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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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가 며칠이 남았는데도 나는 벌써부터 2009년 달력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깨끗한 새 달력 1월에는 벌써 엄마와 동생의 생일이 표시되어 있다. 늘 가족들과 친구들의 생일들을 적기 위해 새 달력을 꺼내 놓으면 가장 먼저 적게 되는 것이 엄마의 생일이다. 나는 물끄러미 ‘엄마 생신’이라고 적힌 날을 바라본다. 올해도 그 날에는 집에 내려가지 못할 것이다. 곧 설이니까. 그때 내려가야지. 라는 핑계로 전화로 인사를 할 것이다. 엄마의 생신이 다가오면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를 위해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리던 엄마가 떠오른다. 나는 언제 저렇게 엄마에게 밥상을 차려줄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무거운 과제로 남아있다. 

  가족. 특히나 엄마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조심스럽다. 엄마라는 존재에 희생이라는 단어를 연결시키고 싶지도 않고 죄책감과 연결시키고 싶지도 않다. 이 책에 가득한 엄마에 대한 회상들 슬픔들 죄송스러움들 후회들. 시간이 흐른 후에, 아니 지금부터라도 나는 엄마에 대해 이런 것들만 품고 있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아직 그러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나는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라는 책을 읽은 후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두 권 모두 어머니에 관한 소설이다. 앞에 읽은 책이 이제 막 엄마라는 견고한 역할에 갇히기 시작한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여자들에 관해 다루었다면 이 책에는 그 고난들을 거친 후 야단을 맞던 어린 자식들이 자란 후의 엄마가 있다. 실종한 엄마의 젊은 날을 그려낸다면 알링턴파크의 그 여자들과 비슷할지 모른다. 그녀들의 고난들은 역사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상황은 다르지만 엄마가 되는 것이라는 것에서는 비슷할 것이다. 단지 젊은 엄마의 입장이 아니라 그들에게 길러진 자식들의 눈으로 회상되었기에 포장되었고 우리가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엄마에 대한 환상에 기대어 그려져 있을 뿐이다.

  딸들은 나이가 들어가며 엄마에 대해 점점 다른 시각을 갖게 된다. 올려다보던 엄마를 비슷한 높이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늘 안기던 것에서 벗어나 엄마를 안을 수 있게 된다. 엄마를 태어날 때부터 엄마가 아닌 한 여자로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런 시선을 갖게 되면 여러모로 엄마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 때때로 가슴이 아파져 오기도 한다.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웃는 얼굴을 지금 엄마의 얼굴에서 발견할 때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고 언젠가 내게서도 저런 얼굴이 만들어질 걸 생각하면 알 수 없이 먹먹해진다. 엄마가 외할머니의 웃음을 닮고 내가 엄마의 웃음을 닮는 다는 게 왜 슬픈 일인 걸까. 여전히 나도 엄마라는 지나친 구속과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자식과 남편을 위해 천하무적이 되었던 과거의 어머니들에게서 쉽게 벗어날 수는 없다. 엄마들의 웃음에는 늘 말 못하는 애환들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싶지 않았다.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진부했다. 그리고 책의 표지를 보는 순간, 신경숙이라는 작가의 문체를 떠올리는 순간 내용이 너무 뻔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가족의 깊은 곳을 보지 않으려는 나쁜 습성 때문일 것이다. 모두 알고 있지만 직면하고 싶지 않은 것들. 듣고 싶지 않고 생각하고 싶지 않는 것들. 붉은 표지의 이 책은 손에 들고 있기엔 너무 따끔따끔하다.

