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좀 환상하는 여자들 4
라일라 마르티네스 지음, 엄지영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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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손녀가 교대로 화자로 나선다. 4대에 걸친 가족사가 펼쳐지는데 할머니는 주로 과거, 손녀는 현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푼다. 그들의 가족사를 주변으로 스페인의 근대사(프랑코 정부의 독재), 자본주의의 폭력, 핍박받는 여성의 삶, 계급, 가난과 억압 등의 이슈가 서사의 층위를 다양하게 한다. 200쪽 정도의 짧은 분량 안에 4대에 걸친 여자들의 삶이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이야기가 오랜 세월을 거슬러야 할 때, 반드시 대하소설이 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두 여자가 사는 집은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이면서 비밀과 악의를 품은 또 하나의 중요한,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다. 어둠의 그늘이 곳곳에 도사리고 정체 모를 (초현실적인) 존재들이 출몰한다.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미래를 예지하는 할머니의 능력은 이야기에 꼭 필요하다. 소설은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역시 폭력으로 맞서고 복수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전반적으로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가 압도한다. 슬픔과 억울(抑鬱), 분노, 증오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인물들을 지배한다. 인물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뿜어 나오는 울분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단순히 남성들을 가해자로 만들 수도 있고 그런 남성들에게 권력을 쥐어주고 여성들을 소외시킨 거대 시스템에 화살을 돌릴 수도 있다. 자본주의의 병폐인 가난과 그 대물림, 계급 차이에서 빚어지는 폭력, 독재와 폭정, 나라에 의한 폭력 등은 잘못된 정치에서 나오는 문제로 보이고 그것은 인간성을 피폐하게 만든다.

고딕 호러를 기반으로 환상소설, 여성서사, 사회고발소설 등의 특징들을 두루 아우른다. 자국인 스페인에서는 SF 문학상을 받았다고 하니, SF 장르의 폭이 얼마나 넓은 것인지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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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없는 소리
김지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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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이다. (당연한 소리)



(무려)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렸다. 요즘 단편 한 편으로 책 한 권을 만드는 시대에 이 정도면 가성비 최고다. 다양한 인물들, 이야기들을 만날 기대로 마음이 잔뜩 부푼다.

근데 (솔직히) 기대에는 못 미쳤다.



모호한 이야기가 많다. 이야기들의 ‘코어(core)’를 찾기가 쉽지 않아 도대체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인지 의아한 작품이 있다. 물론 독자로서 나의 수준 탓일 수도 있겠다.



이야기의 집약도가 떨어진다. 산만하다는 얘기다. 단편소설에서는 낭비할 겨를이 없다.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한눈팔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



‘Something New’가 없다. 여성과 소수자의 인권 등에 지속적이고 지대한 관심을 가져온 독자들이라면 고루할 수 있다. 내부는 낡았고 외면은 거칠다.



작품들마다 거의 공통된 설정들이 있다. 바닷가, 망해가는 조선소, 사람들이 거의 떠난 폐허 분위기의 동네, 청년과 중년 사이의 어중간한 나이, 그리고 가르치는 직업.

겹치는 설정들이 많아 작품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인다. 작품마다 이야기가 뚜렷하지 않아 더 그렇다. 임팩트가 부족해 뒤돌아서면 쉬이 잊히는, 휘발성이 강한 이야기들이 많다. 눈을 사로잡는 ‘무언가’의 부재도 한몫한다.



숙련된, 준비된, 기대되는 신인의 느낌은 없다. 이 책의 적지 않은 작품들이 습작처럼 읽힌다.

그런데 이 작가, 완전 신인은 아니다. 데뷔 장편이 2019년에 출판됐다. 아무리 이 나라 문학 시장이 등단 시스템에 휘둘린다고 해도 전작(前作)을 무시하는 처사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럼에도 술술 잘 읽힌다는 것, 생각이나 감정을 짚어내고 그것을 문장으로 옮길 수 있는 건 분명 작가의 재능이다. 모든 작품에서 그 재능이 발휘되는 건 아니지만 눈에 자주 띈다.



*****



표제작인 <마음에 없는 소리>가 가장 눈에 들어온다. 네 인물의 ‘케미’가 좋았다. 주거니 받거니하는 대화와 알콩달콩한 일상, 잔잔하게 깔린 로맨틱한 정서에, 더 이상 어리지 않지만 아직은 삶에 미숙한 자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잘 스며들어 있다. 무작정 희망을 외치지 않는 작가의 현실적인 태도도 균형 있게 표현되어 있다.



