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공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60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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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 분이 무슨 일을 하시든,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시간이 나중에는 그쪽 분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될 거예요. 그쪽 분은 황무지라고 말씀하시지만, 나중에 그쪽 분이 기억하실 지금이라는 시간은 눈부시도록 정밀하게 채워질 거예요. 그럴 수밖에 없을 거예요. 아직 시작되기 전인 거 같아도, 이미 시작되어 있거든요. 아직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 같아도, 이미 뭔가 하고 있거든요. 답을 찾으러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뒤를 돌아보니까, , 답이 내 뒤에 있는 거예요. (41)

 

사는 게 힘들다는 거, 저도 알거든요. 그만큼 즐겁다는 것도 알고요. (93)

 

저는 스무 살인데요. 제가 세상에서 무슨 짓을 한 걸까요. 일이 이렇게 되도록 말예요?

그런 거 없어요.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앞으로 세상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할까.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세요. (110)

 

 

 

 

백 여 쪽이 겨우 넘는 짧은 이 소설은 아이와 함께 산책을 나온 스무 살의 여자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보잘 것 없는 물건을 파는 중년의 남자가 나누는 대화로 일관된다. 여자는 어느 부잣집에서 입주 도우미로 일하고 있고 남자는 집도 절도 없는, 매 끼니와 매일의 잠자리를 고민해야 하는 행상이다.

딱히 진행되는 이야기도 없고 여러 장소를 옮겨 다니지도 않고 긴 시간대를 아우르는 것도 아니다. 두 사람은 그저 앉아서 오후부터 해질녘까지 대화를 나눈다. 한 편의 연극 같달까.

두 사람의 대화는 끊임없이 흐른다. 다소 두서없기도, 자기 얘기만 하기도 하나. 논쟁은 없다. 토론에 가깝다. 서로를 향해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반론하는가 하면 양보하고 타협한다. 정체된 이야기에서 뭔가 약동한다.

남자는 제법 삶에 만족하는 것 같다. 큰 욕심도 없고 하루를 그저 넘기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반면 여자는 목표가 분명한 편이다. 여자에게 결혼은 구원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당장의 목표다. 토요일마다 가는 댄스홀은 기회의 장소다.

 

영화 유스(Youth, 2015)에서 한 인물은 삶에 대한 자세를 공포아니면 열정이라고 말한다.

물건을 팔기 위해 떠도는 걸 여행이라고 부르는 남자는 두려운 걸까.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다른 시도를 하지 않는 걸 공포때문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어딘가 있을 더 나은 삶을 원하고 추구하는 여자에겐 열정이 있는 걸까.

 

세상에 !’하고 등장함과 동시에 우리에게 부여되는 이라는 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그것을 저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생일을 축하하는 걸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우리의 권리일까, 아니면 아등바등 애를 써야 하는 과업일까. ‘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고들 하는 걸 보면 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걸 더 좋아한다. 스스로 제 목숨을 포기하려는 사람을 보면 적극적으로 뜯어말린다. 과거, ‘자살은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나쁘고 흉악한 이었다. 태어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을지언정, 계속 살아간다는 건 우리에게 일종의 의무인 셈인 거다.

 

그렇다면 이왕 사는 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잘 사는 게 최선일 텐데,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걸까.

 

여자와 남자가 주거니받거니 하는 말들은 결국 독자인 를 향한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데 문제는 나도 잘 모르겠는 거다.

두 사람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작가는 잘 알고 있을까.

아닌 것 같다. 결론도 없이 소설을 마친 걸 보면.

우리 다 같이 생각해 봅시다. 답은 없어요.”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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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의 죽음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18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명우 옮김 / 해문출판사 / 198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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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 에이미 레서런루이즈 레이드너부인의 보호와 치료를 요청받는다. 직업이 간호사라 치료까지는 이해해도 보호라는 말은 충분히 의아하다. 요청을 받아들인 레서런 간호사는 레이드너 부인을 본 첫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는다. 아름답고 지적인 레이드너 부인은 망상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

