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 좋은 방 열린책들 세계문학 28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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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 영국의 지방 귀족 자제인 루시가 노동자 계급의 조지를 우연히 만나 도움을 받으면서 사랑에 빠지지만, 세상의 눈초리와 계급에 대한 자의식으로 감정을 숨기고 외면하다가 영국에 돌아와서 그와 다시 만나 결국 사랑을 이루는 과정의 이야기다.

 

로맨틱한 읽을거리, 볼거리가 넘쳐나는 요즘에 이 이야기에 과연 어떤 매력이 있을까.

 

오래 전에 본 영화를 생각해보면 로맨틱한 감상이 전부였다. 당시에도 다소 식상한 이야기였으나 매력적인 배우들과 능숙한 연기, 고전적이면서 화려한 의상, 공들여 재현한 무대와 배경 같은 볼거리가 충분했으므로 볼 가치는 충분했다. 하지만 활자로 된 소설은 뭔가 더 있어야 한다. 모든 걸 머릿속에서 독자 스스로 그려내야 하니, 영화가 남긴 시각적 잔상이 있는 나 같지 않은 독자라면 조금 어렵지 않을까.

하지만 이 소설을 그저 구태의연한 로맨스로 치부하기엔 뭔가가 있다.

 

이 작품에 힘을 보태는 건 흥겹고 발랄한 분위기와 다소 엉뚱한 유머다. 작가의 작품들 중, 가장 행복하고 유쾌한 소설이라고 하는데, 읽은 게 고작 모리스정도이니 말을 더 보탤 수는 없지만 행복하고 유쾌한 소설이라는 데엔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작가의 이 초기작에서 제인 오스틴의 흔적을 발견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아웃사이더인 에머슨 부자(父子)’로 대변되는 진보적인 사상도 이 소설이 출판된 시기(1908)의 영국을 생각하면 꽤 새롭다. 귀족과 노동자, 보수와 진보, 직업과 취미, 생업이 아닌 소일거리로서의 노동, 계급 내 속물근성, 정략적이고 억압적인 결혼과 자유연애 등의 소재는 넓은 영지 소유하고 각종 고용인들을 둔 안락한 생활과 종교와 교육의 테두리에 안주한 이성애자 백인들이 다수였던 당시의 독자들에게 퍽 도발적이지 않았을까. 작가 스스로도 자신이 속한 계급에 머물면서 그것에 반()하는 여러 면모를 보이고 있으니, 이 작품이 주는 시대를 앞서가는 감각, 사화의 모순에 대한 신랄한 비판적 의식은 아마도 작가의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지 않을까.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 알겠지만.

 

로맨스의 주인공들보다 몇몇 조연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구시대적인 노처녀 이상은 아니었던 샬롯이나 몇 겹의 모습을 보이는 비브 목사같은 인물들은 입체적인, 생생한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다른 작가의 다른 작품 안에서라면 그다지 빛을 내지 못했을, 오로지 포스터만의 인물이라 더욱 특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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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결함
예소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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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언젠가 무슨 수상작 모음집에서 작가의 단편을 읽고 반했더랬다. 그래서 첫 소설집에 거는 기대가 컸다. 그래서 결과는 어땠을까.

 

전반적인 감상은 (몇 개의 작품들을 제외하고) 과연 이런 모양새의 작품들을 출판 시장에 내놓을 가치가 있는가, 였다.

일단 절반은 성공했다고 말하고 싶다. 열 개의 작품 중 네 편은 건졌다. 나머지 여섯 편은 엉망이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의견이다.

 

전체적으로 산만하고 난삽하다.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이끌기보다 작가 혼자 폭주하는 느낌이 많다. 작가가 기술적인 면에서 좀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감성으로만 쓰인 소설은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소설 작업은 감성과 더불어 이성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구체적이지 않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야기들은 읽다가 자주 막힌다. 이랬던가, 하면서 앞을 자주 확인해야 한다. 특히 인물들에 일관성이 없다. 작가 편의에 따라 인물 성격이 이랬다 저랬다 한다. 이런 건 습작에서나 보이는 실수인데 작가가 모르는 건지 냅다 지른다.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자기연민, 내지는 자기혐오에 빠져 있으면서 동시에 폭력적이다. 그것도 의미가 있는 폭력도 아니고 자기만족을 위한 이기적인 형태의 행동을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작가가 혹시 정서불안을 겪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 같지도 않은 의심을 했을 정도다.

