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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가 말하는 CEO - 세계 최고의 리더들에게 배우는 성공의 비밀
제프리 J. 폭스 & 로버트 라이스 지음, 김정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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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가 말하는 CEO
 
 
세상에는 수많은 유형의 크고 작은 기업들이 존재하며 그 만큼의 숫자에 해당하는 CEO가 있기 때문에 저마다의 경영에 대한 고민 또한 각양각색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기업은 성공하고 또 어떤 기업은 사라져간다. 성공 또한 영원한 것도 아니고, 실패 또한 마찬가지이나, 조금 더 오래 성공을 유지하는 기업과 CEO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한 기업과 그 기업을 선두에서 이끄는 CEO는 물론 주변의 환경과 여건의 도움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나름의 공통된 무언가가 있을 것으로 미루어볼 수도 있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CEO 전문가인 제프리 폭스와 로버트 라이스는 오늘날 가장 주목받고 있는 44명의 CEO를 인터뷰하고 분석하여, 이 시대 성공한 최고 경영자들로부터 33가지의 리더십 핵심 키워드를 추출해내었다. <The Transformative CEO>이라는 책의 원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내용과 주제를 관통하는 핵심은 혁신적인 리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CEO가 말하는 CEO - 세계 최고 리더들에게 배우는 성공의 비밀>로 번역된 이 책은 이처럼 위대한 성공을 거둔 조직을 만들고 이끌어가는 위대한 CEO들의 성공에는 공통된 전략과 실행 패턴이 있음을 발견하고, 전세계 수많은 CEO를 잠 못 들게 하는 세상 모든 문제들에 답하는 책이다.
 
위기에 처한 조직을 회생시키는 변화관리 방법론, 올바른 조직문화를 만드는 가치(존재이유)에 기초한 혁신, 조직 내에서 효과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하는 방법, 조직 외부의 고객들과 효과적으로 소통하는 방법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CEO가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할 덕목들을 간단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기업 경영인corporate executive과 기업인entrepreneur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기업 경영인은 어떤 아이디어에 대해 라는 대답을 99, ‘아니오라는 대답을 1번 듣겠지만, 그럼에도 그 아이디어를 포기하는 사람이다. 반면 기업가 정신이 투철한 기업인은 아니오라는 대답을 99, ‘라는 대답을 1번 들을지라도 그 아이디어를 실행시키는 사람이다. 혁신적 CEO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잘 이해하고 오리 광고에 손을 들어주며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이다.” (p.97)
 
2001년 타계한 현대그룹의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사후 8년 만에 현대중공업 기업 이미지 TV광고에 등장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현대조선소 창업 이야기를 담은 신선한 충격을 주는 영상 광고였다. 정 회장 생전의 생생한 육성과 동영상 속의 모습을 통해 대한민국 성공 신화의 대표적 전설을 되살려줬던 그 광고는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잊고 살았던 그때의 뜨거웠던 추억과 도전정신을 새삼 일깨워 주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한국경제 발전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여러 가지 이론모형과 사례 분석을 했지만, 외국인들이 아마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고 알 수 없는 한국 경제발전의 비밀은 정 회장의 동영상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당시 창업 1세대 기업가들이 가졌던 거의 무모함에 가까운 불굴의 도전정신이 아닐까.
 
정 회장의 동영상과 함께 그가 남긴 유명한 말 한마디 이봐, 해봤어?”가 모든 것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학자들은 이런 정신을 학술적으로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이라고 하지만, 정 회장은 경영학은커녕 대학도 안 다닌 분이다. 그래서 기업가 정신은 지식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회 문화 속에서 배양되는 일종의 정신문화다.
아마도 이 세상의 수많은 책들 가운데 가장 많은 책이 자기계발과 리더십 함양에 대한 책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런 이유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리더십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리더의 역할과 조건이 강조하려는 포인트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지기 때문에 오늘날 리더십 앞에는 너무나도 난해하고 화려한 수식어가 난무하여 때로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이 책은 목차만 봐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리더들의 핵심적인 리더의 자질, 역량, 태도, 성과 등이 응축된 소중한 지혜를 다 모아놓았다. 지금보다 좀 더 지혜롭게 혁신과 비상을 꿈꾸는 리더가 되고자 한다면, 비록 지금 당장은 CEO가 아닐지라도, 이 책을 통해 조직과 사람과 전략을 관리하는 소중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CEO들이 고민에 부딪히는 중요한 테마 하나씩 짧고 단순하게 핵심적으로 요약하고 있어 마치 그들로부터 원 포인트 레슨을 받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명료한 답이라고 하긴 했지만, 그 하나하나의 주제에 관해서 무수한 이론과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걸 생각하면 사실 이 책에서 정리해놓은 33가지 핵심주제인 목차를 요약해서 늘 갖고 다니며 해당되는 판단과 행동이 요구되는 상황에 적절하게 적용해보는 실전 연습이 많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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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금융시대 - 개인 투자와 세계경제의 흐름을 바꿀 금융의 미래
로버트 쉴러 지음, 조윤정 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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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미국 뉴욕에서는 금융권의 탐욕과 소득 불평등에 맞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반금융 시위가 벌어졌고 급기야 전 세계 1500여개 도시로 확산됐다. 2008년 미국의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발발한 세계 금융위기는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금융권을 아예 사기꾼’, ‘약탈자’, ‘범죄집단으로 낙인찍게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동양그룹의 CP(기업어음) 불완전판매 사태, 국민은행의 고액 사기대출 사건 등이 터지면서 금융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과 불안이 팽배해지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그렇다면 과연 금융은 정말 이렇게 부도덕하고 탐욕스럽기만 한 악의 무리인가, 과연 금융의 본질은 무엇인가하는 물음에 답은 없는가?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답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다. 그는 예일대 경제학과 교수이자 예일 경영대학원 금융학과 교수로서, 주택시장과 닷컴 버블을 경고한 <이상 과열Irrational Exuberance>, 금융위기를 행동경제학으로 분석한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 부동산 거품과 경제 시스템 간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버블 경제학The Subprime Solution> 등의 저자이며, 행동경제학의 대부이자 사회심리학을 전통적인 경제학과 결합시켜 버블 형성과 붕괴, 서브 프라임사태 등을 정확히 예측한 바 있다.