  엄마의 실종을 둘러싼 가족들의 이야기는 2인칭 혹은 3인칭으로 진행된다. 너, 그, 당신, 그리고 새처럼 날아다니는 엄마 자신이 일인칭으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엄마에 대해 회상하는 자식들의 모습을 다시 엄마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어쩌면 그러기에 이 소설 속에 새로운 엄마의 모습은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환상 속의 어머니상이다. 엄마의 과거에서 자식들은 모르는 과거의 남자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아주 깜찍한 비밀정도로 밖에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소녀시절의 엄마가 간간히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엄마를 한 여자로 그려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오롯이 ‘박소녀’라는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되어지지는 않는다. ‘박소녀’는 온통 엄마라는 역할만을 짊어지고 있다. 그런 점이 알링턴파크의 ‘여자들’과는 뚜렷하게 대비되어진다. 서울역에서 엄마를 잃어버리기 전부터 이미 가족들에게서 잊힌 ‘박소녀’는 자신의 삶에 대해 방황하기도 전부터, 자신의 삶을 꿈꾸기 전부터 남편을 가지게 되고 자식들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박소녀라는 사람의 가슴 속에는 온통 가족들에 대한 것들로만 가득한 것이 당연한 걸까. 그런 점이 아쉽고 속상하다. 그러나 그건 자식들의 시선에서 바라 본 엄마이기에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자식들은 엄마의 과거에 대해 젊음에 대해 절대로 알 수가 없다. 우리가 후에 아이를 낳았을 때 그 아이들이 나의 한 시절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우리도 엄마의 어떤 한 시절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해하고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엄마라는 역할에 짓눌린 한 여자의 말랑말랑한 속살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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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
레이철 커스크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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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들이 내 인생을 망치고 있어! 니들이 망치고 있다고!”

  

  메이지가 두 딸에게 외쳤다. 어떤 이는 엄마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냐고 말할 것이고 어떤 이는 나처럼 그렇게 외치는 메이지를 측은하게 바라볼 것이다. 아직 결혼하지도 않은, 아이도 낳아보지도 않은 나 같은 이십대 후반의 여성들은 언젠가 자신이 이런 말을 외칠까 두려워 할지 모른다. 그리고 한걸음씩 결혼에서 멀어진다.

  이 책은 결혼에 대한 경고로 가득하다. 하지만 결혼하지 말라고 작가는 말하는 게 아니다. 그저 결혼이라는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어떤 작품들은 결혼에 대한 환상과 꿈만 그려준다면 이 책은 결혼의 그 이면과 조심해야 할 것들만 보여준다. 어쩌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모를 결혼, 계속되는 출산, 한 침대에서 잠을 자도 서로 절대 들여다보지 않는 각자의 영역, 서로의 사이에 있는 아이들, 지치게 하는 육아,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부부의 눈빛과 외면, 결혼을 떠올릴 때 어쩌면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부분들이 이런 것들이다. 그리고 쉽게 간과하는 것들이 이런 것들이다.  

  알링턴파크에 사는 여자들의 하루를 들여다보면 모두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속박되어 있다. 그들은 그 현실을 겨우 견디고 있거나 견딜 수 없어 폭발하기 직전이다. 그러나 남편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 남편들은 여전히 결혼 전과 같은 몸을 가지고 있고 자신만의 취미를 즐기고 있으며 손님들이 올 때 면도하고 깨끗한 옷만 갈아입으면 된다. 그러나 아내들은 아이들을 낳느라 몸매는 망가지고 손님들을 위해 하루 종일 요리를 준비하고 기름 범벅이 된 몸을 급하게 화장으로 가린다. 이런 상황은 영국의 그곳과 한국의 이곳이 별로 다르지 않다.

  어머니라는 환상. 아니 그 족쇄는 우리나라에서 더욱 크게 느껴진다. 어머니는 희생해야 하고 자신보단 항상 가족이 먼저여야 한다는 생각들. 사람들은 가끔 그런 어머니에게 감사해하고 죄송해하지만 그걸 바꾸는 걸 원치 않는다. 그러면서 어머니의 역할을 조금이라도 소홀이 한다면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다. 어머니는 먼저 한 인간이며 한 여자이다. 자신이기를 지키며 어머니이자 아내의 역할을 하기 위해 요즘에는 슈퍼우먼이 생겨났다. 슈퍼우먼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늘 부족한 어머니, 부족한 아내라는 오명을 써야한다.

