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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한 사람들

7. 지갑을 준비하지 않겠습니다




글을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제 주례 선생님께서는 제가 알고있는 가장 아름다운 주례사를 준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신혼여행을 다녀와 찾아뵜을 때, 저와 제 아내를 위한 지갑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너무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만 한 것 같아, 그것이 마음에 걸리셨다고 하셨습니다.




어줍잖게도 저 역시 글을 마치면서 그런 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을 보면, 인간되기 참 어려운 세상이지만, 우리 괴물을 되지 말자. 는 말을 누군가 합니다. 다른 나라, 다른 시대를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적어도 오늘날의 한국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한국은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을 것 같은, 각자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전쟁터 같습니다.




하지만 지갑을 따로 준비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 각자의 방법과 몫이 있겠지요. 당신의 20대에 건투를 빕니다.




2007.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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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다시, 책 읽기에 대하여




 글을 쓰다보니 책 이름을 많이 말하고 싶은 욕구가 계속 떠올라 조심스럽습니다. 좋은 책을 나열하는 글이 되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책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여기까지만 하려고 합니다.




 간혹 친구들에게서 책을 추천해달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그럴 때면, 매번 조심스럽습니다.

실은 좋은 책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독자적인 우주를 가진 존재이고 그 존재가 지닌 사고의 결은 모두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는 다는 행위를 일종의 만남이라고 규정한다면, 사람에 따라 좋은 만남이 다른 것처럼 제게 참 좋았던 책도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는 좋지 않은 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만남은 개별적이고 독자적입니다. 연애로 힘들어 하는 후배에게 좋은 충고를 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다만 책을 읽는 것과 관련해 한 마디만 보태려고 합니다. 카프카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 머리를 산산히 망치로 부스는 것과 같은 충격을 주지 못한다면 무엇하러 책을 읽는가’ 라고요. 물론 책을 읽는다는게 찜찔방에 가서 몸과 마음에 휴식을 갖는 것처럼, 헐리우드 액션영화를 보고 나서 때로는 머리가 개운한 것처럼 그런류의 즐기는 행위일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요.




 책을 읽다보면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깨달음을 혼자 알지 않고 무슨 이유에서건 글로 남겨 수백년이 지난 세월을 살아가는 나와 대화를 할 수 있게 해주었을까 싶어서요. 카프카의 말처럼 그런 책들은 때때로 불편하고 때때로 사람을 뒤흔들어 놓아, 그들을 만나고 시간이 지나면 어느 순간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사고하는 폭이 달라지고 사고하는 언어가 달라지는 거 말이예요.




 어려운 사고를 하게 되고 현학적인 말을 쓰게 되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좀 더 정직하게 자신을 바라볼 용기를 얻고 또 좀 더 진솔하고 정확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길을 알게 되는 그런 것이지요. 진리는 명제화된 무언가가 아니라, 진실하게 사는 행위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진리는 인식해야 될 대상이 아니라, 살아내야 할 시간인 것이지요. 우리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신만의 진리를 가질 수 있고, 우리 삶이 모두 독자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베스트셀러에 주목하되, 경계하셨으면 합니다. 베스트 셀러들은 우리 세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책이 팔리는 공간은 수요과 공급이 만나는 시장이라는 사실 역시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자신의 삶을 경영하는 방법들이 인기가 좋은 것이 최근 몇 년의 추세입니다. 가슴이 따뜻해 지는 이야기들을 모은 모자이크와 같은 책 역시 하나의 축을 형성하고 있구요. 하지만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절실한 것이 경영기술일까요. 물론 각자 알아서 스스로 살아남아야 하는 21세기 한국에서 필요한 생존기술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책들이 한 인간이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리한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서, 그럼에도 우리가 별개의 존재일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무엇을 알려줄까요. 기술적으로 사무적으로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부모나 형제나 아내나 가까운 친구와 같은 존재를 대함에 있어 어떤 인내를 가르쳐 줄까요.




