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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와 겐지 걸작선
미야자와 겐지 지음, 이선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12월
평점 :
우리에게도 익숙한 ‘마츠모토 레이지’의 TV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에 영감을 준 중편 <은하철도의 밤>을 비롯한 열네 편의 동화가 실려 있다. 언젠가 원작을 읽고는, 은하계를 여행하는 열차라는 소재 외에 내가 기억하던 만화 스토리와 전혀 상관없어서 뜨악했던 기억이 난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읽어보니 만화의 원작이라기보다는 모티프를 제공했다는(inspired by) 표현이 정확한 것 같다. 기억하는 만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읽으면 나름의 독창적인 묘미가 있다. 설정과 배경은 근사하지만 이야기는 꽤 어둡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타나토스’의 미학이랄까. ‘조반니’의 여행은 꿈을 넘어서 임사(臨死) 체험으로도 보인다.
이어지는 중편, <구스코 부도리의 전기>는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인물의 삶을 담아낸다. 주인공의 살신성인은 보은(報恩)의 성격을 띤다. 어렵고 굶주리던 시절 자신에게 도움을 주고 힘이 되어준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담보로 과업에 뛰어드는 부스코의 모습에 한없이 숙연해진다. 이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감독 ‘스기이 기사부로’는 자신의 영화를 의인(義人) ‘이수현’씨에게 헌정했다.
나머지 작품들은 대부분 짧은 분량의 중편이다. 동화의 특징인 환상성이 잘 살아있고 캐릭터들도 효과적으로 부각되어 있다. ‘이솝’의 동화들처럼 선과 악이 명징하지도 않고 무언가 교훈을 주려는 의도도 없다. ‘그림 형제’의 동화들처럼 막장의 요소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스토리텔링도 없다. 작품들은 대부분 삶과 죽음, 성장과 희생, 이별과 세상의 이면 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동화에서 사는 게 이런 거다, 하고 있으니, 읽으면서 아이들이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성인 버전의 동화쯤 되겠다. 작가의 동화적 상상력이 외부 세계를 향하기보다 내면의 풍경에 천착하고 있지 않나 싶다.
작가의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비교적 널리 알려진 작품들을 중심으로 모아놓은 선집(選集)이다. 작가가 한 세기도 전의 사람이라 그 시대 일본의 특징이 많이 묻어나리라 예상했지만 의외였다. 뭐, (어차피 일본 작가의 작품이라)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작품마다의 원형성, 보편성이 더 두드러진다. 특징적인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작품에 긴 생명을 부여하는 건 아무래도 특정 지역과 시대에 국한되지 않는, 지엽적인 무대를 하고 있더라도 얼마나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일 것이다.
사족.
이수현씨에 대해서는 여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