 

실러 교수는 2012년에 발간한 신작 <새로운 금융시대Finance and the Good Society>에서 금융은 여전히 중요한 사회적 도구이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장치라고 말한다. 그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주범은 금융’, 혹은 금융기관자체가 아니라 금융시스템이라고 분석한다. 나아가 금융이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단언하며, 구체적으로 실행 가능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도 제시하고 있다.

 

얼핏 금융과 좋은 사회라는 책 제목은 쉽게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개인 투자와 세계 경제의 흐름을 바꿀 금융의 미래라는 그림에 좀 더 초점을 맞춰 책을 읽다보면 논리적으로 충분히 납득이 가도록 구성되어 있다. 원래 이 책은 예일대에서 행했던 저자의 금융 강좌를 보완하여 금융업에 진출하고자 하는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대중적인 책의 필요에서 집필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금융자본주의가 진화, 확산되는 과정에서 부정적인 의미가 일부 내포되어 있긴 하나, 본래 금융은 초창기 사회의 고질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finance’(금융)의 어원은 라틴어 ‘finis’에서 왔는데 그 말은 목적(end)', ‘목표(goal)’를 뜻한다. 금융이 단순히 돈을 버는 기술이라기보다는 어떤 목표를 이루는 수단이 돼야 한다는 의미다. 역사적으로도 금융은 산업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시장의 리스크를 흡수하며 산업혁명, 최근의 정보 디지털 시대를 앞당기는 데 기여해 왔다.

 

금융자본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따라 금융이라는 중요한 사회적 동력에 기준이 될 만한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다. 금융이 어떻게 작용하지는 표준을 정하고, 기업과 공공부문과 시민사회의 리더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기준도 정해야 한다. 이 리더들은 좀 더 튼튼하고 풍요로운 경제라는 목표를 위해 새로운 금융상품을 최대한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과도함을 가다듬고, 변동성을 줄이며, 금융이 선진국과 후진국 모두의 요구를 어떻게 채워줄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p.35)

 

"금융은 인류의 행복과 성취, 그리고 더 좋은 사회라는 목표를 실현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p. 38)

 

책은 크게 2부로 이루어졌는데, 전반부에서는 금융 시스템을 구성하는 CEO, 자산운용사, 보험회사, 정책결정자 등의 역할과 책임을 소개하고, 후반부에서는 금융발전을 가로막는 요소들을 살피고 이런 요소들을 어떻게 변화시켜 발전해 나가야 하는지를 다양한 시각에서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에필로그에서는 금융 안에서 일어나는 권력불균형과 민주적인 금융질서 내지 경제민주화를 위한 저자의 시각을 펼치고 있다. 전반부가 다양한 금융시장 참여 주체들에 대한 개별적인 문제 제기라고 한다면, 후반부는 큰 틀에서 이들을 하나의 통합된 시스템으로 보고 어떻게 혁신과 변화를 이루어나갈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아이디어와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단순히 금융과 경제를 연결시키는 게 아니라 금융상품이나 정책을 만들 때 인간 본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반영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논리 전개를 위해서 저자는 금융시스템에 참여하는 각 주체들의 역할과 책임을 통렬한 자아비판과 함께 설파하면서도, 행동심리학, 신경정신학, 철학, 미학 이론을 넘나들며 금융의 사회적 순기능을 설명한다.

 

경제이론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리스크를 꺼리고 불확실성을 피하려는 합리적 인간을 전제하지만, 그 반대로 기꺼이 위험한 상황에 뛰어들려는 충동(야성적 충동)도 가지고 있다. 위험을 떠안으려는 충동은 일종의 감각 추구로써 부분적으로 기업가정신을 부추기고, 부분적으로 투기 거품, 그 뒤의 붕괴를 낳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건설적인 위험 감수의 산물인 경제적 불평등은 과도하지 않는 한 마냥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스크 관리는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거나 피하려고 하지만, 금융시스템에서는 기본 원칙이 되어야 한다. 부채(채무)와 레버리지 관리 방법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대출기관 그 자체가 변화해야 할 뿐 아니라, 대출기관이 부채를 헤지, 증권화, 패키지화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레온 페스팅거의 인지부조화 이론을 적용한 금융의 저속함에 대한 성찰, 유진 파머의 효율적 시장가설을 적용하여 금융투기가 시장의 효율성 증대에 기여하는 중요한 시장 동인이라는 고찰, 저자와 조지 애컬로프가 공동 저술한 <야성적 충동>에서 설파했듯이 금융시장이 야성적 충동을 다루는 방식에 따라 번영과 성공, 쇠퇴와 실패가 엇갈린다는 분석과 평가는 소위 똑똑한 참여자들이 시장을 이긴 적은 없으며, 오히려 가격을 움직이고 금융활동을 낳는 야성적 충동의 역할은 결코 무시될 수 없다.

 

투기는 현대 경제의 기능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며, 일부 행동경제학자들은 이러한 투기 충동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려는 노력에 착수하기도 하였지만, 투기 시장의 모든 활동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인간의 심리적 결점은 시장을 거품으로 치닫게 하는 인간의 보편적 행동과 관련된다. 인간의 경제사가 투기적 거품과 붕괴, 이에 따른 경제 혼란의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투기 거품은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수반하지만, 경제에서 투기 거품과 과도한 레버리지를 막는 일은 정부기관이 하기에는 원천적으로 어려움이 있다. 물론 규제당국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규제 당국 역시 사람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규제 당국의 불완전성을 고려하여 금융 제도를 고안하는 것은 시장 참여자들의 불완전성을 고려하여 금융 제도를 고안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경제학자 폴 A. 새뮤얼슨은 주가가 미시적으로 효율적이며 거시적으로는 비효율적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 말은 효율적인 시장 가설이 전체 주식시장보다는 개별 주식에 더 잘 들어맞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를 새뮤얼슨의 금언이라고 부른다. 즉 시장의 가치평가는 변화하는 시장 심리 정도에 불과하더라도 여전히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며 시장이 여전히 자원 분배의 극히 중요한 정보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금융자본주의 아래서 이루어지고 있는 불평등한 자원 분배는 시위와 항의의 주요 테마다. 금융자본주의가 언제나 불평등을 낳거나 부당하게 부를 재분배하는 것은 아니다. 공공정책은 이런 불평등을 낳지 않고 현대 금융의 혜택을 향유하게 해 줄 수 있다. 오늘날 부자들은 넓은 의미에 있어 금융과 연결되어 있다.