 가슴이 따뜻해지는 여러 이야기를 읽는다고 가슴이 따뜻해질까요. 물론 책의 광고처럼 메마른 마음을 적셔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온통 추운데 자신의 방에 보일러가 고장나지 않았다고 만족하는 진리가 삶의 자세가 꼭 책을 통해 얻어야할 무언가일까요. 정말 가슴이 따뜻해지는 길은 고통 뒤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한 칸트처럼, 아주 불편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대한민국에 통계로 잡히는 노동자들 중에서만 하루 8명씩 노동재해로 죽고 200명이 다치는 사실을 들어본 적이 있었는지요. 대한민국의 5%가 넘는 장애인들의 한 달외출 일수가 5일이 채 안된다는 이야기를 아셨는지요. 가깝게는 지하철에서 선로에 뛰어들어 자살을 하는 사람을 치이고도 계속 운전해야 하는 지하철 승무원 분들의 삶도 모르셨을테니까요. 일상의 소소한 따뜻함과 즐거움을 아는 일은 소중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서 있는 땅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함께 알아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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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예술 : 아름다움을 찾는 일에 대하여




 무언가를 읽고 보고 듣고서 아름답다고 느낀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어떨 때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을 받을까요.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을 느끼는 행위를 지성과 감성이 만나 유희하는 행위, 그러니까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이 함께 어우러져 뛰노는 데서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이 있다고 했어요. 




 그 말은 거칠게 표현하면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을 느끼는데 이성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겠지요. 물론 어떤 작품은 따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마음을 흔들 수 있지만 제 경우는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이 대체로 맞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노래를 아주 못합니다. 노래방 가자는 이야기가 나오면 겁부터 날만큼 노래를 못하고 그림도 그만큼 못 그립니다. 그런 저 자신이 안타까워 그림이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좀 더 좋은 눈을 가져보자는 결심을 대학시절 했었습니다.




 처음에는 시공사의 디스커버리 총서를 사서 마네, 모네 등의 화가 책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제게 지금 다시 그림 책을 사서 보라고 하면 시공사의 책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누가 산다면 말릴 계획입니다. 다름아닌, 전두환의 아들이 운영하는 회사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몰랐었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아시는지요. 수백명의 광주시민들이 군부정권에 의해 학살당한 사건인데, 그 학살을 지휘한 한가운데 전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이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운동에 동참하지는 못하더라도, 현대사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에 대한 예의는 갖추면서 살아야지요.




 그리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2번 읽었습니다. 학교에서 교양 수업으로 같은 제목의 수업을 2번씩 들었구요. 그림 전시회도 부지런히 찾아다녔구요. 그런 노력끝에 제가 얻은 것은 미술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었어요. 뭐였나면요, 제가 보기에 뭔지 모르겠는 작품은 감동이 없는 작품은 적어도 내게는 좋지 않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공부를 하기 전에는 오히려 뭔가가 있는 것이라는 허영에 빠져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함민복이나 황지우, 황동규, 정현종의 시를 좋아합니다.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시를 써주거든요. 그리고 많은 시집들이 시집 한 권에 제 입장에서 좋은 시를 한 두개 이상 찾기 어려울 때가 많은데, 좋은 시인들은 시집 전체에서 어느 수준을 유지해 주더라구요.




 전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책에 대해 말할 때도 가장 자신이 없는 분야가 소설이구요. 대학 1학년 때에는 김소진의 소설에 잠시 빠졌었는데, 요절한 작가인지라 출판된 책이 한정되어 있다보니 그 이후로는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좋아하는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김훈의 <칼의 노래>를 저도 좋아하구요. 공지영의 소설 중에서는 전 <별들의 들판>이 가장 좋았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인데, 이 책은 내용을 고려할 때 쉽사리 추천을 못하겠습니다. 다만 저는 그 소설에 나오는 한윤희라는 여자 주인공의 캐릭터를 많이 좋아합니다.




 재작년 여름 제가 너무 소설을 모르는 것 같아 문학평론가들이 뽑은 한국의 현대소설 베스트 5 목록을 신문에서 스크랩 한 후, 그것들을 읽었습니다. 최인훈의 <광장>은 비슷하게 이념의 문제를 다룬 밀란 쿠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보다 이름은 멋이 덜 멋지지만 더 훌륭한 소설입니다.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은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생각하면서 읽으면 놀라운 소설이구요.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만났던 염상섭의 <삼대>는 이제와서 보면 좋은 소설이 분명할텐데, 아직 못 읽었습니다.




 문학평론가의 글 중에서는 돌아가신 김현 선생님의 글을 좋아했어요. 그 양반은 뭐랄까, 일상적인 언어로 글을 써서 현학적이지 않은데 대단히 날카로우면서 하고 싶은 말을 정확히 다하는 그런 느낌이 있어요.




