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 - 끝없는 밤
손보미 외 지음 / 북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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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 작가의 대상수상작과 자선작 한 편, 우수상을 받은 다른 작가의 다섯 작품, 그리고 작년 대상 수상자인 ‘안보윤’ 작가의 자선작 한 편, 모두 8편이 실려 있다. 구성이 알차다.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혹은 편집 앨범을 듣는 기분이랄까.
여러 작가들이 참여한 작품집을 읽는 것과 오로지 한 작가의 작품들로 구성된 작품집을 읽는 것엔 차이가 있다. 여러 작가들을 만나는 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으나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깊이 알기엔 한계가 있다. 한 작가의 작품들을 통해 그 사람을 알게 되는 건 나와 다른 사상, 새로운 인물들을 만나 경험하며 서로 다른 목적으로 내 밖에 존재하는 무수한 세계를 여행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수상작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장 좋았던 작품은 ‘문지혁’의 단편과 ‘성해나’의 단편이다.

작가 자신의 해외 체류 경험이 독특하게 활용된 <허리케인 나이트>는 주제면에서 영화 ≪기생충≫과 ‘휴 월폴(Hugh Walpole)’의 단편 <은가면(the Silver Mask)>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가난하다고 언제나 선한 것은 아니고 부자라고 언제나 사악한 것은 아니다. 이런 편견은 예전 사회주의에서 그들의 프로파간다를 강화하기 위한 슬로건에 악용됐다.
우리의 편견에, 부유함은 느슨하지만 확실하게 ‘악함’과 연관된다. 부유함은 권력이며 이 시대의 권력은 보통 편력으로 악용되리란, 반대로 솔직하고 선한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리란(적어도 부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사회에 만연해 보인다. 가난하지만 착실한 인물과 이기적이고 꽤 자주 사악한 부자 인물의 대립 구도는 오늘날 대중 매체에서 흔히 사용하는 갈등 구조다. 사람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인물이 돈 많고 성격 더럽고 사악한 것보다 가난하지만 밝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인물이길 바라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런 클리셰, 혹은 편향적 사고에 매스 미디어에 책임을 묻는 건 무의미하다. 이 작품은 인간 사고의 맹점을 드러내어 독자들을 움찔하게 만든다.

<혼모노>는 ‘자신 되기’에 관한 이야기로 읽힌다. 작가는 우리의 ‘무교(武校)’적 장치를 활용해 작품을 재미있게 풀어낸다.
평생 제 몸에 깃든 신(神) 덕에 잘 살아온 ‘나’는 신력(神力)이 쇠해지면서 위기를 겪는다. 어린 나이에 신통한 신력을 발휘하면서 이웃이 된 ‘신애기’의 등장은 그의 경쟁심을 부추긴다.
신에게 몸을 맡긴다는 것은 자신을 지운다는 것이다. 평생 몸주(-主)의 출구 역할을 하고 시종 노릇을 하며 개인적인 자유에도 일상적으로 제약을 받아온 주인공이 밥벌이를 잃는다는 건 ‘불행’일 테지만, 어쩌면 비로소 제 모습을 찾고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다는 건 ‘행’의 기회일 수도 있다. 신력이 사라진 몸으로 피를 철철 흘리며 굿을 하는 나’의 엔딩은 기괴하고 민망하지만 거의 황홀경에 이른 자축연처럼 보인다.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283쪽)’이라는 문장은 진짜 내가 되기 위해 신의 하수인 노릇을 버려야 한다는 의식의 발로이다. 신애기를 향해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256쪽)’던 ‘나’의 조소는 엔딩에 이르면 가면을 쓰고 자신이 아닌 척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가식을 비웃는다(265쪽).

<담담>과 <그 개와 혁명>은 (개인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했던 작품이었다.

