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게이하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2
윌라 캐더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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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루시’는 죽어서도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인물이다. 밝고 쾌활하고 삶에 용감하고 도전적이었던, 훌륭한 피아니스트로서 기대 받는 재목이었다.
루시의 캐릭터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는 ‘열정’이다. 동경의 대상과 사랑에 빠졌던 ‘성덕’이었고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으로 고통받는 로맨틱한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우리의 주인공에게도 흠결이 있어 더욱 인간적이다. 열정적이었던 만큼 루시는 현실 감각이 남들 같지 않았다. 가족의 생계에 관해 언니와 아버지에게 모든 걸 떠넘기던 루시는 사랑하던 남자의 죽음 이후 속절없이 무너져내린다.

세계적인 성악가 ‘세바스찬’과 어릴 적 친구이면서 부유한 집안의 남자 ‘해리’는 루시와 더불어 사랑의 삼각 구도를 이룬다. 드러나지 않은 과거에 아파하면서 일찌감치 사고로 퇴장하는 세바스찬은 여러모로 루시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로 하여금 루시는 삶을 호흡하고 사랑에 눈을 뜬다. 성공적인 사업가이면서 열렬한 순애보적 인물인 해리는 루시에게 버림받고 곧바로 그녀를 외면한다. 그리고 즉시 후회한다. 사랑으로 인한 고통은 사랑으로 치유해야 마땅하지만 자존심 강한 해리는 스스로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는다. 루시에 대한 증오를 일구려 할수록 사랑은 더욱 타오른다. 루시의 죽음 이후 해리는 죽은 자와 다름없는 삶을 그저 살아내기 바쁘다.

루시에게 언니 ‘폴린’만큼의 현실 감각이 있었더라면 세바스찬의 죽음이 가져다 준 위기를 잘 극복하지 않았을까. 루시에게 사랑이 몽상과 꿈이었다면 생존과 삶은 현실이었다. 그 사이의 균형을 잘 맞췄더라면 루시는 자신의 어이없는 죽음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세계적인 성악가를 통해 세속적인 성공을 원한 게 아닌 루시에게 어쩌면 이런 평가는 너무 가혹한 걸까. 루시가 원한 건 그저 사랑이었을 뿐.

열정을 태울 것인가, 아니면 열정에 타버릴 것인가. 루시는 열정에 타버렸다. 짧은 삶을 살다 간 루시를 주변 사람들이 오래 기억하는 건 그녀의 열정을 동경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면에 어떤 폭력이 숨겨져 있든, 어떤 불행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있든, 순수한 열정은 그만큼 귀하게 보인다. 빛에 현혹되어 온몸을 사르는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은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만큼 순수한 열정에 스스로를 희생시키는 용기는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게 아닐는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루시가 세바스찬을 만나고 사랑하게 되는 1부의 대미는 세바스찬의 죽음이 장식한다. 사랑하는 남자를 잃고 난 후 루시의 삶을 좇는 2부 마지막에서 루시는 죽는다. 그리고 긴 세월이 흐른 후, 충분히 나이가 든 해리가 과거의 루시를 회상하는 3부로 마무리된다. 짧은 분량이지만 매 쪽마다 감정이 뜨겁다. 작가 ‘윌라 캐더(Willa Cahter)’의 대표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번역된 작품이 작가의 대표작 두세 편에 불과한 현실에서 이런 초역은 참으로 반갑고 귀하다.

작가가 거의 말년(1935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작가 자신에게도 루시는 의미있는, 노년에 백일몽 같은 지난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캐릭터였을 것 같다. 내 삶은 어땠을까, 열정적이었을까, 아니면 뒤로 물러서서 계산하고 눈치보고 있었을까. 우리 모두에게 언젠가 그런 때가 오겠지. 그때 우리는 지나온 삶을 어떻게 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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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의 세계
위수정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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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는데 작가의 신춘문예 등단작인 중편, <무덤이 조금씩>이 수록된 걸 보면 작가의 첫 소설집인 듯하다.