  메이지가 두 딸에게 외쳤던 말, 그리고 어맨다가 자신의 집을 더럽힌 아이에게 “죽여버리겠어”라고 외치는 말. 그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그렇게 표출해 버린다. 그들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그녀들의 이런 과격한 말에 잠깐 놀라긴 해도, 아이를 낳아보지 못한 나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물론, 결혼이라는 것에 아직 긍정적인 부분을 찾지 못한 나의 생각이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상황에 화가 나 있지만, 그런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남편에게 화가 나 있지만 그녀들의 남편은 그녀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다. 어쩌면 잘못된 결혼의 현실이다.

  꼭 부부가 아니더라도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는 ‘이해’가 우선되어야한다. 그건 가족이라는 집단에서부터 시작되고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알링턴파크에 사는 이 부부들에게는 이해가 부족하다. 서로 다른 것들만 바라보고 이야기한다. 그 둘 사이의 아이들은 불안해하고 울어버린다. 그리고 그런 아이를 안은 아내는 자꾸만 그 손을 놓고만 싶다.

  결혼은 아주 큰 변화를 의미한다. 자신이 지금까지 지켜왔던 모든 것들을 재정비해야할지도 모른다. 자신을 송두리째 바꿔야 한다는 게 아니지만 두 사람이 서로 융합될 수 있도록 부단한, 어쩌면 함께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은 해야 한다. 그러나 알링턴파크의 부부들에게는 아니 부부뿐 아니라 서로의 이웃들 사이에도 융합이란 없다. 그들은 같은 공간에 있을 뿐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의 하루가 이러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직장에는 나가야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하고 아이는 온 집안에 낙서를 하고 칭얼대며 매달려 울고 찬란했던 과거가 부끄러운 현재를 만들어 버리는, 그래서 차라리 지워버리고 싶은 지금. 나로서는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의 고통과 회환들이 이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넘쳐나고 있다. 나는 상상해본다. 나의 미래, 나의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 과연 나는 나의 아이에게 메이지처럼 외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이상하게 너무 먼 미래라는 생각만 들뿐이다. 내가 만들고 싶지 않은 미래. 대신 나는 엄마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조용히 묻고 싶다. 당신의 하루는 어떠했냐고. 그리고 지금의 하루는 어떠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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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없었다, 당신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신은주.홍순애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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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션쇼를 직접 가서 본 적은 없다. 그러나 TV에서 혹은 잡지에서 패션쇼 장면들을 보면, 저것이 과연 옷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옷이란 사람이 입는 건데 도대체가 패션쇼의 옷들은 입으려고 만든 것들이 아니라 그저 보여주기 위한 것들이란 생각이 든다. 패션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흥미도 없는 내가 하는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없었다, 당신』이란 책을 읽으며 문득 그런 패션쇼장을 떠올린다. 실용성이 전혀 없을 것 같은 기하학적인 옷들, 도저히 사람이 신고 다닐 수 없는 굽을 가진 하이힐들, 명품이라는 이름 아래 왠지 허세 부리는 듯 한 그곳의 모든 사람들. 읽으라고 써놓은 것 같지 않은 소설들. 이것이 소설일까 라는 의심이 가는 소설들. 그리고 그러한 작가의 창작품을 즐기고 있는 독자들.

  어떤 사람이 말했다. ‘패션쇼장에서 불이 꺼지고 음악이 흐르다. 모델이 한명씩 걸어 나오며 디자이너의 옷이 런웨이로 올라올 때마다 감전된 듯 짜릿하다. 모델들이 입은 옷은 그냥 옷이 아니며 예술 작품이다.’ 대충 이런 뜻의 문장이었다. 앞에서 말했듯 패션쇼장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디자이너들의 옷을 입은 모델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 그 기대와 두근거림을 이제는 알 것 같다. 그건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새 작품을 마주했을 때, 막 책장을 넘겼을 때 느끼는 감정과 다르지 않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이 책이 바로 나에게 그런 감정을, 두근거림을 깨우쳐 주었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작품은 처음이다. 그러나 그의 소설 분위기는 왠지 읽기 전에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읽고 난 후에는 역시. 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이번 작품집은 단편이 하나씩 끝날 때마다 다음 작품을 두근거리게 했다.

