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씨는 진짜 사랑입니다
엘리자베스 버그 지음, 박미경 옮김 / 나무의철학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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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무덤에서 뭔가를 느껴요. 구체적인 이미지가 떠오르는 건 아니지만 뭔가가 느껴져요.”
“뭘 느끼는데?”
“평온함이랄까… 안도감이랄까. 자 됐습니다. 다 풀지 못했더라도 이젠 펜을 내려놓으세요. (78쪽)❞

❝내 눈에는 시든 잎도 여전히 예뻐요. 시들어 떨어지는 것도 생의 일부잖아요. 꽃망울이 맺힌 상태로 우리 집에 와서 꽃잎을 활짝 벌려 고운 자태를 뽐내다가 이젠 이별을 준비하는 거잖아요. 서서히 이별을 준비하게 놔둬요. 떠날 때가 되면 알아서 떨어질 거예요. 어느 한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때가 없어요. (253쪽)❞


도시락을 들고 죽은 아내의 무덤을 매일같이 찾는 80대 노인 ‘아서’, 편부슬하의 가정에서 외롭고 쓸쓸한 나날을 겨우 살아내는 십대 소녀 ‘매디’, 그리고 아서의 이웃이자 전직 선생님이고 참견장이인 80대 노파 ‘루실’. 세 사람이 이뤄내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진짜 가족의 이야기다.

주요 등장인물들만 봐도 어떤 이야기인지 짐작이 간다. 그리고 그 짐작은 아마 반 이상 맞을 것이다.
익숙한 이야기지만 편안하다. 비교적 안전하고 뻔하다 싶지만 심히 위로가 된다. 유려한 이야기는 마음을 어루만지고 인물들은 가까이 두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 삶은 어때야 하고 가족은 저때야 하고. 이런 소설 흔하잖아? 맞는 말이다. 이 작품만의 두드러지는 특징도 거의 없다. 하지만 흔하다고 필요가 없는 건 아니다. 에두르고 뭉뚱그려 퉁치는 위안이지만 우리에겐 그것조차 절실할 때가 있다.

이야기 속에서 묘지라는 공간은 무척 매력적으로 묘사된다. 망자를 향한 애도, 삶에 대한 낙관과 희망, 신비, 심지어 로맨틱하기까지 하다. 묘지가 중요한 공간적 배경이니만큼 죽음과 삶에 대한 이야기가 작품 전체를 아우른다. 살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더 많은 두 노인이 죽음을 대변한다면 그 대척점에 있는 십대의 매디는 삶을 대변한다. 매디와 아서에게 공통점이 많고 서로를 쉽게 이해하고 공감하듯이, 삶과 죽음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삶은 친숙하고 죽음은 낯설지만 그 둘은 같은 연장선 위에 공존한다.

궁극적으로 작가는 ‘함께하는 삶’을 권하는 것 같다. 세 사람은 가족이 아니지만 가족을 이룬다. 세 사람의 연대는 무척 끈끈하다. 서로를 염려하고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 우리를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아무런 대가없이 도우려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이런 이야기를 그저 환상이라고, 꿈 깨라고 치부해야 할까. 먼 옛날엔 비행기나 자동차도 한낱 헛소리에 불과하지 않았나.
이 작품을 어떻게 보든 그건 각자의 마음이다.

다소 삐딱한 시선으로 보면, 단지 나이가 많을 뿐인 두 노인이 우연히 마주친 착한 십대 소녀를 돕는 이야기다. 두 노인은 나이만 들었을 뿐, 육체적으로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부자다. 노인들에게 흔히 따라오는 경제적인 문제는 거의 없는 셈이다. 건강하고 돈까지 많은 노후란 얼마나 든든한가. 매디의 고민은 심각하긴 해도 어른들의 눈으로 보면 충분히 해결 가능하다. 실제로 아서가 죽은 후 매디는 부자가 된다. 지나치게 안전한 이야기다. 심각한 위기도 없다. 돈이 없어 매 끼니를 걱정하고 오늘내일 하며 겨우 숨만 쉬는 골골한 노인들이 인성 개차반에 싸이코패스 저질 십대 아이를 만난다면 과연 어떤 이야기가 나왔을까.