새해 첫 소설인데 된통 걸렸다. 편편이 어렵다. 불친절하다고도 할 수 있겠는데 다른 독자는 여백이 많다고도 할 수 있겠다.
감정을 알 수 없는 인물들, 개연성 떨어지고 산발적이며 일관성 없는 사건들, 울퉁불퉁 매끄럽지 않은 진행, 툭 툭 끊어지는 구성과 모호한 결말.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긴장을 하긴 했는데, 이게 이야기 자체가 주는 긴장감인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싶은, 그 끝을 확인하고 싶은 독자로서의 조마조마한 마음인지는 도통 모르겠다. 어둡고 시니컬한 분위기에 현실을 초월한, 꿈을 꾸듯 몽롱한 감각엔 신인답지 않은 노련함이 보이지만, 이야기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하기보다 오로지 작가 자신만을 위한 글을 쓰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이야기는 소통이다. 독자들을 위해 쓰는 게 아니라면 작가는 누구를 위해 이야기를 짓고 쓰나. 물론 작가 자신이 즐기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고 출품을 위한 글쓰기는 평단을 의식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독자를 소외시키는 문학이 의미가 있을까. 단지 독자의 자격에 관한 문제일까.

영화감독이고 만화 작가이면서 글쓰기 강사, 이야기 컨설턴트인 ‘브라이언 맥도널드(Brian McDonald)’가 쓴 창작에 관한 실용서 ≪보이지 않는 잉크(Invisible Ink) https://soulflower71.tistory.com/518≫가 생각난다. 작가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야기 외적인 것들’은 모두 이야기 자체이며 이야기를 돕고 이야기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등장해야 한다는 거다. 말하자면 작품 속 소품들, 대화, 상황들, 유머, 어떤 일의 방식, 시간의 흐름 같은 주변적인 것들이 함부로 쓰이거나 등장해서는 안 되며 나름의 상징과 의미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 더불어 그런 요소들은 이야기 자체에 밀접하게 상관이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사족이나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
작가는 이렇게도 덧붙인다.
‘분명하게 전달하라.' '여러분의 관객(독자)들을 존경하라.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 아니다. 작품을 전달해야 하는 것이 여러분의 일이다'.

이런 책을 만나는 대부분의 경우, 난 내 탓을 해버린다. 저질의 독자, 미숙한 독자, 아직 훈련이 덜 된 독자. 이 책에 대해서도 그래야 할까.

짧은 기록이나마 독서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이 책을 다시 읽으려고 했으나, 책을 다시 펴자마자 피곤해진다. 어떤 식으로든 ‘내 것’이 되지 않은 이야기를 굳이 또 읽어야 하나. 물론 어떤 이야기인지 어느 정도 가늠이 되는 책들은 재독의 이유가 충분하다. 다시 읽음으로서 의미는 더욱 확장되고 감상은 깊어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인생은 짧고 책 읽을 시간 역시 무한하지 않다. 세상에 읽을 책은 무궁하고 이미 내 방에도 읽지 않은 책들이 쌓여 있는데, 굳이?

도발적이고 성적인 긴장감이 충만한 <풍경과 사랑>이라는 단편은 기억에 남는다. 뭐, 아주 대단히 빼어난 작품이란 얘긴 아니고, 작품집 안에서 그나마 말이 되고 그럭저럭 읽을 만했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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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가 제철 트리플 14
안윤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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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마지막 책일 듯.
'자음과모음’ 출판사의 ‘트리플’ 시리즈 중 한 권. 이름대로 한 작가의 단편 세 편과 에세이 한 편이 실려 있다. 얇은 책이라 집어 들기 편한데, 책들과 책들 사이에 쉼표처럼 읽기 수월한 기획이다. 매 권권마다 호불호가 갈리긴 해도 대체적으로 이 시리즈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안윤’ 작가는 수상집 형식의 다른 책에서 만난 작가다. 단편 하나를 읽었을 뿐인데 아주 좋았고 인상 깊었으며 호기심이 일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이 작가의 책을 한동안은 기다릴 것 같다.

이 책을 아우르는 키워드가 있다면, 그건 (죽음으로 인한) 이별과 그리움일 것이다. 세 편 모두 누군가를 잃어서 남겨진 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아직도 슬픔을 태우고 난 재처럼 남은 그리움을 안고 있다. 공통적으로 죽음이라는 소재가 등장하지만 작가는 그것에 크게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작가가 집중하고 있는 건 죽음, 그 이후의 일들이다. 그 후의 감정, 그 후의 기억, 그 후에 이어질 삶. 어떻게든, 꾸역꾸역 이어질 인생. 그것을 기다리고 기대해야 하는가, 그래도 되는가, 그럴 만한가의 질문.