 예술을 만나는데 있어, 그러니까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음에 있어 자신이 편하게 접할 수 있는 것만 찾지 말기 바랍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감수성은 계발되고 훈련되는 것이거든요. 고등학교 시절까지 자신이 지닌 감수성의 땅을 적극적으로 마련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으니, 대학시절부터는 평생 우려먹을, 평생 지을 건물의 땅을 산다는 마음으로 낯선 것들에 적극적으로 도전하셨으면 해요.




 인권영화제와 같은 소수자 영화제를 찾아가는 것도 독립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는 일도 좋구요. 남미나 제 3세계의 음악을 들어보는 것을 정민아의 <상사몽>과 같은 퓨전 가야금 음악을 들어보는 것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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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서전과 평전에 대하여 : 우리가 타인의 삶을 알고자 하는 것은




 저는 훌륭한 사람들은 자서전을 써주길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분들은 어지간해서는 자기 자서전을 쓰지 않으십니다. 최근에 돌아가신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님 같은 분이 자서전을 남기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장기려 박사님 같은 분도 그렇구요. 그 분들께서 살아오신 모습을 생각하면 그런 일이 없을 줄 알면서도 미련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들이 있어 후세에 평전들이 생겨나지요.




 소크라테스와 예수는 직접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부처와 공자가 직접 쓴 글은 아직 본 적이 없는데, 제가 확실히 몰라서요. 이 똑똑한 양반들이 왜 다들 글을 쓰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한번씩 해봅니다. 특히 노자 같은 아저씨는 성 문지기가 부탁하지 않았으면 아예 도덕경도 안 썼을 거 아니예요.




 모든 만남은 일대일의 개별적인 만남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요. 그러니까 모든 개개인에게는각자 지닌 독자적인 삶의 역사에 기반한 의식구조가 있고 그에 따른 대화를 해야 하기에, 문자라는 보편적인 형식을 지닌 형태의 대화를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화석화된 문자가 말 그대로 경전이 됐을 때를 걱정해서 였을까요.




 여튼요. 저는 평전이나 자서전 류의 글을 좋아합니다. 역사속의 흔적을 남긴 인물이 아니더라도 자기 삶의 과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누군가의 인생을 따라가보는 일은 살아가는 힘을 줍니다.




 그런데, 간혹 평전들은 상대방에 대한 존경이 지나쳐서 인지 사람을 신화화하고 사람냄새를 박탈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언가 드라마틱한 느낌은 있을지언정 그에게서 우리가 진정 배워야 할 혹은 알고 싶은 인간적인 면모들은 거세시켜 버립니다. 그는 나와 같은 문제로 힘들어하고 좌절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누군가의 삶은 알고자 하는 원동력 아니던가요.




 <닥터 노먼 베쑨> 같은 책이 그래요. 닥터 노먼 베쑨은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스페인과 중국 민중들을 위해 거침없이 살아간 훌륭한 의사입니다. 그런데 그 책을 읽다보면 그의 좌절과 고뇌, 갈등이 느껴지지 않아요. 저는 세상에 떠도는 ‘체 게바라’가 싫고 그의 평전도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 싶어 손을 대고 싶지 않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요. 간디의 자서전을 읽다보면, 간디가 10대에 조기 결혼을 해서 갈등하는게 나옵니다. 한창 성욕이 왕성하던 시기 절제를 못해서 힘들어 하는 간디의 모습을 볼 수 있거든요. 백범일지를 읽어보면 김구가 얼마나 투박하고 순박한 사람이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내용이 아니라 문체에서요. 거침없고 정직하구요. 그는 자신의 행위를 설명할 때, 수사어구를 동원하지 않아요. 전 그 문장으로 인해 김구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김산/님웨일즈의 <아리랑>은 읽을 때마다 님웨일즈에게 감사하는 책입니다. 님웨일즈는 김산과의 대화를 통해 그의 이야기를 살아있는 내용으로 글로 남기는 일을 해주었습니다. 참고로 <아리랑>은 대학 1학년 때 읽을려고 하니 재미도 없고 내용도 딱딱해서 실패했었는데, 26살에 다시 그 책을 만났을 때는 너무나 감사했던 책입니다.