사족

‘아저씨’가 아니라 ‘아서씨(Arthur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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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이방인 - 드라마 <안나> 원작 소설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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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질서를 연기하는 한, 진짜 삶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짜 삶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인생의 마지막에서야 밝혀질 대목이다. 모든 걸 다 잃어버린 후, 폐허가 된 길목에서.❞ (133쪽)

'나’는 오랜 기간 슬럼프에 빠져 허덕거리고 있는 작가. 어느 날 신문에서 어떤 소설을 발췌한 광고를 보게 된다. 의뢰자는 그 소설을 쓴 당사자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설을 쓴 사람은 바로 ‘나’다. 그렇게 ‘나’는 광고 의뢰자인 ‘진’을 만나고 등단하기 전, 아주 오래 전에 바로 자신이 쓴 소설을 ‘이유미’란 사람이 도용했음을 알게 된다.

이유미라는 이름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그녀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거짓’이다. 그녀를 둘러싼, 그녀에 관한 거의 모든 게 허구다. 심지어 진에겐 성별까지 속였댄다. 이걸 속는 사람이 있다고? 싶지만 최근에 똑같은 일이 있었다는 게 생각난다. 세상 참 어처구니없구나 싶다.

이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재미있을까. 이 바닥에 세계적인 인물이 이미 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Patricia Highsmith)’의 악당 ‘톰 리플리(Tom Ripley)’는 괘씸한 놈이지만 매력적인 사람이다. 비난을 하면서도 동정과 연민을 독자로서 아끼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의 관건은 리플리에게 없는 무언가가 이유미에게는 있는가, 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유미에겐 딱히 내세울 무언가가 없다. 가장 큰 건 동기가 없다는 거. 그저 ‘허영’이라는 한 단어로 모든 게 설명된다. 물론 가난과 폭력 같은 부수적인 동기가 있긴 하지만 그닥 쓸모가 없다. 그런 장애에 대응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것을 보면 타고난 천성처럼 보인다. 위기에 몰린 사람의 절박함도 없고 포기했다가 다시 일어서려는 용기도 없다. 심지어 악당들을 상대로 한 대결 구도가 주는 쾌감도 없다. 뼛속 깊이 허영심으로 가득 차 있는데다 나약하고 게으르기까지 한 인물에 독자들이 마음을 열기가 쉬울까.

이야기가 재미가 없다. 진행은 (다소 막힘이 있어도) 비교적 물 흐르듯 하지만, 오로지 설명으로만 일관된 작품은, 전체적으로 소설을 읽는다기보다 요약된 시놉시스를 읽는 기분이다.

주인공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나’라는 화자와 여러 증인들(인터뷰이)들의 필터를 거친 이유미는 그저 피상에 머무른다. 어느 누구 그 사람의 본질에 닿질 못한다. 저들이 겪고 들은 게 진짜 이유미일까. 이야기가 그저 ‘그랬다더라’ 수준이니 이건 작가 탓이다. 시점과 구조의 측면에서, ‘나’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이유미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과 당사자가 직접 자신의 삶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데엔 차이가 있다. ‘나’라는 인물이 왜 필요했을까.

이유미의 이야기와 병행하는 화자의 이야기는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구조 안에서 두드러지는 기능도 없다. 한마디로 불필요해 보인다. 오히려 불쑥 끼어드는 모습이 방해만 되니 성가셔 보이기까지 한다.
피상과 이면, 허상과 본질, 진짜 삶과 연출된 삶, 이런 게 작가의 의도였다면 이유미에게 집중했어야 옳다. 작가는 왜 이유미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을까. ‘나’와 이유미가 마지막엔 한 번쯤 대면하는 게 맞지 않나?

이유미의 목소리는 작품 내내 철저히 거세되어 있다. 무대 뒤에서 유령처럼 존재한다. 이야기에 드러난 이유미도 진짜 이유미가 아닌 것 같다. 말하지 못 한, 보이지 않는 다른 모습이 더 있을 것 같다. 작가가 이런 걸 노렸나?