작품집의 포문을 여는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은 미래, 혹은 ‘끝’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화자인 ‘나’는 자신이 ‘겪은 것, 감당한 것, 견뎌낸 것(25쪽)’에 대해서만 자신하는, 끝난 상태에 이르러야 안심을 하는 인물이다. 자궁 근종이 발견되고 시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전해들은 연인(진영)은 화를 내고(이게 삐지고 화를 낼 일인가, 이젠 완전 마음 놓아도 되는 거냐고 걱정해줘야 맞는 것 아닌가 싶지만) 관계에 위기가 찾아온다.

‘끝’은 고착된 형태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 이후로도 끝난 무언가는 계속 변한다. 모든 것은 언제나 ‘과정’에 있다. 모든 존재는 유한하지만, 한편으로는 무한하기도 하다. 우리는 결코 그 ‘끝’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해변에서 주운 것들은 버려진 것, 끝장이 나버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것들이다. 그것들은 과거의 영역에 속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계속 변화할 것이다. 아직 완벽한 상태의 ‘끝맺음’을 맞은 게 아니다. 해변에 다시 버려진 그것들은 또 다시 무수한 변화를 겪을 것이다. 그 미래는 미지이다. 알 수 없슴, 예측 불허의 상태는 두려움만 남기지 않는다. 기대와 희망도 있다. 진영과 헤어진 화자는 새로운 애인과 만들어갈, 이어지는 미래에 대한 상상들로 설렌다.



굉장히 멋을 부린 <작정기>는 숨겨만 왔던, 그러다가 아쉽게, 어이없게 끝나버린 애정에 대한 뒤늦은 고백처럼 읽힌다. 이 작품 역시 막힘없이 읽히나 큰 의미는 없는, 소품처럼 보인다.

일본에서 성냥갑이 여전히 일상적인 물건인지 궁금했고(아무리 아날로그의 왕국이래도 라이터가 디지털인 것도 아닐 텐데) ‘원진’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어떤’ 사고였는지 구체적이지 않아 이야기의 국면을 반전시키는 중요한 사건임에도, 이렇게 다뤄질 소모성 캐릭터가 아님에도 그의 죽음이 소홀하게, 그저 소비되는 것처럼 보여 거슬린다. 소설 속 인물이라도 죽음을 다룰 때엔 신중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차에 대한 설명의 부재, 신목처럼 묘사된 녹나무 같은 설정은 약간 과한 치장처럼 보인다.



<그런 나약한 말들>은 관계의 피상에 의지하다가 비로소 그 이면을 목격하는 내면의 균열을 그린 이야기로 읽힌다. 마냥 애정을 줄 수만은 없는 화자는 이 작품의 가장 큰 흠이었다.



술술 잘 읽히는 <굴 드라이브>는 이야기의 중심에 작가의 생각이 잘 와닿지 않았다. ‘용서’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는데 그게 필요하다는 얘긴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얘기인지 모호하다.



중고거래 상대를 기다리며 우연히 마주친 세 할머니들과의 한나절을 그린 <결로>, 작품집 안에서, ‘톤(tone)’으로 보나 문장 구성으로 보나 가장 이질적인 성격의 <내가 울기 시작할 때>는 도무지 의미 파악이 되지 않은, 어렵거나 과하게 비튼 작품이었다.



마지막 두 작품인 <사랑하는 일>과 <공원에서>는 목적이 분명한, 작가의 의도가 비교적 명확한 작품이다. <사랑하는 일>은 작가가 작정하고 쓴 퀴어 소설로 읽힌다.



<사랑하는 일>엔 레즈비언 커플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이 조금 별나다. 그런 종류의 사랑에 왈가왈부 토를 다는 건 전혀 의미가 없을 테다. 작가의 목적은 조금 유별난 방식의 사랑도 인정해주고 존중해줘야 한다는 것이고 독자로서 충분히 동의한다.

