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너 올리펀트는 완전 괜찮아
게일 허니먼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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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엘리너’는 ‘괴짜’라는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근면하지만 성실하지는 않고 왠지 외롭고 딱해 보여 손을 내밀고 싶지만 선뜻 그러기 어려운 인물. 주기적으로 술을 마시지만 심각한 알코올 의존증이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는 않고 정해진 루틴에서 한 치도 벗어남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 재미있거나 유쾌한 사람도 아니고, 매력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타인들에게 쉽게 자신을 어필할 ‘뭔가’가 없는 사람. 선천적인 장애는 없지만 어떤 사고에서 연유된 듯 얼굴의 상처를 주홍 글씨 품듯 살고 있는 사람.

주 중에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각에 엄마와 통화를 하는데, 그게 영 쓴 약 삼키듯 해버려 뭔가 있지 싶다. 엄마랑 연을 끊고 사는 건 맞는데 그렇다면 굳이 연락을 근근히 잇고 있는 것도 뭔가 수상하다.

제목이나 표지, 도입부에 등장하는 주인공만 봐서는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괴짜 주인공의 연애+인생 성공 스토리를 기대했는데 이런 전혀 뜻밖의 이야기라니.

한 마디로, 요즘 뭐 읽을 책 없어? 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노벨 수상작품이나 유명한 고전 취향이 아니라면, 그냥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읽는다면 읽어 보라고 사주고 싶은 책이다. 진입 장벽 낮으면서 수월하게 읽히고 결국 ‘재밌다, 잘 읽었다’ 이런 감상을 토하게 만드는.

이런 책 만나기가 과연 쉽던가.

이 책을 다 읽어낸 직후, 내가 휘갈긴 메모는 이랬다.

타인에게는 물론이고 스스로에게 우리는 얼마나 친절하고 다정할 수 있을까.
앞으로 나아가고 무언가 성취하고 손에 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뒤를 돌아보고 과거를 보듬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
그게 진정한 가치의 ‘성장’이 아닐까.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라면 저게 다인 것 같고, 뭐, 그닥 새로울 것도 없다.
특별한 통찰도, 눈에 띄는 각성도 없다. 그냥 평범한 인물을 내세워 좋은 얘기하는 책이라면 주변에 널렸지만, 이 책이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건, 엘리너가 보다 행복해지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점. 그런 면에서 인물의 트라우마 극복기로 읽어도 무방하다.
그것조차 평범할 수 있다면, 그 과정에서 제 주변에 높고 두꺼운 벽을 세웠던 엘리너가 결국엔 타인의 도움을 바라게 된다는 것. 친절을 베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친절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것도 친절이라는 것.

홀로서기가 완벽히 혼자임을 의미하는 건 아닐 터. 영화 어바웃 어 보이의 대사가 생각난다.

❝인간은 섬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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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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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퀴어.
그들의 가족, 이웃들, 그리고 연인들.
고유의 속도로 제각각 흐르다가 반가이 만나기도, 다시 헤어지기도 하는 여러 갈래의 물줄기.
그것들이 이뤄내는 커다란 강.
햇빛에 반짝이는 수면 아래 뭐가 있을까.
먹히고 썩어가는 죽은 짐승은 생전에 어떤 꿈을 꾸었을까.

이 책을 읽자마자 적은 메모인데, 더 이상의 세세한 면을 기억하자니 어렵다. (읽은 지 두 달 가까이 지났다)

대단히 방대한 시간대를 아우른 소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 가족의 많은 구성원들이 나오는데 인물들이 많았던 것도 기억난다. 현실적인 공감이 가는 인물들도 있었고 동화 속의 인물처럼 캐리커처로 묘사되거나 모호하게 처리된 인물들도 있었다.
이런 모호함은 작가가 의도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야기의 몽환적인 분위기에 잘 어울리기도 했지만 현실감을 떨어뜨리는 데에도 한몫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인지 다 읽고도 풀리지 않은(답을 줄 수 없는) 의문이 남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야기 자체로는 뭐랄까, 잘 읽히기는 하지만 남는 건 크게 없었던, 대가족을 통해 그 시대를 대변했던, 예전의 대하 TV 드라마 같았달까. 시대물로서의 기능은 다소 약하고 인물에 집중했으며, 방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작가의 호흡이 다소 허겁지겁 했던 것 같다.

보통 타국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은 (적어도 나에게) 진입 장벽이 높은 편인데(우리나라 역사도 잘 모르는데, 감히 다른 나라의 역사에 과연 공감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기우였다. 많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잘 읽혔고 책장이 빠르게 넘어갔다. 그건 아마도 자국의 역사와 인간의 이야기 사이의 균형을 잘 잡아준, 인간과 삶의 여러 측면들을 잘 보여준 작가 덕분이겠지.