그렇게 이라크에서 활동하고 있는 프레드릭 레이드너박사가 이끄는 고고학 발굴단에 합류하게 된 레서런 간호사는 발굴단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긴장감을 눈치 채게 되고, 레이드너 부인의 첫 결혼에서 비롯된 그녀의 불행과 불안감의 정체를 알게 된다. 결국 밀실 상태의 숙소에서 레이드너 부인이 살해된 채 발견되고, 두 번째 살인이 이어진다.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던 작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잘 녹아 있다. 두 번째 남편이었던 맥스 말로원의 영향으로 이라크와 시리아 등지의 유적 발굴 현장에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참여했던 작가는 중동과 서아시아 지역을 무대로 하거나 고대 유적 발굴단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많이 써냈다. 죽음과의 약속(Appointment With Death), 그들은 바그다드에 왔다(They Came to Baghdad), 끝으로 죽음이 온다(Death Comes as the End)등의 추리소설은 물론이고 Come, Tell Me How You Live란 제목으로 유적 답사기 형식의 기행문을 애거서 크리스티 맬로원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한다(46).

 

이 작품은 그 시기의 경험이 녹아 있는 추리소설들 중에 가장 유명하고 성공적인 작품은 (아마도) 아닐 것이다. 해외 평론가나 미스터리 연구가들에 의하면 이 작품은 큰 주목을 끌지 못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다소 평가절하된 면이 없지 않다.

 

인기 캐릭터 에르큘 포와로가 등장하고 밀실이라는 범행 현장이 호기심을 사로잡는다. 다채로운 성격의 용의자들이 등장하고 작가는 그들에게 설득력 있는 범죄 동기를 주는 데 성공한다. 범죄 방식은 평범하지만 진실을 숨기는 방식은 교묘하다. 첫 번째 범죄가 나오기까지 진행되는 드라마는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들이 그렇듯) 사건의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 포석을 깔고 밑밥을 뿌리는 과정이므로 꼭 필요하다. 그렇다고 의무적으로 끼워 넣은 장면들은 아니다. 분위기를 조성하고 인물들의 감정을 드러내어 갈등이 고조되는 과정을 절묘하게 연출한다.

특히 기억에 대한 작가의 통찰은 얼마나 놀라운지. 작가가 인지심리학에 훤했을지는 차치하고 포와로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기억의 본질은 타인에 대한 큰 관심과 꾸준하고 세밀한 관찰을 통해 얻은 지혜로 보인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엔 작가 만의 무엇이 있다. 그걸 크리스티다움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작품엔 그런 것들이 거의 빠짐없이 들어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의 흠결을 굳이 찾자면 바로 그런 것에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너무나 크리스티다워서 오히려 그게 클리셰가 된달까.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주변 인물들의 시선을 활용하여 레이드너 부인을 표현하는 방식과 그 캐릭터 자체는 후에 나온 백주의 악마(Evil under the Sun)를 생각나게 한다. 범인의 동기만 본다면 거의 말년의 작품 복수의 여신(Nemesis)과 거의 똑같다. 동기만 보자면, 저게 현실로 가능해? 라고 의심을 품지만 감정적, 정서적으로는 충분히 공감이 간다. 이 작품의 결말에 깔리는 여운, 방점을 찍는 아련한 감정은 절대 이루지 못할 사랑, 함께 있어도 외롭고 쓸쓸한 사랑의 슬픔을 잘 대변한다. ‘모두가 다른 길을 가고 있다(259쪽)는 레서런 간호사의 생각처럼 타인은 영원한 타인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앞의 얘기로 돌아가서, 한 창작자의 개성과 특질을 드러내는 게 어떤 경우엔 장점이 되고 어떤 경우엔 단점이 되는가. 그 차이점을 고민하게 되는데 떠오르는 생각들이 참 재미있다.

개성과 특질, 그것뿐이면 작품은 헐벗은 허수아비 같다. 뼈대만 보일 뿐이니 허술한 구성에 단조로운 이야기, 플롯은 기계적이다. 그런 낭패를 피하려면 그 외의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런 관점으로 볼 때, 이 작품이 다소 부족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나중에 라디오 드라마, TV 드라마, 그래픽 노블 등으로 재탄생한다.

