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에이미 레서런’은 ‘루이즈 레이드너’ 부인의 보호와 치료를 요청받는다. 직업이 간호사라 치료까지는 이해해도 ‘보호’라는 말은 충분히 의아하다. 요청을 받아들인 레서런 간호사는 레이드너 부인을 본 첫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는다. 아름답고 지적인 레이드너 부인은 망상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
그렇게 이라크에서 활동하고 있는 ‘프레드릭 레이드너’ 박사가 이끄는 고고학 발굴단에 합류하게 된 레서런 간호사는 발굴단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긴장감을 눈치 채게 되고, 레이드너 부인의 첫 결혼에서 비롯된 그녀의 불행과 불안감의 정체를 알게 된다. 결국 밀실 상태의 숙소에서 레이드너 부인이 살해된 채 발견되고, 두 번째 살인이 이어진다.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던 작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잘 녹아 있다. 두 번째 남편이었던 ‘맥스 말로원’의 영향으로 이라크와 시리아 등지의 유적 발굴 현장에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참여했던 작가는 중동과 서아시아 지역을 무대로 하거나 고대 유적 발굴단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많이 써냈다. ≪죽음과의 약속(Appointment With Death)≫, ≪그들은 바그다드에 왔다(They Came to Baghdad)≫, ≪끝으로 죽음이 온다(Death Comes as the End)≫ 등의 추리소설은 물론이고 ≪Come, Tell Me How You Live≫란 제목으로 유적 답사기 형식의 기행문을 ‘애거서 크리스티 맬로원’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한다(46년).
이 작품은 그 시기의 경험이 녹아 있는 추리소설들 중에 가장 유명하고 성공적인 작품은 (아마도) 아닐 것이다. 해외 평론가나 미스터리 연구가들에 의하면 이 작품은 큰 주목을 끌지 못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다소 평가절하된 면이 없지 않다.
인기 캐릭터 ‘에르큘 포와로’가 등장하고 밀실이라는 범행 현장이 호기심을 사로잡는다. 다채로운 성격의 용의자들이 등장하고 작가는 그들에게 설득력 있는 범죄 동기를 주는 데 성공한다. 범죄 방식은 평범하지만 진실을 숨기는 방식은 교묘하다. 첫 번째 범죄가 나오기까지 진행되는 드라마는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들이 그렇듯) 사건의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 포석을 깔고 밑밥을 뿌리는 과정이므로 꼭 필요하다. 그렇다고 의무적으로 끼워 넣은 장면들은 아니다. 분위기를 조성하고 인물들의 감정을 드러내어 갈등이 고조되는 과정을 절묘하게 연출한다.
특히 ‘기억’에 대한 작가의 통찰은 얼마나 놀라운지. 작가가 인지심리학에 훤했을지는 차치하고 포와로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기억의 본질은 타인에 대한 큰 관심과 꾸준하고 세밀한 관찰을 통해 얻은 지혜로 보인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엔 ‘작가 만의 무엇’이 있다. 그걸 ‘크리스티다움’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작품엔 그런 것들이 거의 빠짐없이 들어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의 흠결을 굳이 찾자면 바로 그런 것에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너무나 크리스티다워서 오히려 그게 클리셰가 된달까.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주변 인물들의 시선을 활용하여 ‘레이드너 부인’을 표현하는 방식과 그 캐릭터 자체는 후에 나온 ≪백주의 악마(Evil under the Sun)≫를 생각나게 한다. 범인의 동기만 본다면 거의 말년의 작품 ≪복수의 여신(Nemesis)≫과 거의 똑같다. 동기만 보자면, 저게 현실로 가능해? 라고 의심을 품지만 감정적, 정서적으로는 충분히 공감이 간다. 이 작품의 결말에 깔리는 여운, 방점을 찍는 아련한 감정은 절대 이루지 못할 사랑, 함께 있어도 외롭고 쓸쓸한 사랑의 슬픔을 잘 대변한다. ‘모두가 다른 길을 가고 있다(259쪽)’는 레서런 간호사의 생각처럼 타인은 영원한 타인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앞의 얘기로 돌아가서, 한 창작자의 개성과 특질을 드러내는 게 어떤 경우엔 장점이 되고 어떤 경우엔 단점이 되는가. 그 차이점을 고민하게 되는데 떠오르는 생각들이 참 재미있다.
개성과 특질, 그것뿐이면 작품은 헐벗은 허수아비 같다. 뼈대만 보일 뿐이니 허술한 구성에 단조로운 이야기, 플롯은 기계적이다. 그런 낭패를 피하려면 그 외의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런 관점으로 볼 때, 이 작품이 다소 부족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나중에 라디오 드라마, TV 드라마, 그래픽 노블 등으로 재탄생한다.
이 작품이 출판된 36년엔 ≪ABC 살인사건(ABC Murders)≫, ≪테이블 위의 카드(Cards on the Table)≫ 등이 발표되기도 했다. 30~40년대는 크리스티가 가장 왕성하게 창작하고 출판한 시기였다. 작가의 대표작이 그 시기에만 포진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중요한 작품들이 많이 발표됐다는 말은 맞는 말처럼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