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 왔나
이청해 지음 / 민음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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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한설 같은 격동의 세월을 보낸 뒤의 고요함, 조용히 가라앉은 노작가가 쓸 법한 이야기 일곱 편. 그럼에도 독자들의 가슴에 불어넣는 숨결이 생생하다. 편편이 주옥 같고, 폐부를 찌르는 표현, 관록이란 이런 거구나, 싶은 문장들이 빛난다. 요즘의 어떤 작가가 단어들의 이런 조합을 생각해낼 수 있을까.

작가는 작품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당신은 지금 당신 삶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를 묻고 있다.

 

‘극한 상황에서 저절로 작동되는 생존본능(61쪽)’이 과연 이기심인지 묻는 <검은 나비>가 포문을 연다. 살면서 잃은 것들, 잊은 것들, 놓친 것들을 화자와 함께 되짚게 되는 <남편의 시(詩)>, 절망과 외로움에 빠진 인간에게 구원은 어떤 형태로 다가오는지, 내밀어진 손이 완전히 의지할 수 있는 것인지 묻는 <친절한 금화씨>, 어둡고 침울한 화자가 새로 이사한 아파트에서 반려견 때문에 뜻밖의 소동을 겪는, 이질성과 동질성에 관한 이야기인 <생쥐와 낙타>등이 실려 있다.

 

폭력이 드리운 긴 그림자를 통해 폭력 피해자로서의 여성과 그들의 인권에 대해 말문을 여는 <너의 발걸음 소리>는 노골적인 여성 서사임에도 폭력을 고발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작가의 역량이 최대한 발휘된 수작이다. 코믹한 필체로 오늘날 문학의 진정성을 탐구하는 <소설가들>도 가슴에 남고, 충동적으로 떠난 여행에서 타지의 낯선 사람들로부터 뜻밖의 호의와 위로를 받는 <여수 이야기>도 기분 좋은 여운이 오래 남는다. 이 작품을 읽고 여수에 가고 싶어졌다.

 

세상은 거칠고 가차 없지만 사람들은 따뜻하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소설집으로서는 ‘이게 마지막’이라고 밝히는데, 제발, 아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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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의 온기
김혜진 지음 / 창비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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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들>은 오지랖과 정당하고 애정 어린 관심의 차이와 경계, 즉 선의(善意)의 선(線)을 묻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정답을 주거나 결론을 내리지 않고 문제만 던지고 뒤로 빠진다. 그 뒤의 판단과 결론은 독자의 할 일이다. 자유로운 감상이 가능한 무대를 제공하는 작가의 수법이 능숙하다.

 

<빈티지 엽서>는 매우 흥미로운, 이 작품집의 백미이다. 읽을수록 토끼굴이 연상된다. 마치 렌즈가 여럿 달린 망원경을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관종들>과 연이어 읽으면 그런 느낌이 두드러진다. 로맨틱한 분위기와 정서,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표면적으로 이 작품은 ‘낯선 곳에 자신의 일부를 남기고 오지 않았을까(48쪽)’ 의심하는 화자의 권태를 다룬다. 화자는 헬쓰장에서 우연히 친해진 남자를 통해 삶을 회고하고 과거에 내릴 수 없었던 결정과 선택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되는데, 사연과 맥락이 명확하지 않은 ‘외국의 엽서’는 우리가 원하지만 닿을 수 없는 세계, 가질 수 없는 것의 상징처럼 보인다. 손에 들고 해석하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건 단어와 맥락 없는 문장 들은 보잘 것 없는 일상에 약(藥)도 되고 독(毒)도 되는, 양가의 가치를 지닌다.

 

이야기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작가는 시선을 중첩시키고 가장 밖에 독자들의 시선을 둠으로서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을 읽는 것 이상으로 경험하게 만든다.

화자와 헬쓰남의 ‘엽서 읽기’가 멈추는 건 외부(관종들)의 시선 때문이었다. 그런데 화자와 헬쓰남 사이에서도 ‘관종들’의 시선이 존재한다. 나중에 화자는 남자의 의도가 진짜 엽서 읽기뿐이었을지 의심하며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로 그 이상의 바람은 없었는지 묻는다. 가장 밖에서 이 모든 양상을 목격하는 독자 역시 이들의 의도를 의심하고 상상하면서 ‘관종’의 시선을 경험한다.

 

<달걀의 온기>도 여운이 길다.

작가는 얼마간 방치됐던 어린시절 기억으로 태생적 피해의식이 있어 늘 원망의 화살로 경계하는 ‘선희’와 보살핌을 받은 적이 없으면서 어떤 대상을 보살피는 꼬마 ‘민지’를 대비시킨다. 성인이지만 정신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선희와 달리 어린 민지는 오히려 성숙하다. 선희는 민지로 인해 ‘바깥의 열기와는 무관한, 내부에서 만들어져 흘러나오는 온기, 아니, 바깥에서 불어넣지 않았다면 결코 생겨나지 못했을 온기(233쪽)’를 경험한다. 작가는 ‘결핍’의 증후가 ‘없어서 할 수 없슴’만이 아닌 ‘없으니까 오히려 더 잘 하려는’ 의지도 있음을 보여준다.