사람은 태어나면서 죽음을 향해 살아간다.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죽을 거라는, 그래서 결국 사라질 거라는 사실은 어느 무엇보다 확실하다. 그건 우리의 정해진 미래다. 인간을 포함한 유기생명체 뿐 아니라 사물들도 마찬가지다. 그것들 역시 제 몫을 다하고 쓸모를 잃게 되면 언젠가는 버려진다. 그리고 사라진다.

그래서 작가는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부연을 하지 않는다. 그런 사실들이 중요한 순간도 있겠지만, 작가가 그려내는 세계에선 그렇지 않다. 그저 죽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그렇게 사라졌다는 사실. 그래서 누군가 더 이상 그를 만날 수 없다는, 그러므로 남은 평생 그를 그리고 가끔 기억을 더듬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만이 문제가 된다.

죽은 자들은 서서히 잊힐까. 그래야만 한다. 아주 잊히지 않을 정도로만, 문득 떠올라 잠깐 울며 그리워 할 만큼의 흔적만 남기고 잊혀야 한다. 그래야 뒤에 남은 자, 살아서 남겨진, 아직 못 죽어 뒤처진 자들이 산다.
삶은 계속 되어야 한다.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고 해도 삶이 우선되어야 한다. 살다가 가는 거지, 죽은 채로 가는 것이 아니다. 가기 위해서는 먼저 ‘살다가’의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그것도 ‘잘’ 살면 더 좋다. 잘 사는 게 어떤 건지 각자의 형편과 기준에 맞추도록 해야겠지만 일단 살아있다면 살아야 한다. 그게 삶에 대한 예의이고 죽음에 대한 예의이다. 최선을 다해 살다가 맞이하는 죽음. 죽음도 그런 죽음이길 바란다. 누군가의 생일과 다른 누군가의 기일이 같을 때, 생일상을 먼저 차리는 <달밤> 속 화자처럼 삶이 죽음보다 앞서는 이유가 한두 가지 더 있다고 해도, 망자들은 화내지 않을 것이다.

뒤에 남은 자들이 위로를 받는 것도 중요하다. 일어설 수 있다고, 슬픔을 극복할 수 있다고, 언젠가는 그럴 거라고, 종종 미친 듯 그리움을 겪으면서도 살 수 있다고, 그렇게 다시 그리고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어야 한다. 그들이 가장 큰 위로를 받는 순간은 자신의 슬픔을 아는 누군가를 만나고 그 감정을 나눌 때이다.
<방어가 제철> 속 화자(안라)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오빠를 사랑하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 후에 자신이 떠안은 똑같은 무게의 두려움과 그리움을 ‘정오’ 역시 갖고 있었음을 알게 되고 진정한 위로를 받는다. 앞으로 안라의 삶은 오빠 ‘재영’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벗어버리고 자신이 용서받았음으로 아주 조금 편해질 것이다.

<만화경> 속 ‘나경’은 생면부지의 타인(미리내)의 죽음을 애도한다. 고달프고 아슬아슬한 삶의 고개를 힘겹게 넘고 있는 나경은 자신에게 주위의 타인들에게 손을 내밀고 안녕을 물어줄 여유가 아직은 남아 있음을 확인한다. 매우 안심되는 순간이다.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에서는 소설 뒤에 존재하는 작가가 보인다. CoVid-19가 대유행하던 시기, 사람들의 죽음을 단지 수치로 환산해 유통하듯 정보를 교환하던 때가 있었다. 익명성 뒤에 숨은 몰개성, 비인간화의 또 다른 증거 앞에서 묵도하는 작가가 보인다. 그 숱한, 허무하고 의미없는 죽음들 뒤에 생존의 의미를 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끝을 아는 이야기를 계속 읽어야 하나.

우리가 마지막의 의지까지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에게 마지막의 선의마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모두에게 ‘최후’를 위해 마지막의 선의는 간직하고 있음을 믿는다. 아주 작은 ‘씨앗’이지만 가능성은 무한대로 존재함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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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6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정성희 옮김 / 해문출판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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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엉거시풀만 해도 어찌나 지독하게 안 뽑히는… 그 뿌리가 땅속 깊숙이 뻗어 있기 때문이에요. 아주 깊숙이, 흙 속으로 계속 뻗어나가는 거죠.”
“예. 그 말씀이 맞습니다.” 경감이 대꾸했다. “아주 깊숙이 멀리… 멀리… 옛날까지 뻗어나가 있는 거죠. 이번 살인사건 말입니다. 18년 동안.”
“아마 그보다 더 오랜 옛날부터였는지도 모르지요.” 마플양이 그의 말을 이어받았다. (269쪽)❞

애거서 크리스티 다시 읽기. 스물한 번째.

