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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춤을 추세요
이서수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8월
평점 :
26년 예순여섯 번째 책.
★★★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이서수’의 작품집.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다.
전체적으로 평타는 치는데 ‘정말 좋다’라고 할 만한 작품이 없다. 물론 겨우 한 권 읽고 이런 말 하기엔 섣부른 감이 있지만 (더 읽어봐야 하겠지만), 이 작품집 한 권만으로 감상을 밝힌다면 이서수 만이 쓸 수 있는, 오리지널한 무언가는 찾기 어려웠다.
‘평타를 친다’는 말은 평균적인 감상이다. 아마추어 같은, 습작처럼 읽히는 작품(전반부)이 있는가 하면 뒤로 갈수록 작품들이 그럴싸해진다. 이걸 다 한 사람이 썼다고? ‘예소연’의 ≪사랑과 결함≫을 읽으면서도 거의 똑같은 생각을 했더랬다. 하지만 예소연과는 달리, 이서수는 장편과 단편집을 이미 여러 권 펴낸, 소위 ‘중견’이라 할 만한 작가다. 그럼에도 이 책으로 작가의 역량, 문체의 개성, 상상력과 구성력, 필력 등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한 권만으로도 팬심이 솟아나게 만드는 작가들이 있는데 이 작가가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이야기마다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바로 모녀 관계(혹은 그 유사 관계)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 반면 남성들은 철저히 소외된다. ‘거세된 남성성’이란 표현은 좀 과할지라도 작품들마다 남자들(주로 아버지들)은 나쁜 사람이거나 필요가 없거나 거추장스러워 무대 밖으로 치워진다. 뿐만 아니다. 이야기들의 ‘문제적 인물’들은 거의 남성들이라는 점에서 성차별적인 요소가 보인다.
너무 불평만 한 것 같은데, 나름 좋았던 점도 언급해야겠다. 이건 차별이야, 이건 혐오야, 그건 꼰대 마인드야, 그건 가스라이팅이야, 그건 가부장이야. 이런 말들은 요즘 너무 쉽다. 그리고 너무 편리하다. 상대방의 입을 한순간에 닫게 만드는 너무나 강력하고 유용한 ‘칼’의 말들이다. 작가는 가끔 이런 말들에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류에 묻어가지 않고 주변을 관찰하고 살핀 결과로서, 그런 말들조차 다른 형태의 폭력이고 편견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다. 그런 부분은 꽤 신선했다.
작품집을 여는 <이어달리기>는 경쾌한 톤, 긍정적인 분위기로 쉽게 읽히지만 책의 첫 작품으로서 독자들을 휘어잡는 데엔 역부족이다. 별론데? 하면서 책을 쉽게 내려놓는 독자들은 분명 존재한다.
일단 화자의 상황이 설득력이 없는 건 물론이고 신뢰가 가지 않는다. 상사의 갑질에 시달리고 격무에 혹사당하고, 이런 불만들이 화자 자신의 시선과 발언에 머물고 있어 과연 그 말들을 믿을 수 있는지, 의심을 하게 만든다. 이는 균형의 문제다. 객관성이 결여된 시선은 이야기 전체에 암시되는 화자의 미성숙한 모습으로 탄력을 받는다. 재취업 의지를 보이지 않는 화자가 엄마를 대하는 태도는 가관이다. 엄마를 ‘씩씩하고 단단한 삶 대신 아름답고 슬픈 삶을 선택한 사람(27쪽)’으로 판단하며 희생을 종용하는가 하면, 막무가내로 회사에서 사라지려 했던 에피소드에서(36쪽), 엄청난 소동을 예상했으나 자신의 부재가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실망하는 모습은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한편 연민과 동정을 구하는 어리광이나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 완전한 성장과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엄마의 그늘 아래로 숨는 자식은 뒤에 실린 <AKA 신숙자>에서도 보인다. 화자의 상황에 설득이 되질 않으니 이야기 전체에 공감이 안 간다. 실직한 엄마와 도서관을 들락거리는 에피소드 역시 허무맹랑한 판타지, 과한 사치로 보인다. 과한 설정은 또 있다. 엄마의 교통사고는 도대체 무슨 의미, 무슨 소용일까.