 

이 작품이 출판된 36년엔 ABC 살인사건(ABC Murders), 테이블 위의 카드(Cards on the Table)등이 발표되기도 했다. 30~40년대는 크리스티가 가장 왕성하게 창작하고 출판한 시기였다. 작가의 대표작이 그 시기에만 포진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중요한 작품들이 많이 발표됐다는 말은 맞는 말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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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싱턴의 유령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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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난 친구의 집을 봐주는 화자가 한밤중에 유령들을 목격하는 이야기인 <렉싱턴의 유령>은 일종의 괴담이다. 소위 유령 이야기로 알려진 다른 괴담들과는 차이가 있는데 유령은 그냥 유령일 뿐이라는 것. 그들에게 있음직한 대단한 사연이 소개되는 것도 아니고 혼이 빠질 정도로 비명을 지르는 주인공도 없다. 화자는 그저 유령들이 그들만의 시간을 갖도록 제 존재를 감춘다.

특이하다면 특이한 이 작품에서 서로에 대한 존중이 읽힌다. 그럴 필요가 없다면 굳이 코를 들이밀지 않는 타인과의 거리감을 이야기한 작품으로 읽었다.

 

<녹색 짐승> 역시 괴이한 존재가 등장한다. 땅 속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낸 녹색의 생명체는 주인공의 머릿속 생각을 읽는 능력을 가졌을 뿐, 악의라고는 전혀 없어 보인다. 남편이 일하러 나가고 텅 빈 집에서 무료한 시간을 지내고 있는 여자는 눈 앞의 괴물에게 구애를 받는데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았음에도 저주와 끔찍한 생각으로 그를 물리친다.

초록색의 괴물이라니. 그 외모만으로도 충분한 위협이었을까. 외모, 혹은 외양으로 말미암은 편견이 그릇된 판단을 하게 만들고 급기야 잔인한 행동을 하게 되는 인간 심리의 맹점을 그린 작품으로 읽었다.

 

<침묵>에는 누명을 쓰고 괴로워하는 인물을 통해 호도된 본질, 거짓이 유통되는 양상, 말초적인 자극을 우선시하는 (대중) 미디어의 함정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주인공이 겪은 소리 없는 폭력의 배후엔 집단이라는 익명의 가면을 쓴 개인의 히스테리가 얼핏 보인다. 제목인 침묵은 거짓에 대항하는 최선의 행동으로, 근거가 없거나 출처를 알 수 없는 온갖 정보가 범람하는 시대에 현명한 개인으로서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동(태도)에 대한 은유로 보인다.

 

<얼음사나이>은 우리나라 고전 설화인 선녀와 나무꾼의 모티프가 살짝 보인다. 자만한 나무꾼이 선녀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영영 헤어져 그리움과 슬픔에 빠졌다면, 이 작품의 주인공은 얼음사나이와 함께 그의 세계로 기꺼이 따라 나서며 외로움과 낯선 환경이 주는 두려움에 몸을 떤다.

서로 다른 환경의 두 사람이 극복할 수 없는 괴리감, 아무리 노력해도 서로에게 다다를 수 없다는 외로움, 두 사람이 함께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는 무엇가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자각에서 오는 인물의 좌절이 이야기의 후반을 지배한다.

 

고인들의 물건을 처분하면서(물건은 그 사람이 아니란다) 그들과 진정한 이별을 고하는(삶은 어떻게든 계속된다) 이야기, 라고 하기엔 단편 분량에 너무 방대한 사건을 우겨 넣은 듯한,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장황해진 <토니 다키타니>는 옷에 대한 집착이 비극으로 이어지는 헨리 제임스의 단편, <어느 낡은 옷에 관한 로맨스>와 닮은 구석이 있다.

 

그 외에, 순간의 실수로 소중한 친구의 죽음을 야기한 인물이 죄책감의 그늘을 벗어나는 <일곱 번째 남자>, 꿈꾸는 분위기, 솜사탕 같은 호흡, 선문답 버금가는 대화, 괜시리 무기력해 보이는 인물만 기억에 남는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등의 일곱 작품이 실려 있다.

 

막힘없이 술술 읽힌다. 절묘한 묘사, 아름다운 문장들이 눈에 더러 띈다. 하지만 이 사람, 뭐가 특별하지 싶다. 더 잘 알려면 더 읽어봐야 하나. 그런데 약간 멈칫한다. 뭔가 식상하다. 정서도 좀 올드하달까. 문체도 역시나(그렇다. 뭐뭐 했던 것이었다).