‘그웬다’와 ‘자일즈’는 뉴질랜드에서 막 결혼해 영국에 정착하려는 신혼부부다. 해외 출장 중인 자일즈를 대신해 영국 남부 해변 마을 ‘딜머스’에서 적당한 집을 찾은 그웬다. 하지만 생전 처음 본 장소에서 이상한 기시감이 그녀를 압도한다. 거실에서 식당으로 가는 길의 가려진 출입문의 존재를 알아맞히고 정원의 숨겨진 계단을 찾아내더니, 급기야 열리지 않는 벽장 안에 발려진 벽지의 무늬를 정확히 기억해 낸다. 자신에게 일종의 초능력이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미친 건 아닌지 의심하는 그웬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연극을 관람하던 중, 어릴 적 기억이 폭발한다. 이층의 계단 난간 아래로 내려다 본 금발 여인의 시체. 목이 졸려 죽은 그녀의 이름은 바로 ‘헬렌’.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 ‘내 눈이 보이지 않아. 그녀는 너무 젊어서 죽었어.’
하지만 그웨니는 헬렌이 누군지 전혀 모른다.

우리의 명탐정 ‘미스 제인 마플(Miss Jane Marple)’은 자신이 미친 게 아닐까 겁을 먹은 그웬다에게 가장 현실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기억하지 못할 뿐, 그웬다는 어릴 적 그 집에 살았었고, 이름만 기억하는 헬렌은 같이 살았던 사람이었다는 것. 잠깐의 조사로 미스 마플의 말은 사실임이 밝혀진다. 세 살의 그웬다는 1년 남짓한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으며 헬렌은 그녀의 새어머니였다. 하지만 그들이 만난 과거의 사람들은 헬렌이 다른 남자와 도망친 것으로 알고 있다. 헬렌의 부재는 자발적인 가출일까, 아니면 살인일까.
젊은 부부는 과거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사건에 호기심을 갖지만 미스 마플은 경고한다. ‘잠자는 살인’은 깨우지 말라고. 그것은 언제든 깨어나 현실을 침범해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하지만 ‘판도라’ 이후로, 호기심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진실을 알고자 하는 부부를 미스 마플은 돕기로 한다.
과연 18년 전에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도입부가 인상적이다. 인상적이라는 말이 적당하지 않은 게 정말로 매력적이다. 단숨에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인다. 고딕 소설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면서도 어딘지 음산하고 기괴하다. 그웬다의 시점으로 기억되는 헬렌의 시체와 연극의 대사를 읊조리는 익명의 남자 목소리를 상상하면 한창때의 ‘다리오 아르젠토(Dario Argento)’를 연상케 하는 구석이 있다.

해결되지 않았거나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지나간 과거의 범죄가 어떤 계기로 현실로 소환되는 상황은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 중의 하나다. 그리고 범죄 해결 이전에 범죄가 과연 성립되는가, ‘진짜로 범죄가 있었을까’ 하는 의심의 플롯 역시 작가의 작품들 속에선 드물지 않았다. 이런 재활용, 혹은 단골 설정의 익숙함이 지배하지만 이런 작품들의 묘미는 역시 불완전하고 왜곡된 기억을 더듬고 세월을 거슬러 올라 진실과 거짓들이 난무하고 교착(交錯)된 증언들 속에서 하나뿐인 유일한 진실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작가는 독자들을 배반하지 않았다.

전형적인 ‘후더잇(whodunit)’의 구조를 지니면서도 기괴함과 슬픔이 황금 비율로 섞인 분위기가 압도하는, 인상적인 수작이다. 작가의 장점, 특기가 골고루, 알맞게 발휘되어서 ‘묘기 대잔치’라 해도 무방하다. 매력적인 도입부를 지나면 음산한 분위기 위로 잘 짜인 범죄 드라마가 진행되는데, 용의자들을 나열하고 그들에게 의심 갈 상황을 만드는 방식, 중요한 단서들을 대수롭지 않은 척 제공하는 동시에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방식들이 모두 ‘크리스티 적(-的)’이다.

특히 악의, 질투, 욕망, 이기심, 그리고 사랑이 뒤범벅된 범죄는 어둡고 추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범인의 심리와 동기가 잘 그려졌다.
사랑이 과하면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고통일 수 있으니, 그것이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아닌 건 분명하다. 이기적이지 않으면 사랑이 아닌 걸까. 이기심을 버린다면 사랑으로 고통받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작가의 특기인 로맨스+유머를 걷어낸 건조하고 음울한 분위기와 매우 잘 어울려 슬픔과 고통의 묘한 여운을 남긴다.