화자가 고백하듯, ‘어려운 글 말고 그냥 내 이야기’, ‘하루를 낭비하는 이야기’, ‘의미 따위는 없는 글, 내가 이렇게 산다고 적는 글, 우리 외엔 아무도 읽지 않는 글(31쪽)’이 이 작품의 본질이라면 독자로서 무슨 말을 더 얹을 수 있을까.
<춤은 영원하다>는 엔딩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무덤가에서 세 명의 여자가 춤을 추는 모습은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 제례나 ≪맥베스≫의 세 마녀, 러시아 설화를 소재로 ‘고골’이 쓴 작품들 연상하게 한다.
이 장면은 말하자면 이 소설의 가장 강렬한 장면,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게 전부다. 오직 엔딩 장면을 위해 쓰인 작품이라고 무방할 정도로 이야기가 빈약하다. ‘춤’이라는 소재는 신선하다. 신과의 소통, 주술적 의식 이상으로 속을 비워내고 무아지경(trance)이 이르고 자신을 잊고 고달픈 현실을 벗어나는 행위는 모두에게 위로가 된다. 외할머니, 엄마와 이모, 화자로 이어지지는 세대를 아우르는 운명과 그것을 극복하거나 마주하기 위한, 시공을 초월한 연대를 보여주겠다는 의도도 괜찮다. 하지만 결과물로서의 이 작품은 공허하다. 인물들의 춤은 위로가 아닌 ‘환각’처럼 보인다. 모든 시름을 잊고 한바탕 춤이나 추자는 결말은 너무나 진심 없는 위로, 대책 없는 파이팅으로 들린다.
‘직장사실주의’를 표방한 듯한 <광합성 런치>는 앞의 두 작품에 비해 늘씬한 모양새가 돋보인다. 여러모로 중간에 끼어 있는 인물 ‘차진혜’를 화자로 세대와 계급, 권력의 차이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갈등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차진혜의 짝사랑은 자칫 빈틈을 메우기 위한 소비적 에피소드로 전락할 수도 있었으나, 차진혜에게 ‘그들’의 시각과 입장을 적극적으로 헤아리는 계기가 된다. 더불어 차진혜에게 타인과의 차이를 인식하는 인물, 그것을 극복할 의지가 있으며 적어도 노력은 하는 사람이라는 인간적인 매력을 부여한다. 전형적인 Z세대인 ‘박이재’라는 캐릭터가 평면성을 넘어서 입체적인 인간으로 반전하는 결말도 좋았다.
X세대(대표, 홍차장), M세대(차진혜), Z세대(박이재) 등, 각 세대의 대표성을 지닌 인물들을 골고루 등장시켜 이야기를 천천히 빌드-업 시키는 구성, 인물 간 대화가 주는 재미가 좋으며 ‘차이와 다름에서 오는 갈등을 어떻게 최소화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독자 스스로 던지게 만드는 방식이 세련됐다. 단, 차진혜의 계모인 ‘김순화’는 쓸모가 없어 보여 지면 낭비처럼 보였다.
‘광합성’과 ‘런치’라는 두 단어를 결합한 제목에 대해선 핑계가 필요하다. 인간의 끼니는 박이재가 원하는 진지와 마찬가지로 자본과 노동의 산물이다. 광합성도 마찬가지로 식물의 노동(명반응, 암반응)과 자본(빛에너지, 물, 이산화탄소 등)을 필요로 한다. ‘광합성 런치’라는 제목은 저절로, 혹은 손쉽게 얻어지는 무엇이라는 의미보다는 ‘식집사’인 박이재의 관심과 애정을 갈구하는 화자의 욕망을 반영한 제목으로 여겨지는데, 작품의 제목으로는 부적절해 보인다.
노동자인 엄마, ‘신숙자’와 미숙한 딸, ‘박미리’가 등장는 <AKA 신숙자>는 모녀 서사를 빌려 어떤 면에서는 아직 아이에 머문 청년 세대를 꼬집는 것 이상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는 줄곧 미숙한 딸의 이기심과 엄마의 희생을 비교하는데 미리 스스로는 엄마를 부양한다고 믿지만 그녀가 실제로 진심어린 성의를 쏟는 대상은 길고양이 ‘퐁이’다. 딸에게 신숙자는 그저 엄마일 뿐, ‘인간 신숙자’가 되기엔 요원하다. 엄마의 온라인 지원서를 작성하면서 쓸 게 별로 없다는(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반면, 엄마는 계속되는 노동에 내몰린다. 그녀에겐 꿈이 있지만 아직은 일을 아직 내려놓을 수가 없다. 그녀는 딸을 위해 끊임없이 희생한다. 무당은 아니어도 딸에게 도움이 된다면 서툴게 무당 흉내까지 낼 수 있다.