  첫 단편은 독자를 방심하게 만든다. 다른 것들보다 어렵지 방식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조금씩 모래화 되어가는 인간의 이야기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소설의 각 페이지 아래마다 전혀 상관없는 듯 한 문장들이 흐른다. 그 문장들은 노래 가사 같기도 하고 영화 속 장면을 묘사한 듯도 하다. 그래서 나는 음악을 들으며 글을 읽는 듯 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TV를 틀어놓은 채 소설을 읽는 듯 한 기분도 든다. 제목에 있는 ‘그림 없는 삽화’라는 의미가 왠지 이 문장들을 통해 모두 설명되는 것 같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한 장의 그림들이 슬라이드 쇼하는 듯 내 시야를 지나가고 있었다. 

  단 한 문장으로만 이루어진 단편도 있다. 이건 작가가 시(詩)의 경계를 넘나들고 싶어 하는 걸까? 시(詩)에서 태어난 소설이 다시 시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일까. 시는 다시 서사화되고 소설은 또 그 서사에서 벗어나려고 한다.「페캉에서」는 파격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소설을 잘 따라가다 보면 소설 속 주인공과 실제 작가와 소설 속 주인공이 만들어 낸 소설 속 작가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낀다. 그 세 인물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는 반복한다. 자칫 방심하면 그 뫼비우스의 띠에서 헤맬 수도 있다. 거기에 이 소설의 재미가 있다. 「이방인 #7-9」 또한 이와 비슷하다. 주인공에게서 작가의 모습이 묻어난다. 이런 작품들은 작가에게 한층 가까워지게 만듦으로 다른 작품들을 더 흥미롭게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그의 작품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아니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주게 한다.

  패션쇼에서 보면 모델들조차 휘청거리게 만드는 하이힐이 있다. 그건 절대 길거리에 신고 다니라고 만든 것이 아니다. 그냥 하나의 구두로서의 작품이다. 여기 그런 하이힐과 같은 단편이 있다. 「여자의 방」은 사실 독자에게 읽으라고 써놓은 작품이 아닌 듯 하다. 두 페이지 분량의 짧은 글을 오려내고 붙이기를 해서 도저히 한 번에 한 문장을 읽어 내려갈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이 글을 읽으려면 번역자가 그랬듯 페이지를 잘라서 퍼즐 맞추기를 해야만 한다. 작가는 독자들의 딱딱해진 머리를 세게 흔들고 싶었던 것 같다. 문장은 꼭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야. 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작품은 이것과 조금 비슷하지만 그나마 친절하다. 마치 단편 영화를 한 컷 씩만 보여주는 것 같다. 같은 대사와 인물을 가지고 다섯 가지의 상황과 장면에서 응용한다. 대사도 같고 인물도 두 명으로 같지만 배경이 다르다. 마치 대사만 있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각자 다른 감독들이 다른 방식으로 촬영을 하는 듯 하다. 이것 또한 한 번에 한 장씩만 넘기며 읽을 수 없고 번호를 찾아가며 앞에서 뒤로 다시 뒤에서 앞으로 왕복을 하며 읽어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지겹지 않다. 단조로운 대사와 내용들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읽으면서도 작가가 이것을 쓸 때 진심으로 즐기고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 스스로가 즐기면서 썼을 때, 그것이 독자에게 전해질 때 정말 재미있는 작품이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작품처럼. 