‘안윤’ 작가는 긴 삶의 한 순간을 무작위로 포착한 듯 시종일관 제목처럼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렇지만 감정은 깊고 인물들의 사고는 날카로우며 로맨틱한 관계를 내세우면서도 꾸준히 냉정하고 관조적인 시선을 유지한다.
사실 작품 전체에 깃든 거리감은 작가가 아닌 인물들 탓이다. 그들은 이미 절절한 사랑을 경험했고 그것을 잃었을 때의 고통을 알면서도 다시 그걸 원한다. 왜? 아프면 다시 안 하는 게 맞지 않나. 그렇지 않다. 이들은 사랑이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살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소중하고 귀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앞에 섰을 때의 태도는 예전과 많이 다르다. 불길 앞에 나방떼처럼 달려든 게 과거의 사랑이었다면, 지금은 그것이 주는 온기와 편안한 안정감만으로 이들은 충분하다. 사랑에 대한 기대도 있고 상대방과 자신이 그릴 그림도 분명 있겠지만 이들은 함부로 요구하거나 예측하지 않는다.
두 인물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반면 그 문장은 아주 뜨겁다. 이 작품이 내 감정을 자극한 건 그런 성숙한 사랑이 매우 요원하기 때문에, ‘아픈 만큼 성숙해지기 위한’ 연륜을 아직 갖추지 못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배경으로 한 바탕 난장판을 그린 <그 개와 혁명>은 아버지처럼 혁명을 도모한 딸의 이야기다.
남자 형제가 없음으로 사촌 형제를 상주로 세우자는 할머니의 말을 거스르고 아버지의 유언대로 장례식장에 애견을 데려옴으로, 화자는 과거 운동권이었던 부모의 궤적을 따른다.
부모 세대의 혁명(운동)이 소위 ‘대의’를 위한 정치적인 것이었다면 이 작품 속 수민의 혁명은 어떨까. 오직 남성이 상주 자격이 있다는 ‘관습’에 반기를 들고, 장례식장에 동물을 데려올 수 없다는 암묵적인(비성문화된) 법칙을 깨는 것 역시 넓게 보면 정치적인 일임을(공여사, 자중하시오. 우리의 적은 제도잖아. 350쪽), 아버지를 사랑했던 수민이 그의 유언을 따르고 뜻을 받드는 모습을 통해 우리의 소소한 일상도 충분히 정치적일 수 있다고 작가는 주장한다.
또한 이 작품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대하는 방식, 슬픔이란 감정의 정체(나의 슬픔은 나에 대한 것인가 고인에 대한 것인가), 애도의 방법(이 애도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등, 죽음 전반에 걸친 고찰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곧잘 슬픔과 연민을 착각한다. 그리고 순수한 슬픔과 후회, 미련 같은 감정을 혼동한다. 죽음으로 인한 이별이 남긴 게 순수한 슬픔이라면 언젠가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미련과 후회 같은 감정이 섞여 있다면 그것을 극복하기란 좀처럼 어렵다. 엄청난 시간이 흘러도 그 어떤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련과 후회를 내려놓으려면, 당시의 나를 용서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사람들이 슬픔을 두고 어쩔 줄 모르는 이유가 대부분 이것 때문인 듯하다. 우리들에게 가장 어려운 게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다. 인색할 정도로 그런 것 같다.
결국 내가 가여워 운다. 나를 애도하고 나를 걱정한다. 순수한 슬픔이 아니다. 2년 전, 어머니를 여의었을 때의 슬픔(지금도 여전한)을 생각하면 그렇다. 난 어머니를 떠나보냈으면서도, 이별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음에도, 나 자신을 아직 용서하지 못한 것 같다.