 그러고 보면 책을 포함한 모든 만남은 시기라는 게 있습니다. 저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중, 고등학교 시절 읽지 못했던 게 안타깝습니다. <데미안>은 저처럼 대학생이 되어서 읽지 말고 십대에 읽어야 하는 책인 것 같아요. 아마 저는 세계 2차 대전 때 독일군 병사들이 참호에서 가슴에 품고 읽으며 느꼈다던 <데미안>의 감동을 저는 앞으로도 영영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성칠 교수의 <역사 앞에서>라는 책도 제가 아마 일찍 만났었더라면 그 가치를 몰라봤을 책입니다. 글을 읽으면 처음에는 별다를 것 없는 일기거든요. 드라마틱하지도 않구요. 한국전쟁을 거치며 그 이념의 혼돈속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또 자신의 자존심과 존엄을 올바르게 지켜나가고자 하는 한 교수의 고뇌가 그 일기 속에 담겨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야 하니까, 공자의 말처럼 어느 사회에서나 올바르게 사는 법은 있다고 하지만 그 길을 찾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러고 보니 <산정에 배를 메고>라는 이구영씨의 책도 있습니다. 남파 간첩으로 체포되어 징역을 살았던 이구영씨의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담담한 문체로 이어지는 내용들을 읽다보면 묘한 감동이 밀려듭니다. 자신이 믿는 무언가를 쫓아 살아간다는 것이 때론 이런 것이기도 하구나 하는 마음이요. 아. 저는 감옥에서 쓰여진 신영복씨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서준식씨의 <옥중서신>을 모두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면 전 단연코 <옥중서신>입니다.




 그 이유 역시 제가 자서전 류의 글을 좋아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영복씨의 글은 참 정갈합니다. 차분하고 맑은 느낌의 글, 도대체 감옥에서 어떻게 이런 성찰들을 해 나가며 버티어 나갈 수 있는지 놀라울만큼 적개심이 그 책에는 없습니다. 물론 그것은 신영복씨의 훌륭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서준식씨의 글을 읽다보면 그가 그 안에서 느껴야 하는 좌절과 답답함 그리고 자신에 대한 콤플렉스가 느껴지고 감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자기자신과 싸워나가며 자신과 세상에 지지 않으려 애쓰는 그 눈물겨운 싸움들을 볼 수 있습니다.




 좀 더 편안한 책들을 예로 들면 시인 백석과의 사랑을 다룬 기생 자야의 <내 사랑 백석>이나 <오체불만족> <기적은 당신안에 있습니다>와 같은 책들 역시 저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물론 평전 중에서도 좋은 책들이 있습니다. 자서전이다 평전이다 하는 이분법적 구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의 자세가 중요한 것이겠지요. <전태일 평전>은 훌륭한 책입니다. 그것은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님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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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종교 : 인간의 가장 깊은 무언가에 대하여




 혹시 연애를 해보셨는지요. 사랑을 끝나고 나면 다른 건 몰라도 확실히 알게 되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사람도 사랑도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못 견디게 숨이 막히는 순간들이 차츰차츰 잦아들고 다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하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어느 순간 다시 누군가를 만나기도 합니다. 시간이 무서운 거지요. 글을 쓰다보니 힘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하게 되는데, 시간은 정말 힘이 세거든요.




 그런데 종교는 수천년의 세월을 살아남은 녀석들입니다. 지난 100년동안에 세상이 워낙 많이 바뀌어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우리세대의 유산 중에 천년이 지난 다음에 기억할만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1000년이라는 세월은 한 인간이 살아낼 수 있는 시간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크기인지라, 답이 어려울 거예요.




 그 수천년의 세월 속에서, 그것도 그냥 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에 깊이 스며들어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는 것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놀랍고 경이롭기까지 한 일입니다.




 전 종교서적을 좋아합니다. 아. 제 종교는 불교입니다. 그냥 향 냄새가 좋아 일년에 몇 번 절에 가는 정도이구요. 여름이면 여기저기 사찰의 수련 프로그램에 들어가 3박 4일정도씩 묵언 수행이나 참선 수행을 하고 지냅니다. 참고로 여름 사찰 수련의 백미는 새벽 참선입니다. 해가 뜨는 것을 세상에 빛이 들어오는 것을, 그 미세한 변화를 온 몸으로 느껴본적이 있는지요. 작년 여름 법주사 참선수련회에 참석했을 때, 500년된 건물에 앉아 새벽 4시 참선을 하며 태양이 서서히 뜨고 그 빛이 인간세상에 다가오는 것은 처음으로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아.