하지만 굉장히 위선적인 이야기로 읽힌다. 은호는 자신의 커밍아웃에 (적극적으로 혐오를 드러낸 할머니를 제외하고) 미적지근한 반응으로 일관한 가족들에게 (적의에 가까운)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상속을 노린다. (그럴 수 있나? 이건 정말 진정한 ‘PRIDE’의 문제다) 게다가 은호는 중매로 결혼해 살다가 최근에 이혼한 부모의 사랑을, 아내를 사랑했다는 아빠의 고백(245쪽)을 묵살하고 ‘거짓된 사랑’으로 폄하한다.

자신이 존중받길 바란다면 상대도 존중해줘야 한다. 자신의 것을 돋보이기 위해 굳이 남의 것을 깎아내려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은호는 부모가 결혼한 과정이나 그들의 사랑에 대해, 태어나기 전이므로,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저런 언행은 오만해 보인다.



커밍아웃에 대해서도 은호는 상대의 가치관이나 개인적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 것 같다. 평생 이성애자 사회에서 이성애자 가치관을 갖고 이성애자로 살아온 사람이, 더군다나 제 자식, 누나가 이성애자가 아니라는 고백을 들었을 때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열렬한 환영과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찬 반응을 기대했던 걸까. 이야기 구석구석엔 은호에 대한 식구들 나름의 노력이 보인다. 오히려 노력을 하지 않는 건 은호다. 맥락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한남’ 타령을 하고 있는 것(233쪽)보다, 자신에게 커밍아웃을 권했다는 이유로 사과를 요구하고 있는(<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24쪽) 것보다 더 나빠 보인다. 이 작품은 내게 대단히 기만적인 이야기로 읽힌다.



여성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에 대한 이야기인 <공원에서> 역시 그렇다.

작가의 취지는 충분히 공감한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겠고 그 의도, 핵심에도 공감한다.

하지만 화자는 다른 의미에서의 ‘가해자’다. 자신이 당한 폭력은 굉장한 사건이고 자신이 불륜에 가담하여 이야기에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 낯모를 (같은) 여성에게 정서적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작가가 굳이 이런 설정을 왜 포함시켰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이런 설정을 화자의 삶에 포함시키기로 했다면 그 사실에 대해서도 언급이나 설명을 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인물에 동정과 연민을 느끼도록, 그 분노와 억울함에 동승해 그를 응원할 수 있도록 설득했어야 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러지 않는다. 오히려 기원을 알 수 없는 말습관, 관용구를 가지고 시비거리로 삼는다. 이 시대 사람들이 책임질 수 없는 걸로 책임을 묻는다. 언어와 표현은 일종의 문화유산이다. 더 이상 쓰지 않도록, 속뜻을 알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도록 사람들에게 알리고 계도하고 시간을 두고 볼 일이다. 그런 말들이 사소하게 통용된 시대적 특징과 한 시기를 지배했던 가치관과 관습을 깡그리 무시하고 사전에서 지운다고 말 습관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미래를 보지 않고 거스를 수도 없는 과거를 비난하는 건 트집 이상은 아니다.



화자에 공감이 안 되니 그가 끔찍한 일을 당했음에도 마음이 크게 움직이질 않는다. 섣부른 독자라면 이 사람이 그저 ‘땡깡’부리는 걸로 여길 테다. 동정과 연민을 느껴야 할 이야기에서 ‘내로남불’의 허울을 씌우다니. 그저 독자 탓일까.



삶은 연속의 과정이다. 삶은 여러 사건을 아우른다. 이야기, 한 편의 소설에서 독자들이 목격하는 것은 삶의 한 토막이다. 그 조각난 일면에 많은 감정과 사유, 사건이 포함된다. 그것들을 통해 작가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세계에 드러내고 싶은 자신 속 세계를 내보인다. 그것들은 함부로 쓰이지 않는다. 작가는 취사선택을 해야 한다. 하물며 단편이라면 그 선택은 더욱 신중하고 집약적이어야 한다. 인물, 대화, 설정, 소품 하나라도 허투루 등장해서는 안 된다. ‘그저 설정이 그래’ 이런 말은 빈약한 핑계다.



가장 거슬렸던 것은 따로 있다. 그건 작품들마다 저변에 흐르는 ‘증오’와 ‘혐오’의 정서였다.