작년 수상자인 ‘안보윤’ 작가의 <그 날의 정모>는 자폐의, 혹은 정신적으로 허약한 아들을 둔 가정의 고단함을 세밀화처럼 보여준다.
이 작품은 꽤 가혹해 보이는데 서투른 위로조차 시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괜찮아질 거란 대책 없는 희망을 주는 대신 작가가 취하는 태도는 대체로 ‘가차 없음’이다. 우리는 대개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대책 없는 위로나 근거 없는 희망을 전하는 경우가 많다. 그게 쉽고 안전한 방법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신 가차 없는 현실을 마주하도록 돕는 게 오히려 효과적일 수도 있다. 약효는 한정적이지만 고통은 지속적이다. 고통에 익숙해지도록 돕는 게 잔인한 것처럼 보여도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은 것 같다.
이야기의 최대 ‘빌런’으로 등장하는 할머니는 화자(정모의 미성년자 누나)에게 ‘정모한테서 평생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네 년 말년이 나보다 나을 것 같느냐(384쪽)’고, 그들 가족을 지탱해주는 건 ‘가당찮은 가족애(383쪽)’라고 악담을 퍼붓는다. 저주처럼 들리지만 솔직한 사실이다. 정모의 상태가 말끔히 나아질 일은 없을 테고 그의 평생, 누군가, 아마도 가족, 그것도 부모, 아니면(그들이 죽고 나면) 형제가 그 곁을 지키고 온 시간을 돌봄 노동에 쏟아부어야 할 테니까. 하지만 ‘가족애’라는 건 그들이 잃지 말아야 할 귀중한 가치이다. 그 동아줄마저 없으면 그들은 결국 무너지고 만다. 그것이 아직 건재함을 인정한 할머니의 말은 위로로 여길 만하다. ‘사랑’이라는 말이 고리타분하고 케케묵은 농담처럼 들릴지언정 그건 진실을 품는다고 믿는다.

‘서장원’ 작가의 <리틀 프라이드>는 제목처럼 노골적인 주제의식이 흐른다. 지나치게 자신만만하고 어딘지 강요하는 듯한, 선뜻 동의할 수 없어 감정적으로 반문만 하게 된, 그런 작품이었다. 작가의 작품집,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의 감상이 되살아났는데, ‘좋아하지 않음’과 ‘혐오’를 같은 맥락에서 다루려는 작가의 태도를, 나로서는 쉽게 긍정할 수 없었다. ‘정치적 올바름’에 천착하는 작가의 고집은 가치 있지만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요령이 필요해 보인다. 이야기를 푸는 솜씨는 전작들보다 한결 나아진 것처럼 보인다.

대상작인 ‘손보미’ 작가의 <끝없는 밤>과 작가의 자선작 <천생연분>은 아무리 읽어도 의미와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두 작품 모두, 현재의 어떤 사건 와중에 과거 기억의 실마리를 데려오는 구성이었는데, 이런 저런 사건들만 많을 뿐, 과거에도 많은 일이 있었고 현 상황에도 많은 일이 긴박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우선 첫째로 내가 고급 독자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달았고, 그 다음으로 작가 탓을 하게 됐는데, 탓이라기 보다, 아, 이 작가는 내 스타일이 아니구나, 이 단편들을 다시 읽거나, 다른 작품을 찾게 되지는 않겠구나, 하는 슬픈 예감을 갖게 된 정도랄까. 이 리뷰를 쓰기 위해 두 작품을 다시 읽으려고 벼르고 있었으나, 굳이, 억지로, 다른 읽을 책도 쌓여 있고, 다른 궁금한 작가들이 많으므로 보류하기로 했다. 보류라기 보다 포기에 가깝지만. 이 리뷰에 정작 대상수상작가의 작품을 다루지 않은 건 아무래도 찝찝한 일이다. 책에 죄를 지은 느낌이랄까, 뭐 싸고 안 닦은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족도가 꽤 높았던 책이었다. 여기서 처음 만난 문지혁, 안윤, 예소연 작가들은 더 궁금해서 다른 작품들을 준비해 놓았다(문지혁의 장편 ≪P의 도시≫, 안윤의 작품집 ≪방어가 제철≫, 예소연의 작품집 ≪사랑과 결함≫). 언제 읽게 될지는 모르지만.
성해나와 안보윤 작가는 예전에 꽤 좋게 읽었었고. 특히 성해나의 작품집 ≪빛을 걷으면 빛≫은 아주 좋았던 걸로 기억된다. 내공이 느껴졌달까.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예사롭지 않았다. 안보윤 작가는 단편집(≪밤은 내가 가질게https://soulflower71.tistory.com/536≫)은 좋았으나 장편(≪밤의 행방https://soulflower71.tistory.com/541≫)은 기대에 못 미쳤다. 이런 식으로 독서의 폭을 넓힐 수 있게 힌트를 준다는 것. 이게 바로 이런 수상집의 가장 큰 미덕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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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시계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7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황해선 옮김 / 해문출판사 / 199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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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다시 읽기, 스무 번째.