 신양성서는 참 좋은 책입니다. 그 중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4대 복음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고독했던 한 존재의 모습을 보여주는 눈물겨운 이야기들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는 몇 년동안 여름마다 성경을 읽으려 하다 실패했어요. 물론 교회에서 하는 성경읽기 모임같은 곳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 곳에서는 제가 성경에 대해 갖고 있는 의문들에 대해 의미있는 답변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읽을 줄 몰랐었습니다. 저는 적어도 성경이 믿음으로 읽어야 하는 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예수가 쓴 글이 아닐 뿐더러, 예수가 죽고 수십년이 지나서 쓰여진 책들입니다. 다만 예수를 깊은 사랑으로 기억하는 자들이 그들의 기억과 마음을 기록한 책이지요. 예수 역시 자신의 사랑과 실천을 제자들이 믿어주기를 바랬지 성경의 구절들을 암송하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사람마다 예수를 만나게 되는 경로가 다르겠지만 저는 이누카이 미치코의 <성서 이야기>와 서준식의 <옥중서신>과 김규항의 글들을 통해 그를 만나는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논산육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으며 신약성서의 4대복음을 그대로 옮겨쓰는 일을 했었습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너무 보석 같아서 누구도 볼펜으로 눌러쓰며 마음속에도 담고 싶었습니다.




 예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글에서 기독교 신자일지도 모르는 당신과 그가 신인지 아닌지 여부를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제가 만났던 알고 있는 예수에 대해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어요. 다만 제게 그를 만나는 일은 한 존재가 보여줄 수 있는 윤리적 실천의 극한들을 접하는 일입니다. 몇 년전 한 선배에게 보냈던 편지를 동봉합니다.




요즘들어 그를 지탱하던 힘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으면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이해하던, 화석화된 계율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과거의 유산들을 무시하지 않던, 자신의 몸으로 사랑을 행하면서도 그 결과물에 대해서 자신의 이름을 붙이줄 모르던 그는 어디에서 힘을 얻었을까요.




그를 통해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심판하는 권세를 꿈꾸던 자신의 제자들과 '내가 곧 진리'라는 말에 그를 정신병 환자 취급하던 유대인들과 사람을 살리고 귀신을 쫓는 기적만을 그에게서 바라던 민중들 사이에서 그는 어떻게 막달라 마리아를 앞에 두고서 '너희들 중 죄 없는 자 이 여자를 쳐라'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요. 계율에 따라서 죄인이냐 아니냐를 묻는 질문에 그 둘을 모두 긍정하고 또 부정하는 그 놀라운 답을 내놓을 수 있었을까요.




유한한 존재로 태어나 영원의 가치를 이야기하다, 그 마지막 완성을 위해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가던 그는. 단 한번도 자신의 십자가를 나눠지자고 말하지 않았잖아요. 나를 따르는 자들은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서, 가난한 자들은 네 몸같이 사랑하고 말했을 뿐이잖아요. 어떻게 그는 그토록 거대한 사랑을 하면서도 또 그토록 거대한 고독을 감수할 수 있었을까요.




자신을 배반할 줄 알면서도 유다를 그 긴 시간동안 묵묵히 지켜보고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자신을 체포하러 온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배반한 제자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해서 그는 열매에 대한 기대없이 묵묵히 씨앗을 뿌릴 수 있었을까요.




형.




과연 그를 지탱하던 힘이 무엇이었을까요.




 아. 저는 불교신자인데 성경을 너무 길게 이야기한 것 같네요. 불교는 오히려 제가 드릴 말씀이 많지 않아요. 다만 시간이 나면 서울 길상사의 참선 수련회나 여름방학을 이용해 사찰의 여름수련회에 참석해보길 권합니다.