레즈비언 커플을 본 해변가의 ‘남자’가 침을 뱉는다. 딸로 추정되는 어린 여자아이가 동행이었다. 여자아이는 잠재적으로 레즈비언 커플을 보면 침을 뱉는다, 식의 공식을 학습할 수 있다.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16쪽)

주인공 커플을 본 ‘남자’ 노인이 지팡이를 가지고 폭력을 행사한다.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17쪽)

외국인 ‘남자’ 노동자들이 화자를 성희롱한다. (<굴 드라이브>, 43쪽)

화자의 식당에 손님으로 온 ‘남자’ 노인이 갑질을 한다. (<마음에 없는 소리>, 170쪽)

자신의 커밍아웃을 시들한 반응으로 일관한 (할머니를 제외한) 이성애자 가족 구성원들에게 염오의 감정을 드러내며,(<사랑하는 일>) 맥락도 없이 남동생을 ‘한남’이라고 표현한다. (같은 작품, 233쪽)

기타 등등…,



이런 설정, 이런 장면, 이런 에피소드들을 정말 그냥, 별다른 의미 없이 썼을 수 있다. 한 작품이라면 독자로서도 그냥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홉 편의 작품이 실린 작품집 안에서 가슴이 조마조마해질 정도로 거듭된다면 독자로서 이런 불평을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굳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의도가 목적이 쓰임새가 분명해야 한다. 용도가 교묘히 숨겨져 있나. 그래서 저질의 독자가 저급한 눈으로, 깊은 속뜻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단지 차별과 혐오의 프레임을 씌우고 있는 걸까.

.

저 설정, 저 장면, 저 에피소드들이 다른 모양새였거나 차라리 없다면 작품의 완성도에 해가 됐을까.

저 설정, 저 장면, 저 에피소드들이 이야기에 꼭 필요한가. 필연적인 도움을 주고 있나.



*****



작가는 작품을 통해 말한다. 작품은 작가의 도구이고 무기이면서 세상에 자신을 비춘 반영이다.



저질과 저급의 ‘콜라보’로 무장한 독자로서 오독을 한 결과이길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



작가가 ‘짓는(作)’ 사람이라면 독자는 ‘읽는(讀)’ 동시에 ‘짓는(作)’ 사람이다. 소설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는지는 작가가 아닌 독자가 해야 할 일이다. 그 영역엔 작가가 할 일이 거의 없다. 소설이 출판되어 세상에 나와 독자의 손에 들리고, 전자책 리더기 화면에 활자가 뜨는 순간부터 그 창작물은 더 이상 작가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독자가 읽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근거는 작가가 쓴, 바로 그것이다. 작가가 제 맘대로 쓴다면 독자는 제 식대로 읽는다.



김성중 작가는 작품 안에서 (≪에디 혹은 애슐리, 문학동네, 2020년6월 刊≫ 안, <상속, 175쪽> 중에서) ‘소설은 나(작가)의 인식이 더해진 세계에 대한 번역’이라고 했다.



*****



소설을 쓰는 일은 주장이 아닌 설득의 과정을 요구한다. 그리고 설득엔 균형이 필요하다. 감정에 빠진 작가는 자신만 감동받는, 공감을 요구하는 그런 소설만 쓴다. 당위나 개연은 내팽개쳐진다. 그래서 때때로 실패한다. (개인적인 고백이지만, 같은 이유로 나는 화자가 ‘나’인 소설은 가능한 피한다. 읽더라도 각오가 필요하다) 작가는 제 안에서 나와 밖에서 볼 줄 알아야 한다. 소설 쓰는 일은 감정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그 작업은 대단히 전략적인 일이다. 이야기를 좀 더 그럴 듯하게 만들고 이야기로 독자들을 설득하여 ‘내 편’에 설 수 있게 만들려면 ‘꾀바름’이 필요하다. 감성과 함께 예리한 ‘이성’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소설은 감성만으로, 혹은 이성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독자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 작품을 읽는 데에는 감성과 이성 모두를 가동시켜야 한다. 공감 이전에 모든 이야기는 말이 되어야 한다. 소설엔 논리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내 생각엔 헛소리다. 단 수학적인 논리는 아니다. 행동과 사유엔 동기가 필요하고 그 동기는 납득하고 설득당할 만해야 한다. 공감 이전에 이입이 가능해야 하고 마음이 열려야 한다. 기계적인 반응을 진짜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소설은 문자를 매개로 하는 이야기의 예술이고 인물이나 설정, 문장 등은 그것을 이루는 요소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야기란 인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며 결국 어떤 결말을 통해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에 대한 흐름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게 (좋은) 소설이 아니다.



