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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 좋은 방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8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 영국의 지방 귀족 자제인 ‘루시’가 노동자 계급의 ‘조지’를 우연히 만나 도움을 받으면서 사랑에 빠지지만, 세상의 눈초리와 계급에 대한 자의식으로 감정을 숨기고 외면하다가 영국에 돌아와서 그와 다시 만나 결국 사랑을 이루는 과정의 이야기다.
로맨틱한 읽을거리, 볼거리가 넘쳐나는 요즘에 이 이야기에 과연 어떤 매력이 있을까.
오래 전에 본 영화를 생각해보면 로맨틱한 감상이 전부였다. 당시에도 다소 식상한 이야기였으나 매력적인 배우들과 능숙한 연기, 고전적이면서 화려한 의상, 공들여 재현한 무대와 배경 같은 볼거리가 충분했으므로 볼 가치는 충분했다. 하지만 활자로 된 소설은 뭔가 더 있어야 한다. 모든 걸 머릿속에서 독자 스스로 그려내야 하니, 영화가 남긴 시각적 잔상이 있는 나 같지 않은 독자라면 조금 어렵지 않을까.
하지만 이 소설을 그저 구태의연한 로맨스로 치부하기엔 뭔가가 있다.
이 작품에 힘을 보태는 건 흥겹고 발랄한 분위기와 다소 엉뚱한 유머다. 작가의 작품들 중, 가장 행복하고 유쾌한 소설이라고 하는데, 읽은 게 고작 ≪모리스≫ 정도이니 말을 더 보탤 수는 없지만 행복하고 유쾌한 소설이라는 데엔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작가의 이 초기작에서 ‘제인 오스틴’의 흔적을 발견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아웃사이더인 ‘에머슨 부자(父子)’로 대변되는 진보적인 사상도 이 소설이 출판된 시기(1908년)의 영국을 생각하면 꽤 새롭다. 귀족과 노동자, 보수와 진보, 직업과 취미, 생업이 아닌 소일거리로서의 노동, 계급 내 속물근성, 정략적이고 억압적인 결혼과 자유연애 등의 소재는 넓은 영지 소유하고 각종 고용인들을 둔 안락한 생활과 종교와 교육의 테두리에 안주한 이성애자 백인들이 다수였던 당시의 독자들에게 퍽 도발적이지 않았을까. 작가 스스로도 자신이 속한 계급에 머물면서 그것에 반(反)하는 여러 면모를 보이고 있으니, 이 작품이 주는 시대를 앞서가는 감각, 사화의 모순에 대한 신랄한 비판적 의식은 아마도 작가의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지 않을까.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 알겠지만.
로맨스의 주인공들보다 몇몇 조연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구시대적인 노처녀 이상은 아니었던 ‘샬롯’이나 몇 겹의 모습을 보이는 ‘비브 목사’ 같은 인물들은 입체적인, 생생한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다른 작가의 다른 작품 안에서라면 그다지 빛을 내지 못했을, 오로지 ‘포스터’만의 인물이라 더욱 특별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