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가 내려온다
오정연 지음 / 허블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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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한국sf소설을 읽었다. 내가, 그리고 사람들이 한국형 sf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참으로 기발한 상상력도 한 몫 할테지만 결정적으로는, 어쩌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인류에 대한 희망과 사랑을 놓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한 때, 디스토피아 sf물을 아주 좋아했다. 인류의 끝모르는 욕심은 결국 어두운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낸 기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죽어가는 인류는 짜릿한 쾌감과 더불어 강렬한 반성도 느끼게 했다. 하지만 한국 작가들은 따스한 감성과 더불어 그래도,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언제나 바보같은 실수를 하지만, 그 실수는 사랑하기 때문이고, 그 사랑은 끝끝내 희망을 가져올 것이라 말한다. 인간은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이다. 언제나 그랬듯 사랑하기 위해 살아남을 것이며 작은 것에도 희망을 발견해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이런 책을 읽으면 위로 받는 기분이 든다.
 <행성 사파리>는 우리 지구의 과거와 유사한 생태계를 가진 쌍둥이지구로 사파리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미아는 자신이 이전에 죽었던 언니의 복제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은 그저 복제품에 불과한지, 달라질 수 없는 것인지 고민하다 여행을 결정한다. 쌍둥이지구는 지구와 같지만 다르다. 이기적인 누군가는 '어차피 망해버린 지구는 버리고 여기로 오는 게 낫지 않겠나'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쌍둥이지구는 그 곳만의 시간으로 살아가는 독자적인 곳이다. 이 여행으로 많은 걸 보고 느낀 미아는 언니의 복제품이 아닌 한 사람의 미아로 성장한다.
 지구와 저 너머 우리가 알 수 없는 우주와 행성. 그 막막함 속에서 따스함을 찾아내 위로를 건네는 책은 언제 읽어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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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장도연·장성규·장항준이 들려주는 가장 사적인 근현대사 실황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
SBS〈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제작팀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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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나온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굉장히 기뻤다. 왜냐하면 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열혈팬이기 때문이다. 우연히 파일럿으로 시작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라는 예능을 알게 되었고, 이후부터는 한 주도 빼놓지 않고 목요일만 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를 처음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 빠지게 만들어준 에피소드는 바로 1화인 '암호명 마카로니 그리고 거짓말'다. 납치, 북한 공작원, 간첩 등 흔히 시사르포 프로그램에서 다룰 법한 이야기 전개에 나는 점점 빠져들었고, 뒤이어 가슴 아픈 반전을 알게 되자 눈물을 흘렸다. 이 에피소드 이후로 지금까지 매주 꼭 챙겨보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이 프로그램이 좋은 이유는 우리의 얼마 되지 않은 과거를 다룬다는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다루는 사건들의 시점은 주로 1940~1990대의 근현대사이다. 그리고 이러한 근현대사의 역사는 아직까지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더러 있기 때문에 현재에 다루기 민감하고, 그러다보니 다루기를 피하는 편이다. 학교에서도 역사나 사회 시간에 근현대사를 중요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그러다보니 분명히 얼마 멀지 않은 시대에 우리 나라에서 일어난 일인데도 잘 알지 못하는 사건이 많다. 주목받지 못하고 먼지만 쌓여가는 사건과 사람들을 다시 끄집어 내어 현재의 우리는 어떻게 그 사건을 받아들여야하나 의문을 던지는, 근래들어 아주 의미있고 재밌는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이 책으로 나온다니.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책에는 방송에서 다뤘던 모든 에피소드가 들어가있지는 않고, 선별된 일곱 가지의 사건이 담겨져있다. 그 중 방송에서도 책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이다. 사람을 죽여 살인죄를 인정받아 사형을 받은 박흥숙은 당시에 '무등산 타잔'이라는 별명으로 신문에 보도되었다. 단단한 몸과 매일 몸을 단련한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 그리고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까지. '공포의 무술인'을 떠올리는 그의 별명 '무등산 타잔'. 하지만 이 사건의 내막은 전혀 달랐다. 가난함에 못 이겨 가족끼리 뿔뿔이 흩어져 살던 중학생 어린 나이의 박흥숙은 가족끼리 살아보고싶다는 소망 하나로 어린 나이에 직접 집을 짓는다. 겨우겨우 완성한 조그만 집에서 박흥숙의 가족은 옹기종기 모여 산다. 