이런 저런 문학상을 받은 작품들이 세 편이나 실려 있다. 독자들 별점도 좋고 출판사나 평단의 호들갑 만큼의 감상은 건지지 못했다. 다소 과대평가된 작품집이지 않나 생각된다. 당연히 내 주관적인 감상이다.



사족 1.



소설 쓰는 수업의 합평 시간이라면 지적받을 것들이 눈에 더러 띈다. 사소한 실수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정확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문장을 구사해야 하는 건 작가의 의무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선풍기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오래 머무르기에 그 앞으로 기어가 앉아 내 쪽으로 선풍기를 고정했다. (95쪽)



심각한 오류는 아니지만 작가가 말하는 건 아마도 ‘선풍기의 머리’였을 것이다. 인물이 필요했던 건 ‘선풍기 바람’이었을 테니까.



사족 2.



소설 시장이 ‘등단 시스템’에 휘둘리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소위 등단 작가이면서 대기업 형 출판사에 의해 ‘간택’되지 않는 작가들, 흔히 말해 ‘메인스트림’이 아닌 작가들에게 요즘 슬슬 시선이 간다. 기업형 출판사+대형 서점+주류 평단의 콜라보는 독자들의 판단을 마비시키는 것 같다. 독자로서 그들이 출판한 책, 그들이 진열한 책, 그들이 해설을 써준 책을 사보라고 강요받는 기분이 든달까. 눈에 많이 노출되는 건 광고의 힘이지 작품이 힘이 아니다. 게다가 이런 저런 여러 작가들을 탐험하고 새로운 작가를 발견하는 게 독서의 진짜 묘미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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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캐슬 대교북스캔 클래식 7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오현수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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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밸런시’는 노처녀 소리를 듣는 29세의 미혼 여성이다. 외모도 별로다. 사교술도 없다. 교육의 기회도, 직업을 갖고 돈을 벌 기회도 변변치 않아 제대로 된 결혼만이 여성들이 살 길이었던 당시(1920년대), 교양과 체면, 관습과 형식에 목숨을 거는 친척들이 모이는 자리에선 으레 집안의 평판을 깎아먹는 ‘빙충이’ 취급을 면치 못한다.
연애 경험이 있는가 하면 절대 아니다. 어느 정도냐면 예를 들어, 댄스파티에서 남자들에게 춤 신청을 받지 못해 언제나 ‘벽의 꽃(wallflower)’ 신세다. 하지만 말이 좋지, 아무도 밸런시를 ‘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런 밸런시에겐 탈출구가 있다. 상상의 장소 ‘블루 캐슬’에서 그녀는 아름다운 황후이고 공주다. 자유와 행복을 만끽한다. 아름다운 사랑의 주인공이 된다. 드디어 제 삶의 꽃을 피운다. 하지만 결국 현실의 벽과 마주해야 한다. 숨 막히고 희망 없는 삶도 삶인지라 하루하루 버텨내야 한다.

타고난 약한 몸으로 건강에 이상을 느낀 밸런시는 의사를 찾아간다. 의사는 그녀에게 협심증과 동맥류를 진단하면서 1년의 시한부를 선고한다. 밸런시는 죽음이 두려웠을까. 희망이나 낙관 따위 찌꺼기도 남지 않은 삶인데 그럴 리가. 그 사건은 슬픔을 요구하기보다 밸런시를 각성시킨다. 그녀는 남은 생애를 자유롭게, 알차게 보내기로 작정한다.

주인공 밸런시는 작가의 대표작 ≪빨강머리 앤(Anne of Green Gables)≫의 주인공 ‘앤 셜리’의 후손이다. 이 작품이 ‘빨강머리 앤’보다 16년 후에 출간됐으니 그 영향을 받은 건 가능해 보인다. 그런 탓에 초반부에 드는 기시감은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밸런시가 가족들에게 반기를 들고 말대답을 하고 일상의 루틴을 가차없이 깨면서) 분위기는 서서히 반전된다. 이야기는 독자의 예상을 보기 좋게 배반면서 ‘의외의 방향’으로 물머리를 돌린다.

