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한 사람들
3. 종교 : 인간의 가장 깊은 무언가에 대하여
혹시 연애를 해보셨는지요. 사랑을 끝나고 나면 다른 건 몰라도 확실히 알게 되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사람도 사랑도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못 견디게 숨이 막히는 순간들이 차츰차츰 잦아들고 다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하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어느 순간 다시 누군가를 만나기도 합니다. 시간이 무서운 거지요. 글을 쓰다보니 힘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하게 되는데, 시간은 정말 힘이 세거든요.
그런데 종교는 수천년의 세월을 살아남은 녀석들입니다. 지난 100년동안에 세상이 워낙 많이 바뀌어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우리세대의 유산 중에 천년이 지난 다음에 기억할만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1000년이라는 세월은 한 인간이 살아낼 수 있는 시간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크기인지라, 답이 어려울 거예요.
그 수천년의 세월 속에서, 그것도 그냥 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에 깊이 스며들어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는 것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놀랍고 경이롭기까지 한 일입니다.
전 종교서적을 좋아합니다. 아. 제 종교는 불교입니다. 그냥 향 냄새가 좋아 일년에 몇 번 절에 가는 정도이구요. 여름이면 여기저기 사찰의 수련 프로그램에 들어가 3박 4일정도씩 묵언 수행이나 참선 수행을 하고 지냅니다. 참고로 여름 사찰 수련의 백미는 새벽 참선입니다. 해가 뜨는 것을 세상에 빛이 들어오는 것을, 그 미세한 변화를 온 몸으로 느껴본적이 있는지요. 작년 여름 법주사 참선수련회에 참석했을 때, 500년된 건물에 앉아 새벽 4시 참선을 하며 태양이 서서히 뜨고 그 빛이 인간세상에 다가오는 것은 처음으로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아.
신양성서는 참 좋은 책입니다. 그 중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4대 복음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고독했던 한 존재의 모습을 보여주는 눈물겨운 이야기들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는 몇 년동안 여름마다 성경을 읽으려 하다 실패했어요. 물론 교회에서 하는 성경읽기 모임같은 곳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 곳에서는 제가 성경에 대해 갖고 있는 의문들에 대해 의미있는 답변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읽을 줄 몰랐었습니다. 저는 적어도 성경이 믿음으로 읽어야 하는 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예수가 쓴 글이 아닐 뿐더러, 예수가 죽고 수십년이 지나서 쓰여진 책들입니다. 다만 예수를 깊은 사랑으로 기억하는 자들이 그들의 기억과 마음을 기록한 책이지요. 예수 역시 자신의 사랑과 실천을 제자들이 믿어주기를 바랬지 성경의 구절들을 암송하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사람마다 예수를 만나게 되는 경로가 다르겠지만 저는 이누카이 미치코의 <성서 이야기>와 서준식의 <옥중서신>과 김규항의 글들을 통해 그를 만나는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논산육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으며 신약성서의 4대복음을 그대로 옮겨쓰는 일을 했었습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너무 보석 같아서 누구도 볼펜으로 눌러쓰며 마음속에도 담고 싶었습니다.
예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글에서 기독교 신자일지도 모르는 당신과 그가 신인지 아닌지 여부를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제가 만났던 알고 있는 예수에 대해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어요. 다만 제게 그를 만나는 일은 한 존재가 보여줄 수 있는 윤리적 실천의 극한들을 접하는 일입니다. 몇 년전 한 선배에게 보냈던 편지를 동봉합니다.
요즘들어 그를 지탱하던 힘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으면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이해하던, 화석화된 계율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과거의 유산들을 무시하지 않던, 자신의 몸으로 사랑을 행하면서도 그 결과물에 대해서 자신의 이름을 붙이줄 모르던 그는 어디에서 힘을 얻었을까요.
그를 통해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심판하는 권세를 꿈꾸던 자신의 제자들과 '내가 곧 진리'라는 말에 그를 정신병 환자 취급하던 유대인들과 사람을 살리고 귀신을 쫓는 기적만을 그에게서 바라던 민중들 사이에서 그는 어떻게 막달라 마리아를 앞에 두고서 '너희들 중 죄 없는 자 이 여자를 쳐라'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요. 계율에 따라서 죄인이냐 아니냐를 묻는 질문에 그 둘을 모두 긍정하고 또 부정하는 그 놀라운 답을 내놓을 수 있었을까요.
유한한 존재로 태어나 영원의 가치를 이야기하다, 그 마지막 완성을 위해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가던 그는. 단 한번도 자신의 십자가를 나눠지자고 말하지 않았잖아요. 나를 따르는 자들은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서, 가난한 자들은 네 몸같이 사랑하고 말했을 뿐이잖아요. 어떻게 그는 그토록 거대한 사랑을 하면서도 또 그토록 거대한 고독을 감수할 수 있었을까요.
자신을 배반할 줄 알면서도 유다를 그 긴 시간동안 묵묵히 지켜보고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자신을 체포하러 온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배반한 제자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해서 그는 열매에 대한 기대없이 묵묵히 씨앗을 뿌릴 수 있었을까요.
형.
과연 그를 지탱하던 힘이 무엇이었을까요.
아. 저는 불교신자인데 성경을 너무 길게 이야기한 것 같네요. 불교는 오히려 제가 드릴 말씀이 많지 않아요. 다만 시간이 나면 서울 길상사의 참선 수련회나 여름방학을 이용해 사찰의 여름수련회에 참석해보길 권합니다.