 

"금융은 강력한 도구다. 자본을 조성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사람들의 조화를 이끌고, 그들에게 동기를 제공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부는 단순히 그들의 노력과 재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대개 많은 유능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거대하고 효율적인 조직을 형성하고 이끄는 그들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다." (p. 322)

 

저자는 부의 세습에 따른 상속세 징수, 과시적인 지위적 소비(positional consumption)에 대한 사친단속세, 누진소비세, 불평등 연동세제와 불평등 보험 등을 통해 평균적인 경제적 복지를 증진시켜 줄 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리스크를 관리해 줄 것이라고 한다.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문제는 불평등이 어느 정도 좋은 것이라는 원칙이 분명하게 표명되어야 하며, 불평등의 적절한 수준을 달성하려는 목적과 함께 총체적 관점에서 이를 체계적으로 다루고 리스크 관리이론, 행동경제학 등 금융이론을 적용해야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자선사업과 기부의 경우에도 경제적 불평등을 줄이는 좋은 방법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저자는 미국과 독일의 연간 기부총액이 해당 국가의 국민소득의 1%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인데, 그 원인은 자선사업에 대한 동기부여를 제대로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자신의 기부사실이 알려지기를 바라는 인간의 욕망, 또한 일방적인 기부가 아닌 기부에 대한 보상을 통한 상호적인 인간관계를 고려하는 캠페인, 소셜 미디어의 등장과 스카이프 전화 등을 통한 기부자와 수혜자 사이의 유대감 강화 기회를 마련하는 등 기부행위가 좀 더 의미 있는 경험이 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금융을 인간화하고 경제적 동기를 약화시키는 부작용 없이 소득 불평등을 줄이려면 기부에 유리하도록 세법을 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보기술의 발달로 포괄적인 자동화 시스템이 도입된 덕분에 상당 부분 세제 간소화가 되긴 했지만, 세제에 진정한 기부동기를 구축한다는 목적에 따라 다시 검토하고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질 필요가 있다. 그 밖에도 기부금 공제와 환급제도, 개인간 증여에 대한 세금 우대, 참여 비영리법인(participation nonprofit corporation, 베네피트 기업)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조직을 설립하는 것, 기부자조언기금(donator-advised fund), 해외기부공제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기부자들에게 더 나은 보상을 해줄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공익 조직과 세제 개편을 생각해볼 수 있다.

 

금융자본주의의 역사는 상당한 정도로 인구의 폭넓은 계층에 금융이익을 분산하고 소유를 분배하기 위한 계획적인 정부 정책의 역사다. 이런 정부 정책은 금융의 민주화에 일익을 담당했다. 농지 개혁, 주택 소유, 투자 포트폴리오의 소유, 종업원 주식 소유 제도, 자본확산보험기업(capital diffusion insurance corporation), 도드 프랭크법 등의 다양한 정책들이 자본 소유의 과도한 집중에 따른 경제적 권력의 집중과 불평등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들이다. 비록 이러한 공공정책들이 정부의 조치에 의해 이행되긴 했어도 그 아이디어들은 대중에게서 혹은 대중의 우려에 대한 반응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국 국회의원 노먼 에인절의 거대한 환상(The Great Illusion)’은 거의 보편적인 생각이라고 할 착시, 즉 그릇된 믿음이다. 1910년 이 책이 나올 당시의 인간의 공격성에 대한 거대한 환상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고 볼 수 있으며, 공적 담론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아 2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고 말한다. 오늘날에는 기업들이 정말로 공격적이고 사악한 행동을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믿음이 팽배하며, 이런 믿음은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재계에 대한 분노를 낳을 것이고, 따라서 기업의 바람직한 역할이 방해받을 것이고, 미래 세계의 번영은 속도가 둔화되는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에인절이 논한 거대한 환상이 세계대전을 낳은 것처럼, 경제 영역의 거대한 환상은 경제적 비효율과 실망을 낳는다. 교육자를 포함하여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환상을 바로잡을 중요한 책임이 있다. 그 일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좋은 사회의 건설을 위한 기반이 마련될 것이다.

금융이 발달된 경제에서는 본질적으로 건설적이며 인명의 손실이 따르지 않는 공격성의 배출구가 제공된다. 그것이 1773년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De l'Esprit des Lois>에서 하고자 한 말이었다.

상업의 정신에는 자연히 검소, 검약, 절제, 노동, 신중함, 평정, 질서, 규칙이 수반된다. 이런 정신이 존속하는 한, 여기서 생산되는 부는 나ㅃㄴ 작용을 하지 않는다. 위험은 과도한 부가 상업의 정신을 파괴할 때 일어난다. 그러면 불평등의 폐해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p. 387)

 

저자는 콘라트 로렌츠의 비둘기 실험, 생태학자 프란스 드 발의 영장류의 평화만들기 실험, 스티븐 핑커의 인간의 공격성 본성에 대한 뇌의 분노 회로실험 결과 등이 설명하는 것은 현대 사회는 삶에 있어서 인간의 공격 성향을 어떻게 관리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기적 행동에 맞닥뜨렸을 때 분노와 공격성이 노골적인 폭력으로 분출되는 사회를 어떻게 피할 수 있을지에 대한 수세기에 걸친 사고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이 과정은 금융자본주의의형성과 유지에 큰 역항을 했고, 오늘날의 과세제도와 공공재의 공급 시스템은, 비록 다소 체계가 없고 무계획적이긴 하지만, 불평등을 억제하고 그러한 불평등을 낳는 인간의 공격성향을 제한한다.