 

<우리 철봉하자>는 주인공 석주의 폭주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석주는 오랜 기간 알고 지낸 친구도 아니고 동네 gym에서 단지 운동하다 만난 사이인 맹지의 삶을 넘겨짚고 자의로 해석하고 판단해서 사생활에 허락도 없이 개입하는 과정의 이야기다.

석주가 지금 민감한 상태인 건 예측 가능하다. 그녀는 인턴으로 일하는 회사에서 날선 검수로 위기에 몰려 있고 Ex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금전적인 피해도 입었다. ‘연애 포기자로 자인하는 석주는 피해망상에 시달려 과도하게 자신을 보호하려는 과잉방어의 의지를 보인다. 외부 세계를 적대시하는 걸로 모자라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행동을 보이는데, 그 대상이 바로 맹지이다.

석주는 맹지의 남자친구를 쓰레기라고 매도하고 있는데 그 근거가 없다. 맹지 남친에 대한 정보도 제대로 제시된 적 없다. ‘살 뺐으면 좋겠다고 말한 맹지 남친의 말은 맥락과 어조, 당시의 분위기를 살펴야 한다.

맹지의 반응만 삭제하거나, 달리 해서 본다면, 이 작품은 거의 사이코스릴러에 맞먹는다. 석주는 자신의 상처를 새롭게 사귄, 잘 알지도 못하는 맹지에게 투사하여 스스로 구원자가 되겠다는 오만을 부린다. 같이 살자며 논의도 허락도 없이 짐을 싸들고 함부로 타인의 영역에 침범하고 싫다는데도 막무가내로 환경을 바꾸려는 행동은 충분히 공포스럽다. 곧 맹지를 쥐고 흔들며 행동과 판단을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다.

석주의 폭주도 무시무시하지만 더 소름 끼치는 건 이런 폭력을 쾌활함, 유쾌함, 엉뚱함으로 포장하고 있는 작가의 태도다.

 

이런 자기중심적이고 폭력적인 인물은 마지막 작품인 <내가 머물던 자리>에서도 등장한다.

이 작품은 교묘한 거짓말로 돈을 빌리고 잠적한 정선이 숨어 있다는 곳으로 찾아 나서는 시연의 이야기인데, 작가는 시연의 의지와 행동을 인정머리 없고 이기적인 것으로, 거짓말에 연락도 없이 마냥 기다리게 만드는, 예의도 배려도 없는 태도로 일관한 정선을 자유롭고 깨어 있는 인물로 그린다.

이런 일방적이고 기울어진 사고는 작가가 배경으로 삼은 셰어 하우스대안 가정의 대비에서도 나타나는데, 작가가 그리는 셰어 하우스는 오로지 규칙과 계약으로 유지되는 비인간적인 공간으로, ‘--으로 이뤄진 대안 가정은 관용과 사랑으로 움직이는 인간적인 정이 충만한 공간으로 그린다. 이는 대학 기숙사와 친한 친구와 자취하는 상황을 비교하는 것과 비슷해 보이는데 비교할 대상이 전혀 아닌데도 작가는 전혀 거리낌이 없다.

 

작품집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혹은 차지하도록 의도했을) 세 작품,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는 연작이다. ‘희조미정이라는 어릴 적 기억을 공유한 두 인물이 주인공인, 소외되고 궁지에 몰린 아이가 존재감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일종의 성장기인데, 한 마디로 대략 난감, 총체적 난국이다.

주인공인 희조는 (역시나) 자기중심적이고 아전인수 격의 사고를 하는, 굉장히 이기적인 인물이다. 희조는 또한 죽음에 매혹되어 있고 그것을 동경한다. 누군가의 죽음을 유희의 도구로 삼고 겁을 줄 상대를 고르고 죽어가는 할머니를 희롱할 정도로 비겁하고 잔인하다. 자기연민과 자기혐오로 어설프게 엮은 외피를 뒤집어쓰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굉장히 공정한 척하면서 선택적 폭력을 휘두른다.