 

창작과 표절의 경계를 내세워, 우리가 무엇을 인식할 때, 오직 그것 자체만이 인식의 대상일까 질문하는 <우연의 직조>는 예술과 우연의 상관관계를 생각하게 했고, 나와 우리라는 울타리 밖의 존재를 그저 외부, 나와 상관없는 것, 의심스럽고 조심해야 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편견과 혐오에 대한 이야기인 <우리와 우리 아닌 것>도 읽기 좋았다. 이 작품은 또한 한 번 경험되어 각인된 이미지가 얼마나 오래 가는지, 우리가 그것에 얼마나 고집스레 집착하는지, 화자를 통해 경험할 수 있어 흥미로웠다.

 

서서히 세상 밖으로 나와 ‘어떤 것에 어렵게 다다른(102쪽)’ 화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푸른색 루비콘>과 독(毒)이 약(藥)으로 작용해 밖으로 나왔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다시 껍질 속으로 들어가는 ‘애실’의 모습이 안타까운 <하루치의 말>은 쌍을 이루는 작품처럼 보였다.

 

‘김혜진’의 소설집이다. 미문(美文)보다 경제적이고 적확한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의 특징이 읽기에 좋다. 섬세하고 내면적이되 개인성에 함몰되지 않고 안과 밖, 개인과 사회를 적절히 조율한 이야기, 일곱 편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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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사냥개 ㅣ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7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정성희 옮김 / 해문출판사 / 198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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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 다시 읽기 스물네 번째 책.

 

 

❝- 어둠에서 헤매는 아들을

운명의 여신은 무슨 등불로 이끌어주시는가?

 

- 이심전심의 등불이다, 하고 하늘에서 대답했다.

 

알겠니? 제프리에게는 그것이 있는 거야. 이신전심의 등불 말이야. 아이들은 모두 가지고 있지. 어른이 되어가면서 점점 그것이 없어져 버리지. 아니, 그것을 없애고 있을 뿐이지. 아주 나이가 들어버리면 희미하게 빛이 돌아오는 수도 있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 등불은 아이 때가 가장 밝은 빛을 내지. (<등불>, 65쪽)❞

 

전형적인 ‘귀신들린 집’ 이야기이면서 어른이 되면서 사라지는 동심과 순수함의 흔적을 좇는 <등불>은 작가의 단편 중 내가 자주 꺼내 읽는 작품 중 하나이다. 으스스한 분위기에 완벽한 구성, 각 캐릭터들의 효과적인 역할 분담과 ‘어른 되기’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 메시지까지. ‘좋은 단편소설’이 갖추어야 할 미덕을 짧은 분량 안에 빼곡하게 담아낸다.

 

이 작품집은 크리스티의 여러 단편집 중 여기저기서 추려 편집한 책이다. 원래 영미권에서 출판된 책은 이런 모양새는 아니었으나 출판사(‘해문’) 임의로 저지른(?) 결과물이다. 그런데 오히려 더 좋다. 결과적으로 다양한 맛과 색깔을 갖춘, 그야말로 종합선물세트 같은 모양새를 갖췄으니까. ‘황금가지’의 판본은 아마도 다르리라 추측된다.

 

초현실적인 이야기들이 두드러진다. 보통 애거서 크리스티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후던잇(Whodunit)’에 특화된 작가지만, 사실 여러 장르를 넘나든 전천후였다. 열한 편의 작품이 실린 이 책에서만도 호러, 정통 미스터리, 로맨스 등, 그 맛이 다양하다.

 

<죽음의 사냥개>에서 작가는 초현실적인 요소들을 자신의 특기인 범죄와 교묘하게 연결 짓는다. 그런 특징은 고양이와 인간의 영혼이 뒤바뀌는, 다소 허무맹랑한 이야기인 <아서 카마이클 경의 기묘한 사건>에서도 보인다.

미래를 예견하는 인물의 비극을 그린 <집시>, 귀신 들린 인형을 중심으로 한 소동극인 <의상 디자이너의 인형>도 호러 소설 범주에 속한다. 특히 <의상 디자이너의 인형>는 독자의 인간적인 면에 호소하는 결말로 독특한 여운을 남긴다.

 

로맨스 소설로 읽히는 <목련꽃>은 불륜 상황을 중심으로 인간의 존엄과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진지하게 조명한다. 작가 자신이 불륜의 피해자였으므로 그 상황과 관계를 탁월하게 잘 설득해냈다.