 

현대에 대량 살상 무기가 발달하면서 이에 대한 대응으로 공격성을 제한할 수단의 발전이 절대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우리가 그런 메커니즘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정은 결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금융자본주의를 개선하고, 민주화하고, 인간화하는 동시에 거대한 환상과 그 산물을 영원히 폐기처분한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그렇게 할 수 있다.

 

현대 금융은 거래를 보증하기 위한 모든 형태의 인질 교환을 버린 게 아니다. 오늘날의 인질 교환에 쓰이는 용어는 담보고, 인질은 사람이 아니라 금융자산이다.” (p.408)

 

금융의 민주화가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권력과 부의 무작위적인 재분배를 막는 효율적인 리스크관리 제도--금융 계약 시스템--에 좀 더 의존하게 될 것이다. 금융의 민주화는 금융 시스템에 대한 참여의 성격과 정도를 개선하도록 요구한다. 여기에는 금융 시스템의 작동에 대한 기본 정보를 제대로 아는 것도 포함된다. 인간의 본성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는 인간이 가진 공격적 본성에 배출구를 제공해주면 이기적 추구를 허용하는 시스템을 좀 더 정교하게 완성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잘 만들어진 금융자본주의는 폭력 없는 권력 투쟁의 안전한 무대를 마련해준다. 즉 불가피한 인간의 충돌을 통제 가능하고 평화로우며 건설적인 경기장으로 한정하여 인간의 공격성과 권력욕에 배출구를 제공해준다. 이런 시스템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금융을 인간화하는 적절한 혁신이 요구되며, 이때 행동경제학과 신경경제학의 증대된 지식이 고려되어야 한다.

 

이 책은 사회의 자산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하는 금융의 본질적 기능을 회복하고 좋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금융은 탐욕과 투기의 부정적인 특성 못지않게 금융자본주의 경제에서 상당 부분 긍정적으로 기능하고 있고 매우 강력한 힘도 가지고 있음을 역설하며, 지속적인 금융 혁신이 촉진되어야 지금보다는 좀 더 공평한, 좋은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의 세계 금융환경은 거의 하나로 통합된 전 지구적 시스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이 책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다양한 선진 금융기법과 제도에 대해서 우리나라 금융기관과 규제당국이나 금융시장 참여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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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분 후의 삶
권기태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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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일분 후의 삶
저 자 : 권기태
출판사 : 알에이치코리아

생의 극한에 직면했던 사람들이 들려주는 생존, 그리고 매순간 우리가 버릴 수 없는 삶의 희망을 전하고자, 죽음의 위기를 극복하고 생의 진정한 순간들을 겪은 12명의 실제 이야기를 기자 출신의 저자가 전국을 돌며 수 년 간의 취재 끝에 책으로 엮어냈다.

‘生은 매순간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는 작가의 말에서처럼 우리의 삶은 평소에는 나른하게 서행하던 일상이 치명적인 날카로운 위기에 봉착하면 매우 높은 밀도를 지니게 된다. 슬픔과 후회와 상실과 종말의 감정으로부터 용서와 사랑과 희망과 용기의 마음에 이르기까지 결정적인 순간이 낳은 정서와 깨달음을 이 책을 통해 따라가다 보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어가고 있는 그들의 세계에 나 자신 역시 몰입하게 된다.

1. 성에에 새긴 이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우는데 한평생이 필요하다. - 루시어스 세네카-

2001년 1월 15일 한국해양대 해사대학 동기인 김학실 씨와 김영은 씨가 필오션 사의 유조선 P-하모니 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선장을 꿈꾸며 실습항해사로 실습하던 중 악천후 속에서 발생한 폭발사고로 한 겨울의 차가운 바다에 빠져 중국 선적의 가스파라곤 호 구명정에 의해 가까스로 구조되었던 아찔한 체험담이다. 이 사고로 16명의 선원 중 9명이 숨지고 7명만이 살아남았다. 김학실 씨와 김영은 씨는 이창무 선장과 심경철 2항해사가 자신들도 똑같은 위험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명튜브를 던져주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도록 곁에서 격려하는 등 살신성인의 희생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우리는 언제 생명이 끝나더라도 의무를 다하려고 했던 것 같다. 서로의 불행을 위로해야 한다는.”(p.27)


2. 나를 방생해준 자연

자그마한 티끌 하나에 우주가 들어 있다. - 화엄경-

1990년 2월 20일 임강룡 씨가 아내의 도움으로 조양상선에 기관사를 돕는 조기수로 취업하여 메이스타 호를 타고 영국 리버풀에서 곡물을 싣고 방글라데시의 치타공으로 항해하던 중 커다란 너울파도에 휩쓸리는 바람에 갑판에서 미끄러져 인도양 바다에 빠져 조난당하고 사경을 헤매다가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커다란 거북이의 도움을 받고 실종된 지 7시간 만에 극적으로 구조된 경험담이다.

사실 희망은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거짓말일 때가 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차라리 부질없는 희망을 접어버리는 게 마음의 평정을 가져온다. 하지만 희망을 버리면 죽을 수밖에 없을 때 선택할 일은 오직 하나다. 그 거짓말이 현실이 되도록 사력을 다하는 것. 사람은 힘이 없을 때 죽는 게 아니다. 가망이 없어서 죽는다.