하지만 그 집은 허가도 받지 않은 '불법 건축물'이었다. 그 불법 사안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놀랍게도 박흥숙은 자신의 집이 무너졌을 때 분노한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도 힘없고 늙은 사람의 집이 무너졌을 때 분노했다. 박흥숙의 사연을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아픔과 분노에 공감하고 연민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결국 사형을 받았다. 그의 마지막 말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그럼 우리는 어디서 사냐'라고 묻자 '안 보이게 굴이라도 파서 살아라'라는 답을 들은 박흥숙은 실제로 굴을 파서 집을 만드려고 했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치던 박흥숙은 '우리가 개돼지만도 못한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죗값을 치렀다.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은 실제로 TV 방영 직후 범죄 미화 논란이 있었다. 조폭 놀이를 하며 사람을 살해한 고금석을 이후 죄를 뉘우치고 반성했으며, 산동네 초등학생들의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주었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그렇듯 나 또한 가해자를 미화하는 것이 불쾌했기에 방송을 봤을 당시에는 의아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책을 펼치고 하나하나 글을 읽으며 사건을 다시 되짚어보니 이 일을 특히 조명하고자 한 제작진의 의도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은 변하는가.' 예전부터 이어져 온, 아무도 명확한 대답을 내리지 못한 이 질문을 제작인은 다시금 언급해보고 싶었던 듯 하다. 나는 각종 쏟아지는 강력범죄에 관한 뉴스를 보면 늘 생각했다.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아." 사람을 잔인하게 죽여놓고도 뻔뻔하게 기억이 안난다 말하는 가해자를 수도없이 본 까닭일까, 아니면 모자란 죗값을 치르고 나온 후 또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파렴치한을 너무나 많이 본 까닭일까. 나는 사람은 변하지 않으며 악인은 반성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다. TV로 해당 에피소드를 볼 때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내 확답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정말로 고금석, 그가 반성하지 않았다면, 어차피 죽을 몸, 뭐하러 기도를 드리고 자신의 영치금을 기부했을까. 그가 저지른 죄는 나쁘다. 그가 어떤 반성을 한다고 해도 그가 죽인 사람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죄를 참회했고 자신에게 주어진 죗값을 받아들였다. 사람은 변할까.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반성했을까. 그 깊은 속내까지는 알 턱이 없다. 하지만 굳건히 가지고 있던 생각에 물음표를 찍게 된 사건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이 나오고 나면 으레 나오는 반응은 '저런 일이 있는 줄 몰랐다.'이다. 그 일이 고작 30~40년 전에 일어난 일인데도 말이다.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역사에 무지하고 과거에 무딘지 매번 새롭게 느끼곤 한다. 가까운 과거로부터 되짚어 보고, 그에 따른 의문에 답을 찾아야 가까운 미래의 답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각종 음향 효과와 자료화면을 통해 한 편의 영화를 보듯 티비 프로그램으로 보는 것도 재밌지만,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고 과거의 그 때를 문자를 그리며 천천히 되짚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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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이어 말한다 - 잃어버린 말을 되찾고 새로운 물결을 만드는 글쓰기, 말하기, 연대하기
이길보라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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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펼쳐 읽어보기 전, 나는 이 책이 무엇을 말하는 책인지,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아무런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길보라라는 범상치 않은 이름만으로도 나는 작가가 최소한 내가 듣고 싶은 얘기를 해줄 수 있겠구나 기대했다.

 이 책의 가장 큰 소재는 코다이다. 코다는 청각 장애인 부모를 둔 비청각 장애인 자녀를 뜻하는 말인데, 나는 이 단어를 책을 통해 처음 들어봤다. 그리고 그러한 위치에 있는 아이들이 원치않는 상황, 이를 테면 보호자인 부모를 보호해야하는 상황에 놓인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 아이들이 부모에게 남모를 죄책감을 갖고 있다는 점도 말이다.

 책에 작가와 비슷한, 코다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미라클 벨리에가 소개된다. 나는 이 영화를 이전에 본 적이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인 벨리에는 청각 장애인 부모를 둔 코다이다. 그녀는 특히 노래에 재능이 있다. 하지만 가족은 수어를 통역해줄 자신이 있어야한다. 벨리에는 자신이 가족을 돌봐야한다는 생각에 잠시 주저하지만 이내 사실 부모는 이미 자신이 없기 전부터 잘 살아왔고, 그 이유로 자신의 꿈을 접는 건 말도 안된다는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꿈을 향해 날아간다. 노래라는 자신의 재능을 부모 앞에서 펼쳐보이면서.

