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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향과 분노
윌리엄 포크너 지음, 정인섭 옮김 / 민족문화사 / 2000년 1월
평점 :
절판


'출판된 책의 절반은 팔리지 않는다.
팔린 책의 절반은 읽히지 않는다.
읽힌 책의 절반은 이해되지 않는다.
이해된 것의 절반은 잘못 이해된 것이다.'

<음향과 분노>는 이것을 초월하여 거의 이해되지 않는 작품이다. 그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번역하신 분이나, 많이 팔리지 않을 텐데도 사명감으로 출판한 출판사에게 책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한 권의 책을 읽고 작가와 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 중에서도 고통스런 인내가 동반되는 책들이 있다면 이와 같은 의식의 흐름에 의해 씌어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큰 마음을 먹고 이 책을 손에 들 수 있었던 건 세계문학의 최고봉에 선 작품을 감상하고 싶은 갈망과 난해 문학의 정수에 도전해 보고 싶은 꽤 선량한 모험심 때문이다.

무슨 내용인지, 뜻인지 모르면서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윌리엄 포크너'라는 이름 탓이였다. 이 글을 다른 작가가 썼다면 중간에 포기했을 가능성도 많았을 것이다. <에밀리에게 장미를>에서 받은 느낌, 영국의 제임스 조이스와 견주어서 생각할 수 있는 작가의 위치가 가져다 주는 무게, 교차된 시간 속을 흐르는 작가의 의식 세계를 살펴보고 싶은 호기심 등이 이 책을 나름대로 정독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처음 예상했던 대로 이 책의 줄거리조차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았고. 주인공인 벤지와 켄틴의 의식의 흐름은 감도 잡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한 책을 서평할 수 없겠지만, 이와 같은 심리소설에서 받은 인상과 여운은 보통의 책과는 다른 법인가 보다.

<밤으로의 긴 여로>에 나오는 애증의 주인공들처럼 여기 콤프슨가의 형제들에게서 전해져오는 사랑과 욕망의 관계, 파괴된 자아와 상실된 감각 뒤에 따라오는 무질서한 삶, 그 비극적인 공간속의 울림이 애잔하게 전해져 온다.

개인의 존재 스스로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상처와 비애를 안은채 인생의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인듯 보인다. 적어도 인생의 본질에 포함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인간의 연약한 본성과 상처입은 존재 그대로를 인정하면서도 삶의 의미를 깨닫고 새로운 인간성을 창출할 수 있는 소망있는 실재의 인생이기에, 경외해야 될 대상을 발견할 수 있는 규모있는 인생- 얼룩짐은 그대로 남지만 거룩하다 말할 수 있는 무질서 이기에 <음향과 분노>의 울림이 더욱 아련하게, 그리고 엄숙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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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낙원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6
존 밀턴 지음, 이창배 옮김 / 범우사 / 1999년 4월
평점 :
품절


영문학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대서사시 실낙원은 창세기 3장의 내용을 노래한 존 밀턴의 반영감된 작품이다.

이 시의 주제는 제1편 첫머리에서 작가 스스로 잘 요약해 주고 있다. '인간이 태초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금단의 나무 열매 맛보아 그 치명적인 맛 때문에 죽음과 온갖 재앙이 세상에 들어와 에덴을 잃었더니 한층 위대하신 분이 우리를 구원하여 낙원을 회복하게 되었나니 노래하라 천상의 뮤즈여..'

이 주제 속에는 두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함으로써 타락한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위대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신앙이다.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장부터 8장까지는 아담이 타락하기 까지의 선과 악의 싸움을, 9장부터 12장까지는 아담과 이브의 타락과 낙원을 잃게 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밀턴은 실낙원의 주제를 극적으로 전개시키기 위해 이야기의 초점을 지옥과 천국, 에덴동산과 인류의 타락에 집중시킨다.