전체적으로 설득이 안 된다. 설정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이야기가 그렇다. 거칠고 투박하고 성급하다. 인물에 감정을 주기도 어렵고 공감도 어려우니 남는 건 활자뿐인데, 이조차 ‘와!’하는 구석이 없다. 예를 들어 인터뷰 녹취의 기록이라면 구어체여야 한다. 그래야 진짜 같다. 엔딩에서 밝혀지는 반전 아닌 반전은 바보 같다. ‘반전 아닌 반전’이란 표현을 쓴 까닭은 작가는 최후의 일격처럼 다뤘지만 그냥 제 살 깎는 것 이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끝까지 읽고 처음으로 돌아가 30쪽까지만 읽어 보라. 얼마나 넌센스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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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게이하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2
윌라 캐더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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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루시’는 죽어서도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인물이다. 밝고 쾌활하고 삶에 용감하고 도전적이었던, 훌륭한 피아니스트로서 기대 받는 재목이었다.
루시의 캐릭터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는 ‘열정’이다. 동경의 대상과 사랑에 빠졌던 ‘성덕’이었고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으로 고통받는 로맨틱한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우리의 주인공에게도 흠결이 있어 더욱 인간적이다. 열정적이었던 만큼 루시는 현실 감각이 남들 같지 않았다. 가족의 생계에 관해 언니와 아버지에게 모든 걸 떠넘기던 루시는 사랑하던 남자의 죽음 이후 속절없이 무너져내린다.

세계적인 성악가 ‘세바스찬’과 어릴 적 친구이면서 부유한 집안의 남자 ‘해리’는 루시와 더불어 사랑의 삼각 구도를 이룬다. 드러나지 않은 과거에 아파하면서 일찌감치 사고로 퇴장하는 세바스찬은 여러모로 루시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로 하여금 루시는 삶을 호흡하고 사랑에 눈을 뜬다. 성공적인 사업가이면서 열렬한 순애보적 인물인 해리는 루시에게 버림받고 곧바로 그녀를 외면한다. 그리고 즉시 후회한다. 사랑으로 인한 고통은 사랑으로 치유해야 마땅하지만 자존심 강한 해리는 스스로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는다. 루시에 대한 증오를 일구려 할수록 사랑은 더욱 타오른다. 루시의 죽음 이후 해리는 죽은 자와 다름없는 삶을 그저 살아내기 바쁘다.

루시에게 언니 ‘폴린’만큼의 현실 감각이 있었더라면 세바스찬의 죽음이 가져다 준 위기를 잘 극복하지 않았을까. 루시에게 사랑이 몽상과 꿈이었다면 생존과 삶은 현실이었다. 그 사이의 균형을 잘 맞췄더라면 루시는 자신의 어이없는 죽음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세계적인 성악가를 통해 세속적인 성공을 원한 게 아닌 루시에게 어쩌면 이런 평가는 너무 가혹한 걸까. 루시가 원한 건 그저 사랑이었을 뿐.

열정을 태울 것인가, 아니면 열정에 타버릴 것인가. 루시는 열정에 타버렸다. 짧은 삶을 살다 간 루시를 주변 사람들이 오래 기억하는 건 그녀의 열정을 동경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면에 어떤 폭력이 숨겨져 있든, 어떤 불행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있든, 순수한 열정은 그만큼 귀하게 보인다. 빛에 현혹되어 온몸을 사르는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은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만큼 순수한 열정에 스스로를 희생시키는 용기는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게 아닐는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루시가 세바스찬을 만나고 사랑하게 되는 1부의 대미는 세바스찬의 죽음이 장식한다. 사랑하는 남자를 잃고 난 후 루시의 삶을 좇는 2부 마지막에서 루시는 죽는다. 그리고 긴 세월이 흐른 후, 충분히 나이가 든 해리가 과거의 루시를 회상하는 3부로 마무리된다. 짧은 분량이지만 매 쪽마다 감정이 뜨겁다. 작가 ‘윌라 캐더(Willa Cahter)’의 대표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번역된 작품이 작가의 대표작 두세 편에 불과한 현실에서 이런 초역은 참으로 반갑고 귀하다.

작가가 거의 말년(1935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작가 자신에게도 루시는 의미있는, 노년에 백일몽 같은 지난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캐릭터였을 것 같다. 내 삶은 어땠을까, 열정적이었을까, 아니면 뒤로 물러서서 계산하고 눈치보고 있었을까. 우리 모두에게 언젠가 그런 때가 오겠지. 그때 우리는 지나온 삶을 어떻게 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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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의 세계
위수정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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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는데 작가의 신춘문예 등단작인 중편, <무덤이 조금씩>이 수록된 걸 보면 작가의 첫 소설집인 듯하다.

