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해줘
기욤 뮈소 지음, 윤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때 난 길을 걷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학교 근처를 혼자 배회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저녁, 포장마차의 사람들이 텔레비전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건물이 비행기와 충돌하며 무너지고 있었다. 그 당시 나의 자취방에는 텔레비전이 없었고 나는 아무런 감흥 없이 그 장면을 길거리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날 지인은 주식이 곤두박질 쳤다고 투덜댔다. 나는 다음 날도 학교 앞을 목적 없이 걸어 다녔다. 

  여전히 나에게는 9․11테러가 특별하지 않다. 그 일로인해 어떤 쇼크도, 정신적 외상도 갖게 되지 않았다. 역사적인 사건이 또 생겼구나 라는 정도이다. 하지만 그걸 가까이서 겪은 이들은 그 사건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구해줘』 또한 그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드러내놓고 그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결국은 그 날의 사건에서 벗어나려고 외치고 있다. ‘구해줘’ 그러나 누구를? 어디로부터? 어떻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해피엔딩을 좋아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드러내놓고 당신에게 즐거움과 안도감을 주겠다는 식의 영화나 소설이 아니라면 해피엔딩은 나에게 조금 불편하다.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얻으려는 것은 ‘감동’이다. 나에게 감동은 슬퍼서 눈물을 줄줄 흘리게 되는 감동도, 이 소설에서처럼 온갖 역경을 딛고 결국 사랑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고 해피엔딩에 도달해서 안도하는 감동도 아니다. 이야기로부터, 인물들로부터 내 마음이 움직여지는 것을 말한다. 비틀어져 있던 내 마음이 제자리를 잡게 되거나 굳어져 있던 것들이 조금씩 비틀어지는 것, 새로운 의문이 생기는 것, 그 질문들에 답을 찾게 되는 것, 다시 의문이 생기는 것, 잠시 멍하게 있을 수 있게 해주는 것,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대신 해주는 것 등등. 감동이라는 말은 나에게 수많은 의미를 포함한다. 물론 ‘재미’라는 것도 중요하다. 모든 예술작품에는 기본적으로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건 웃음을 주는 재미도 물론 포함하지만 흥미를 끌 수 있는 것 그것이 심각하든 슬프든 잔인하든 그 흐름을 계속해서 좇을 수 있게 하는 힘. 그 흐름을 전개해나가게 하는 힘이 바로 재미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분명 재미있다.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읽기 시작한 나는 초반에는 도대체 이야기가 어디로 튀어갈지 예측할 수 없었다. 사랑이야기겠구나 라고 생각했더니 테러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가고 다시 죽음의 사자가 등장하여 혼란스럽게 만든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라고 계속해서 나를 궁금하게 만든다. 독자를 잠시도 느슨하게 두질 않고 앞으로 앞으로 이야기가 거침없이 전개된다.

  그러나? 결국 그 알록달록하고 특별나던 재료들은 우리가 흔히 보아오던 평범한 생크림 케이크가 되어버렸다. 여러 과일들이 올려져있고 생크림이 가득 둘러져 있는, 그다지 새롭지 않은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란 책이 자꾸만 떠오른다. 이 책은『구해줘』보다는 더 직접적으로 9․11 테러를 다룬다. 그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아이를 좇아가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삽화가 도입되고 여러 장치들을 편집에 활용하여 그 소설은 믿을 수 없게 놀라운 소설이 되었다. 아이를 아주 가까이에서 좇아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의 모든 감정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만큼 치밀하게 모든 것이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해줘』의 인물들을 좇아가다보면 그들 가까이에 다가가 숨결과 그들의 표정을 느낀다기보다는 한 발짝 물러나 구경하게 된다. 등장인물들이 점점 정형화되어가면서 흔히 우리가 볼 수 있었던 할리우드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샘과 줄리에트, 그들은 로맨스 영화 속 주인공이다. 단지 그 속에 테러와 살인이라는 무시무시한 장애물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로맨스 영화의 결론처럼 사랑과 용서로 모든 것을 극복하고 행복한 아침을 맞는다. 

  이 소설은 문장을 읽으면서 동시에 쉽게 영화 장면으로 만들어 볼 수 있다. 영화로 만들기에 정말 쉬운 소설이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서는 자꾸만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만 이 소설이 만들어진다. 죽음의 사자로 나오는 그레이스, 무차별로 사람을 죽이려는 테러범 대머리 독수리 그리고 주인공 샘 또한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무거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가진 무게와 절실함, 심각함들은 너무 뻔하다. 적당한 예산을 들여 누구나 불평 없이 볼만 한 할리우드 영화 속 무난한 캐릭터들 같다. 아니 오히려 조금은 코믹스럽기까지 하다. ‘인간들에게 악의 존재를 분명하게 깨닫게 하기 위해, 악에 대한 경종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위대한 범죄자들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들이라 생각한다’ 라는 대머리독수리의 생각에는 이제 그만 좀 해.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어쨌든 정말 머지않아 할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질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한 가지 더 확실한 건 나는 그 영화를 보러 극장에는 절대 가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차라리 영화가 더 나을 수도 있다. 문장들이 소설적인 매력보다는 차라리 영화 쪽에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캐릭터가 중요한 영화의 입장에서도 그렇게 신선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이 소설의 결론이 나쁘다고 할 순 없다. 작가의 메시지는 분명하며 사람들은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단지 과연 이렇게 모든 것이 사랑과 용서로 마무리 지어질 수 있는 걸까라는 회의가 들뿐이다. 어쩌면 이건 억지스런 해피엔딩 모두에 대한 나의 회의이다.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구해줘』는 로맨틱 코미디이고 나는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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