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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 마로니에북스 36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 청림출판 / 1991년 11월
평점 :
품절
몇 년 전 TV에서 '설국'을 소개하면서 보여준 일본의 눈 덮힌 산과 터널을 지나가는 기차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그 영상이 생생히 남아 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면 설국이었다' 작품의 첫 마디는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마음속에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듯 싶다.
작품을 다 읽고 나서 다시 되돌아와 이 구절을 볼 때 가슴속에 잔잔히 전해져오는 낭만적인 여운이 있었다. 마치 황무한 정신과 파산된 육체를 실은 기차가 꿈결같이 흐르는 시간을 뚫고 모든 인생의 고뇌를 하얗게 덮어서 가려주는 환상의 세계로 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긴 터널은 나다니엘 호오도온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숲의 이미지와 비슷하다. 영 굿맨 브라운이 가보고 싶어한 - 그러나 꼭 한번만 가겠다고 결심한 숲은 환상의 세계인 동시에 죄악을 경험하는 세계인 것이다. 그 상징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터널은 전혀다른 별개의 두 세상을 이어주는 것이며 흐르는 의식의 탐닉을 이어가는 점에서 숲으로 향한 길과도 같은 것이다.
터널을 빠져나온 설국은 정지된 시간과 공간 속에 자리잡은 꿈의 세계와 같은 곳이다. 터널 전의 주인공의 인생이 존재하는 곳이 현실이라면 터널을 지나 위치한 눈 덮힌 이 세계는 도피처로서 환상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주인공 시마무라의 삶을 따라가 보면 설국이 곧 현실 세계가 된다. 두 세계는 터널을 교차하며 전도된다.
뿌연 차창처럼 흐려진 허무의 정신 세계가 그렇게 인생을 뒤바꾸어 놓는 것이다. 그 정신 세계에 침투해 들어가는 것은 한 여인의 슬플이만큼 아름다운 목소리와 또 다른 여인의 애처롭게 부딪히는 육체이다. 그 둘 사이에서 시마무라의 의지는 결코 분투하지 않는다. 그것은 눈이 얼어붙는 소리가 들리는 혹한의 야경에 묻혀 버린다. 그 그림 속에 소설은 진행된다. 다이나믹한 사건과 구성은 없다. 이국적 정취를 풍기는 시각적 이미지만이 존재하며 그 속에 투영된 인생에 대한 슬프고도 애달픈 정서 뿐이다.
요오코의 '슬플이만큼 아름다운 목소리'는 설국의 이미지의 절정이다. 그 소리의 여운이 설국의 경치를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 역할을 위해서 그녀는 외부에서 잔잔하게 정숙한 분위기로 나타난다. 반면에 고마코는 항상 시마무라 가까이에서 접촉한다. 그 모습이 애교있고 생기있게 또한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애절한 감정으로 그려진다. 그러한 고마코를 향한 시마무라의 태도는 작품전체를 모호하게 이끌어 간다. 거기에는 이성과 감정, 둘 다 결여된 듯 하다.
시마무라와 고마코,요오코의 관계는 피상적으로 보여지며 그들을 둘러싼 눈 덮힌 고장의 정적 이미지는 관계에 있어 창조적인 진전을 마비시키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시마무라의 삶에 있어서 두 여자는 끊임없이 존재하고 있다. 그는 비현실적이라는 기차를 타고 삶을 운행하지만 두 여인의 기억은 환영이 아닌 실재적인 것이다. 비현실 세계 속에서의 현실적인 삶이다. 그런 삶의 추구를 계획하지 않은채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목적은 없다. 그러나 애잔한 정서가 존재하기에 거기서 허무의 안식을 하는 것이다. '인간은 엷고 매끄러운 피부를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기에...
그러나 온전한 관계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비현실적인 '설국'이기 때문이다. 슬픈 헤어짐이 언제나 기다리고 있으며 그러한 고마코의 애뜻한 감정은 상당히 호소력 있게 묘사되고 있다. 고마코가 애절하게 다가올수록 시마무라는 자신이 살아있지 않은 듯한 가책에 빠진다. 고마코의 모든 것을 담은 목소리도 공허한 벽에 부딪히는 메아리와 같다. 불꽃에 묻힌 요오코의 목소리도 하늘 위 은하수에 씻겨 흘러간다. 시마무라의 허전함과 공허함도 아름다운 설국의 눈에 묻힐 것이다.
설국의 정취가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계절에, 순수한 환상을 꿈꾸는 이들이 맞이할 첫눈을 기대하며... 이 도시의 불결함을 덮어줄 하늘의 은총을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