  시작에서 패션쇼 이야기를 했다. 패션은 새 시즌마다 새로운 것들을 내어놓는다. 그리고 그 새로운 것들은 트렌드라는 것이 되어 어떤 큰 흐름을 가진다. 그 큰 흐름 속에 얼마나 자신만의 새로운 것들을 창조해 내는냐가 명품이 되느냐 아니냐로 갈린다. 작가가 그랬듯이 이제 보수적인 작가들과는 안녕해야한다. 그리고 젊은 작가들은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소설이 그저 이야기를 가지고 내용을 전달해주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 형태 자체를 들여다봐야한다. 그건 소설이라는 그 근본부터 다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소설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곳에서 시작한 물음들에 대한 답을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 작품을 통해 대답한 것 같다. 디자이너들에게 옷이 그저 입어야 하는 것으로서의 것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듯 소설 또한 그저 글자들로 내용들만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형식과 기본이라고 생각했던 틀까지 다시 바라보며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야 하는 영역이다.

  지금 우리 문단의 시(詩)의 영역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활발하게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작가들이 많다. 시의 영역은 절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해졌고 한계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소설에서는 여전히 경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읽었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나 지금 『당신이, 없었다, 당신』 만큼의 파격적인 소설은 아직 접하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들의 시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소설이라는 가끔은 답답하게 느껴지는 그 틀을 그들이 보기 좋게 깨고 새로운 영역으로 발을 디딘 것 같다. 그들의 시도는 그만큼 나에게 소설에 대한, 글쓰기에 대한 고민들을 던져주었다. 그 고민들은 나를 더 다이내믹하게 해준다. 내 뇌세포들이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게 해준다.

  디자인은 패션이나 건축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소설을 쓸 때에도 소설 자체에 대한 디자인이 필요하다. 소설의 영역에서는 이제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었고 기꺼이 동참할 생각이다. 그리고 이러한 쇼는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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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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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감고 걸으려고 했던 적이 있다. 그곳은 내게 익숙한 길이었고 잘못 걷는다 해도 다치지 않을 평탄한 길이었다. 그러나 나는 몇 걸음도 떼지 못하고 눈을 떠버렸다. 이건 정상적으로 눈이 보이는, 그것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통 모습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인간은 보이는 것, 눈이라는 것에 의지하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그것이 조금이라도 손상되면 다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게 된다. 마치 눈먼 자들이 사는 그 도시의 사람들처럼.

  집단과 조직은 분명 다르다. 그러나 여러 명이 모여 이루어진 다는 점에서 같다. 여럿이 모이면 그냥 집단이다. 그 집단에 목적이 생기거나 상하관계가 생기거나 할 때 조직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처음에는 집단을, 그리고 계속해서 그것을 조직으로 만들려고 평생을 노력한다. 조직이란 걸 만들지 않으면 인간은 살 수 없다는 듯 어떤 형태로든 그것들을 만들고야 만다. 그런 것들을 상기할 때마다 느끼게 된다. 인간은 정말 나약하다는 것을. 나도 집단이나 조직이라는 형태는 두드러기가 날 정도로 싫어하지만 고백하건데 정말 내가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집단에도 속해 있지 않는다면 불안해 할 것이다.

  인간은 둘 이상이 모이면 늘 집단을 만들려고 한다. 『파리대왕』의 어린아이들도 무인도에 떨어지자 자기들끼리 집단을 만들어 가고 또 대립한다.『눈먼 자들의 도시』의 수용소에 모인 집단 또한 무인도의 이 아이들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집단을 이루고 조직하고 또 대립한다. 아니 더 나아가 착취하고 전투를 벌인다. 『파리대왕』에서는 어린아이들이 그런 집단을 만들고 서로 잔인하게 싸워나간다는 데 충격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어른들의 싸움이다. 사실 그다지 놀랍지는 않다. 인간 사회에 충분히 익숙해진 인간으로서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실이 자못 슬프다.