“칠전도에 밤이 찾아오면 하늘과 바다에 모두 별이 뜬다. 하늘의 별이 바다에 고스란히 비치듯이. 삼라만상은 모두 다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이들 속에 잠시 살다 가는 작은 미물. 그 동안 섬세한 이 자연의 거미줄을 흩트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선한 마음을 다하면 하늘과 바다는 온갖 힘을 다해 우리를 도와준다.”(pp. 56~57)


3. 내 마음의 발가락

언제 우리는 정말 우리 자신인가 - 옥타비오 파스 -

1992년 수원산악연합 소속 산악인 박태원 씨가 히말라야 등정에 앞서 텐산산맥 최고봉인 7,439미터의 포베다 산을 등정하는 첫 해외등정 과정에서 수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는 극한의 모험으로 결국 발가락 열 개를 잘라내고 혼자 힘으로 걷게 되기까지의 모험담이다. 그는 자신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으며, 그 결과 1996년에 매킨리봉, 2000년에는 아이거 북벽을 정복했으며, 대한산악연맹 산악연수원 교수로 일하고 있다. 저자의 소개로는 그가 2007년 여름에 킬리만자로 등정을 준비하고 있다고만 되어 있어 글을 쓴 지 6년이 지난 지금 그 때등정 성공 여부가 자못 궁금하다.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다. 험한 일이 닥쳤다고 인생을 거꾸로 살 수 없는 것처럼. 무릎으로 기어가더라도 정상에 가야 한다. 칼날 능선을 올라가려면 방법은 하나다. 정신을 칼날처럼 세우는 것. 나는 신경을 세울 대로 세워 한 발 한 벌 옮겨갔다. 희미한 바람 한 줄기에도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몸이 흔들리는 것이다. 높이 7,000미터 실선 위에서.
(중략)
그렇다. 불가능은 없다. 하면 되고, 안 하면 안 된다. 그렇다. 위험하지 않다면 모험이 아니다. 모험이 없다면 내가 누군지 알 수가 없다. 내 한계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지금 이 창공 속에서 끝없이 밀고 나간다. 나의 한계를. 도무지 이 세상 같지 않은 이 위태로운 설산 위에서.
위기의 장점은 극한의 집중을 불러낸다는 것이다.”(p. 71)


4. “저기 캔버스가 있다”

주먹이 단련되는 곳은 체육관이 아니다. 복서의 주먹은 마음속에서 만들어진다. - 무하마드 알리 -

사춘기 시절 성수대교에서 친구들과 한강으로 뛰어내리며 방황하던 프로복서 김택민 선수가 신인왕전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시고 슬럼프에 빠진 이후 절치부심하여 자신을 단련하고 한국 랭킹 1위에 오르기까지의 이야기이다.

“인생의 벽에 부딪혔을 때 해답은 자기 자신이 쥐고 있다. 인생의 벽에는 흐릿하고 불분명한 것들이 벽돌로 꽂혀 있다. 워낙 사적이고 미묘한 것들이어서 남들은 결코 설명해줄 수가 없다. 자신이 그걸 남에게 가르쳐줄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해답이 나온다.”(p. 92)

“링 바닥은 캔버스라 불린다. 그래, 캔버스다. 화가가 붓질하는 캔버스. 복서가 승부를 겨루는 캔버스. 우리의 승부는 예술이 될 수 있다. 가자, 링으로, 내 인생을 향해. 저기 캔버스가 있다.
(중략)
나에겐 적이 없다. 방심만이 나의 적
나에겐 기적이 없다. 최선만이 나의 기적
나에겐 묘수가 없다. 정직만이 나의 묘수
나에겐 주먹이 없다. 집중만이 나의 주먹”(p.100)


5. 요나가 고래 뱃속에 들어간 까닭은

광부들은 땅속을 깊이 파고 들어가서 땅속이 아무리 캄캄하여도 그 캄캄한 구석구석에서 광석을 캐어낸다. - 욥기 (구약성경) -

회사에서 연말 송년모임 후 방심해서 길을 걷다가 뚜껑 열린 맨홀 지하 하수구 구멍에 빠져 무려 9일 동안이나 실종되었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조성철 씨의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 가운데 가장 어이없는 웃음이 나오는(?) 이야기다. 건설회사에서 대규모 토목건설로 잔뼈가 굵었고 지금은 에너지 컨설팅을 하는 자신이 그깟 하수구에 빠져 죽을 수는 없다며 마음의 시계를 읽으면서 치매에 걸린 칠순이 넘은 노모와 몇 년째 앓고 있는 아내를 생각하며 지하 수로를 걸으며 ‘사람 살려’를 계속 외치다가 마침 자동차 회사 간부인 김충배 씨가 3층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극적으로 발견되어 119의 도움을 받고 무사히 구조되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졌지만 곧장 죽지는 않았다. 고래한테 삼켜져서 사흘 밤낮을 캄캄한 뱃속에 갇혀 지냈다. 고래는 그런 후에 요나를 해변에 뱉어낸다. 하나님이 고래를 보냈지만, 요나가 고래 밥이 되라는 게 아니었다. 물에 빠져 죽지 말라는 것이었다.”(p. 114)


6. 나의 오른손

말로도 코끼리로도 갈 수 없는 곳에 자기 위에 앉은 사람은 갈 수 있다. - 법구경 -

울주군 삼남면에 산남 장애인 근로작업시설을 세운 태권도 유망주였던 간은태 씨가 대학생 사범 시절 알지도 못하는 어느 초등학교 아이가 전봇대에 걸린 연을 내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물기 묻은 고압 전신주에 올라갔다가 감전되어 전신을 관통하는 사고를 당한 후에 좌절과 방황을 극복하고 목축업, 화훼업을 시작한 후 장애인 시설장을 세우는 등 전혀 다른 희망의 삶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담은 이야기이다.

“다시 그런 부탁을 받더라도 나는 도와줄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때보다는 더 조심스럽게. 우리는 누군가의 손이 되고 싶다. 우리는 누군가의 소매단추를 채워주고 싶다. 우리는 누군가의 잃어버린 연을 찾아주고 싶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작은 천수관음이 되고 싶다.……세상을 위해 천 개의 팔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pp. 139~140)


7. 안식

위기의 시간에 자신에게 허용해도 될 생각은 오직 하나. 다음 할 일은 무엇인가뿐이다. 안식은 그 생각이 다 끝난 다음이다. - 생 텍쥐페리 -

1993년 10월 10일 정광우 씨가 섬 낚시를 갔다가 정원을 초과한 서해 훼리 호 침몰사건을 겪었던 이야기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선실 유리창을 머리로 들이받아 깨고 침몰하는 선실에서 탈출하여 구조선인 고깃배 종국호에 간신히 구조되어 목숨을 건졌다.