 영화 속 벨리에는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하는 자녀이지만 유일한 청인이기 때문에 마치 가장처럼 가족을 돌보며 책임감을 느낀다. 벨리에처럼, 그리고 어릴 적의 작가처럼 청각 장애인 부모를 둔 아이의 경우, 부모의 의사소통을 도우며 부모를 보살필 것을 강요받는다. 장애라는 편견에 갇혀 부모가 성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가 생겨나지 않았나 싶다. 작가는 부모에게 카세트를 사달라 얘기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부모는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벨리에는 자신의 노래라는 재능에 죄책감을 느낀다. 부모는 자신의 재능을 절대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미묘한 죄책감은 코다만이 느끼고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책을 통해 전혀 모르고 있던 타인의 세계를 조금 엿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작가는 참으로 불편하고 예민한 사람이다. 작가는 사소한 것도 절대 그냥 놓치지 않고 관찰하며 그 사소함이 어디서부터 온 것이고 대체 왜 자신을 신경쓰이게 만드는지 고심한다. 장애인을 보며 눈물 짓는 방송, 당연하게 마이크를 쥐는 남성, 지원을 받기 위해 벌이는 가난 경쟁, 예심위원을 한다고 하자 들었던 개고생이라는 말. 어떻게 보면 그냥 흘려 듣고 넘길 수 있는 말을 작가는 절대 흘리지 않는다. 그런 상황이 벌어진 이유, 그런 말이 나오게 된 이유, 자신이 예민하고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을 던진다. 나는 작가가 심심치않게 피곤하다라는 말을 들었으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대체로 우리 사회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을 그닥 반기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우리는 라는 질문없이 여기까지 발전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과학이든 기술이든 철학이든 예술이든 정치이든 말이다. 세상은 언제나 예민하고 불편한 사람들에 의해 의문이 제기되고, 그 의문을 푸는 과정에서 발전했다.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말이 있다. 그 때에는 당연히 정답인 줄 알았던 것이 시간이 흐르고 또 다른 개념과 정의가 들어서면 다른 것을 넘어 틀린것이 될 수도 있다. 세상에 확신할 수 있는 건 없다는 걸 배웠다. 당연히 자식이 의사소통이 잘 되면 기꺼이 부모의 수발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장애인을 다룬 방송을 보면 습관처럼 불쌍해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은 개고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 ?’라는 질문을 던지자 내 안에도 의문과 불편함이 피어났고 이내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보고 반성해볼 수 있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더 나은 나를 만날 수 있는 기쁜 기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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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을 지키고 싶은 엄마를 위한 안내서 - 인터뷰집
마티포포 지음, 정유미 외 엮음 / 포포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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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제대로 된 취업 계획 없이 아르바이트나 전전하는 내 모습에 우울감을 느꼈던 적이 있다. 그 때 내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던 책은 아윤 작가의 《네 직업이 무어냐 물으신다면》이라는 책이었다. 자유를 찾아 이 일 저 일 쉼없이 도전했던 작가의 생생한 경험담은 내게 세상에는 다양한 삶의 형태가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취업을 하지 못해도 그리 망한 인생은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되었고, 큰 위로가 되었다. 이렇듯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의 이야기는 많은 위로가 된다.


이 인터뷰에 참여한 10명의 엄마들도 자신과 비슷하게 아이를 낳고 기르는 상황에서 일을 병행해야한다는 어려움에 봉착한 워킹맘들에게 위로가 되고자 인터뷰에 참여했다. 10명의 엄마들이 공통적으로 했던 말들 중 하나는 바로 ‘롤모델의 부재’였다. 비슷한 길을 앞서 걸었던 사람이 있었다면 그걸 보고 따라서 가면 조금은 편했을텐데 그런 롤모델이 없었기 때문에 직접 헤메며 가야했다. 그리고 10명의 엄마들은 다른 워킹맘들에게 기꺼이 자신이 ‘롤모델’이 되기를 자처하며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만 힘들게 아니라는 것, 나만 고된 게 아니라는 것. 그 사실을 듣는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는 힘듦과 위로를 경험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이 책은 워킹맘 뿐만 아니라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디딘 여성 사회초년생에게도 ‘출산과 육아’는 나의 커리어를 단절시킬 무시무시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사회가 아이를 키우기에 적합하게 계속해서 변화하다보면 출산과 육아에 ‘경력단절’이라는 게 뒤따라오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 사회가 하루빨리 오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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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트렁크 팬티를 입는다 - 까탈스런 소설가의 탈코르셋 실천기 삐(BB) 시리즈
최정화 지음 / 니들북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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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대학교 신입생 때 매일 오전 550분에 일어났다. 학교에 일찍 가기 위해서나, 공부를 하기 위해서 그렇게 일찍 일어난 게 아니다.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눈 뜨자마자 머리를 감으러 들어갔다.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샴푸, 트리트먼트 두 개를 사용해 감고, 타올 드라이를 한 후에는 미스트도 뿌렸다. 고데기를 할 수 있을 정도까지 머리를 말리는데도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머리를 얼추 말린 후에는 화장을 해야한다. 로션, 선크림, 프라이머, 컨실러, 파운데이션(그날 그날 내 피부 컨디션에 따라 스펀지로 바를지, 브러쉬로 바를지 달라졌다.), 파우더, 블러셔, 쉐이딩, 섀도우(최소 2), 아이라이너, 마스카라, 아이브로우, 마지막으로 립스틱까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지난 밤에 준비해두었던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차려입고, 그동안 달궈놨던 고데기로 헤어 스타일링까지 해야한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나면 드디어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평발인 나에게는 더더욱 불편한 구두에 발을 욱여넣고 현관문을 열고 나면 눈 뜬지 2시간은 지나있었다.