초반에 등장하는 ‘헬레나 루빈스타인’의 초상화는 인간이 지닌 여러 겹의 얼굴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잘 안다고 생각하는 누군가를 정말로 잘 알고 있는 것일까. 피상의 일부만으로 전체를 본다고 착각하고 있지나 않을까.
인간의 시간은 과거를 지나 현재에 이르러 미래를 향하는, 선(線)으로 흐르기보다 ‘차곡차곡 쌓이며(<미식 생활, 252쪽)’ 흐른다. 위에 것을 덜어내고 깊이 파헤치는 노력 없이는 결코 그 아래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작품은 우리가 타인을 보다 잘 보고 이해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이 충분한지 묻는다.
다만, 한 문단 안에서 시점이 ‘널을 뛰고 있다’는 건 치명적인 흠으로 보인다. 이런 아마추어 같은 실수가 진짜 실수일까. 아니면 어떤 의도로 계획된 예술적 허용일까.
<운동장 바라보기>는 이 작품집에서 베스트로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인물들의 편견과 설레발로 점철된 이야기는 부분으로 전체를 안다고 믿는 오만, 전형적인 패턴을 진실로 착각하는 오류, 소수를 위하는 척 드러내는 다른 형태의 가부장, 비판 없이 공식처럼 작동되는 PC적 사고, 이런 습관적이고 기계적인 인식과 반응에 역차별적 행동을 보이는 아이들의 결말로 대항한다.
현실을 마주한 당사자가 아닌 외부인의 시선은 한계가 있다. 숫자뿐인 통계, 교묘히 선발되고 왜곡된 이미지 등은 사고를 무력화 시킨다. ‘김희서’의 일기를 제 식대로 윤색해서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청미’의 행동(161쪽)은 황색언론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돕고 싶다는 청미의 말에 희서는 ‘언니는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해?(153쪽)’라며 되묻고, 귀촌한지 얼마 안 되어 곤충들에 익숙하지 않은 ‘설경’에게 ‘벌레를 무서워하면 벌레 많은 시골에서 못 산다(166쪽)’고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김희서로 대변되는 결혼이주여성들은 보통의 걱정, 우려와는 달리 타국 생활에 대해 이미 완벽한 준비와 각오가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들을 그저 타국에서 고생하는, 타국으로 ‘팔려온’ 피해자, 약자라는 프레임을 습관처럼 씌우고 있는 건 아닌지 질문해 볼 일이다.
<잘 지내고 있어>는 논쟁적인 이야기가 될 뻔했으나 실패한 작품으로 보인다. 뭔가 아귀가 안 맞는 느낌이랄까, 초점이 어긋난 사진을 보는 느낌이 든다.
가장 눈에 거슬리는 건 연명 치료를 포기한 걸 ‘살인’에 비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딜레마를 제대로 보여주길 바랐다면 ‘안락사’ 정도의 이슈가 나왔어야 하지 않을까.
이 작품은 줄곧 ‘모녀 서사’에 매달리던 작가가 (이제야 아빠들에게 미안했는지) ‘아빠’라는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집의 유일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일단 눈에 띈다. 하지만 시종일관 의식불명으로 누워 있는 게 전부이므로, 아빠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다. 서사의 촉매제로서의 도구 역할에 지나지 않는 아빠 캐릭터는 소외되고 거세당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면적으로는 조금 다른 형태의 모녀 서사로 읽히는데, 혈연이 배제된 모녀 관계(딸들과 아빠의 내연녀)가 이야기 저변에서 활발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아빠에 대한 힌트, 정보가 거의 전무하므로, ‘주연-세연’ 자매의 감정이 잘 살지 못하고 독자로서 이야기에 멀찌감치 거리를 두게 된다. 치열한 척 분위기를 내지만 이야기는 빈약하다. 공감할 여지가 없다.