하루키 브랜드가 있는 것 같다. 이 작품집만 해도 작품마다 아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공통점이 있다. 물 먹은 솜 마냥 무거운 분위기, 뭔가 어깨가 축 처진 듯한 인물들, 책과 재즈에 대한 애호. 어떤 틀이 있는 것 같다. 그 자체가 작가의 개성이고 특질이겠지만, 글쎄.

 

이 작가를 처음 접한 게 30여 년 쯤 됐나. 동기한테 상실의 시대를 선물 받고 그 책이 나쁘지 않아서 다른 책(하드보일드 어쩌구 하는 제목)에 덤볐다가 포기했다. 그 이후로 읽은 기억은 전무하다. 집에 이 사람 책은 몇 권 있는데, 기회 닿을 때마다 읽어 보면 조금 가까이 갈 수 있으려나. 그런데 나도 꼭 좋아해야 하나. 여기저기서 추앙하듯 떠받드는 걸 많이 봐서 궁금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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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아이 외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24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진일상 옮김 / 책세상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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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콜하스>는 2013년, ‘매즈 미켈슨’ 주연으로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이라는 제목으로 공개된 영화의 원작이다. 영화를 볼 땐 단순히 복수극으로 보였는데, 소설로 읽으니 감상이 좀 다르다.
내 권리를 보호해주지 않는 나라에서는 머물고 싶지 않소. 발로 짓밟혀야 한다면 인간이기보다는 차라리 개가 되겠소.
주인공의 이 외침은 작품의 모든 것을 대변한다. 공권력이 더 이상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할 때, 정의 구현은 어떻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해 작가는 질문한다. 우리의 주인공이 선택한 방법은 사적인 복수다. 그럼에도 질문은 남았다. 그것은 정의로운가.
대부분, 복수하는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 등지에서 주인공이 복수를 하느라 행한 폭력에 대해서는 묵인한다. 별로 상관없는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재산을 잃거나 했을 텐데 그건 괜찮은 걸까.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처럼 보인다.

<O... 후작 부인>은 요즘에 발표됐다면 대단한 논란을 불러올 작품인데, 성폭력을 소재로 하기 때문이다. 작품이 쓰이고 발표된 1800년대엔 묵인됐을 가능성이 농후한 상황이지만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이 작품이 어떻게 읽힐지 상당히 궁금하다.
작품 외적으로 이 작품이 진실을 숨기고 독자들로 하여금 이야기를 끝까지 읽게 만드는 방법이 눈길을 끈다. 작가가 이 시대에 추리소설을 읽었을 리는 없고, 굉장히 독창적인 방법으로 진상을 숨기고 있는데, 이는 추리소설 장르에서 범인의 알리바이를 교묘하게 위장하거나 생략하는 방법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전개 역시 추리소설의 구조와 비슷하게 흘러가는 건 무척 재미있는 일이다.

<칠레의 지진>은 사형 집행을 앞둔 연인을 그리고 안타까워하는 수감자가 지진의 혼란을 틈타 탈출하여 연인을 만나지만 행복도 잠시, 죗값을 치르라는 대중의 고발에 위기에 처하는데 엉뚱하게도 다른 사람이 그 폭력에 희생된다는 이야기다.
재미있는 건 ‘알프레드 히치코크’ 감동의 주된 테마인 ‘오인된 남자(the Wrong Man)’가 엿보인다는 사실. 또한 종교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나름의 도덕성을 무기로 죗값을 치르기를 요구하며 마구잡이식 눈먼 폭력을 휘두르는 군중들은 ‘앙리 클루조’의 ≪까마귀(le Corbeau)≫, ‘히치코크’의 ≪하숙인(the Lodger)≫, ‘폴란스키’의 ≪세입자(the Tenant)≫ 등의 영화를 생각나게 한다.

위기에 처한 애인을 구하려다가 목숨을 잃는 여자의 이야기인 <산토 도밍고의 약혼>은 한 편의 멜로드라마로 읽힌다. 여인의 주검 앞에서 자살하는 남자의 모습은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희곡을 생각나게 한다.

아주 짧은 소품인 <로카르노의 거지 노파>는 어둡고 차가운 귀신 이야기다. 귀신은 친절에 대해선 보답하지 않고 불친절한 사람에게는 보복을 한다. 짧은 분량에 할 얘기만 하는데도 으스스한 감상은 남다르다.