"생사의 위기를 넘은 생존자들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난 게 아니라고 말한다. 집에 있는 누군가를 위해 그렇게 버텼다고 말한다.... 위험하고 고단한 여로에 나선 사람들은 자기가 걸어온 길들을 한나절이나 하루 단위로 토막내기도 한다. 그 한 토막, 한 토막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바친다. 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 한 토막은 나를 위해 걸은 게 아니라고. 그대를 위해 참아낸 거라고. 당신을 위해 인내한 거라고. 그렇게 험한 길을 나선 사람들이 옷의 내피나, 모자의 챙에 가족의 이름을 새겨넣는 것은 자기 마음에 가족을 담아가는 풍습이다." (p. 150)

“나는 하나님 아래 그 섬세한 고리들로 이어진 다른 존재들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했었나. 그들을 위해 내가 살아나야 할 때도 있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살아나리라고 다짐한 사람도 있는 것을. 그 같은 사람들을 지루하게 여기고, 내 일상을 지겨워한 것은 그들과 내 생이 앞으로 항상 내게 머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인가. 그러나 내게 남은 생이 이번처럼 이제 하루나 한 시간뿐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것은 내 눈앞에서 얼마나 소중하고 선명하게 타들어갈 것인가. 
(중략)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근심 풀었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pp. 163~164)


8. 태어나 가장 기쁜 악수

나는 완전 몰입할 때 생의 기쁨을 느낀다. 그 순간을 위해 산에 올라간다. - 이현조 -

산악인 이현조 씨가 2005년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 남쪽 루팔 벽 등정 때 겪은 극한의 체험담이다. 그는 이 기억의 복원작업을 끝으로 2007년 5월 16일 새벽 에베레스트에서 가장 힘든 구간인 남서벽을 등정하다가 정상 1천미터를 남기고 산사태를 만사 숨졌다. 이 책에 등장한 주인공 중에서 유일한 사망자이다. 그가 낭가파르트 등정에서 구해낸 후배 김미곤 씨는 그가 사망한 날 아침 남동쪽 루트를 통해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했지만, 남서벽에서 이현조 씨가 숨을 거뒀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10미터, 20미터, 30미터, 나는 올라가는 게 아니라 들어가고 있다. 나를 잊어버리는 몰아의 세계로.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을 절대 집중의 세계로. 내면으로 난 이 통로 끝의 세계로. 나는 이런 시간이 좋았다. 그래서 등산을 선택했다." (p. 178)

"피켈은 등반가의 혼. 힘들더라도 피켈을 더 깊이 박아야 한다. 피켈을 휘두르는 스윙이 한 번, 두 번 모이고 쌓여 고도를 높이고, 정상으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밤 11시. 김창호 형과 나는 뜨겁게 끌어안고 무전을 날렸다. "대장님, 더 높으 곳이 없습니다. 여기가 정상입니다."  한국에서 출발한 지 94일 만이었다." (p. 181)

9. 라라야, 안녕

어떤 개들은 입을 길게 뒤로 당겨 사람의 웃음을 흉내낸다. 개들은 우리를 신이라 생각하진 않겠지만 갖은 추리를 다해 우리의 뜻을 섭리처럼 따라가려고 한다. - 엘리자베스 마셜 토머스 - 

고속버스 운전기사로 일했던 김진문 씨가 2002년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송정리 계곡에 전원주택을 짓고 애완견 시베리안 허스키 '라라'와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중 2006년 강원지역의 집중호우로 인한 산사태로 무너져내린 흙더미에 집과 함께 깔렸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오자마자 불어난 계곡 물에 곧바로 휩쓸려 떠내려가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무려 9일 동안이나 흙더미 속에 갇혀 있던 라라를 자신의 부상 때문에 제대로 보살펴줄 수 없어 끝내 다른 사람한테 맡기게 된 안타까운 사연이다.

"생사는 운명에 달린다. 그 운명이 주는 생존의 기회는 집중한 사람한테만 보이고 준비된 자에게만 주어진다." (p. 203)

"사람들은 헤어진 이들과는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고 말한다. 저편의 세상에선 사랑하던 이들과 마침내 재회하게 된다고. 그의 눈앞에는 선연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나중에 거기서 누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 (p. 213)


10. 오전 11시 23분

인간의 유일한 의무는 행복해지는 것이다.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났다. - 헤르만 헤세 -

경북 안동의 김보현 씨가 가난을 극복해보고자 어렸을 때부터 온갖 험한 일들을 겪고 우여곡절 끝에 친구의 제안으로 자동차 보험회사에 취직하여 열심히 뛴 결과 우수사원에 대한 포상으로 해외여행 대상자로 선정되어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임신한 아내와 함께 중국을 관광하고 귀국하는 비행기가 기상악화 및 조종사의 실수로 김해공항 인근 야산에 추락한 후 가까스로 탈출하고 구조되었던 아찔했던 체험담이다.