세 작품 내내 희조의 대척점에 있는 미정은 얄팍하기가 종잇장 같은 인물이다. 그녀의 폭력적인 성향은 딱히 원인이 없고 방향도 없다. 그냥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는 미치광이 망나니 같다. 인격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이야기 진행 상 필요한 역할을 하는 꼭두각시처럼 보인다.

작가가 이 세 작품을 애초부터 연작으로 만들 기획이 아니었다는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인물들에도 일관성이 없고 설정이 뒤엎어지는 경우도 있다. 작가의 쓸모에 의한, 소모적인 인물들이 편의대로 나왔다가 그냥 사라진다. 말을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건 최악이다. 작가도 작가지만 편집자의 책임도 큰 몫을 한다.

이런 요소들로 진행되는 이야기 세 편은 억지로 쓴 약을 삼키는 감상을 준다. 연민도 공감도 재미도 감동도 없다. 그냥 2이야기로 치부하기엔 읽어내는 데 들이는 노력이 상당하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작품에서는 인물들이 자신을 성찰할 기회를 외면하고 거부하는 모습조차 보인다. 굉장히 무의미하고 불온해 보이기까지 한다.

 

표제작인 <사랑과 결함> 역시 불편한 감상을 남긴다.

이 작품은 급조된 느낌이 강하다. 구성이 치밀하지 못하고 허술한데다 산만하고 장황하다. 군더더기, 이른바 TMI가 많은 반면, 정작 필요한 장면은 안 보여준다. 오롯이 설정과 인물들의 정서적 상태를 서술하는 것으로 끝내려는 작가의 창작 태도가 안쓰럽다. 설정, 이야기들의 중요 요소가 말이 되게 하려면 그 사이에 다리를 잘 놓아줘야 하는데, 이 작품은 그 다리들이 아예 없거나 사상누각이라 쉽게 허물린다. 이야기의 중요한 포인트들이 공감을 얻지 못하니 이야기가 허황되고 있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더 나쁜 건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 훤히 잘 알고 있다는 믿음이 생기질 않는다는 사실이다.

전체적으로 작가는 인물들을 한 단어로 정의하려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습작 시기의 버릇처럼 보이는데 심각하다. 그냥 착하다하고 끝낼 게 아니라 이 사람이 왜 착하다는 평판을 듣는지 보여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뻥이다. 이조차 일관성이 없어 이 말 했다가 저 말 한다. 인물들이 무슨 종이인형도 아니고 팔랑팔랑거린다. 인물들이 잘 안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투명인간이 되어 버린다. 주인공 성혜만 해도 극적인 설정으로 과장된 게 전부다. 자기연민과 자기혐오, 스스로에게 가학적인 모습은 앞의 희조와 닮아 있다.

 

<>은 한마디로 숨통을 틔워주는 작품이었다. 작품집 시작부터 내내 안개를 헤치고 시궁창을 뚫고 험난한 길을 걷다가 비로소 양지 바른 곳에 가닿은 느낌이랄까.

주인공인 해나는 계약직으로 어찌어찌 살아왔으나 삶에 큰 열의는 없는, 우연히 공모전에 당선되어 상금을 탔지만, 그 돈으로 자격이나 기술 취득에 투자하기 보다는 부동산에 운을 기대한다.

이혼한 가정의 삶에 쫓기는 엄마를 보고 자란 해나는 (마찬가지로) 자기연민에 빠져있으면서 대의를 따르려고 노력하는 아빠를 깔보고 의심하고 거부한다. 해나는 결말 즈음에 수로에 빠지는데, 그 사고를 아빠의 탓으로 돌리고, 결국엔 아빠가 대의의 세계에서 자신을 제외시킨다고 원망한다.

앞의 작품들에서 줄곧 보인 부정적인 사고를 지닌 인물이 이 작품에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해나라는 인물이 결국 반면교사의 각성을 촉구하는 덕이다. 이 작품이 주는 울림은 이솝 이야기에 나오는 늑대가 주는 그것과 비슷하다. 포도가 아직 익지 않아서, 시어서 먹을 가치도 없다는, 상대를 평가절하하여 자신의 면목을 세우려는 이기심.