3박 4일동안 말을 한 마디도 안해보는 경험은 참 신기합니다. 전혀 새로운 세상에 입문한 느낌입니다. 과연 내가 살아가면서 꼭 해야하는 말은 얼마만큼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절에서 하는 발우 공양이라는 것도 그래요. 내가 먹은 음식은 그 음식물을 씻은 물까지도 깨끗하게 본인이 먹게하거든요. 우리가 살면서 세상에 참 많은 안 좋은 것들을 남기잖아요. 우리에게 산소와 그늘을 주는 나무를 잘라 책을 읽고 이 종이도 그렇게 만들어졌을테고요. 가정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내는 폐기물 1등이 음식물 쓰레기라고 해요. 그런데 절에서 하는 발우 공양은 먹는 일에 있어 자연에 대해 예의를 지킨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렇게 먹고 살기만 한다면, 내가 살다가서 세상이 더 오염되는 일 없기에 자연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마음이 생겨요.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라고 말할만큼 때로는 난해하고 책들 역시 한자가 많아 입문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알고 계셨을 현각스님의 <만행>을 읽어보시면 좋으실거예요. 서구인들은 동양인들에 비해 불교에 입문하는 과정이 보다 논리적인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낯선 종교에 일생을 바친다는 일 자체가 많은 결심을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서구의 교육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효나 지눌과 같은 훌륭한 스님들이 배출된 나라에 살고 있으면서도 불교서적들은 오히려 외국분들이 쓴 게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납득이 되고 이해가 가게 말을 해주거든요. 미국 명문대학의 종교학과 학생이고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가 스님이 되는 과정을 따라가다보면 불교라는 종교가 가진 매력을 아실 수 있을 거예요. 문제는 <만행>이 절판되었다는 건데, 도서관에서 빌리셔야 할 거예요. 대한민국 출판시장은 많이 열악해서 좋은 책들은 금방금방 절판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한국스님이 쓰신 책 중에서는 도법 스님의 <내가 본 부처>를 추천합니다. 스님들을 교육하는 분이신 도법스님이 부처의 일생에 대해 쓰신 책입니다. 부처의 고뇌를 이해하고 또 부처의 존재를 신화화하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나는 책입니다.
마지막으로 공자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께요. 전 부처와 예수를 만나기 전에 공자를 먼저 만났습니다. 채치충이라는 만화가가 그린 <논어>라는 만화책을 고등학교 시절 도서관에서 읽다가 처음 그를 알게되었습니다. 그전까지 동안 제가 알고 있는 공자는 그저 지루하고 딱딱하기만 했는데, 그 만화 속에서는 공자가 살아 숨쉬고 있었습니다.
그는 60살이 넘어 현실 정치를 바꿔보겠다고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다 실패를 하고 돌아오기도 하고, 사랑하는 제자가 죽었다고 땅을 치며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통곡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운명에 대해, 죽음에 대해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앞의 두 성인과 다릅니다. 우리가 허공에 뜬 이야기처럼 여기는 유교가 실제로는 얼마나 현실적인 철학인가를 보여주는 면입니다. 그래서 18세기 기독교가 처음 조선시대 실학자들에게 받아들여졌을 때, 정약용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그 내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했었습니다. 제사를 거부하기 전까지는요. 유교에서 말하지 않는 사후세계에 대한 철학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운명과 죽음에 대해, 우리의 호기심 많은 제자들은 질문합니다. 공자는 대답하지요. 운명은 너무 오묘해서 말을 할 수 없다고요. 또 제자들은 질문합니다.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해 귀신에 대해 질문하지요. 공자는 그 질문을 듣고 오히려 제자에게 묻습니다. 그것에 대해 안다고 해서 네 인생이 달라질 것이 무엇이 있느냐 라구요.
저는 공자의 이 대답들이 마음에 많이 듭니다. 좋지 않나요. 공자의 이야기들은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어느 제자가 질문합니다. 인(仁)이 무어냐고, 공자가 대답하지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성인이 된다는 게 무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또 그렇게 대답하지요. 사람을 아는 일이라고. 전 그 대답들이 너무 좋습니다. 공자는 책을 추천하기가 어렵습니다. 몇 번 논어 책을 샀지만, 제게는 딱딱하고 재미가 없어 다 읽은 적이 없습니다. 저는 채치충의 <논어>와 안민영의 <붓다 속의 공자, 공자 속의 붓다>라는 책을 추천합니다. 안민영은 전문 학자는 아니구요. 프로필을 보면 그냥 책을 많이 읽고 좋아하는 사람 같습니다. 그래도 그 책이 저는 가장 좋았습니다.
공자와 소크라테스가 특히 그렇지만, 예수나 부처 모두 훌륭한 교육자입니다. 그들은 무언가를 진심으로 몰라 답을 구하는 이들에게 아무리 하찮은 질문이라도 최선을 다해 답을 하고 상대의 눈높이에 맞추러 교육을 하고 또 그 과정에서 믿음을 갖고 성장을 기다립니다. 또 반대로 신과 지식을 팔아 자신의 안위를 구하는 이들을 증오하고 분노하는 것도 같습니다. 예수는 유월절의 시장에서 신의 이름으로 장사를 하는 곳에서 깽판을 쳤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재판관들을 대놓고 무시하며 지식으로 장사하는 소피스트들을 찾아다니며 박살을 내지요. 공자나 부처역시 좀 더 점잖은 것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읽다보며 만만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