파렴치한 양아들의 패륜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버려진 아이>는 막장 드라마 같다. 폭력의 상호성을 고발한 <미하헬 콜하스>나 일방적이고 무분별한 집단성, 익명의 가면을 앞세운 폭력을 고찰한 <칠레의 지진> 같은 작품들과 비교하면 느낌이 사뭇 다르다.
‘니콜로’가 양어머니에게 위협을 가하는 행동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단편, <유언장의 행방 (Wireless)>의 ‘찰스’와 거의 똑같다.

<성 세실리아 또는 음악의 힘>과 <결투>는 전설이나 구전 동화 같은 면이 강한데 선과 악의 극렬한 대립, 악이 패배하는 결말, 갈등 해소와 문제 해결 과정에서 개입되는 ‘성령’의 힘 등으로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 종교 영화나 ‘전설의 고향’ 같은 시리즈로 만듦 직하다.

영화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의 기억으로 읽기 시작한 책이다. 작가가 태어난 해가 1777년이고 주요 활동 시기가 1800년대라 문장이나 대화가 예스럽고 장황하고 지나치게 친절한 나머지 중언부언한다. 게다가 그 시대 독일 사람들 인명이 도대체 너무나 길고 어려워서 처음엔 적응하기가 힘들었지만 처음의 고비를 넘기면 읽는 데 무리가 없다. 무엇보다 이야기마다 매력이 있고 재미있다.

작가는 당시 주로 소설, 희곡 등을 발표했고 정기 간행물 발간인으로도 활동했지만 어느 하나 성공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연애에도 소질이 없었던지 평생 외롭게 살다가 드디어 만난 여자가 유부녀. 두 연인은 함께 자살로(당시 작가 나이 34세) 생을 마쳤다고.
작가는 근대에 이르러 겨우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최근에는 18세기 독일 문학의 기수로 추앙받는다고 한다.
작가의 희곡이 거의 대부분 번역되어 있고, 이 책엔 작가가 발표한 모든 단편이 실렸다고 하니 소장 가치도 좋다. 내가 읽은 ‘책세상’ 판은 절판이고, ‘창비’의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온 책이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수록작은 순서까지 똑같다. 번역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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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조금 남아 있을 때
서성란 지음 / 강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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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의 두 사람, 부부 관계를 화두로 한 두 작품, <완벽한 스테이크와 적양배추 요리>와 <봉희>는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삶의 지향점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환경도 다른 성인이 된 두 사람이 결혼이라는 제도로 한데 묶였을 때, 그 관계가 사랑을 기반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마냥 행복하기만 할까. 두 사람은 얼마나 오래 같이 살았든, 얼마나 깊은 사랑을 했든, 얼마나 많은 자손을 봤든, 나는 네가 아니고, 네가 될 수도 없고, 마찬가지로 너 역시 내가 아니고, 내가 될 수도 없듯이 서로에게 영원한 타인이지 않을까.

<완벽한 스테이크와 적양배추 요리>의 아내는 실직하여 방에 처박힌, 드럼 세트를 사고 싶은 욕구조차 충족하지 못하는 남편을 위해 완벽한 식사를 구상하고 요리하지만, 정작 그의 욕구나 고통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 그저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려고 할 뿐, 시모가 아들을 위해 준비해 보낸 음식마저도 귀찮아하며 방치한다. 완성된 완벽한 스테이크는 결국 여자의 입에 들어간다.
이 작품에서, 서로 보이지 않는 벽에 둘러싸인 부부 관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감정이 소외된 남편에게 다소 치우쳐져 있다면, <봉희>에서는 아내의 메마른 삶이 좀 더 두드러진다.

‘성중’의 적극적인 구애로 결혼한 ‘봉희’는 29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결심을 한다. 이 작품은 ‘권태’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는데, 남편에 대한 억누르기 어려운 혐오감(199쪽)과 불쾌하고 짜증스러운 감정(202쪽)엔 특별한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저 우연히 순간의 일탈을 경험하고(피아노 학원의 초록색 소파, 익명의 남자와 들어갔던 호프집) 숨어 있기 적당한 장소(205쪽, 도서관)를 찾아 나선다는 사실 뿐. 이후 봉희는 모든 의무에서 벗어나 얽매이지 않고 살고 싶은(207쪽) 욕구에 갈등하는데, 자서전을 쓰고자 하는 욕망은 자신의 삶을 오롯이 되짚어 보는 기회를 갖고자 하는 필요에 의한 것처럼 보인다. 봉희에게 자서전 쓰기는 거짓과 왜곡에서 자유로운(207쪽)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독자들은 성중 역시 봉희와 같은 마음이었음을 결말에 알게 되는데, 이로서 권태라는 감정을 딱히 설명하지 않았음에 면죄부를 제공한다.