  작가가 말이 많다. 소설을 읽는 초반부터 그러한 사실이 거슬렸다. 인물들을 잘 따라가다가 작가의 말로 군더더기가 많이 붙는다는 느낌이다. 나름 소설 속 인물들의 행동이나 상황을 통해 작가가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한다는 건 알겠지만 가끔은 좀 조용히 좀 해요! 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작가가 수다스럽다. 그러나 이야기의 진행에 있어서는 담담한 편이다. 마치 노인들이 무덤덤하게 과거의 이야기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듯 매끄럽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그 혼란스러운 사람들 속에 같이 눈이 멀기도 하고 눈을 뜨고 있는 그녀처럼 혼자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기도 한다. 맨발로 걷다가 바닥의 오물을 밟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성행위를 눈앞에서 목격하기도 하고, 썩어가는 시체를 보고 남몰래 구토하기도 한다. 책을 다 읽고 잠을 자려던 그 날 저녁은 실제 백색 어둠이 나를 덮치기도 한다. 그 말 그대로 모순적인 어둠 속에 갇혀 혼자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백년동안의 고독』이란 책을 읽을 때에도 마술적 리얼리즘의 매력에 흠뻑 빠졌었다. 그리고 『눈먼 자들의 도시』란 책을 통해 다시금 그 마술에 홀려 버렸다. 백색 질병이라 불리는 그 전염병자체가 도시에 거는 마법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환상적이기 보다는 더 현실적으로 사람들에게 찾아온다. 보이지 않는 인간을 통해 인간의 바닥까지를 보여주려 하고 있다. 그들이 눈이 먼 사이에, 단 한 사람의 눈을 통해 당신에게 숨어 있는 당신을 보여준다.

  영화로 개봉되었고 아직 보진 않았지만 기대가 된다. 사실 영화가 개봉한다기에 서둘러 책을 읽은 감도 없지 않다. 영화는 당연히 원작 그 이상을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줄리안 무어의 얼굴만 보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백색질병에 걸린 도시의 모습이 책만으로도 생생하게 그려지는데 영화에서는 어떻게 그려질지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그러나 언제나 인간의 밑바닥까지 들여다 본 후는 씁쓸해질 수밖에 없다. 극장을 나선다면 그 느낌에서 떨쳐버리기 위해 서둘러 사람들 속에 섞이려고 할 것이다. 책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마지막 장까지 천천히 책장을 넘긴 것은 참 오랜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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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해줘
기욤 뮈소 지음, 윤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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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난 길을 걷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학교 근처를 혼자 배회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저녁, 포장마차의 사람들이 텔레비전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건물이 비행기와 충돌하며 무너지고 있었다. 그 당시 나의 자취방에는 텔레비전이 없었고 나는 아무런 감흥 없이 그 장면을 길거리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날 지인은 주식이 곤두박질 쳤다고 투덜댔다. 나는 다음 날도 학교 앞을 목적 없이 걸어 다녔다. 

  여전히 나에게는 9․11테러가 특별하지 않다. 그 일로인해 어떤 쇼크도, 정신적 외상도 갖게 되지 않았다. 역사적인 사건이 또 생겼구나 라는 정도이다. 하지만 그걸 가까이서 겪은 이들은 그 사건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구해줘』 또한 그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드러내놓고 그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결국은 그 날의 사건에서 벗어나려고 외치고 있다. ‘구해줘’ 그러나 누구를? 어디로부터? 어떻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해피엔딩을 좋아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드러내놓고 당신에게 즐거움과 안도감을 주겠다는 식의 영화나 소설이 아니라면 해피엔딩은 나에게 조금 불편하다.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얻으려는 것은 ‘감동’이다. 나에게 감동은 슬퍼서 눈물을 줄줄 흘리게 되는 감동도, 이 소설에서처럼 온갖 역경을 딛고 결국 사랑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고 해피엔딩에 도달해서 안도하는 감동도 아니다. 이야기로부터, 인물들로부터 내 마음이 움직여지는 것을 말한다. 비틀어져 있던 내 마음이 제자리를 잡게 되거나 굳어져 있던 것들이 조금씩 비틀어지는 것, 새로운 의문이 생기는 것, 그 질문들에 답을 찾게 되는 것, 다시 의문이 생기는 것, 잠시 멍하게 있을 수 있게 해주는 것,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대신 해주는 것 등등. 감동이라는 말은 나에게 수많은 의미를 포함한다. 물론 ‘재미’라는 것도 중요하다. 모든 예술작품에는 기본적으로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건 웃음을 주는 재미도 물론 포함하지만 흥미를 끌 수 있는 것 그것이 심각하든 슬프든 잔인하든 그 흐름을 계속해서 좇을 수 있게 하는 힘. 그 흐름을 전개해나가게 하는 힘이 바로 재미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분명 재미있다.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읽기 시작한 나는 초반에는 도대체 이야기가 어디로 튀어갈지 예측할 수 없었다. 사랑이야기겠구나 라고 생각했더니 테러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가고 다시 죽음의 사자가 등장하여 혼란스럽게 만든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라고 계속해서 나를 궁금하게 만든다. 독자를 잠시도 느슨하게 두질 않고 앞으로 앞으로 이야기가 거침없이 전개된다.

