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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이야기
메이 싱클레어 지음, 송예슬 옮김 / 만복당 / 2021년 2월
평점 :
제목처럼(원제는 Uncanny Stories) 불가사의하고 무시무시하고 신비로운 이야기 일곱 편이 실렸는데, ‘작정하고 호러’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하지만 처음 접하는 작가에 대한 호기심과 한 세기 전 작가가 누렸던 인기와 명성을 확인하고 싶다면 추천한다.
이 작품집엔 유령이 나오는 작품들(작가가 호러 장르를 의식하고 쓴 이야기들)이 몇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들조차 독자들의 기대를 뛰어넘는데, 보통 유령, 귀신, 죽은자의 영혼 등은 보통 악의를 가지고 복수나 현실의 혼란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 등장하는 유령들은 성격이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징표>에는 남편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죽은 아내의 영혼이 나온다. 아내의 목적은 무뚝뚝하고 냉정한 남편이 생전에 자신을 사랑했음을, 짧았던 자신이 삶이 무용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죽음이란 이별이고 망각이지만 육체가 사라진다고 완전히 소멸되는 건 아니다. 죽은 사람은 남은 사람에게 과거의 일부로, 그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 존재한다.
단순한 구성에 짧은 분량, 죽은 유령의 애처로운 갈망과 남편의 극심한 후회가 어우러져 애수(哀愁)어린 감상을 남긴다.
<증거의 본질>은 뻣속까지 유물론자인 남자가 ‘진짜 체험’을 하는 이야기다. 아내의 죽음 후 아름답고 육감적인 여자와 재혼을 한 남자는 ‘합방’을 방해받는데, 죽은 아내의 환영이 남자 앞에 나타나기 때문. 자칫 코미디로 빠지기 쉬운 소재와 신비로운 분위기, 섹슈얼한 무드가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파장이 이야기에 독특한 임팩트를 부여한다.
현실의 아내와 환영으로 보이는 (죽은) 아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남자의 두려움과 갈등은 물질과 정신의 대립으로 읽힌다. 주인공이 경험하는 ‘두렵고 강렬한 만남’,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 이상으로 깊숙하며 존재의 모든 부분을 건드릴 만큼 거대한 열정(222쪽)’은 ‘낸시 A. 콜린스’의 기이하고 괴랄한 로맨스 <에이프라(Aphra)>를 연상하게 한다.
<죽은 자가 알게 된다면>은 늙은 모친과 애인 사이에서 갈등하는 가난한 오르가니스트의 이야기이다. 사랑스러운 애인과 결혼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은 노모가 죽음으로서 물려받을 유산으로서 해결된다. 남자는 애인을 사랑하는 만큼 어머니도 사랑하고 어머니가 살아있는 한 그 곁을 떠날 수 없다.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모친이 죽고 결혼에 성공하지만, 주인공은 잠시나마 자신이 어머니의 죽음을 바랐던 적이 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갖는다. 그 죄책감은 어머니의 유령을 마주하게 되면서 극대화된다. 누군가의 죽음을 바랐고 실제로 그 누군가가 죽었다면, 생각만으로도 죄가 되는 것일까.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는 게 면죄부가 될까.
‘죄(罪)’의 본질, 집착과 소유욕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는 가족애의 이면, 사랑과 증오, 부모와 연인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자의 양가감정이 짧은 분량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다.
<희생자>는 애인과의 사이를 이간질했다고 오해해 고용주를 살해하고 시체를 유기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하지만 남자 앞에 나타난 고용주의 유령은 오히려 남자를 용서하고 위로한다.
살인보다 더 큰 범죄는 증오이며,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는 건 오직 사랑이라는 작가의 관점이 독특하다. 사랑과 용서, 관용에 대한 이야기이다.
<크리스털의 결점>은 행간마다 강렬한 성적인 에너지가 흐르는 묘한 감상의 작품이다.
‘애거사’는 타인의 마음을 조종하고 정신을 치유하는 특이한 능력(일종의 염력)의 소유자로서, 그 자신이 바로 ‘맑고 진실한’ 무결점의 크리스털(99쪽)’이다. 플라토닉한 사랑에 만족하며 유부남인 ‘로드니’를 위해 사심없이 발휘되던 그녀의 능력은 그를 향한 ‘기쁨에 딸린 육체적인 성격(135쪽)’을 의식하게 되면서 손상된다.