 3박 4일동안 말을 한 마디도 안해보는 경험은 참 신기합니다. 전혀 새로운 세상에 입문한 느낌입니다. 과연 내가 살아가면서 꼭 해야하는 말은 얼마만큼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절에서 하는 발우 공양이라는 것도 그래요. 내가 먹은 음식은 그 음식물을 씻은 물까지도 깨끗하게 본인이 먹게하거든요. 우리가 살면서 세상에 참 많은 안 좋은 것들을 남기잖아요. 우리에게 산소와 그늘을 주는 나무를 잘라 책을 읽고 이 종이도 그렇게 만들어졌을테고요. 가정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내는 폐기물 1등이 음식물 쓰레기라고 해요. 그런데 절에서 하는 발우 공양은 먹는 일에 있어 자연에 대해 예의를 지킨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렇게 먹고 살기만 한다면, 내가 살다가서 세상이 더 오염되는 일 없기에 자연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마음이 생겨요.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라고 말할만큼 때로는 난해하고 책들 역시 한자가 많아 입문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알고 계셨을 현각스님의 <만행>을 읽어보시면 좋으실거예요. 서구인들은 동양인들에 비해 불교에 입문하는 과정이 보다 논리적인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낯선 종교에 일생을 바친다는 일 자체가 많은 결심을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서구의 교육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효나 지눌과 같은 훌륭한 스님들이 배출된 나라에 살고 있으면서도 불교서적들은 오히려 외국분들이 쓴 게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납득이 되고 이해가 가게 말을 해주거든요. 미국 명문대학의 종교학과 학생이고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가 스님이 되는 과정을 따라가다보면 불교라는 종교가 가진 매력을 아실 수 있을 거예요. 문제는 <만행>이 절판되었다는 건데, 도서관에서 빌리셔야 할 거예요. 대한민국 출판시장은 많이 열악해서 좋은 책들은 금방금방 절판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한국스님이 쓰신 책 중에서는 도법 스님의 <내가 본 부처>를 추천합니다. 스님들을 교육하는 분이신 도법스님이 부처의 일생에 대해 쓰신 책입니다. 부처의 고뇌를 이해하고 또 부처의 존재를 신화화하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나는 책입니다.




 마지막으로 공자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께요. 전 부처와 예수를 만나기 전에 공자를 먼저 만났습니다. 채치충이라는 만화가가 그린 <논어>라는 만화책을 고등학교 시절 도서관에서 읽다가 처음 그를 알게되었습니다. 그전까지 동안 제가 알고 있는 공자는 그저 지루하고 딱딱하기만 했는데, 그 만화 속에서는 공자가 살아 숨쉬고 있었습니다.




 그는 60살이 넘어 현실 정치를 바꿔보겠다고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다 실패를 하고 돌아오기도 하고, 사랑하는 제자가 죽었다고 땅을 치며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통곡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운명에 대해, 죽음에 대해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앞의 두 성인과 다릅니다. 우리가 허공에 뜬 이야기처럼 여기는 유교가 실제로는 얼마나 현실적인 철학인가를 보여주는 면입니다. 그래서 18세기 기독교가 처음 조선시대 실학자들에게 받아들여졌을 때, 정약용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그 내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했었습니다. 제사를 거부하기 전까지는요. 유교에서 말하지 않는 사후세계에 대한 철학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운명과 죽음에 대해, 우리의 호기심 많은 제자들은 질문합니다. 공자는 대답하지요. 운명은 너무 오묘해서 말을 할 수 없다고요. 또 제자들은 질문합니다.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해 귀신에 대해 질문하지요. 공자는 그 질문을 듣고 오히려 제자에게 묻습니다. 그것에 대해 안다고 해서 네 인생이 달라질 것이 무엇이 있느냐 라구요.




저는 공자의 이 대답들이 마음에 많이 듭니다. 좋지 않나요. 공자의 이야기들은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어느 제자가 질문합니다. 인(仁)이 무어냐고, 공자가 대답하지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성인이 된다는 게 무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또 그렇게 대답하지요. 사람을 아는 일이라고. 전 그 대답들이 너무 좋습니다. 공자는 책을 추천하기가 어렵습니다. 몇 번 논어 책을 샀지만, 제게는 딱딱하고 재미가 없어 다 읽은 적이 없습니다. 저는 채치충의 <논어>와 안민영의 <붓다 속의 공자, 공자 속의 붓다>라는 책을 추천합니다. 안민영은 전문 학자는 아니구요. 프로필을 보면 그냥 책을 많이 읽고 좋아하는 사람 같습니다. 그래도 그 책이 저는 가장 좋았습니다.




 공자와 소크라테스가 특히 그렇지만, 예수나 부처 모두 훌륭한 교육자입니다. 그들은 무언가를 진심으로 몰라 답을 구하는 이들에게 아무리 하찮은 질문이라도 최선을 다해 답을 하고 상대의 눈높이에 맞추러 교육을 하고 또 그 과정에서 믿음을 갖고 성장을 기다립니다. 또 반대로 신과 지식을 팔아 자신의 안위를 구하는 이들을 증오하고 분노하는 것도 같습니다. 예수는 유월절의 시장에서 신의 이름으로 장사를 하는 곳에서 깽판을 쳤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재판관들을 대놓고 무시하며 지식으로 장사하는 소피스트들을 찾아다니며 박살을 내지요. 공자나 부처역시 좀 더 점잖은 것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읽다보며 만만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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