"그런 일은 내 적성에 맞았다. 누구나 행복을 줄 수는 없을지 몰라도, 불행을 덜어줄 수는 있다. 갑작스레 사고를 당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을 도와줄 때 정말 기뻤다. 어려서 마이너스 체험을 해본 사람은 다행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어려운 읽을겪는 애타는심정이 어떤 건지 알지 못한다." (p. 223)

"순전히 행복한 사람과 순전히 불행한 사람은 없다. 행복한 때와 불행한 때가 있을 뿐. 일생에는 행복과 불행이 뒤섞여 있다. 시절에 따라 그 비율이 조금씩 달라질 뿐. 가장 큰 행복은 괴로움이 가장 적을 때, 가장 큰 불행은 기쁨이 가장 적을 때이다.
(중략)
누군가 오전 11시 23분이 어떤 시간이냐고 물으면 나는 "우리가 추락했던 시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내 딸이 태어난 시간"이라고 말한다." (p. 237)


11. 생애 가장 긴 순간

저녁 놀이 아름답듯이 노인의 시선으로 본 세상은 아름답다. -이토 세이 -

건국 후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대한민국 항공회 총재로 일하고 있는 유명 토종 영어강사 이보영 씨의 모친인 김경오 씨가 1957년 대위로 예편한 지 10년 후인 1967년 7월 산후 우울증을 겪으면서도 한일 민간 여성 비행사 친선 교환비행차 위해 파이퍼 체로키라는 경비행기를 몰고 오사카로 향하던 중 정비불량인 경비행기의 고장으로 현해탄에 추락할 뻔한 위급한 상황에서 아슬아슬하게 다시 솟구쳐올라 정상 착륙했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야기이다.

그녀는 동덕여고 시절 교장 선생님의 추천으로 정부의 여성 비행사 선발시험에 추천되었으나 집안의 반대로 무산될 뻔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식구들 몰래 집을 빠져나와 한 겨울 눈발 속에서 국회의장 공관으로 달려가 직접 추천서를 받아와 훈련소에 입소할 정도로 열정이 넘쳤다.

"그녀는 조종사가 되면서 그렇게 교육받았다. 죽는 장소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고.
죽음은 삶이 남긴 동상이다. 죽는 한순간으로 인생 전체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 죽을 수밖에 없다면 최후의 위격을 갖춰야 한다." (p. 255)

"집착하면 일이 어려워지고, 마음을 비우면 시야가 넓어진다. 
(중략)
그의 회상 속에 비행기 기수를 왼편으로 돌리다가, 저 위로 지나가는 하늘을 본 것은 확실히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죽음마저 허락할 만큼 마음을 비워버린 뒤에 심리적인 시야가 넓어졌기 때문이었다. 착륙하기 위해 아래로만 향하던 시선이 집착없이 온전한 하늘을 대했기 때문이다. 내려가야 한다는 강박을 딛고 도리어 솟구쳐서 조망을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pp. 256~257)


12. 잃어버린 시계

사는 동안 내가 바라보는 모든 풍경의 군주는 바로 나다. - 윌리엄 쿠퍼 -

충북 청원의 이경섭 씨가 1997년 2월 11일 친구와 함께 저수지에서 얼음 위에서 놀다가 물 속에 빠져 죽었다가 공사 위병이 건져내 항공우주의료원 응급실에서 심폐소생술을 받고 살아난 기적같은 이야기이다. 그를 소생시킨 당시 항공우주의료원 진료부장은 정기영 대령으로 2007년 한국 최초의 우주인 주치의가 되었다고 한다.

"일체의 경험이 쌓이지 않고, 오로지 현재만 존재하는 삶. 감각은 고조될 대로 고조되고, 피로가 빨리 찾아오지만, 일상의 식상함이나 상투성은 사라져버린다. 만일 신처럼 불멸하는 삶이 있다면, 현재만이 그런 삶이 되리라. 영생의 대가로 일체의 기억이 시시각각 증발하는 삶. 그렇지 않다면 반복되는 일상과 세상의 정적인 측면에 지겨워서 불멸의 특권 자체를 반납할 수밖에 없으리라. 권태는 기억이 가져다준 형벌인 것이다." (pp. 267~268)

"그것은 아마 기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나서 듣게 되면, 생의 이 순간이 그 죽음 때문에 훨씬 더 선명해질 거라고. 지금 현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분명히 알게 될 거라고. 시시각각 기억의 바깥으로, 과거의 것으로 변색되는 이 한 번뿐인 현재가."  (p. 271)

이들 생존자들의 체험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의 신비한 우연이 거의 공통적으로 담겨져 있다. 그것은 대부분 자신이 아닌 타자, 즉 부모, 아내, 자녀 등 가족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것이기도 하고, 종교적 체험을 동반하는 경우도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열 두명의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갑작스럽게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몰려 죽음이라는 생의 극한에까지 닿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그들은 진정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고 자신의 진짜 삶과 직면하게 된다. 소설가 이윤기 씨는 추천평에서 "죽음을 유예시키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깨어있는 의식이라는 것을, 비슷한 과거가 있는 나는 이 책에서 다시 확인했다."고 했다.

죽음의 순간에 발동한 강렬한 생의 의지가 죽음도 물리친 감동적인 이야기는, 애써 기억하고 싶지 않은 비슷한 과거를 갖고 있는 나에게 처음에는 약간의 두려움 혹은 거부감을 줬던 것도 사실이지만, 반복되는 일상에 권태로움을 느끼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나를 다시금  추스려 일으키고 현재의 삶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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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밥이다 - 매일 힘이 되는 진짜 공부
김경집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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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밥이다>

 

이 책의 저자 김경집은 나무처럼 살고 싶은 바람을 품고 사는 인문학자라고 한다. 그는 오늘날의 인문학 열풍이 사람들이 공부하는 즐거움을 발견하고 인문학을 제대로 삶 속에서 활용하는 데 하나의 전환점이 되기를 희망하며, 인문학자로서 일반 대중들이 다양한 분야의 인문학에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자 또는 메뉴판의 역할을 자처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책은 크게 412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철학, 종교, 심리학, 역사, 과학, 문학, 미술, 음악, 정치, 경제, 환경, 젠더를 순서대로 다루고 있다. 1부는 마음의 깊이를 더하는 인문학으로 철학, 종교, 심리학에 대해 소개한다. 2부는 진보하는 인류와 인문학으로 역사와 과학을 다루고 있다. 감성을 깨우는 인문학을 다룬 3부에서는 문학, 미술, 음악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4부에서 정치, 경제, 환경, 젠더를 묶어서 인문학은 관계 맺기다는 저자의 인문학 혹은 인간학에 대한 사유와 공부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저자가 이 책 한 권으로 무려 12개의 개별 학문에 대하여 완벽하게 소개한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다. 만약 어느 누구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자만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지적 오만 또는 자신의 무지를 온 세상에 드러내는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특정 학문에 대한 특정 저자의 개론서 한 권도 이 책의 분량에 맞먹는 600여 쪽이 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자칫 수박 겉핥기 식의 치명적인 오류에 빠질 위험도 있는 만큼 이런 류의 책들이 갖는 근본적 한계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분야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도 이 책의 메뉴판을 훑어보고 나름대로 관심과 흥미를 갖고 공부를 좀 더 깊이 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길잡이로서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본다.