이 작품은 또한 형식적으로도 좋게 보인다. 경제적이고 집약적인, 잘 쓰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 개와 혁명>은 나를 예소연이라는 작가에게 이끈 작품이었다. 이런저런 문학상도 많이 받고 여러 앤솔러지에 실린 작품기도 하니, 예소연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이 작품 역시 작가의 특기인 엉뚱함과 쾌활함으로 무장되어 있지만 결말이 주는 페이소스가 상당하다. 체제에 대한 대항, 관습과 전통의 전복을 노리는 이야기로서 젊은 세대의 치기가 읽힌다. 유쾌하고 도발적인 이야기로서 죽음을 소재로 장례식장을 무대로 하면서도 은은하고 암시적인 개그 코드로 달콤쌉싸름한, 고급스러운 감상이 일품이다. 우리는 무엇과 싸우고 있는가, 무엇을 쟁취하려 하는가, 하는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질문도 효과적이다.

 

활짝 열려 있는 결말이 무궁한 토론 거리를 제공해 줄 <분재><도블> 역시 경제적이고 모범적인 구성을 갖춘, 무척 맛있는작품이었다. 특히 인물들 간의 관계가 모호한 반면, 그들의 역할이 부각된 <분재>는 삶에 많은 것을 걷어내고 할 일을 그저 묵묵히 내해는 것이 최선의 삶이 아닐까, ‘살아 있음의 의미는 그저 살아간다는 것 이상의 다른 의미는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질문이 주는 정서적 떨림이 상당했다. 불필요한 무게를 덜어냄은 이어지는 <도블>에서도 반복되는 것으로 읽힌다.

 

후반의 몇 작품을 빼면 상당히 실망한 소설집이었다. 책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같은 작가가 썼다고는 도무지 믿기 어려울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소설은 진실을 가장한 거짓이다. 일말의 진실이 없다면 그냥 거짓인 거다. 거짓을 진실처럼 포장하기. 그게 소설을 쓰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능숙한 거짓말쟁이. 운명이 그렇다면 소설가들은 능란한 뻥쟁이가 되어야 한다. 허무맹랑한 거짓말에 독자들이 속을 리 없다. 좋은 거짓말일수록 교묘하고 기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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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는 언제나 검은 옷을 입는다
파올로 코녜티 지음, 최정윤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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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곧잘 여행에 비유되곤 한다. 익숙한 생활 반경을 벗어난 타지에서 마주하게 되는 모든 것은 새롭다. 주변의 풍광도 사람들도, 특히 매일의 익숙한 일상이 여행이라는 피상이 덧씌워지면 색다른 것이 되는 경험이 되는 것은 놀랍다. 여행의 참맛을 최대한 누리기 위해 나는 홀로 떠나는 여행을 더 좋아한다. 시끌벅적, 사람들에게 이름 난 곳이 아니면 더 좋다. 고요하고 낯선, 평범의 관성이 방해받지 않는 공간에서 혼자 누리는 시간은 오롯이 에게 집중하게 만든다. 감각은 예민해지고 상상력은 무한으로 나아간다. 잠깐 스칠 뿐인 사람들이 내게 남긴 흔적을 되새긴다. 낯선 곳에서 정작 나 자신은 스스로 물러서 무대의 조연이 된다. 스포트라이트의 바깥에서 주인공들의 삶을 살짝 엿보고 상상하며 다소 겸허해진다. 이런 느낌에 오만함이 없지는 않지만 나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 나를 알고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 나를 좋아하거나 나를 싫어하는, 혹은 내가 좋아하거나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고 관계에 대해 성찰할 수 있다는 건, 그것이 겨우 시늉에 그치더라도 귀한 경험이다.

