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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올해가 며칠이 남았는데도 나는 벌써부터 2009년 달력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깨끗한 새 달력 1월에는 벌써 엄마와 동생의 생일이 표시되어 있다. 늘 가족들과 친구들의 생일들을 적기 위해 새 달력을 꺼내 놓으면 가장 먼저 적게 되는 것이 엄마의 생일이다. 나는 물끄러미 ‘엄마 생신’이라고 적힌 날을 바라본다. 올해도 그 날에는 집에 내려가지 못할 것이다. 곧 설이니까. 그때 내려가야지. 라는 핑계로 전화로 인사를 할 것이다. 엄마의 생신이 다가오면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를 위해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리던 엄마가 떠오른다. 나는 언제 저렇게 엄마에게 밥상을 차려줄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무거운 과제로 남아있다.
가족. 특히나 엄마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조심스럽다. 엄마라는 존재에 희생이라는 단어를 연결시키고 싶지도 않고 죄책감과 연결시키고 싶지도 않다. 이 책에 가득한 엄마에 대한 회상들 슬픔들 죄송스러움들 후회들. 시간이 흐른 후에, 아니 지금부터라도 나는 엄마에 대해 이런 것들만 품고 있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아직 그러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나는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라는 책을 읽은 후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두 권 모두 어머니에 관한 소설이다. 앞에 읽은 책이 이제 막 엄마라는 견고한 역할에 갇히기 시작한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여자들에 관해 다루었다면 이 책에는 그 고난들을 거친 후 야단을 맞던 어린 자식들이 자란 후의 엄마가 있다. 실종한 엄마의 젊은 날을 그려낸다면 알링턴파크의 그 여자들과 비슷할지 모른다. 그녀들의 고난들은 역사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상황은 다르지만 엄마가 되는 것이라는 것에서는 비슷할 것이다. 단지 젊은 엄마의 입장이 아니라 그들에게 길러진 자식들의 눈으로 회상되었기에 포장되었고 우리가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엄마에 대한 환상에 기대어 그려져 있을 뿐이다.
딸들은 나이가 들어가며 엄마에 대해 점점 다른 시각을 갖게 된다. 올려다보던 엄마를 비슷한 높이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늘 안기던 것에서 벗어나 엄마를 안을 수 있게 된다. 엄마를 태어날 때부터 엄마가 아닌 한 여자로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런 시선을 갖게 되면 여러모로 엄마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 때때로 가슴이 아파져 오기도 한다.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웃는 얼굴을 지금 엄마의 얼굴에서 발견할 때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고 언젠가 내게서도 저런 얼굴이 만들어질 걸 생각하면 알 수 없이 먹먹해진다. 엄마가 외할머니의 웃음을 닮고 내가 엄마의 웃음을 닮는 다는 게 왜 슬픈 일인 걸까. 여전히 나도 엄마라는 지나친 구속과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자식과 남편을 위해 천하무적이 되었던 과거의 어머니들에게서 쉽게 벗어날 수는 없다. 엄마들의 웃음에는 늘 말 못하는 애환들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싶지 않았다.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진부했다. 그리고 책의 표지를 보는 순간, 신경숙이라는 작가의 문체를 떠올리는 순간 내용이 너무 뻔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가족의 깊은 곳을 보지 않으려는 나쁜 습성 때문일 것이다. 모두 알고 있지만 직면하고 싶지 않은 것들. 듣고 싶지 않고 생각하고 싶지 않는 것들. 붉은 표지의 이 책은 손에 들고 있기엔 너무 따끔따끔하다.
엄마의 실종을 둘러싼 가족들의 이야기는 2인칭 혹은 3인칭으로 진행된다. 너, 그, 당신, 그리고 새처럼 날아다니는 엄마 자신이 일인칭으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엄마에 대해 회상하는 자식들의 모습을 다시 엄마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어쩌면 그러기에 이 소설 속에 새로운 엄마의 모습은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환상 속의 어머니상이다. 엄마의 과거에서 자식들은 모르는 과거의 남자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아주 깜찍한 비밀정도로 밖에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소녀시절의 엄마가 간간히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엄마를 한 여자로 그려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오롯이 ‘박소녀’라는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되어지지는 않는다. ‘박소녀’는 온통 엄마라는 역할만을 짊어지고 있다. 그런 점이 알링턴파크의 ‘여자들’과는 뚜렷하게 대비되어진다. 서울역에서 엄마를 잃어버리기 전부터 이미 가족들에게서 잊힌 ‘박소녀’는 자신의 삶에 대해 방황하기도 전부터, 자신의 삶을 꿈꾸기 전부터 남편을 가지게 되고 자식들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박소녀라는 사람의 가슴 속에는 온통 가족들에 대한 것들로만 가득한 것이 당연한 걸까. 그런 점이 아쉽고 속상하다. 그러나 그건 자식들의 시선에서 바라 본 엄마이기에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자식들은 엄마의 과거에 대해 젊음에 대해 절대로 알 수가 없다. 우리가 후에 아이를 낳았을 때 그 아이들이 나의 한 시절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우리도 엄마의 어떤 한 시절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해하고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엄마라는 역할에 짓눌린 한 여자의 말랑말랑한 속살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