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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눈을 감고 걸으려고 했던 적이 있다. 그곳은 내게 익숙한 길이었고 잘못 걷는다 해도 다치지 않을 평탄한 길이었다. 그러나 나는 몇 걸음도 떼지 못하고 눈을 떠버렸다. 이건 정상적으로 눈이 보이는, 그것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통 모습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인간은 보이는 것, 눈이라는 것에 의지하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그것이 조금이라도 손상되면 다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게 된다. 마치 눈먼 자들이 사는 그 도시의 사람들처럼.
집단과 조직은 분명 다르다. 그러나 여러 명이 모여 이루어진 다는 점에서 같다. 여럿이 모이면 그냥 집단이다. 그 집단에 목적이 생기거나 상하관계가 생기거나 할 때 조직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처음에는 집단을, 그리고 계속해서 그것을 조직으로 만들려고 평생을 노력한다. 조직이란 걸 만들지 않으면 인간은 살 수 없다는 듯 어떤 형태로든 그것들을 만들고야 만다. 그런 것들을 상기할 때마다 느끼게 된다. 인간은 정말 나약하다는 것을. 나도 집단이나 조직이라는 형태는 두드러기가 날 정도로 싫어하지만 고백하건데 정말 내가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집단에도 속해 있지 않는다면 불안해 할 것이다.
인간은 둘 이상이 모이면 늘 집단을 만들려고 한다. 『파리대왕』의 어린아이들도 무인도에 떨어지자 자기들끼리 집단을 만들어 가고 또 대립한다.『눈먼 자들의 도시』의 수용소에 모인 집단 또한 무인도의 이 아이들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집단을 이루고 조직하고 또 대립한다. 아니 더 나아가 착취하고 전투를 벌인다. 『파리대왕』에서는 어린아이들이 그런 집단을 만들고 서로 잔인하게 싸워나간다는 데 충격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어른들의 싸움이다. 사실 그다지 놀랍지는 않다. 인간 사회에 충분히 익숙해진 인간으로서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실이 자못 슬프다.
작가가 말이 많다. 소설을 읽는 초반부터 그러한 사실이 거슬렸다. 인물들을 잘 따라가다가 작가의 말로 군더더기가 많이 붙는다는 느낌이다. 나름 소설 속 인물들의 행동이나 상황을 통해 작가가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한다는 건 알겠지만 가끔은 좀 조용히 좀 해요! 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작가가 수다스럽다. 그러나 이야기의 진행에 있어서는 담담한 편이다. 마치 노인들이 무덤덤하게 과거의 이야기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듯 매끄럽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그 혼란스러운 사람들 속에 같이 눈이 멀기도 하고 눈을 뜨고 있는 그녀처럼 혼자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기도 한다. 맨발로 걷다가 바닥의 오물을 밟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성행위를 눈앞에서 목격하기도 하고, 썩어가는 시체를 보고 남몰래 구토하기도 한다. 책을 다 읽고 잠을 자려던 그 날 저녁은 실제 백색 어둠이 나를 덮치기도 한다. 그 말 그대로 모순적인 어둠 속에 갇혀 혼자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백년동안의 고독』이란 책을 읽을 때에도 마술적 리얼리즘의 매력에 흠뻑 빠졌었다. 그리고 『눈먼 자들의 도시』란 책을 통해 다시금 그 마술에 홀려 버렸다. 백색 질병이라 불리는 그 전염병자체가 도시에 거는 마법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환상적이기 보다는 더 현실적으로 사람들에게 찾아온다. 보이지 않는 인간을 통해 인간의 바닥까지를 보여주려 하고 있다. 그들이 눈이 먼 사이에, 단 한 사람의 눈을 통해 당신에게 숨어 있는 당신을 보여준다.
영화로 개봉되었고 아직 보진 않았지만 기대가 된다. 사실 영화가 개봉한다기에 서둘러 책을 읽은 감도 없지 않다. 영화는 당연히 원작 그 이상을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줄리안 무어의 얼굴만 보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백색질병에 걸린 도시의 모습이 책만으로도 생생하게 그려지는데 영화에서는 어떻게 그려질지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그러나 언제나 인간의 밑바닥까지 들여다 본 후는 씁쓸해질 수밖에 없다. 극장을 나선다면 그 느낌에서 떨쳐버리기 위해 서둘러 사람들 속에 섞이려고 할 것이다. 책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마지막 장까지 천천히 책장을 넘긴 것은 참 오랜만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