밀턴은 아담과 이브의 타락의 원인을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의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은 비록 청교도이지만 후대에 알미니안주의(요한 웨슬리)로 불리워지는 사상을 지녔던 밀턴의 신앙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단의 유혹앞에 굴복하는 인간의 무력한 모습을 부각시키며 이성의 기능을 강조하는 듯이 보인다.

또한 아담이 이브에 대한 연민 때문에 의리있게 같이 타락하는 것으로 묘사된 장면은 실제 성경속에는 직접 언급되지 않는다. 이것은 다분히 여성을 격하시키는 밀턴의 여성관으로 보여진다. 곧 이브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대적했지만, 남자인 아담은 단지 여성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죄를 범했으니 그 책임에 있어서 가볍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들이 죄를 범한 후에 하나님을 피하며 서로 갈등하며, 쓸쓸히 낙원에서 쫓겨 나가는 모습에서 죄의 가공할 만한 세력과 죄범한 영혼의 비참함을 느낄 수 있다.

'문학가의 사명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바르게 설명하는 것이다'라는 안톤 체홉의 말에 비추어 본다면 이 작품 속에는 그러한 설명이 탁월하게 들어있으며, 낙원에서 추방되는 것으로 끝나는 비극적인 여운을 남기는 것이 문학의 위대한 기능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작가 밀턴은 시의 첫부분과 마지막에서 해답까지 제공해준다. 그 해답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죄범한 인간을 향한 구세주의 말씀을 잃어버린 낙원 그 현장에서 들을 수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3)

실낙원에서 밀턴의 목소리는 아이러니칼하게도 다시찾은 낙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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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 마로니에북스 36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 청림출판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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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몇 년 전 TV에서 '설국'을 소개하면서 보여준 일본의 눈 덮힌 산과 터널을 지나가는 기차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그 영상이 생생히 남아 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면 설국이었다' 작품의 첫 마디는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마음속에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듯 싶다.

작품을 다 읽고 나서 다시 되돌아와 이 구절을 볼 때 가슴속에 잔잔히 전해져오는 낭만적인 여운이 있었다. 마치 황무한 정신과 파산된 육체를 실은 기차가 꿈결같이 흐르는 시간을 뚫고 모든 인생의 고뇌를 하얗게 덮어서 가려주는 환상의 세계로 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긴 터널은 나다니엘 호오도온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숲의 이미지와 비슷하다. 영 굿맨 브라운이 가보고 싶어한 - 그러나 꼭 한번만 가겠다고 결심한 숲은 환상의 세계인 동시에 죄악을 경험하는 세계인 것이다. 그 상징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터널은 전혀다른 별개의 두 세상을 이어주는 것이며 흐르는 의식의 탐닉을 이어가는 점에서 숲으로 향한 길과도 같은 것이다.

터널을 빠져나온 설국은 정지된 시간과 공간 속에 자리잡은 꿈의 세계와 같은 곳이다. 터널 전의 주인공의 인생이 존재하는 곳이 현실이라면 터널을 지나 위치한 눈 덮힌 이 세계는 도피처로서 환상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주인공 시마무라의 삶을 따라가 보면 설국이 곧 현실 세계가 된다. 두 세계는 터널을 교차하며 전도된다.

뿌연 차창처럼 흐려진 허무의 정신 세계가 그렇게 인생을 뒤바꾸어 놓는 것이다. 그 정신 세계에 침투해 들어가는 것은 한 여인의 슬플이만큼 아름다운 목소리와 또 다른 여인의 애처롭게 부딪히는 육체이다. 그 둘 사이에서 시마무라의 의지는 결코 분투하지 않는다. 그것은 눈이 얼어붙는 소리가 들리는 혹한의 야경에 묻혀 버린다. 그 그림 속에 소설은 진행된다. 다이나믹한 사건과 구성은 없다. 이국적 정취를 풍기는 시각적 이미지만이 존재하며 그 속에 투영된 인생에 대한 슬프고도 애달픈 정서 뿐이다.

