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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
레이철 커스크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니들이 내 인생을 망치고 있어! 니들이 망치고 있다고!”
메이지가 두 딸에게 외쳤다. 어떤 이는 엄마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냐고 말할 것이고 어떤 이는 나처럼 그렇게 외치는 메이지를 측은하게 바라볼 것이다. 아직 결혼하지도 않은, 아이도 낳아보지도 않은 나 같은 이십대 후반의 여성들은 언젠가 자신이 이런 말을 외칠까 두려워 할지 모른다. 그리고 한걸음씩 결혼에서 멀어진다.
이 책은 결혼에 대한 경고로 가득하다. 하지만 결혼하지 말라고 작가는 말하는 게 아니다. 그저 결혼이라는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어떤 작품들은 결혼에 대한 환상과 꿈만 그려준다면 이 책은 결혼의 그 이면과 조심해야 할 것들만 보여준다. 어쩌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모를 결혼, 계속되는 출산, 한 침대에서 잠을 자도 서로 절대 들여다보지 않는 각자의 영역, 서로의 사이에 있는 아이들, 지치게 하는 육아,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부부의 눈빛과 외면, 결혼을 떠올릴 때 어쩌면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부분들이 이런 것들이다. 그리고 쉽게 간과하는 것들이 이런 것들이다.
알링턴파크에 사는 여자들의 하루를 들여다보면 모두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속박되어 있다. 그들은 그 현실을 겨우 견디고 있거나 견딜 수 없어 폭발하기 직전이다. 그러나 남편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 남편들은 여전히 결혼 전과 같은 몸을 가지고 있고 자신만의 취미를 즐기고 있으며 손님들이 올 때 면도하고 깨끗한 옷만 갈아입으면 된다. 그러나 아내들은 아이들을 낳느라 몸매는 망가지고 손님들을 위해 하루 종일 요리를 준비하고 기름 범벅이 된 몸을 급하게 화장으로 가린다. 이런 상황은 영국의 그곳과 한국의 이곳이 별로 다르지 않다.
어머니라는 환상. 아니 그 족쇄는 우리나라에서 더욱 크게 느껴진다. 어머니는 희생해야 하고 자신보단 항상 가족이 먼저여야 한다는 생각들. 사람들은 가끔 그런 어머니에게 감사해하고 죄송해하지만 그걸 바꾸는 걸 원치 않는다. 그러면서 어머니의 역할을 조금이라도 소홀이 한다면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다. 어머니는 먼저 한 인간이며 한 여자이다. 자신이기를 지키며 어머니이자 아내의 역할을 하기 위해 요즘에는 슈퍼우먼이 생겨났다. 슈퍼우먼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늘 부족한 어머니, 부족한 아내라는 오명을 써야한다.
메이지가 두 딸에게 외쳤던 말, 그리고 어맨다가 자신의 집을 더럽힌 아이에게 “죽여버리겠어”라고 외치는 말. 그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그렇게 표출해 버린다. 그들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그녀들의 이런 과격한 말에 잠깐 놀라긴 해도, 아이를 낳아보지 못한 나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물론, 결혼이라는 것에 아직 긍정적인 부분을 찾지 못한 나의 생각이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상황에 화가 나 있지만, 그런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남편에게 화가 나 있지만 그녀들의 남편은 그녀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다. 어쩌면 잘못된 결혼의 현실이다.
꼭 부부가 아니더라도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는 ‘이해’가 우선되어야한다. 그건 가족이라는 집단에서부터 시작되고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알링턴파크에 사는 이 부부들에게는 이해가 부족하다. 서로 다른 것들만 바라보고 이야기한다. 그 둘 사이의 아이들은 불안해하고 울어버린다. 그리고 그런 아이를 안은 아내는 자꾸만 그 손을 놓고만 싶다.
결혼은 아주 큰 변화를 의미한다. 자신이 지금까지 지켜왔던 모든 것들을 재정비해야할지도 모른다. 자신을 송두리째 바꿔야 한다는 게 아니지만 두 사람이 서로 융합될 수 있도록 부단한, 어쩌면 함께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은 해야 한다. 그러나 알링턴파크의 부부들에게는 아니 부부뿐 아니라 서로의 이웃들 사이에도 융합이란 없다. 그들은 같은 공간에 있을 뿐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의 하루가 이러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직장에는 나가야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하고 아이는 온 집안에 낙서를 하고 칭얼대며 매달려 울고 찬란했던 과거가 부끄러운 현재를 만들어 버리는, 그래서 차라리 지워버리고 싶은 지금. 나로서는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의 고통과 회환들이 이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넘쳐나고 있다. 나는 상상해본다. 나의 미래, 나의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 과연 나는 나의 아이에게 메이지처럼 외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이상하게 너무 먼 미래라는 생각만 들뿐이다. 내가 만들고 싶지 않은 미래. 대신 나는 엄마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조용히 묻고 싶다. 당신의 하루는 어떠했냐고. 그리고 지금의 하루는 어떠하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