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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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년 일흔세 번째 책.

 

★★☆

 

김연수의 작품집. 여덟 편의 작품이 실렸다.

오롯이 개인적인 감상이다.

 

작가의 전작을 섭렵한 건 아니지만, 내가 읽은 김연수의 작품집 중에서 가장 이질적이다. 뭔가 새로운 걸 시도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고 처음 든 느낌. ‘백가흠의 소설집, 같았다를 읽고 난 후와 비슷했다. 한국 문학계에서 대가대접은 조금 이를지라도 노련한 중견소리는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이렇게 무너지나, 하는 생각. 어딘지 아등바등해 보인다고나 할까, 처연해 보인다고나 할까. (내가 읽은) 전작들에 비하면 약간 쥐어짜는 듯, 안간힘을 쓰는 듯해서 안쓰럽다는 생각도 조금은 했던 것 같다. 작가의 개성이나 장점들이 이 작품집에선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작품들이 공허하다. 실체가 없다. 아이디어와 설정, 개념을 소개하고 끝나는 이야기들이 많다.

심하게 표현하면 겉만 번드르르하다. 뭔가 알록달록 그럴 듯한 포장을 벗기고 나면 모래 한 줌 들어 있는 선물 상자 같다.

 

관념적이고 명확하지 않은 문장들도 한몫한다. 좋게 말하면 시적이고 감각적이라 할 수 있겠으나, 당의(糖衣)를 입힌 듯, 현혹하지만 솔직하지 못한 문장들이 많이 거슬린다. 달큰하고 화사한 색깔의 솜사탕을 주먹에 쥐면 설탕 한 줌 남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체 비슷하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해왔으나, 이 작품집에선 하루키 짝퉁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올드한 느낌이 강하다. 작가의 경력이나 연령을 고려하면 이상할 것도, 딱히 거슬릴 것도 아니지만 시대의 흐름이나 인식과 시각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어떤 작품에서 작가는 여전히 과거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젊은 척을 하라는 게 아니다. 현재의 물결에 잘 적응한 작가로서의 스탠스랄까. 그런 점이 아쉽다. 다른 작가와 비교하는 건, 이 작가에게나 저 작가에게나 예의가 아닌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이청해21년 출간된 소설집, 어디까지 왔나와 비교를 하게 된다. 팔순이 다 된 작가가 쓴 작품들에선 이런 촌스러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표제작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삶의 긍정성을 이야기한 작품으로 읽히는데 전반적으로 설득력은 떨어진다. 독자가 !’하는 지점이 없다. 현재와 미래, 과거라는 시제에 대한 어떤 개념, 아이디어는 흥미롭지만 작품은 이를 설명하느라 바쁘다. 그게 전부다.

미래를 기억한다는 표현은 이 작품의 핵심처럼 보이는데, 대체로 의미가 모호하다. ‘최진영역시 23년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단편, <홈 스위트 홈>에서 똑같은 문장을 쓴 바 있다. 하지만 최진영의 그 문장은 이야기 안에서 시간은 발산한다는 표현과 어우러져 받아들이는 데 크게 무리가 없다. 이야기와 인물에 잘 녹아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연수의 이야기에선 이야기랄 것도 없고 인물들 역시 극적으로 과장된 캐리커처들(관심종자)뿐이라 독자들이 감응할 여지가 없다. 작가는 이런 빈틈을 메우기 위해 여기저기서 많은 것들을 끌어넣는데 그 통에 산만하고 정신이 없다. 집약적인 간결함이란 단편소설의 미학적 측면에서 봐도, 이 작품에 점수를 후하게 주지 않을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난주의 바다에서> 역시 산만하게 읽힌다. 여기저기서 데려온 것들로 크게 부풀려진 덩치에 비해 속은 텅 비어 있다. ‘정난주의 이야기가 작품 안에서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는 탓에 막상 주요 인물인 통계학과 은정이의 시름이 크게 와닿지 않는다. 주객이 전도됐다고 할까. 추자도 관광 홍보 영상에 어울릴법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소설 작품으로는 무리다.

어중간한 곳에서 멈추지 않고 경험의 극대치를 찍자는, ‘끝까지 가본다는 메시지는 좋았다.

 

<진주의 결말>은 이 책에서 그나마 눈에 띈 작품이었다.

유진주라는 인물의 행위와 의도를 알려는 노력, 과정이 이야기의 핵심인데, 그 끝을 말끔히 보여주지 않는 미완의 결말이 매력적이었다. 범죄 수사 드라마나 사이코스릴러에 어울리는 소재도 난 잘 쓸 수 있어, 라고 작가가 말 하는 듯하다. 썩 잘 한 것 같다.

한 인간을 파악하는 것,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이 가능할까, 라는 질문은 언제나 유효하다. 동시에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인간은 혼돈 그 자체. 인간에게 진심이란 없다는 전제 아래, 오로지 임시방편의 핑계와 구실만 있고 그건 이 아니라는 사유는 흥미로웠다.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은 몽골에 대한 환상이 있는 나로서는 대단히 흥미롭게 읽은 작품이었다. 특히 수려한 자연 풍광의 묘사나, ‘빅토르 위고를 인용하면서 밤의 신비로움을 표현한 부분은 나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연애 이야기를 이다지도 진부하고 장황하고 재미없게 할 수도 있구나, 하고 놀랐다. 이해할 수 없는, 도무지 무슨 감정인지 헤아리기 어려운 인물을 보면서, 작가가 작품에 과한 치장을 하고 있다는 생각, 약간 허세랄까, 현학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독자의 공감, 독자와의 교감과는 크게 상관없는 것에 더 힘을 쓰고 있지는 않았는지 우려가 들었다.