 그래도 그 때는 그렇게 꾸미는게 즐거웠다. 중고등학생 시절 틴트도 바르지 않던 나에게 화장과 치장은 신세계였다. 2시간동안 공들여 준비하고 나가면 들을 수 있는 예쁘다소리가 내 자존감을 채워준다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서 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꾸밈은 점점 부담으로 다가왔다. 조그마한 용돈으로 화장품과 옷을 사들이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매일 아침 꼭두새벽에 일어나는 것도 힘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화장을 한 얼굴이 내 진짜 모습이라는 착각이 들었다. 어쩌다 늦잠을 자서 화장을 못하는 날이면 맨 얼굴이 창피해서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나서야 나갈 수 있었다. 뽀얗게 칠하지 않은 내 얼굴은 창피한 얼굴이 되었고, 2시간을 들여서 만들어 낸 내 얼굴이 나의 아이덴티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맨 얼굴을 드러내는 게, 나의 본 모습을 보여주는 게 점점 창피한 일이 되어갔다. 더운 여름 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마스크로 화장기 없는 얼굴을 가리고 사람들 틈속을 수그리며 지나갈 때, 그리고 맞은 편에서 나를 향해 오는 친구가, 화장기 하나 없이 다크서클이 드러난 얼굴을 하고도 환하게 웃으며 걸어오는 모습을 봤을 때, 나는 그제서야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어떤 것이 나를 불편하게 할 때 그게 진짜 나를 불편하게 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단지 전에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 낯설기 때문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디폴트로 화장을 하던 모습에서, 당장 맨 얼굴로 다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꾸 옅은 눈썹이 신경쓰였고, 울긋불긋한 내 볼이, 유달리 작아보일 것 같은 내 눈이 신경쓰였다. 한 겹 화장이 둘러져 있는 얼굴에서 벗어나는 건 불편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사람들은 내게 무관심했다. 내가 화장을 하던 말던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러거나 말거나 점심에 뭐 먹을지가 더 중요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저 이전에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불편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화장을 하지 않아서, 책 속에 나와있는 것처럼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서, 혹은 제모를 하지 않아서 느껴지는 불편함은 허상일 가능성이 높다. 누구나 낯선 것에는 경계심을 느끼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낯설다고 피할 필요는 없다. 조금만 그 낯섬을 견뎌보면 편안함의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화장 안 하는 게 무조건 예쁘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우리가 예쁠 필요가 없다는 얘길 하고 싶다.”

 학생들이 짙은 화장을 한 모습을 본 어른들이 으레 하는 말이 있다. “니들 나이 때에는 그런 거 안 해도 이뻐.”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의문이었다. 아니. 나는 전혀 안 예쁜데? 나의 젊음을 접목시켜 판단해보려고 해도 아닌 건 아니였다. 중요한 건 예쁘고 안 예쁘고가 아니라는 건 뒤늦게서야 알았다. 나는 지금도 내가 그리 예쁜 편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그 사실에 연연하며 안 예쁨이라는 글자에 을 떼어보고자 노력하지 않는다. 안 예뻐도 괜찮다. 내가 얼굴로 먹고 사는 사람도 아닌데 굳이 예뻐야 하나? 나는 나대로의 매력이 있다. 그 사실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여자라면 예쁘기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 만약 내가 작가와 같은 인생 선배를 일찍 알게 되었다면 더 빨리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화장의 속박에서는 벗어나 자유롭지만 그 외의 것들에서는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브래지어를 벗는 것, 새로운 속옷을 착용하는 것, 면생리대를 사용하는 것은 아직 나에게 높은 벽처럼 느껴지는 일들이다. 누구도 나에게 책 속의 모든 것들을 시도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지금 그대로의 상태가 편한 사람이라면 그저 책을 한 번 읽고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하고 책을 덮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는 일상 속에서 작은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이다. 슬슬 꽉 조여오는 바지가 불편하고, 계속해서 나가는 꾸밈 지출을 줄여야 할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고, 고통스러운 생리통을 완화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나처럼 변화하고 싶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먼저 변화의 길을 걸어본 사람의 지난 경험을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책을 덮고 나서 나는 가장 먼저 트렁크 팬티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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