속기 타이피스트인 ‘셰일라 웨브’는 고객의 요청으로 그 집을 방문한다. 하지만 빈 집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중년 남자의 시체와 4시 10분을 가리키고 있는 네 개의 시계. 알고 보니 그 집의 주인인 ‘페브마쉬 양’은 타이피스트를 부른 적이 없고 현장의 시계도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주장한다. 죽은 남자는 신원불명이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시계들 중 하나가 현장에서 사라지고 얼마 후, 두 번째 살인이 터진다.

도입 부분이 매력적이다. 첫 장을 열자마자 독자들은 ‘어마무시’한 사건에 직면하는데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한둘이 아니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다. 게다가 그 연극적인 무대라니. 지나치게 과장된 면이 없지 않으나, ‘후던잇(Whodunit)’ 장르의 성격을 고려하면 큰 흠은 아니다.
미스터리 장르의 미덕은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다. 추리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가학적인 고통, 혹은 즐거움을 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의 도입부는 모범적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면 크고 작은 문제가 서서히 드러난다. 플롯은 재활용이고 ‘안락의자 탐정(armchair detective)’을 자처하는 ‘포와로’의 추리는 기계적이다. 작가의 특기였던 ‘로맨틱 미스터리’조차 수줍음이 사라져 억지스럽고 민망하다. 스파이 스릴러 장르와 전통적인 후던잇 장르를 섞어놓은 작가의 시도는 서로 삐걱거려 다소 황당한 결말로 이끈다.

사실 자신의 기존 작품에서 플롯을 재활용해 환골탈태한 작품으로 (새 작품인 척) 내놓는 건 작가의 장기이고 결과 또한 대부분 훌륭하니 (크리스티의 작품에 익숙하다면) 독창성 운운하며 트집 잡는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스파이 스릴러와 후던잇의 혼용 또한 작가가 꽤 자주 사용한 방법인데, 이 경우에 있어서 결과는 ‘케바케’다. 어떤 작품은 괜찮고 어떤 작품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후자인데 두 장르가 따로 논다. 지극히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범죄는 영국 내의 ‘공산주의자’를 고발하려는 의도와 잘 붙지 않는다. 목적과 성격이 전혀 다른 두 플롯이 한 작품 안에서 각자 고유한 지면을 차지하면서 적절히 뒤섞이려면 공통분모(여기서는 동기와 기회 면에서)가 있어 서로 돕거나 반목해야 한다. 그래야 서로 상관이 있는 모양새가 나와 작가의 의도가 효과를 발휘한다. 그런데 지금은 살인범도 그렇고 포와로도 그렇고 지나치게 운(어쩌면 우연)에 의존하고 있다. 어쩌다 얻어걸린다고나 할까.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가 거의 말년에 완성한 작품이다(63년 作. 이로부터 10년 후, 작가가 마지막으로 쓴 소설, ≪운명의 문https://soulflower71.tistory.com/407≫이 출판된다). 작가가 60년대에 발표한 작품들을 보면 사건의 ‘불가사의함’이 특히 두드러지는데, 이 작품은 그런 특징에서 다소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인간의 양면성, 사건보다는 캐릭터에 포커스를 두어 작가가 여전히 ‘인간’이라는 주제에 천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소’의 대립이 한창이었던 60년대의 작품이니, 스파이, 간첩 운운하는 이런 이야기가 가능했을 것이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의 세대가 이 작품을 읽는다면 주석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 작품에도 당시의 소련에 망명하려는 인물이 나오는데, 적지 않은 작품에서 공산주의를 적대시했던 걸로 미루어 작가가 보수적이었다고 짐작해도 될까(여러 평론가들이 크리스티를 매우 보수적인 사람으로 여긴다). 하지만 당시엔 이쪽 세계에서라면 당연한 일이지 않았나. 오늘날 스파이 스릴러를 쓰려는 작가들은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할까. 어떤 인물이 등장하고 어떤 갈등을 엮으며 어떤 싸움을 할까. 과거의 스파이 스릴러가 ‘소련 팔기’가 주종목이었다면, 오늘날의 스파이 스릴러는 새로운 세대의 독자들을 위해, 문학으로서 어떤 덕목을 갖춰야 할까. 한 장르 안에서도 문학이 시대에 맞춰 다양한 모습으로 변태되는 걸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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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키스의 말 - 2024 제18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배수아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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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이효석 문학상 수상집과 세 작품이나 겹치네요. 무려 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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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비밀 강령회
사라 페너 지음, 이미정 옮김 / 하빌리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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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sense.
이런 책 읽으면 화난다.
출판은 어떻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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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4-10-10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글 읽으실 지 모르지만, 영꽃님 리뷰 팬입니다~.