새해 첫 소설인데 된통 걸렸다. 편편이 어렵다. 불친절하다고도 할 수 있겠는데 다른 독자는 여백이 많다고도 할 수 있겠다.
감정을 알 수 없는 인물들, 개연성 떨어지고 산발적이며 일관성 없는 사건들, 울퉁불퉁 매끄럽지 않은 진행, 툭 툭 끊어지는 구성과 모호한 결말.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긴장을 하긴 했는데, 이게 이야기 자체가 주는 긴장감인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싶은, 그 끝을 확인하고 싶은 독자로서의 조마조마한 마음인지는 도통 모르겠다. 어둡고 시니컬한 분위기에 현실을 초월한, 꿈을 꾸듯 몽롱한 감각엔 신인답지 않은 노련함이 보이지만, 이야기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하기보다 오로지 작가 자신만을 위한 글을 쓰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이야기는 소통이다. 독자들을 위해 쓰는 게 아니라면 작가는 누구를 위해 이야기를 짓고 쓰나. 물론 작가 자신이 즐기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고 출품을 위한 글쓰기는 평단을 의식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독자를 소외시키는 문학이 의미가 있을까. 단지 독자의 자격에 관한 문제일까.

영화감독이고 만화 작가이면서 글쓰기 강사, 이야기 컨설턴트인 ‘브라이언 맥도널드(Brian McDonald)’가 쓴 창작에 관한 실용서 ≪보이지 않는 잉크(Invisible Ink) https://soulflower71.tistory.com/518≫가 생각난다. 작가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야기 외적인 것들’은 모두 이야기 자체이며 이야기를 돕고 이야기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등장해야 한다는 거다. 말하자면 작품 속 소품들, 대화, 상황들, 유머, 어떤 일의 방식, 시간의 흐름 같은 주변적인 것들이 함부로 쓰이거나 등장해서는 안 되며 나름의 상징과 의미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 더불어 그런 요소들은 이야기 자체에 밀접하게 상관이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사족이나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
작가는 이렇게도 덧붙인다.
‘분명하게 전달하라.' '여러분의 관객(독자)들을 존경하라.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 아니다. 작품을 전달해야 하는 것이 여러분의 일이다'.

이런 책을 만나는 대부분의 경우, 난 내 탓을 해버린다. 저질의 독자, 미숙한 독자, 아직 훈련이 덜 된 독자. 이 책에 대해서도 그래야 할까.

짧은 기록이나마 독서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이 책을 다시 읽으려고 했으나, 책을 다시 펴자마자 피곤해진다. 어떤 식으로든 ‘내 것’이 되지 않은 이야기를 굳이 또 읽어야 하나. 물론 어떤 이야기인지 어느 정도 가늠이 되는 책들은 재독의 이유가 충분하다. 다시 읽음으로서 의미는 더욱 확장되고 감상은 깊어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인생은 짧고 책 읽을 시간 역시 무한하지 않다. 세상에 읽을 책은 무궁하고 이미 내 방에도 읽지 않은 책들이 쌓여 있는데, 굳이?

도발적이고 성적인 긴장감이 충만한 <풍경과 사랑>이라는 단편은 기억에 남는다. 뭐, 아주 대단히 빼어난 작품이란 얘긴 아니고, 작품집 안에서 그나마 말이 되고 그럭저럭 읽을 만했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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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가 제철 트리플 14
안윤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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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마지막 책일 듯.
'자음과모음’ 출판사의 ‘트리플’ 시리즈 중 한 권. 이름대로 한 작가의 단편 세 편과 에세이 한 편이 실려 있다. 얇은 책이라 집어 들기 편한데, 책들과 책들 사이에 쉼표처럼 읽기 수월한 기획이다. 매 권권마다 호불호가 갈리긴 해도 대체적으로 이 시리즈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안윤’ 작가는 수상집 형식의 다른 책에서 만난 작가다. 단편 하나를 읽었을 뿐인데 아주 좋았고 인상 깊었으며 호기심이 일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이 작가의 책을 한동안은 기다릴 것 같다.