이 글 서두에 발췌, 인용된 두 인물의 대화는 인간의 악마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에 대한 생각의 단초를 제공한다.
인간의 성격(범죄성향 같은 악마적인 면을 포함하여)은 단기간에 형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타고난 성정에 자라면서 받은 외부의 영향이 더해진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사는 동안 계속 변한다.
인간의 본성에 선함과 악함이 공존한다는 가설을 사실로 친다면, 선한 부분과 악한 부분은 개인을 둘려싼 여러 조건들(내재적, 외부적)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발전하거나 퇴보할 것이다. 선한 부분보다 악한 부분이 더 두드러지는 환경 속에서 개인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할까. 그의 악한 행동을 제지하고 옳지 못한 동기를 제거하려면 과연 성장의 어떤 단계에 수정이 가해져야 할까.
이런 상상 만으로도 여러 소설, 영화가 떠오른다. 동서고금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독자나 관객에게 들려주고 보여주고 궁극적으로 입증하려고 한 것은 (심지어 선한 인간이 악함을 눌러 이기는 교훈적인 이야기조차) 인간의 선함이 아닌 악함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악함은 대개 그 뿌리가 길고 깊어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면, 선한 행동은 이기심, 증오, 질투와 분노 등을 기어코 눌러내야 어렵사리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존 웹스터(Jong Webster)’의 희곡, ≪말피 공작부인(the Duchess of Malfie)≫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아포리즘으로 (꽤 중요하게) 인용된다.
어린 그웬다가 들은 범인의 독백은 아래와 같다.

❝Cover her face.
Mine eyes dazzle.
She died young❞

그녀의 얼굴을 덮어라.
내 눈이 보이지 않아.
그녀는 젊어서 죽었다.

(‘존 웹스터’, ≪말피 공작부인≫, 4막2장)


발표 순으로 보면 가장 마지막(1976년)에 세상에 나온 작품이다. 작가의 가장 중요한 캐릭터들 중의 한 명인 ‘미스 제인 마플’의 마지막 책이지만, 실제로 이 작품은 40년대에 쓰였다. 집필 순서대로라면 미스 마플의 마지막 활약을 담은 책은 71년 작인 ≪복수의 여신(Nemesis) https://soulflower71.tistory.com/270≫이다.

2차세계대전 중에 작가는, 자신의 사후에 발표하기로 하고 두 작품의 원고를 써놓는데, 한 권이 이 책이고 다른 한 권은 ‘에르큘 포와로(Hercule Poirot)’의 마지막 책인 ≪커튼(Curtain)≫이다. 작가의 사후, 이 작품보다 일 년 전(75년)에 출간된 커튼에서 포와로는 죽음을 맞는데, 실제 인물인 양, 신문에 부고 기사까지 실린다.

실제로 이 작품이 쓰인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설왕설래가 많았던 모양이다. 크리스티 전문가들에 의하면 1940년이라고 보는 견해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43년 작인 ≪움직이는 손가락(the Moving Finger)≫이 살짝 언급되는 걸 보면 그 이후인 것 같기도 하고, 68년 작 ≪엄지손가락의 아픔(By the Pricking of My Thumbs)≫의 도입부가 그대로 이 책에서 인용되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62년 작, ≪깨어진 거울(the Mirror Crack’d From Side To Side)≫에 죽은 걸로 나오는 ‘밴트리 대령’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등, 인물들의 타임라인에 혼란이 온 것을 보면, 그 이전에 쓰인 것만은 분명하다.

사족.

이 작품을 위해 작가가 염두에 둔 제목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이 작품 다섯 번째 챕터의 제목 ‘회상 속의 살인(Murder in Retrospect)’이 그 하나이고, 존 웹스터의 희곡에 나오는 대사 ‘그녀의 얼굴을 덮어라(Cover Her Face)’도 물망에 올랐다고.

‘회상 속의 살인’은 작가의 43년 작, ≪다섯 마리의 아기 돼지(Five Little Pigs) https://soulflower71.tistory.com/498≫의 미국판 제목이 되었고, ‘그녀의 얼굴을 덮어라’는 나중에 ‘P.D. 제임스’의 데뷔작(62년) 제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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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
모드 방튀라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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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을 쓴 적이 없으면서 글을 쓴다 믿었고
사랑한 적이 없으면서 사랑한다 믿었으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닫힌 문을 마주한 채 기다리기만 했다.』

소설 서두에 나오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연인≫ 속 문장은 화자를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용이다.