 

언제부터인가 관계에 집착을 버리게 됐다. 떠날 사람은 어차피 떠나게 되어 있고, 내 삶에 들어올 사람은 용을 써서라도 기어이 그리 된다. 이런 안일함, 내지는 방관이 나이를 먹으면서 얻게 되는 이점일 수도 있겠다. 세상을 사는 법을 서서히 터득하고 있는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점점 더 게을러지고 자족하기 위해 머리를 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뭐가 됐든, 사는 게 이젠 좀 편안하다고 믿기 위해 무엇을 더 놓아야 할까. 아니면 더 움켜쥐어야 할까. 손에 더 넣는 것엔 한계가 있다. 채우는 것과 비우는 것의 목적과 효과가 비슷하다면, 차라리 비우는 편이 쉽지 않을까. 나이가 들면서 놓고 버리고 비우는 것에 더 익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언제부터 하게 됐을까. 죽음이 코앞인 순간에 후회나 미련, 증오나 원망 같은 걸로 나 자신을 괴롭히는 일만큼은 하고 싶지 않으니, 미리 용서하고 타협하고 몸무게 줄이듯 정신의 무게도 줄여 마지막 순간엔 가벼이 훨훨 날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며 든 생각을 죽 적고 보니, 책의 내용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어쩌다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다소 의기소침한 정서가 전반에 깔려 있지만 암울한 소설은 아니고, 인물들은 죽음보다 살아 있다는 것에 더 감사하고 있다. 전체로서의 소설은 주인공 소피아의 출생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열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연작 소설의 형태를 갖춘다. 성취의 이야기보다는 실패와 각성의 이야기가 많다. 삶에 대한 환상보다는 삶의 진실에 더 가까운 이야기들이다.

 

소피아가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이 재미있는데, 소피아가 등장하지만 정작 주인공이 따로 있는 작품들이 많다. 소피아의 부모, 고모, 친구나 동료들, 연인들, 아주 잠깐 인연을 맺는 사람 등등. 각각의 작품들에서 모두들 소피아의 삶을 다각적으로 보여주는 조연이면서 스스로의 삶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주연이 된다. 작가가 소피아를 중심으로 그려내는 관계의 네트워크는 모든 이는 각자의 삶에서의 주인공이라는 귀중한 교훈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바로 이것. 지금의 나를 만든 건, 지금껏 나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은 인연들의 결과라는 사실. 사람이 혼자 존재할 수 없다는 말엔 이런 진실 또한 숨어 있는 것 같다.



 

너는 네 인생의 스승이자 제자이다. 과거의 너에게 배우고 미래의 너에게 가르쳐준다. 보통 사람들은 그 안에서 길을 잃지만 너는 춤을 추며 다닌다. (187)

 

나는 길을 잃게 될까,

아니면 춤을 추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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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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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아일린은 잘 만들어진 캐릭터다. 소설 작법 책의 캐릭터 챕터에서 다룰 만한 인물이다.

동정도 가고 연민도 간다. 동시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한다. 어떤 부분에선 혐오에 가까운 감정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그녀가 살아온 인생이나 당장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 빨리 벗어나라고, 혹은 당장 그만두고 네 인생을 살라고 소리치고 싶어진다. 이 작품은 캐릭터 소설이면서 (약간 다른 의미의) 성장 소설로 읽힌다.

 

아일린은 시한폭탄 같은 인물이다. 이 소설이 갖는 재미와 매력의 80퍼센트는 모두 이 인물에게서 비롯된다. 작가는 아일린이란 인물을 도구로 독자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데, 이 인물을 무척 전략적으로 사용한다.

인물에게서 비롯된 긴장은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서도 이야기의 반이 지나도록 작품의 긴장은 유지된다. 중반을 지나며 매력적인 리베카란 인물이 등장하고 아일린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보이는 게 다일 것 같지 않은 리베카는 어느새 아일린의 일상에 빠질 수 없는 존재로 부각하고 이야기 저변에 흐르던 서스펜스가 서서히 증폭된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도무지 감이 오질 않는 거다. 그러다 거의 막바지에 어떤 사건이 빵! 터지는데 그 충격에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진다.

 

리베카의 무분별한 행동은 충격적이나 딱히 마땅한 동기가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왜 그래야 했을까. 별다른 이유 없이 작가는 중요한 패를 리베카에게 넘김으로써 아일린을 한낱 꼭두각시 조연으로 추락시킨다. 이어지는 결말은 맥이 빠진다. 가능한 결말 같지도 않고 다소 억지스럽다.