이 책을 아우르는 키워드가 있다면, 그건 (죽음으로 인한) 이별과 그리움일 것이다. 세 편 모두 누군가를 잃어서 남겨진 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아직도 슬픔을 태우고 난 재처럼 남은 그리움을 안고 있다. 공통적으로 죽음이라는 소재가 등장하지만 작가는 그것에 크게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작가가 집중하고 있는 건 죽음, 그 이후의 일들이다. 그 후의 감정, 그 후의 기억, 그 후에 이어질 삶. 어떻게든, 꾸역꾸역 이어질 인생. 그것을 기다리고 기대해야 하는가, 그래도 되는가, 그럴 만한가의 질문.

사람은 태어나면서 죽음을 향해 살아간다.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죽을 거라는, 그래서 결국 사라질 거라는 사실은 어느 무엇보다 확실하다. 그건 우리의 정해진 미래다. 인간을 포함한 유기생명체 뿐 아니라 사물들도 마찬가지다. 그것들 역시 제 몫을 다하고 쓸모를 잃게 되면 언젠가는 버려진다. 그리고 사라진다.

그래서 작가는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부연을 하지 않는다. 그런 사실들이 중요한 순간도 있겠지만, 작가가 그려내는 세계에선 그렇지 않다. 그저 죽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그렇게 사라졌다는 사실. 그래서 누군가 더 이상 그를 만날 수 없다는, 그러므로 남은 평생 그를 그리고 가끔 기억을 더듬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만이 문제가 된다.

죽은 자들은 서서히 잊힐까. 그래야만 한다. 아주 잊히지 않을 정도로만, 문득 떠올라 잠깐 울며 그리워 할 만큼의 흔적만 남기고 잊혀야 한다. 그래야 뒤에 남은 자, 살아서 남겨진, 아직 못 죽어 뒤처진 자들이 산다.
삶은 계속 되어야 한다.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고 해도 삶이 우선되어야 한다. 살다가 가는 거지, 죽은 채로 가는 것이 아니다. 가기 위해서는 먼저 ‘살다가’의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그것도 ‘잘’ 살면 더 좋다. 잘 사는 게 어떤 건지 각자의 형편과 기준에 맞추도록 해야겠지만 일단 살아있다면 살아야 한다. 그게 삶에 대한 예의이고 죽음에 대한 예의이다. 최선을 다해 살다가 맞이하는 죽음. 죽음도 그런 죽음이길 바란다. 누군가의 생일과 다른 누군가의 기일이 같을 때, 생일상을 먼저 차리는 <달밤> 속 화자처럼 삶이 죽음보다 앞서는 이유가 한두 가지 더 있다고 해도, 망자들은 화내지 않을 것이다.

뒤에 남은 자들이 위로를 받는 것도 중요하다. 일어설 수 있다고, 슬픔을 극복할 수 있다고, 언젠가는 그럴 거라고, 종종 미친 듯 그리움을 겪으면서도 살 수 있다고, 그렇게 다시 그리고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어야 한다. 그들이 가장 큰 위로를 받는 순간은 자신의 슬픔을 아는 누군가를 만나고 그 감정을 나눌 때이다.
<방어가 제철> 속 화자(안라)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오빠를 사랑하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 후에 자신이 떠안은 똑같은 무게의 두려움과 그리움을 ‘정오’ 역시 갖고 있었음을 알게 되고 진정한 위로를 받는다. 앞으로 안라의 삶은 오빠 ‘재영’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벗어버리고 자신이 용서받았음으로 아주 조금 편해질 것이다.

<만화경> 속 ‘나경’은 생면부지의 타인(미리내)의 죽음을 애도한다. 고달프고 아슬아슬한 삶의 고개를 힘겹게 넘고 있는 나경은 자신에게 주위의 타인들에게 손을 내밀고 안녕을 물어줄 여유가 아직은 남아 있음을 확인한다. 매우 안심되는 순간이다.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에서는 소설 뒤에 존재하는 작가가 보인다. CoVid-19가 대유행하던 시기, 사람들의 죽음을 단지 수치로 환산해 유통하듯 정보를 교환하던 때가 있었다. 익명성 뒤에 숨은 몰개성, 비인간화의 또 다른 증거 앞에서 묵도하는 작가가 보인다. 그 숱한, 허무하고 의미없는 죽음들 뒤에 생존의 의미를 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끝을 아는 이야기를 계속 읽어야 하나.

우리가 마지막의 의지까지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에게 마지막의 선의마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모두에게 ‘최후’를 위해 마지막의 선의는 간직하고 있음을 믿는다. 아주 작은 ‘씨앗’이지만 가능성은 무한대로 존재함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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