화자는 두 자녀를 둔, 결혼 15년 차의 주부다. 경제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고 그녀 자신도 좋은 직업을 갖고 있다. 남편에게도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바쁘고 정신없고, 익숙함에 매몰된 무관심을 보이다가 그런 와중에도 알맞은 순간에 사랑을 표현하는, 오히려 다정한 남자다.
그럼에도 화자는 매우 불행하다. 아니, 스스로 불행하다 느낀다.

화자는 남편의 사랑을 끊임없이 의심한다. 남편이 자신을 떠날까 두렵고 불안하다. 사소한 행동에 실제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려 든다. 작은 농담에 상처 입고, 별 것 아닌 무관심에 분노한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다니는 건 아닌지 살피고 덫을 놓고 시험하려 든다. 그러면서 자신은 다른 남자들과 섹스를 한다. 남편을 벌주기 위해서.

화자의 사랑엔 나르시시즘적인 면이 있다. 그 사랑의 대상은 정작 남편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자신의 모습이다. 화자 자신이 고백하듯(134쪽) 상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랑에 중독된’ 자신의 상황이 오로지 문제가 된다. 화자의 가장 큰 결핍은 자신이 그런 상태임을 확인해줄 ‘결핍’이 없다는 것이다. 무언가 모자란다는 건 완벽에 다다르기 위한 동력이다. 그게 없으니 매사 지루하고 진부하고 불안하고 두렵다. 사랑을 통해 실존을 확인해야 하는 화자는 (우리 옛말에)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는’ 것처럼 보인다. 걱정을 사서 한다.

결핍이 없음이 결핍인 화자는 미친 걸까. 어느 의미에서는 그렇게 보인다. 완전 광기는 아니더라도 평범한 멘탈은 아니다. 스스로 불행의 여지를 만들어 자신을 고문한다. 남편을 사랑한다 목청껏 외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화자의 감정은 가학적이기도, 한편으로는 피학적이다. 작품 속에서 남편의 문제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반면 화자의 문제는 사백 쪽 가까운 본문에 거의 빼곡하다.

작가는 ‘사랑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같다. 영원한 사랑이 있을까. ‘위대하고 진실한 사랑’을 논할 때, ‘변함없음’이라는 조건은 언제나 상위일까. 변함없는 사랑이 마냥 좋은 걸까. 언제나 긴장하고 마음 졸이게 만드는 사랑이 과연 행복과 만족을 보장할까. 그런 사랑을 통한 존재의 의미, 존재함에 있어서 사랑의 가치는 언제나 상응할까.
제정신이 아닌 듯 보이는 화자를 통해, 정신적으로 남자에게 완전히 종속된 여자의 정신이 얼마나 피폐해질 수 있는지, 여성의 ‘의존성’, ‘미성숙함’을 꼬집으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을 페미니즘 문학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눈에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사랑을 가장한 ‘폭력’이었다. 이 작품은 사랑의 이면에 도사린 폭력성과 가학성, 그 양가의 균형이 깨졌을 때 드러나는 폭력의 양상을 고발하는 이야기로 읽힌다. 화자는 스스로를 고문함과 동시에 남편 역시 가해자, 피의자로 만든다. 엄연한 정신적 폭력이다. 화자는 남편이 자신을 실망시킬 때마다 나름의 복수도 준비하는데 그걸 일일이 수첩에 기록하는 기벽을 보여준다. 사랑이 끔찍한 폭력으로 변질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 같은 거라, 언제 어떤 얼굴을 드러낼지 아무도 모른다.

‘사이코 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시종일관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 마냥 위험스럽게만 보이는 건 아니다. 문득 냉정하고 정신적 균형을 찾는 순간도 있다. 블랙 코미디 같은 면모는 행간에 스며 있는 엉뚱한 유머로 확인된다.

독특한 소설이다. 최소한의 인물, 경제적인 배경으로 인물의 이상 심리에 파고든다. 시종일관 시선을 화자에게 두는 건 다소 피곤하다. 열정이 지나쳐 광기를 넘나드는 인물의 내면은 흥미로우면서 지루하다. 이야기 흐름에 완급이 필요하지 않았나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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