영꽃 2024-10-11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런던 비밀 강령회
사라 페너 지음, 이미정 옮김 / 하빌리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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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8세기 말 영국. 심령 사업으로 유명한 ‘런던 강령술 협회’의 수장 ‘볼크너’가 살해당하자 유럽 전역에 명성이 자자한 영매(靈媒, a Medium) ‘보델린’이 파리에서 영국으로 건너온다. 보델린의 제자 ‘레나’도 함께 오는데, 볼크너가 살해당한 날, 레나의 동생 ‘에비’ 역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됐다. 두 여자는 범인을 찾기 위해 강령회를 계획한다.

책을 읽고 화가 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지극히 주관적으로) 정말 엉망이기 때문이다. 이 책도 그렇다.

이 책은 그냥 한 마디로 못 썼다. 재미가 있고 없고 지루하고, 이런 문제가 아니다. 그냥 못 쓴 거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거기다가 길기까지 해서(본문만 거의 450쪽) 사람 미친다.

일단 아이디어 자체는 괜찮다.
심령물, 오컬트(occult), 사후 세계, 이런 것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마음이 동할 만하다. 거기에 페미니즘 서사에 퀴어 서사까지 보태져 풍부한 이야기를 기대하게 한다.
빅토리아 시대 말기의 영국을 배경으로, 여성들에게 배타적인 클럽을 무대로 두 영매가 남자들의 범죄를 까발리고 응징하는 통쾌한 서사를 기대할 만도 하지 않은가.
이야기 자체도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이 작품은 초현실에 대한 긍정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데(정통은 아니지만 사이비도 아닌) 그런 무리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거짓, 인간의 나약함을 악용하여 돈을 벌고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악의 무리를 고발하려는 취지도 좋아 보인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냥 못 썼다. 기본이 안 되어 있다. 말이 안 된다.

우선 레나의 동기가 이해 안 간다. 레나는 과학의 편에 있는,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동생의 복수를 위해 제일 먼저 할 일은 경찰 수사가 어떻게 진행됐고 마무리됐는지,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은 없는지, 이런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수단에 매달리지 죽은 동생의 영혼을 만나려고 영매에게 달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영매의 제자를 자처하다니.
이런 동기가 괜찮아 보이는가? 우연히, 미처 깨닫지 못한 숨은 능력을 발견하고 뛰어드는 게 아닌데? 레나는 그러면서 계속 심령의 세계를 의심한다. 대체 뭐 하자는 건가.

그리고 설사, 작가가 심령이나 영혼의 존재를 긍정했다 치더라도, 영혼의 도움으로 범죄를 해결하는 게 18세기 영국에선 흔한 일이라 치더라도, 독자들에게 그걸 믿으라고, 사건과 갈등의 해결이라고 들이밀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희생자의 영혼이 나와 정답을 알려주는 이 작품의 엔딩을 봐라. ≪장화 홍련전≫이 따로 없다. 이럴 거면 바로 강령회를 해버리지 400쪽이 넘는 분량이 왜 필요했나. 하는 일도 거의 없고 그조차 영혼이 알아서 다 알려주는데 주인공은 왜 필요한가.