작품 속 세계에서 밸런시는 반목의 아이콘이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시선, 관습, 의무에 저항한다. 사람들은 그녀를 탕녀, 광인으로 취급한다. 그런 평판을 무시할 수 있었던 건 죽음을 각오한 자의 순수한 용기 덕분이었다. 그리고 삶에 대한 후회와 미련. 얼마 남지 않은 (끝이 보이는) 삶에서 단 한 순간이라도 ‘나 자신으로’ 사는 것. 100년 후의 우리들에게도 꽤 솔깃한 욕구다.

로맨스+코미디를 주된 기둥으로 한 이야기는 독자들로 하여금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진정한 행복은 스스로를 가둔 틀을 깰 때 가능하다. 지금 우리를 행복하지 못하게, 나 자신으로 살지 못하게 만드는 건 과연 어떤 요소들일까, 내가 뒤집어쓰고 있는 가식의 허울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에겐 그 껍질을 벗을 힘과 용기가 과연 있을까.

밸런시의 결말은 참으로 장르다운 면모를 빠짐없이 갖춘다. 사랑과 돈, 그리고 용감하고 슬기로운 여성이라는 명예까지. 이런 결말을 두고 오늘날의 여성주의자들은 어떤 말들을 할까. 요즘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밸런시는 과연 행복한(바람직한) 결말을 맺었다고 할 수 있을까.

밸런시의 앞날을 두고 설왕설래하기 전에, 제발 1920년대의 사정을 염두에 두자. 그리고 용기와 지혜, 친절함과 배려심까지 갖춘 여자가 자신이 그토록 바랐던 것을 ‘남자와의 결혼을 통해’ 손에 넣는 게 어리석고 멍청한, 남자에게 길들여지는 일이라면, 그저 코 한 번 찡긋 하며 웃어주면 된다. 그 이상은 낭비다.

사족

전체적으로 영화 ≪Last Holiday≫와 유사점이 많다. 1950년 오리지널은 보기 어렵고, ‘퀸 라티파(Queen Latifah)’ 주연으로 리메이크한 2006년의 영화는 쉽게 접할 수 있으니 같이 비교하면서 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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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여름 소설Q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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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살의 ‘기하’는 아빠와 둘이 산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엄마는 오래전에 암으로 잃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새엄마를 데리고 들어오고 졸지에 아홉 살 아래의 동생 ‘재하’가 생긴다. 기하는 갑작스런 새엄마도 당황스러운데 생전 처음 해보는 형 노릇에 질색한다. 기하는 새엄마에게도 재하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다.

흔히 아는 ‘정식의 절차’가 없었더라도 기하는 새엄마와 재하를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왜? ‘중2병’을 앓을 나이는 이미 지났고 이듬해면 성인인데 저리 옹졸한 태도는 대체 왜지? 엄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도 아니고 아빠에 대한 배반감? 아니면 가족의 울타리 안에 선뜻 발을 들인 낯선 자들에 대한 두려움?

위에 적은 것들 모두 해당될 테지만 작가는 기하가 어떤 마음인지보다 보이는 것, 행동과 태도에 집중한다. 전체적으로 인물에 대한 여백이 많은 작품이다. 설명이 부족하다는 말이기도 한데 독자들이 그 공간을 채워야 한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게 재미있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약간 뻔해서 심심하다.

인물들의 권력 관계를 살펴보면 흥미롭다. 두 집 모두 편부, 편모의 가정이다. 두 집 모두 아들 하나씩 있고, 두 집 모두 수입이 있다. 사진관 사장과 학습지 교사 중 누가 수입이 더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재하 엄마가 기하 아빠에게 경제력을 완전 의지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재하네는 기하네로부터 ‘받아들여져야’ 하고 기하는 그들을 거부한다.

평등해 보이는 조건에서도 권력이 기운다. 기하는 권력을 ‘행사한다’. 여자는 받아들여져야 하고 남자는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할 권리가 있다. 재하의 엄마는 이혼녀이다. 그리고 폭력적인 남편 때문에 고생을 했다. 그 폭력이 언제 다시 시작될지 바늘방석이다. 여자는 폭력적이지 않고 착하고 성실한 남자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젊지만 유용하고 막강한 무기는 되지 못한다.