자국인 대만에서는 ‘퀴어 문학’으로 소개되고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걸로 기억되는데, 주변의 많은 인물들에 섞여 두드러지지 않았기 때문인지 이 소설을 정의하고 소개하기에 적당한 도구는 아닌 것 같다. 아니면 작가는 그들의 삶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게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사족.

음력 7월 보름은 불교의 ‘백중일’과 겹친다. 불교에서도 그날 망자들을 위해 예를 갖추고 제사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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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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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어플을 통해 만난 남자들을 만나 돈을 갈취한, 소위 ‘꽃뱀’ 범죄의 피의자로 기소된 ‘가지이 마나코’. 가지이의 범죄가 더욱 유명세를 탄 건 남자들이 몇 명 죽었기 때문이다.
돈을 빼앗고 필요가 없어진 남자들을 죽인 걸까. 아니면 자연사? 사고사?
잡지사 기자인 ‘리카’가 독점 취재를 위해 가지이의 사건에 뛰어 들지만, 리카는 눈앞의 가지이가 ‘아름다운’ 사람이 아닌 데에 놀란다. 커다란 체구에 살집 풍부한 몸매는 일반적인 여성성과 거리가 먼, 성적 매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저런 사람이 남자들을 꼬드겼다고? 드러나지 않은 게 더 있음을 직감한 리카는 가지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의문의 범죄가 등장하고 의뭉스러운 용의자와 의욕적인 탐정이 잇따른다. 명목상 미스터리의 외피를 쓰고 있으니 잘 어울리고 바람직한 도입부다.
초반에 매력적인 설정들이 많다. 일단 가지이는 짐작 가능한 ‘팜므 파탈’ 형의 캐릭터가 아니다. 범죄자의 매력에 서서히 빠져들어 결국 그 영향력에 휘둘리는 주인공의 권력 구조는 ≪양들의 침묵≫에서 보이는 ‘한니발 렉터’와 ‘클라리스 스털링’의 구도를 닮았다. 음식을 매개로 캐릭터를 설명하려는 취지도 신선하다. 젠더 감수성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요즘의 소설들과는 달리, 이 작품엔 인물들의 외모에 대해 작가는 직접적인 묘사를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맛이 달랐고 용기 있어 보였다.

작품을 통해 작가가 던지는 질문도 꽤 독보적이다. ‘여성성’은 여자들의 약점일까, 무기일까. ‘사랑받음’, ‘받아들여짐’은 구속일까, 자유일까. 사랑을 얻는다는 것은 성취인 동시에 또 다른 굴레, 속박은 아닐까. 음식과 섹스를 넘나들며 자기 몸의 권리, 인간관계의 역학과 통찰을 담아내려 한 시도 역시 귀 기울일만 했다.

하지만 산만하다. 그리고 장황하다.
뒤로 갈수록 초점을 잃고 군더더기를 덧붙이며 우왕좌왕한다. 관념적인 주제를 실체화 하려는 시도는 결국 실패한 것처럼 읽힌다. 후반부로 갈수록 집중도가 떨어지더니 결론은 다소 성급하다.
재료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많은 분량(거의 600쪽에 육박)이 필요했었나, 하는 의문이 남는다. 가지들을 쳐내고 절반 정도의 길이면 딱 적당했을 것 같다.

사족.

일본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했다.
실제 사건 개요는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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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어린 아이가 울고 있다 - 상처 입은 내면아이와 화해하는 치유의 심리학
니콜 르페라 지음, 이미정 옮김, 유은정 감수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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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 그대로 어린시절 트라우마에 대해 고찰한다.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나의 성격, 타인과의 관계에서 두드러지는 태도, 취향, 관점 등, ‘지금의 나’는 과거의 무엇(대개 부정적인 경험)에 막대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이다.

‘내 안의 울고 있는 어린아이’라는 제목이 참 슬프다. 그 어린아이는 물론 나이고, 어떤 여정을 따라 그 아이를 위로하고 과거를 받아들이고 모종의 상처를 준 사람을 이해하고 그와 화해함으로서 지금의 나를 치유한다는 생각만으로 벌써 한결 나아진 기분이 든다.