요오코의 '슬플이만큼 아름다운 목소리'는 설국의 이미지의 절정이다. 그 소리의 여운이 설국의 경치를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 역할을 위해서 그녀는 외부에서 잔잔하게 정숙한 분위기로 나타난다. 반면에 고마코는 항상 시마무라 가까이에서 접촉한다. 그 모습이 애교있고 생기있게 또한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애절한 감정으로 그려진다. 그러한 고마코를 향한 시마무라의 태도는 작품전체를 모호하게 이끌어 간다. 거기에는 이성과 감정, 둘 다 결여된 듯 하다.

시마무라와 고마코,요오코의 관계는 피상적으로 보여지며 그들을 둘러싼 눈 덮힌 고장의 정적 이미지는 관계에 있어 창조적인 진전을 마비시키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시마무라의 삶에 있어서 두 여자는 끊임없이 존재하고 있다. 그는 비현실적이라는 기차를 타고 삶을 운행하지만 두 여인의 기억은 환영이 아닌 실재적인 것이다. 비현실 세계 속에서의 현실적인 삶이다. 그런 삶의 추구를 계획하지 않은채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목적은 없다. 그러나 애잔한 정서가 존재하기에 거기서 허무의 안식을 하는 것이다. '인간은 엷고 매끄러운 피부를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기에...

그러나 온전한 관계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비현실적인 '설국'이기 때문이다. 슬픈 헤어짐이 언제나 기다리고 있으며 그러한 고마코의 애뜻한 감정은 상당히 호소력 있게 묘사되고 있다. 고마코가 애절하게 다가올수록 시마무라는 자신이 살아있지 않은 듯한 가책에 빠진다. 고마코의 모든 것을 담은 목소리도 공허한 벽에 부딪히는 메아리와 같다. 불꽃에 묻힌 요오코의 목소리도 하늘 위 은하수에 씻겨 흘러간다. 시마무라의 허전함과 공허함도 아름다운 설국의 눈에 묻힐 것이다.

설국의 정취가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계절에, 순수한 환상을 꿈꾸는 이들이 맞이할 첫눈을 기대하며... 이 도시의 불결함을 덮어줄 하늘의 은총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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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의 형제 -상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학수 옮김 / 범우사 / 199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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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역작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읽고 나서 나의 영혼이 격앙되는 환희를 맛볼 수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저자가 러시아의 대문호일 뿐 아니라 역사가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셰익스피어의 인생 무대를 통해 비극적 운명에 저항할 수 없는 인간을 조명해 볼 수 있다면,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 그러한 인간의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 보며 인간 본성 자체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저자는 방대한 분량의 이 소설을 천재적인 솜씨로 이끌어 가고 있다. 까라마조프가의 아버지와 형제들의 반목과 파괴적인 갈등속에 세 형제들의 독특한 성격과 사상을 드러내며, 각각의 주인공들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마치 한 가정사가 세상속의 모든 인생을 상징하는 듯 도도하게 흘러간다. 저자의 위대함은 그러한 줄거리 속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엄숙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점이다. 대조되는 인물들이 서로 바라보는 신에 대한 사고는 사건의 반전과 주인공들의 개인적인 종말과 맞물려 분명하게 구현되고 작품 결말에 와서는 순수한 알료사를 바라보는 어린아이들의 '까라마조프 만세'라는 심원한 함성 속에 저자의 의도가 표현되고 있다.

인간 본연의 심성에 대한 신뢰이며 당시의 러시아 시대상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비열한 인간들을 그리면서도 그들에 대한 동정을 담고 있는,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갖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저자의 탁월한 점이라고 생각된다. 비록 더러움과 추악함을 지닌 인간이지만 그들에 대한 이해와 사랑으로 품는 마음은 바로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며 참으로 부끄러움이 없는 순전한 삶에의 소망을 갖게 한다. 여전히 인간 본성안에 잠재된 죄의 악들을 지닌채로...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동정에 깊은 감동을 받으며 저속한 인간을 인간적으로 신뢰하며 절대자의 은총을 드러내는 작가의 위대한 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세속화되어 인간의 가치가 상실되는 시대에 이 위대한 고전이 더욱더 찬연히 빛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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