그러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그래서 외롭게 남는 쪽은 ‘기하’처럼 보인다.
어차피 두 가족은 ‘중국 냉면의 육수에 잘 풀어지지 않는 땅콩소스’처럼, 서로 융화될 가망이 별로 없었다. ‘어느 쪽이든 괜찮은, (토마토가) 과일이든 채소든 상관없는(26쪽)’ 재하와는 달리, 기하는 친절하지 못하고 배려 없었던 제 행동을 돌아보게 된다. 이 작품이 극히 일부의 독자들로부터 ‘남성중심적인 이성애자 사회의 남성 구원 서사’라는 원망을 듣는다면, 그 구원은 실패했다고 말해야 한다.

인물들이 모두 착하다. 악인이라고는 한 명도 없다. 새엄마는 기하의 인정을 얻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재하는 그런 엄마가 약간 과하다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비슷한 태도를 취한다. 기하의 아빠 또한 친절하기 짝이 없고 기하의 행동도 악하다고는 볼 수 없다. 철이 없다고나 할까. 기하가 하는 양을 보면 찬바람이 휙휙 불다가 뒤돌아서 곱씹고 후회하는, 그런 유형이다. 유일한 ‘빌런’이 한 명 등장하는데(재하의 친부), 이 사람의 쓰임새 역시 전형적이다. ‘양아치’의 습성을 빠짐없이 갖춘, 결국엔 어렵게 맺어진 사람들의 여전한 노력들을 무용하게 만들어 다시 뿔뿔이 흩어지게 한다.

설정이나 인물, 이야기의 얼개 등이 새롭지도 않고 짜임새가 그리 조밀하지도 않다. 전체적으로 고루한 인상을 주는데, 작품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거의 재활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엔 개성이 있다.

낡은 소재들이지만 포장은 새롭다.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고 현실에 가장 가까워 보이는 결말을 그린다. 할 만한 행동들엔 부연이 필요 없다. 선뜻 받아들이긴 어렵지만 납득은 된다. 생략과 비약은 작가 나름의 계산이었던 것 같다. 작가는 큰 노력 없이 세련된 맵시를 부린다.

작품 전체를 꿰뚫는 소재로 ‘사진’이라는 작가의 선택은 적절해 보인다(기하 아버지의 직업이 괜히 사진관 운영이 아니었다). 소재 이상의 장치로 보인다.
사진은 시간을 ‘박제’한다. 시간은 정지하고 진실은 봉인된다. 박제된 순간은 사진을 마주함으로서 반복된다. 사진으로서 과거는 현재로 소환되고 환기(喚起)된다. 마법이 비로소 풀린다. 과거의 의미가 비로소 부여된다. 훗날 사진을 보면서 과거에 자신이 ‘두고 온 것’을 생각한다.

작품은 우리가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과거엔 만족보다 후회나 아쉬움이 더 크다. 지난날엔 항상 미련이라는 긴 그림자가 남기 마련이다. 우리는 스스로 만족하는 걸 오만이라고 느끼기 쉽다.
그럼에도, 타산지석으로 삼을 과거가 있음에도 우리는 비슷한 실수를 반복한다. ‘프랙탈(fractal) 패턴’은 우리 삶에도 보인다(편혜영 작품의 리뷰에서도 이 비유를 했던 것 같다). 우리 인간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장과 변화는 요원한 듯 보인다.
작가가 그런 점을 의식했을까. 작품에서 ‘반복’이라는 장치가 거듭 보인다. ‘19세의 기하-10세의 재하-중년 기하-청년 재하’로 이어지는 구성(화자의 교차와 반복), 거듭 등장하는 ‘사진’이라는 소재, 그리고 반복되는 장소(인릉).

15년이 흐르고 재회한 기하와 재하는 과거에서 비롯된 간극을 좁히지 못한다. 누군가는 사과하고 누군가는 용서하고, 한때 형제였던 두 사람이 진짜 형제가 되는 시작점에 선 두 사람을 보는 것으로 끝이 났더라면. 하지만 삶이 어디 그런가. 두 사람은 어른이 됐고 살 만큼 살았고 경험할 만큼 경험했고 여러 형태의 좌절도 겪었다. 두 사람은 의미 있는 변화를 겪으며 삶을 통과했지만 지향점이 서로를 향하지는 않았다.