<개 다음에>는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몇 십 년이 지나서도 눈물짓게 만든, 매우 좋아하는 단편이다. 절망과 희망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순간을 잘 잡아내어 진정한 위로란 무엇인지에 곱씹게 만든다. 애절하고 사랑스럽고 낭만적인 작품이다.

 

나머지 작품들은 이 책의 작가가 누구인지 잊지 않게 만들어준다. ‘포와로’가 도난 사건을 멋지게 해결하는 <이중 범죄>와 <이중 단서>는 범죄와 트릭이 강조된 작품이며, 포와로가 앞으로 일어날 살인을 미리 막는 <말벌 둥지>와 ‘미스 마플’이 이방인의 죽음을 조사하는 <성역>은 범죄보다 인물의 드라마가 전면에 드러난다.

 

읽을 때마다 이런 작가가 또 있을까, 감탄하곤 한다. 올해(2026년)가 크리스티 사망 50주년이라고 해서 고향인 영국에선 여러 축제가 열리거나 열릴 예정이라고 하니 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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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으로 들어가기
카롤리네 발 지음, 전은경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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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전에 읽은 ≪스물두 번째 레인≫의 속편 격 이야기. 전편에서 어린 아이였던 ‘이다’가 주인공이다. 출판은 전작으로부터 일 년의 터울이 있지만, 이야기 속 이다는 어느 새 성인(열아홉이나 스물)이다.

 

알코올 중독이었던 엄마가 약물 과용으로 죽고 이다는 홀로 남는다. 죽은 엄마를 발견한 충격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함부르크에 정착한 언니에게 가는 길, 충동적으로 외딴 섬으로 향한다.

 

낯선 지방, 낯선 사람들에 섞여 슬픔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회복하며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다의 이야기다. 전작과 같이 성장 드라마 성격이 강하다. 알코올 중독자인 엄마를 홀로 견디며 울퉁불퉁 반항적인 기질이 된 이다가 주변 인물들의 도움으로 모서리를 다듬어가는 모습이 주를 이룬다. 전작보다 더 인물의 내면에 천착한다. 틸다의 이야기가 미래를 찾는 과정에 관한 것이었다면, 이다의 이야기는 과거를 부드럽게 매만지며 자신의 모습을 깎고 다듬는 과정에 집중한다.

 

언니의 이야기와 비교했을 때 공통점이 많다. 물의 이미지(수영장, 바다), 비와 바람, 숲이라는 공간, 인정 많고 친절한 조력자, 수수께끼 같은 매력의 젊은 남자. tone & manner가 일관되어 나처럼 연달아 읽는다면 살짝 지루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젠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진, 자매의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결혼과 출산으로 문학의 꿈을 접은, 상실된 미래에 아파하다가 알코올이 주는 괴력에 의존하게 된, 그래서 남편에게 버림받고 아이들을 소외시켜 결국엔 붕괴되고 만 여자의 삶은 어땠을까. 프리퀄 형식으로 엄마의 이야기를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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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두 번째 레인
카롤리네 발 지음, 전은경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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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저버린 아빠에 알코올 중독에 빠진 엄마, 나이 터울이 많은 이부동생.

힘겹고 부지런할 수밖에 없는 삶. 하지만 힘에 부친다. 교통사고로 인한 ‘썸남’의 죽음도 죄책감을 짓누른다.

수학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틸다’는 교수로부터 박사 과정을 위해 대도시로 떠날 것을 추천받는다. 도약할 좋은 기회다. 그런데 어린 동생과 망가진 엄마가 걸린다. 틸다는 훌훌 털어버리고 꿈을 좇고 싶지만 삶이 녹록치가 않다.

 

기회와 선택, 희망과 극복의 이야기다. 과거에 매인 현재에 주저앉느냐, 아니면 희생을 있더라도 미래로 나아갈 것이냐. 이런 딜레마를 중심으로 틸다의 고민이 전개된다.

나라면 어떨까. 현재에 그냥 남기로 결정하는 게 나에겐 쉬운 결정 아닐까. 나쁜 사람은 되기 싫기에, 나중에 후회하거나 손가락질 받는 건 견디기 어렵기에. 하지만 그런 걸 완벽하게 차단할 방법이 있을까.

결국 집을 떠나는 주인공을 보며 부러웠다. 가족을 떠나고 싶은 게 아니라 현실을 벗어나기로 결정한 그 용기에. 틸다의 결정엔 동생 ‘이다’의 역할이 컸다. 겨우 열두세 살인 이다는 너무나 성숙하다. 어린 아이가 저래도 되나, 걱정될 정도로. 동생이 언니를 설득하고 능력을 증명하고 응원하지 않았었대도 틸다가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어둡고 침침한 이야기이지만 마냥 침울하지만은 않다. 대부분 무겁고 슬프지만, 그래도 유머러스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장면들이 양념처럼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두 자매가 서로 의지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인간은 스스로를 먼저 돌봐야 한다.

석 달만에 완성한 작가의 데뷔작이라고 하는데, 그 재능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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