‘리비도(libido)’의 각성은 애거사가 지닌 능력의 방해 요소로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원동력이기도 한 것으로 읽힌다. 애거사는 가정이 있는 로드니에게 성적으로 끌리면서 한편으론 두려워한다. 나중에 애거사의 자아는 또 다른 치유 대상인 ‘하딩’의 자아와 동일화되어 그의 공포와 괴로움이 애거사에게 전이된다. 이는 사랑(혹은 성적인 감정, 로맨틱한 관계에 대한 열망)의 은유로 읽힌다. 작가는 그것을 ‘신성하지만 위험한, 끔찍한(178쪽, 180쪽)’ 것으로 표현한다.
<그들의 불이 꺼지지 않는 곳>에선 사후 세계가 특이하게 묘사된다.
부모가 허락하지 않아서 실패한 첫사랑과 부인에게 돌아간 유부남과의 두 번째 사랑을 거쳐, 삼십대의 ‘해리엇’은 세 번째 사랑인 ‘오스카’를 만난다. 문제는 오스카 역시 유부남이라는 사실. 스릴 넘치는 모험 같은 사랑은 짧았고 지루해진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은 두 사람은 죽는다. 그리고 사후 세계.
두 사람만 존재하는 사후 세계가 펼쳐지는데 연애할 때의 지루함과 전혀 즐겁지 않았던 기억이 되살아나 해리엇은 오스카를 피하고 싶지만 절대 그럴 수 없다. 죽어서조차 ‘두 사람이 두려워하면서도 아직 용기 내어 거부하지 못하는, 영원한(23쪽)’ 관계가 지겹다.
죽어서도 서로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두 사람의 모습은 불륜에 대한 대가로 얻은 또 다른 지옥(징벌)일까. 혹은 단순히, 결혼 생활의 은유일까, 혹은 두 사람의 사랑이 자신들의 생각보다 진실했던 건 아닐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도 재미있지만, ‘미래가 과거에 영향을 준다(46쪽)’는 작가의 운명론적인 사유가 독특하다. <크리스털의 결점>과 ‘불륜’과 ‘리비도’라는 키워드를 공유하며, 사후 세계라는 배경은 마지막 작품 <절대적 세계의 발견>과도 중첩된다.
철학가인 ‘스폴딩 씨’가 죽은 후 목격하는 ‘저쪽 세계’의 풍경이 묘사되는 <절대적 세계의 발견>은 서사보다는 이미지(시각화)에 치중한 작품이다. 철학과 SF적인 요소로 버무려 독특하고 대단히 현대적인 그림들을 그려낸다. 그런데 너무 어렵다. 미장센이 멋진 SF 영화를 보며 ‘와!’하며 감탄하는데 무슨 얘기인지 따라잡지 못하는 느낌이다. 철학이나 물리학에 대한 배경 지식이 있다면 좀 더 나았을까.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은 없으며 천국도 없고 지옥은 있는데 그곳은 바로 우리가 사는 현세라는 정도만 이해했다(완전 공감).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섞이고 공존하는 모습은 ‘최진영’의 단편 <홈 스위트 홈>의 ‘시간은 발산한다’는 문장과 맥락이 비슷해 보인다. 이 정도가 이 작품을 이해한 바이다.
나름 한 시대를 풍미했으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독자들에게 잊힌 작가로 보이는데 구글을 검색해 보니 해외에선 아직 책이 출판되고 있다. 소설, 시, 철학, 평론 등 팔방미인으로 활동했고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으며 작품에 실험적인 시도를 마다하지 않은 동시에 정치적으로도 활발했던(여성 참정권 운동), 여러모로 선구적인 작가였다고 한다. 실험적이고 진보적인 작가의 면모는 다양한 층위를 가진 이야기들로 구성된 이 작품집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이 (단순히) 호러 소설집으로 알려지고 소비되는 것이 약간 아쉽다. ‘호러 선집’이라는 타이틀로는 이 책을 온전히 묘사하는 데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