안타까운 가족사를 소재로 작가는 ‘진짜 삶’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현실에 발을 디딘, 꽤 단단한 느낌을 준다. 슬프지만 전형적인 슬픔과는 결이 다른 정서가 꽤 오래 여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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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리스 거리의 마지막 집
캐트리오나 워드 지음, 이경아 옮김 / 검은숲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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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명의 화자가 교대로 등장한다. ‘테드 배너먼’, ‘로런’, ‘올리비아’, 그리고 ‘디디(딜리일러)’, 기타 등등.

외딴 집에 직업도 없이 칩거하다시피 살고 있는 테디는 어떤 일에든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기에 힘들어 보이고, 어린 딸 로런과 함께 올리비아라는 고양이를 키우고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몇 안 되는 이웃들은 테디의 딸과 고양이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 옆, 니들리스 거리의 마지막 집에 새로운 이웃이 이사 온다. 11년 전, 가까운 캠핑장 호숫가에서 사라진 ‘막대아이스크림을 든 소녀’의 언니인 디디는 동생의 행방과 실종에 책임이 있는 누군가를 좇고 있다.

처음 몇 장(章), 대략 60쪽을 지나면 다양한 화자들이 실제로는 한 인물임을 의식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독자들은 질문한다. 작가가 지금 ‘다중인격’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 (이거 혹시 스포일러일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틀리다’는 말이 왠지 공정하지 않게 들리는데 이야기는 시종일관 다중인격(책에서는 ‘해리성정체감장애(DID: 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에 시달리는 남자 얘기를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학대’와 그 파괴적인 영향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 말미의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이렇게 적고 있다.

❝DID가 소설에서 공포를 자아내기 위한 장치로 소비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나의 일천한 경험으로 보자면 이 증상은 오히려 그 반대다. 학대에서 살아남고, 이 증상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선(善)을 위해 분투한다.(512쪽)❞

작가의 이런 의도, 증상에 대한 이해, 오해를 종식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이 책의 내용이고 목적이고 그 전부다. 이야기 전반에 흐르는 암울한 정서는 공포라기보다 외로움에 가깝다. 테디의 비밀스러운 삶은 충분히 의뭉스럽지만 그 속을 알고 나면 그런 시선이 단지 편견이었음을 알게 된다. 룰루의 실종과 테디의 이야기는 하나로 통합되어 전체를 이룬다. 테디를 의심하고 괴물로 인식했던 디디는 스스로가 괴물이 된다. 한 사람의 오해는 무시되거나 설득의 여지가 있지만 대중의 오해는 하나의 거대한 벽이다. 이 작품은 범죄와 비밀, 거짓말과 두려움, 공포와 혼돈으로 가득차 있지만 결국 ‘선의(善意)’에 대한 이야기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작가가 들인 노력은 작가란 직업이 앉아서 얻어먹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읽고 조사하고 쓰는 육체적인 노동은 물론이고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 꾸준히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탐색하는 과정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난한 길이다. 이 작품이 주는 정서적인 충격은 작가의 의도를 알게 되면 더 큰 울림을 남긴다. 평소에 책 말미에 실리는 ‘작가의 말’ 따위 왜 필요한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이런 작가의 말이라면 꼭 필요하고 읽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와 독자의 소통 공간은 ‘작품(이야기)뿐, 그 이상은 안 돼’라는 고집에 약간 여유를 두기로 한다.

시작과 더불어 1/4 분량은 몰입이 약간 어렵다. 한 명이면서 여러 명인 목소리가 서로 다른 기억과 경험들을 동시에 떠들어대는 통에 눈도 머리도 어질어질하다. 하지만 그 지점을 넘어가면 이야기에 빨려들 듯 흡수되는데 그 속도감이 장난이 아니다.

현실을 기반으로 환상 속 자아들이 쏟아내는 초현실적 이야기, 이미지들엔 장단점이 있다. 충분히 흥미로운 반면 인물의 이해하기 어려운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500쪽 넘게 헤매고 다닌다는 점에서 지루한 면도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이야기 전체에 대한 실제적이고 실속 있는 단서들을 찾는 재미가 독특하다. 마치 엉킨 실타래의 실마리를 찾는 느낌, 혹은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통해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느낌이랄까. 이런 장르의 팬이라면 충분히 즐길 만한 요소다.

사족

원제는 ≪The Last House on Needless Street≫.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72년 영화, ≪The Last House on the Left≫를 생각나게 하는데, 내용은 크게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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