 

<엄마 없는 아이들>에서는 이혼과 외부모 가정, 남겨진 아이들에 대한 작가의 고루한 상상력, 때 늦은 현실 감각 등이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이 작품 역시 독자의 감정이 얼마나 움직이느냐가 중요한 작품처럼 읽히는데, 공감이 쉽지 않았다.

가장 단 적인 예로, ‘명준혜진을 같은 수위에 놓고 마치 땡처리 하듯 취급하는 작가의 태도가 거슬렸다. 엄마 없는 가정에서 크긴 했어도 명준과 혜진이 품은 내면의 결은 완전히 다르다. 명준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큰 사람인 반면, 혜진이 엄마에게 지닌 감정은 분노가 대부분일 것이다. 명준은 엄마 없이 자란 자신의 숙명에 순응했을 테고, 혜진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반항하고 저주처럼 여겼을 것이다. 두 사람이 어찌 같을 수 있을까. 독자는 누구에게 감정을 줘야 하는가. 두 인물의 내면이 합쳐졌을 때 시너지가 생겨 이야기가 의도한 효과가 날 텐데, 서울과 부산을 한데 엮으려니 무리가 생긴다.

 

지나치게 낭만적인 설정의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는 타인의 기억 속의 나, 기억의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서의 나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잊히는 건 정말 두려운 일일까. 영원히 기억되는 것이 좋기만 한 일일까. 잊히는 것과 기억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위로에 대한 화두도 엿보였는데, 진정한 위로란 의외로 평범하고 사소한 것에서 오는 게 아닐까, 보잘 것 없는 삶이라도 그것에 만족하고 감사하지 않는다면 위로란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무엇보다 제 상처를 어루만지고 살필 수 있는 건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 빤하지만 행동이 어려운 그런 생각들을 했다.

반면, 결국 희진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 메일이란 수단과 다른 인물을 동원한, 이유 없이 복잡한 얼개는 흠처럼 보인다.

 

<사랑의 단상 2014>는 사랑에 실패한, 이별을 겪고 상처받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는 남자가 아픔을 극복하고 자신을 다시 세우는 회복의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이국적인 여행지와 낯선 소재들이 제법 나오는데, 이런 멋부림이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이 작품에서는 썩 어울린다. ‘몸은 무죄, (늦된) 마음은 유죄라는 문장 역시 매우 트렌디하게 들려 이 작품의 정서에 잘 스민다. 자칫 바람 맞은 남자가 징징거리는 공허한 이야기로 읽혔을 법도 하지만, 작가는 형식적인 면에서 기교(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모호한 대화 구성과 영화의 오버랩(overlap)같은 장면, )를 부려 위험을 극복한다.

마지막에 세월호 참사이야기는 정말 뜬금없다. 본 이야기에 잘 섞이지 않을뿐더러 이런 식으로 그 사건을 소비해도 되는지, 작가가 무슨 생각이었을지 궁금하다.

 

영화 인터스텔라를 연상케 하는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의 중요한 화두는 시간이다. 그런 이유로 책 머리에 실린 표제작, <이토록 평범한 미래>의 변주처럼 읽히는데, (작품이 어땠는지와는 별도로) ‘시간이라는 소재를 작가 자신의 말로 좀 더 잘 풀어낸 것 같다.

우리는 광활한 우주, 영원한 시간 속에서 라는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과거는 현재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그리고 현재의 나는 미래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이런 사유가 가능했다.

과거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나는 과거에도 존재했고, 현재의 나는 미래에 영향을 줄 것이므로 나는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다. 나의 육체는 머지않아 사라질 테지만 실재하지 않음의 상태로 나는 존재할 것이다. 과거에도 나는 존재했다. 시간의 영속성(eternity) 위에서 우리는 어쩌면 영원하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분명한 경계로 서로 단절된 것이 아니고 겹치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시간의 연속성(continuity) 위에서도 우리는 영원하다.

(작품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과는 달리 글로 적으려니 뭔가 횡설수설하게 된다)

존재와 시간, 철학과 과학, 심지어 영성적인 색채까지 어우러져, 작품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 풍성했는데, 이야기 자체보다 이런 상상들이 더 재미있었다. 반면, 시간이 중첩되고 서로 원인을 제공하고 결과를 야기한다는 개념이 언제나 세계의 확장, 존재의 확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돌고 도는 뫼비우스의 띠나, 꼬리를 물고 영원히 도는 우로보로스의 뱀이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질문은 인간의 내면, 인식을 고립시키는 설정이 되기도 한다. SF-호러 장르나, 다크 판타지 장르의 다수의 영화에서 종종 보이는 서사 장치이기도 하다.

소설=이야기라는 엄격한 기준 아래라면, 이 작품 역시 앞의 몇 작품과 마찬가지로, 극화, 이야기화, 소설화에 실패한, 소재와 개념에서 주저앉은,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펼쳐 보이는 대신 기존의 무언가를 끌어다 지면을 때운 것처럼 보인다. 하나마나 한 말이지만, 이는 독자에 따라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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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특히 소설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는 독자마다 다르다. 그건 취향이나 선호도의 문제 이상이다. 보다 먼저, 소설이 무엇인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독자 스스로의 고민이 먼저 이뤄져야 할 것이다.

독자는 자신의 결정에 따른다. 자신의 기준으로 소설을 읽을 권리가 있다. 그건 또한 독자로서의 의무이기도 하다. 작가의 손을 떠난 한 권의 책은 멀리 나아가 세상의 파도에 휩쓸린다. 세파에 휩쓸려 만신창이가 되는 것도, 고이 모셔져 성물(聖物)로 숭배받는 것도 모두 작품의 운명이다. 그리고 그건 온전히 독자에게 달려 있다. 응당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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