완성도와는 별도로 이 작품의 의미는 죽음, 웰 다잉(well dying)에 대한 사유를 촉발한다. 죽음에 있어 최소한의 품위를 잃지 않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어떻게? 인간이라는 필멸자로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연명 치료를 거부하는 건 물론이고 안락사 역시 사회적으로 합당한 방법으로 용인되어야 하지 않을까. 죽음에 임박해 고통에 시달릴 때 그들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동시에 사랑하고 함께 오랜 세월 동고동락 했어도 실제적으로는 가족으로서 아무런 권리도 보장도 없는 이야기 속 사실혼 관계를 통해, 결혼이라는 제도 밖에 있는, 가족이지만 가족이 아닌 관계들(대표적으로 동성애자 커플)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이들 관계를 법이라는 틀 안에서 효력을 갖게 하려면 사회는 어떤 시도를 하고 어떤 변화를 겪어야 할까.
<미식 생활>에선 먹는 입, 넣는 입, 토하는 입, 탐하는 입, 죽으려는 입 등의 다양한 ‘입’이 등장한다. 작가는 ‘먹는’ 흔하고 평범하며 익숙한 행위를 미시적인 시선으로 관찰하고 풀어헤치다가 경험, 삶, 역사로 시야를 확장(음식은 그저 음식이지 않고 입은 그저 입이지 않다. 그것은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생과 사에 개입하며 특정한 리듬 안에 잠기게 된다, 250쪽), 무너지고 있는 타인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인간애, 휴머니티의 결말로 이끈다. 서사의 흐름이 무척 유려한데, 마치 각기 흐르던 수많은 지류들이 마침내 깊고 푸른 강으로 합쳐지는 것에 비유할 만하다. 특히 손 끝에 혼이 붙은 듯 써내려간 결말 즈음의 페이지들에선 행간에 휘몰아치는 에너지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먹는 행위를 나만의 경험, 그것만이 내 역사의 근간으로 보는 작가의 인식이 독서라는 행위에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 건 새롭다. 책을 읽는, 나만의 고전, 나만의 명작을 찾는 과정도 비슷해 보인다.
노동을 소재로 한 <청춘 미수>는 통통 튀는 문체와 경쾌한 톤, 화자 주변의 발랄한 조연들 덕에 유쾌하게 읽힌다. 이슈 메이커로서 울림이 꽤 묵직하다.
‘김아혜 선생님’의 행동을 시혜적 태도로 볼 것인가. ≪악인의 서사 (돌고래, 다수의 저자, 2023년 刊≫에서 ‘전승민’은 이런 태도를 ‘연민과 동정, 이해를 앞세운 우월한 자의식이 깃든 나르시시즘’으로 간주하고 소극적인 악(惡)으로 봤다. 김아혜 선생님의 친절 역시 있는 자의 여유, 가진 자가 보이는 가부장적 온정으로 볼 수 있을까. ‘미수’의 노동은 성실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과연 ‘성실한 노동’은 무엇일까. 그리고 어떤 형태일까.
작가는 아마도 김아혜의 편을 들어주려는 모양이다. 미수의 꿈 속에 나타난 두 명의 엄마는 아마도 미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엄마 품을 벗어난 미수를 위한 다른 엄마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이 작품 역시 살짝 비튼, 다른 형태의 모녀 서사로 읽힌다. 아마도 김아혜의 친절이 진심이었는지, 그리고 진심이 통했는지, 미수는 자신이 받은 실망을 거두고 김아혜의 안녕을 빌어준다.
요즘의 한국 소설을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한국 문학’이란 어떤 장르적 특색, 경계가 존재하는 건 아닐까. 한정된 단어들만 가지고 생각하고 글을 쓰라는 무형의 압박이(마치 ‘오웰’의 ≪1984≫처럼) 작가들에게 가해지는 것은 아닐까. 물론 심각한 비약이고 과장인 줄 안다. 소설 역시 시대적 유행을 타는 것임을 부정해선 안 된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주류 문학들이 어떤 틀 안에서 머무는, 그 경계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는 건 분명하다. 읽을수록 좀 더 새롭고, 좀 더 파격적이거나 독창적이고, 좀 더 용감하고, 좀 더 획기적인 이야기에 대한 갈망이 커진다.
‘영혼을 때리는 울림’이라는 건 분명 있다. 과거엔 소설을 통해 종종 그런 경험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의 독서 이력을 살펴보면 그런 경험이 매우 귀하다. 무엇이 문제일까. 내가 변한 걸까. 아마도. 하지만 변화는 내 밖에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기교나 기술적 측면은 아닌 건 확실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