 

아일린이 이런 인물이었나 의심이 든다. 리베카의 영향력 아래에서도 아일린은 주체적인 인물이었다. 아일린이 맞는 결말은 그 자체로서는 괜찮다. 하지만 그런 결말에 이르게 되는 과정엔 동의할 수 없다. 아일린은 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그리고 자신을 지킬 능력이 있는 인물이어 왔다.

 

클라이맥스가 좀 과하단 생각이 든다. 아일린은 어쨌든 추락할 운명이었다. 그 과정을 유려하게 그리며 인간이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으리라 짐작한다. 하지만 그러기에 리베카가 주도한 사건이 지나치게 튄다. 대상보다 배경이 두드러지는 그림 같다. 배경에 시선을 빼앗기다 보니 정작 그림의 주인공은 배경에 스며들고 만다. 이는 구조의 문제처럼 보인다. 강약 조절에 실패했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소설이란 생각이 든다. 독특한 인물을 창조하고 성격을 서서히 드러내며 오직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긴장을 부여하는 솜씨가 남다르다.

그리고 작품이 던지는 중요한 질문 하나. 삶이 올바른, 적어도 바라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길을 잘못 들어섰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인지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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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 매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8
김금희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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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이 그다지 보수적이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고, 스스로도 사랑에 개방적인 터라 어떤 연애 도, 그것이 제 아무리 파격적이라고 해도 긍정하고 인정할 수 있다고 자부하지만, 유독 반감이 드는 형태가 있는데, 그건 바로 불륜’, 혼외의 사랑이다.

 

이 짧은 소설은 재훈과 유부녀 매기의 사랑을 그린다. 두 사람은 대학 시절 연인이었지만 그 사랑은 콜라 김 빠지듯 싱겁게 끝났다. 그리고 한참 후에 두 사람은 우연히 재회하고 다시 사랑에 빠진다.

매기는 여자의 본명이 아니다. 재훈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서 그녀의 본명은 숨겨지지만 정체까지 미궁인 건 아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직 독신인 재훈과 어엿한 남편을 둔 매기의 사랑 역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재훈은 이야기 초반에 둘의 관계가 무해하다고 선을 긋는다. 무해하다고? 정말로 그럴까.

 

좀 더 나가보자. 두 사람의 문제는 사랑을 하네, 마네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그 문제도 있겠지만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가장 선두에 있는 문제는 두 사람에게 서로를 사랑할 자격이 있는가이다.

사랑할 자격이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할 수도 있겠으나, 매기에게는 엄연히 남편이 있다. 작가는 작품 내내 매기의 남편을 소외시킨다. 나오기는커녕 언급도 별로 없다. 맨 마지막에 가서야 잠깐 모습을 보이는데 큰 의미가 있는 등장은 아니다.

소설 속 당사자인 두 사람은 물론이고 작가 역시 그것이 폭력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다. 사실을 외면한다. 피를 흘리는 피해자가 있는데 그저 이대로 괜찮은 건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라면 어떤 폭력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건 그렇고. 두 사람은 정말 사랑한 걸까.

 

비겁하고 기만적인 이야기로 읽힌다. 작가의 매혹적인 문장들에도 섣불리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재훈은 자신들의 관계와 감정을 내내 미화하고 합리화 한다. 재훈의 시점이라 더 그렇게 느껴진다. 외부의 시선이라면, 전혀 상관없는 화자가 두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냈다면 작품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그렇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쳐도, 작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결말은 필연적이다. 그런 끝 외에 어떤 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설픈 사랑은 막 나가지도 않고 불륜의 경계 안에 안전히 머문다. 실패는 이미 잠정되어 있다. 끝이 뻔한 이야기엔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다. 작가의 아름다운 문장은 설득하느라 바쁘다. 초반에 마음에 이미 철벽을 친 나 같은 독자는 마음의 빗장을 풀지 못한다.

 

마지막 장을 덮고 독자로서 고민하게 된다.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작가는 결국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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