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램 호텔에서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5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정성희 옮김 / 해문출판사 / 1991년 5월
평점 :
품절


26년 예순다섯 번째 책.

애거서 크리스티 다시 읽기 스물다섯 번째 책.

 

★★★☆

 

사람은 절대로 과거로 돌아갈 수가 없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돌아가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말이에요. 인생의 본질이란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니까 말이죠. 인생이란 결국 일방통행로 아니겠어요? (210)

 

영국 런던. 중심가에서 벗어난 한적한 곳에 위치한 버트램 호텔(Bertram’s Hotel)’.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많은 게 진보적인 변화를 거듭하고 있지만, 이 곳만은 과거 에드워드 왕조 시대(1901~1910)의 매력을 한껏 뽐내고 있다. 요즘 같으면 레트로라는 키워드 아래 SNS 페이지마다 인증샷으로 도배될 핫플이 될 수 있겠지만, 우리의 명탐정 미스 마플의 눈에는 부자연스럽다.

 

호텔의 손님인 레이디 셀리나 헤이지에서 데릭 러스컴 대령으로 시점을 옮겨가며 작품의 주무대인 버트램 호텔을 보여주는 도입부가 무척 인상적이다. 독자는 작가가 이끄는 대로 호텔의 구석구석을 목격한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한 편의 연극처럼 느껴지는데 고풍스럽고 우아한, 한편으로는 폐쇄적이고 어딘지 모르게 비밀을 품고 있는 장소 덕이다. 무대 자체가 하나의 캐릭터인 셈이다. 환상적인 연극 무대 같다는 미스 마플의 말은 버트램 호텔의 핵심을 찌르고 있다.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다소 산만하다. 난삽한 사행활의 사교계 셀럽’, 나이 어린 상속녀, 카리스마 넘치는 카레이서, 구시대의 완벽한 호텔 종업원, 각양각색의 손님 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강도 사건과 살인, 실종, 막대한 재산, 삼각관계의 연애 문제에 내가 네 엄마다류의 가족의 비밀까지, 작가는 다룰 수 있는 거의 모든 재료들을 한 작품 안에 쏟아붓는다. 그렇지만 혼돈은 혼돈이되 보기에 좋다. 갖가지 문제들이 치고 빠지며 질서와 균형을 잘 유지한다. 각각의 사건들은 서로를 배반하지 않으면서 영향을 끼친다. 한 사건은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되기도 결과가 되기도 한다. 많은 사건들이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오는 장소는 바로 버트램 호텔. 결국 오랜 역사를 지닌 호텔 건물처럼, 인간의 범죄도 한 순간의 오류가 아닌, 오랜 세월에 걸쳐 곪아온 상처가 터진 결과로 보인다. 인간의 악행을 바라보는 작가의 인식이 드러난다.

 

외부의 사건과 복잡한 내면의 미로를 절묘하게 배합하여 이야기의 단순함을 극복하고 인간의 이기심과 사악함에 집중하는 구성은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보이지만, 50년대 이후의 후기작 (비둘기 속의 고양이, 59, 핼로윈 파티, 69)에서 보다 더 두드러진다.

65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작가의 대표작은 아니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 인상을 남긴다. 전체적인 소재는 굵직굵직하지만 강렬한 긴장감보다 아기자기한 잔재미가 돋보인다. 매력적인 인물들과 강한 멜로드라마 성은 작가의 팬들은 분명 반길 요소다. 그렇다고 코지함(coziness)’만을 내세운 작품은 아닌 게, 결말이 꽤나 묵직하다. 악을 고발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정의(justice)’이다.

 

미스 마플이 등장하지만 활약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미스 마플의 런던 나들이는 그 인물에게도 독자들에게도 귀한 경험이지 싶다. 젊은 시절을 추억하며 곳곳을 누비는 미스 마플을 구경하고 그녀의 과거를 상상하며 그 머릿속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단순히 노처녀 할머니 명탐정이란 소설 캐릭터에서 벗어나 인간 제인 마플로 돌아가는 순간을 작가는 선물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족.

 

극 중 인물인 베스 세지윅이 도넛을 먹으면서 잼이 턱으로 흘러내리는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이 있는데,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도넛을 먹을 때마다 이 소설이 생각나곤 했다. 동시에 흘러내릴 정도로 잼이 꽉 채워진 도넛은 도대체 어디 가면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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