강령(降靈), 소위 죽은 사람의 영혼을 받아들이고 접촉하는 행위는 책을 읽고 공부를 한다고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물론 기술적인 측면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 능력은 ‘타고 난다’.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우리나라의 무속신앙(무교)을 보라. ‘신내림’의 과정은 무당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시험 공부하듯 책을 파고든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주역을 공부해도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고작 사주풀이 정도다. 그런데 레나는 공부를 해서 영매가 되려 한다. 당시엔 영매 자격증이라도 있었나? 영매 되기가 제일 쉬웠어요. 뭐 이런 건가?

심령, 영혼, 접신(빙의), 이런 걸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다. 믿는 사람들도 그것에 대해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미스터리’다. ‘행위와 근거’의 장르다. 과학과 논리로 접근해야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걸 아예 외면한다. 경찰 수사에 대한 짧은 장면조차 나오지 않는다. 아주 짧게 언급되긴 하는데 아무 의미 없다.
그런 장면이 꼭 나와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절차와 단계가 있다. 소설과 이야기의 진행도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으면 비약이고 과장이다. 작가는 두 사람의 죽음에 어떤 의문이 있는지, 왜 살인인지, 주인공이 독자들과 함께 풀어야 할 문제는 무엇인지 정확히 밝혀야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런 기본 세팅조차 안 되어 있다. 작가는 거의 정보도 주지 않으면서 사이비, 돌팔이일지도 모르는 주인공을 그냥 쫓아가라고 요구한다. 이 정도면 막무가내다.

인물들은 모호한 동기에, 작가의(이야기의) 필요한 대로만 움직인다. 그게 무척 우습고 바보 같고 억지스러워 보인다. 예를 들면.
악당이 권총으로 두 여자를 위협하고 있는데, 두 여자는 바로 코앞에서 악당을 상대할 방법을 모의하고 있다. 악당이 한눈을 팔거나 자리를 비운 상황도 아니다. 그것도 모자라 (썸을 타는 관계의) 여자들은 그 와중에 에로틱한 기억을 더듬고 있다. 그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이쯤 되면 ‘개그콘서트’의 한 장면 아닌가.

두 여자의 로맨스는 어떤가? 로맨틱한가? 발정난 뭣처럼 보이지 않는가? 적절해 보이지도 않고 애틋해 보이지도 않고 아름다워 보이지도 않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통에 심지어 이야기 흐름을 툭툭 끊어놓기까지 한다. 잘 다뤘다면 여성 퀴어들의 이야기는 나름 잘 어울렸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불필요하고 어색하고 의미 없고 그냥 거추장스럽다.

이 작품은 그냥 서툴다. 호러와 미스터리, 두 장르의 충돌, 이런 거 따질 가치도 없다. 인물들의 동기도 모호하고 개연성도 없다. 장면들을 잘 분석해 보라. 말도 안 되고 어리석고 민망한 장면투성이다. 애초에 설정이 구멍투성이니 피할 수 없는 결과다. 미국 소설 출판 시장 상황이 어떤지 알 수도 없고 나랑 전혀 상관도 없지만, 이런 소설을 번역해서 내놓을 생각을 한 우리나라 출판 시장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작가가 의욕만 앞세웠다. 역사물을 기본으로 미스터리, 오컬트 호러, 고딕소설, 페미니즘에 퀴어 서사까지 작가가 욕심을 너무 부렸다. 보통 이런 건 장점이기 쉽지만 이 작품은 단점이다. 산만하고 중심이 없다. 작가가 자료조사나 공부를 많이 한 티는 난다. 그런데 어쩌라고? 결과가 이 모양인데. 더 쓰고 더 화내고 더 비웃을 것들이 많지만 이쯤에서 멈춘다. 이런 시간도 아깝다.

돈은 고사하고 내 시간은 어떻게 보상해줄 건데? 진짜 작가한테 메일이라도 쓰고 싶다. 근데 영어다. 대신 출판사에 항의라도 해야 할까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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