‘에고(ego)’나 ‘슈퍼-에고(super-ego)’를 다룬 책들과 주제 면에서 일맥상통하는 내용이 많다. 지금의 나, 타인이 보는 나, 겉으로 드러난 나는 트라우마에 대한 방어기제로 필요에 따른 가면을 쓴 ‘사회적인 나’에 불과하다. ‘진정한 나’는 나조차 알지 못 한다. 탐구하여 알아내야 할 미지의 영역이다. 이게 왜 중요한가. 불행과 타인과의 갈등은 대부분 나를 알지 못 함에서 온다. 나의 본질과 내가 아는 나, 남들이 아는 나, 나로 착각하는 나와의 거리감에서 오는 불일치감은 삶의 많은 문제들을 야기한다. 그러므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기만적인 외피를 모두 걷어내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울고 있는 유년 시절의 나를 만나 위로를 건네고 화해하고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게 쉬운 일일까. 어린 시절의 상처는 대부분 가족(특히 엄마)이 제공하는 경우가 많고, 용서를 하려면 그에 앞서 그들의 가해를 인정해야 하는데 가족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우리 가족이 내게 그럴 리 없어) 또한 표면에 굳어진 외피는 너무나 단단히 밀착되어 있어서 쉽게 깨지거나 벗어던질 수가 없다.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성격이 단지 패턴화 된 방어기제적인 행동의 총체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닌가, 요즘 유행하는 ‘성격 유형’이란 게 고작 누군가의 패턴을 범주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닌가. 과연 성격이란 단어가 그저 행동과 반응의 패턴 이상의 의미가 있을까. 자신의 성격을 알게 된 후, 그것에 맞춰 행동이나 태도를 수정하는 경우는 없을까.

이 책의 성격은 다양하다. 기본적으로 과학(심리학)에 많은 부분 의지하면서도 ‘자기 계발’의 성격을 지닌 워크북처럼 보이기도 하고, 저자는 때때로 영적 지도자(spiritual movement leader) 같은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취지도 좋고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기대 이상의(난 무엇을 기대했던가) 만족감은 얻지 못 했다. 뭔가 말하다 만 느낌,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느낌. 이런 감상은 물론 나의 배경 지식이 짧아서일 것이다. 다소 어려워서 이 책을 완벽히 소화한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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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자들 ㅣ 스토리콜렉터 82
아나 그루에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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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덴마크 해안가에 위치한 광고대행사 건물 안에서 한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건물의 야간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다는 직업 외에 피해자의 신원 외엔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는다. 국적도, 이름도 나이도, 거주지도. 그야 말로 ‘이름 없는 여자’인 셈.
광고대행사 간부인 ‘소메르달’은(현장 내부 사정을 잘 안다는 이유로) 친구이면서 해당 지역 경찰인 ‘토르프’와 공조하여 수사에 착수한다.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도입부를 지나고 두 가지 의문이 제시된다. 모두가 퇴근하고 빈 사무실에서 일개 청소부를 살해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리고 죽임을 당한 여자는 어떤 여자였을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여자의 신원이 하나 하나 밝혀지는데 작가는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것보다 그림자처럼 살아야 했던 피해자의 주변 상황들에 좀 더 집중하며, 삶(크게는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집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의 조명한다.

작가는 법이라는 테두리 밖에 존재하는 이들을 무대에 세운다. 이들을 향한 착취, 특히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드러내며 법 제도에 의문을 던진다. 동시에 선과 악은 그 경계가 분명한지, 선의(善意)가 단순히 그것뿐이지 않을 때, 즉 모종의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선의를 선의라고 할 수 있는지, 작가는 인간성에 내재된 결함과 함정을 고발한다.

덴마크 산(産) 미스터리이다. 세계적인 복지 국가로 이름 난 나라에서 이런 소설이 발표된다는 사실이 무척 고무적이다. 어떤 시스템에도 허점은 있나 보다. 이게 가능한가 싶지만,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단체에서 일어나는 횡령 사건이 종종 보도되는 현실을 생각하면, 덴마크든 한국이든 죄 짓고 사는 건 똑같구나, 생각이 든다. (설마, 덴마크라고 도둑이 없겠어) 범죄를 고발하려는 것 이상으로 자꾸 비뚤어져 가는 사회에 일침을 가하려는 의도가 더 크게 보인다. 이야기에 추진력과 힘이 느껴진다.

인물들이 굉장히 많은데 하나하나 잘 살렸다. 인간적인 모습과 고유의 성격을 부여받은 인물들 을 하나같이 좋은 놈, 나쁜 놈으로 구분하기가 꽤 어려운데, 이들 주위엔 선과 악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선도 없고 절대적인 악도 없는, 상황과 제 편의에 따라 사려 깊은 배려와 연민을 보이다가 한편으론 사익을 추구하는, 이런 게 인간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착한 사마리아 인’은 오로지 성경에만 등장하는 인물은 아닐까. 인물 각각의 이기심과 악의로 완성되는 이야기는, 그래서인지 하나의 거대한 모자이크 화(畵)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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