<좋은 어머니들>은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다. 몇 개의 매듭을 꼬며 시작했다가 진행하면서 서서히 풀어 보이는 이야기엔 각박한 현실에서 엄마보다 ‘어미’가 되어야 했던 여자들의 애환과 고통, 슬픔이 녹진하게 흐른다.
작품이 주는 절절한 감정과는 달리, ‘좋은 어머니들’이란 제목엔 이중의 뉘앙스가 있는 것 같다. 혹자에 따라서는 화자의 어머니를 비롯한 ‘그곳’의 여자들을 비난할 여지도 충분해 보이기 때문인데, 이를 주제로 토론하는 것도 흥미진진할 것 같다. 이 작품집에 실린 작품들 중 가장 좋아했던, 인상 깊었던 작품이었다.

이어지는 세 작품, <내가 아직 조금 남아 있을 때>, <존, 로베르트, 은희>와 <이규호, 노먼 테일러>는 같은 주제를 변주한 작품들이다.
‘해외 입양’을 소재로 한다. 문화 수출로 콧대가 있는 대로 높아진 우리나라의 치부를 드러냈달까. 그것 이상으로 관련 시스템의 부재, 마구잡이식,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행정엔 기가 찬다. 몇 년 전 미디어를 통해 보도된 사건이라고 하니, 이후 관련 행정이 어떻게 수정되었는지 궁금하다.
세 작품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느낌이 다른 건, 인물과 배경, 관점을 각각 달리 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세 작품 중, 사건의 당사자가 주인공으로 나선 <이규호, 노먼 테일러>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위 세 작품은 현실 비판, 사회 고발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표제작인 <내가 아직 조금 남아 있을 때>는 문학작품으로서의 아름다움과 위엄을 갖추고 있다.

<회촌의 달>은 작가의 자기고백적인 성격이 강한 글이다. 창작자로서의 고뇌와 고단함, 더 이상의 생산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걱정과 두려움을 처음 방문한 장소가 주는 낯설음과 공포에 빗대어 잘 표현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하고 지극히 사적이어서 아무것도 아닌 이런 작품이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 건, 호기심과 긴장감으로 문장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작가의 역량 덕분인 것 같다.

<유채> 역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누구나 알 만한 작품이다. 강요된 희생과 침묵으로 거의 넋이 나간 부모의 모습을 작가는 조금도 서두름 없이, 비인간적일 정도로 차분하고 냉정하게 보여준다.
다소 평범한 시작과 혼란과 궁금증으로 독자들을 긴장시키며 이어지다가, 충격적인 마무리로 이어지는, 독자의 감정을 휘몰아치는 전개가 일품이다.
이 역시, 사회를 고발하고 현실을 비판하는 목적이 있는데, 이를 앞세우기보다 문학적인 완성도를 우선시한, 소재와 감정에 함몰되지 않은 작가의 거리감이 남다르다. 울부짖거나 외치는 대신 조곤조곤 낮은 목소리가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늘 쉬운 일은 아니다.

그 외에, 불법체류자를 통해 외국에 나가 소식도 없는 (입양한) 아들의 모습을 발견하며 그리워하는 부부를 그린 <피아라 식당의 손님>, 목사라는 신분을 위장한 출소자를 중심으로 이방인 혐오를 보여준 듯한 <O리의 목사>가 실렸다.
위 두 작품은 좀 어렵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읽게 된, 중소 출판사의 책이라 쉽게 눈에 띄지 않고 쉽게 손이 가지 않아 읽을 기회조차 갖지 못할 뻔했던 책이다. 출판사의 영향력, 폭력적인 마케팅, 이런 걸 떠나 독자들에게 알려질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도태되는 훌륭한 작가들이 얼마나 많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무릇 책을 좋아한다면, 주류 출판사 외의 책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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