  그러나? 결국 그 알록달록하고 특별나던 재료들은 우리가 흔히 보아오던 평범한 생크림 케이크가 되어버렸다. 여러 과일들이 올려져있고 생크림이 가득 둘러져 있는, 그다지 새롭지 않은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란 책이 자꾸만 떠오른다. 이 책은『구해줘』보다는 더 직접적으로 9․11 테러를 다룬다. 그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아이를 좇아가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삽화가 도입되고 여러 장치들을 편집에 활용하여 그 소설은 믿을 수 없게 놀라운 소설이 되었다. 아이를 아주 가까이에서 좇아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의 모든 감정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만큼 치밀하게 모든 것이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해줘』의 인물들을 좇아가다보면 그들 가까이에 다가가 숨결과 그들의 표정을 느낀다기보다는 한 발짝 물러나 구경하게 된다. 등장인물들이 점점 정형화되어가면서 흔히 우리가 볼 수 있었던 할리우드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샘과 줄리에트, 그들은 로맨스 영화 속 주인공이다. 단지 그 속에 테러와 살인이라는 무시무시한 장애물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로맨스 영화의 결론처럼 사랑과 용서로 모든 것을 극복하고 행복한 아침을 맞는다. 

  이 소설은 문장을 읽으면서 동시에 쉽게 영화 장면으로 만들어 볼 수 있다. 영화로 만들기에 정말 쉬운 소설이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서는 자꾸만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만 이 소설이 만들어진다. 죽음의 사자로 나오는 그레이스, 무차별로 사람을 죽이려는 테러범 대머리 독수리 그리고 주인공 샘 또한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무거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가진 무게와 절실함, 심각함들은 너무 뻔하다. 적당한 예산을 들여 누구나 불평 없이 볼만 한 할리우드 영화 속 무난한 캐릭터들 같다. 아니 오히려 조금은 코믹스럽기까지 하다. ‘인간들에게 악의 존재를 분명하게 깨닫게 하기 위해, 악에 대한 경종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위대한 범죄자들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들이라 생각한다’ 라는 대머리독수리의 생각에는 이제 그만 좀 해.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어쨌든 정말 머지않아 할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질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한 가지 더 확실한 건 나는 그 영화를 보러 극장에는 절대 가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차라리 영화가 더 나을 수도 있다. 문장들이 소설적인 매력보다는 차라리 영화 쪽에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캐릭터가 중요한 영화의 입장에서도 그렇게 신선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이 소설의 결론이 나쁘다고 할 순 없다. 작가의 메시지는 분명하며 사람들은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단지 과연 이렇게 모든 것이 사랑과 용서로 마무리 지어질 수 있는 걸까라는 회의가 들뿐이다. 어쩌면 이건 억지스런 해피엔딩 모두에 대한 나의 회의이다.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구해줘』는 로맨틱 코미디이고 나는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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