 

다양한 인문학 분야에 관한 메뉴판을 자처하는 이 책은 각 부마다 하위 장에서 다룰 개별 학문의 커다란 중심주제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독자들이 이러한 분야에 대한 공부를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 일종의 학습목표를 제시한다. 또한 각각의 장마다 해당 학문의 핵심적인 주제를 다루고 말미에는 읽어볼 책들이라는 파트를 두어 저자가 엄선한 관련 도서들을 간략한 소개와 함께 제시하고 있어 유용한 참고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나에게는 솔직히 각 학문에 대한 본문 내용 못지않게 이러한 도서목록이 저자의 독서 편력을 따라가면서 사유의 흐름과 공부 방법을 엿볼 수 있어서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저자가 말하는 인문학은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에 관한 학문으로서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모두 아우르는 넓은 의미의 인문학을 뜻한다. 인문학은 그저 잠깐의 열풍과 관심으로 적당한 지식을 얻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매일 밥을 먹어야 살 듯 언제나 꾸준히 공부하고 자신의 삶으로 내재화하는 과정을 지속해야 한다. 인문학의 목표는 끊임없는 성찰과 질문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하고 개인의 인격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는 생각하는 힘으로 구현되며, 구체적으로는 학제적 성격과 융합적 지식의 발현을 수반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의식하든 안 하든 매일 매순간 인문학을 배우고 활용하는 셈이다. 그것은 때로는 왜 존재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와 같은 철학적, 종교적 문제일 수도 있고, 행복과 불행, 우울증이나 자살, 범죄, 지역 이기주의, 사이코패스 등과 같은 심리적 문제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최첨단 과학기술 문명의 발달과 인간 소외, 예술적 감성과 심미안, 역사적 사건의 해석, 정치적 이념 논쟁과 크고 작은 전쟁, 핵무기와 세계 평화, 빈부 격차, 실업, 협동조합 등 자본주의의 그늘과 대안, 성차별, 양성평등처럼 우리가 혼자서 또는 집단적으로 고민하고 갈등하는 수많은 문제들은 모두 다 인문학적 지식과 통찰에 기반하여 통합적으로 해결방안을 찾아야 할 대상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은 평생의 공부이고 삶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전혀 과장됨이 없다.

 

저자의 이런 폭넓은 관점에 대해서는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동서고금의 성현들조차 인간에 대한 완벽한 이해에는 도달하지 못했기에 인간에 대한 탐구의 여정은 그 끝을 알 수 없어 본디 인문학이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가닥 없는 공부가 되기 십상이다. 때마침 이런 좋은 책이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주니 용기를 내어 나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철학, 역사, 심리학에 각별한 흥미를 갖고 있는 아들이 수능시험 끝나면 그 동안 내가 읽은 책들과 함께 이 책을 독서 길잡이로 읽어보라고 꼭 물려줘야겠다. 편식하지 말고 <> 골고루 먹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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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Simple - 일상과 비즈니스에 혁신을 가져오다
앨런 시겔, 아이린 에츠콘 지음, 박종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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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사회가 발전하고 문명이 발달할수록 그 사회 구성원의 삶은 점점 복잡해지는 것 같다. 우리 모두는 그걸 아무런 비판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고도로 복잡한 최첨단 문명의 이기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 현대인들은 한편으로는 정반대의 심플한 삶을 동경한다. 참으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사회의 복잡성이 증가하게 되면서 기업과 정부는 물론 개인들도 엄청난 자본의 낭비를 감당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낭비를 줄이고 제거하여 사회를 단순하게 만들고, 비즈니스와 행정의 효율을 높여 결국 사람들의 일상을 좀 더 편안하게 해주는 강력한 실천 원칙을 제시하는 책이 바로 <심플>이다.

 

저자들은 사회를 단순하게 만드는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단순함의 세 가지 원칙만 잊지 않는다면 일상과 비즈니스에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한다. 혁신적 단순함의 세 가지 원칙(요소)은 바로 공감empathize하고 핵심만 뽑아내어 정제distill하고, 집중하여 명료clarify하게 만들겠다는 다짐과 각오가 조직 전체에 구석구석 배어있게 하는 것이다.

 

단순함의 첫 번째 원칙은 제대로 공감하라는 것이다. 공감한다는 것은 내가 혹은 상대방이 진짜 원하는 것을 간파하는 세심한 관찰과 인간적인 따뜻함이 어우러지는 것을 말한다.

 

훌륭한 인간이 되려면 깊고 넓은 상상력을 가져라. 가까이 혹은 멀리 있는 사람, 모두의 입장을 살펴야 한다. 타인의 고통과 기쁨을 내 것으로 느껴야 한다.” (영국 시인 Percy Bysshe Shelley)

 

클리블랜드 클리닉이 환자의 경험을 중요시하는 환자 제일주의를 표방하며 오늘날 미국 최고의 병원으로 인정받게 된 바탕에는 바로 환자와의 제대로 된 공감이 있었다. 최고 경험관리 책임자chief experience officer가 있고, 시설관리자에서 신경외과 의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직원들이 40일간 케어기버caregiver(돌보는 사람)라는 직책과 오직 환자만 생각하는 자세를 갖기 위해 교육을 받으며, 라벤더 프로그램Code Lavender을 통해 어떤 직원이 돌보던 환자가 사망해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경우 그 직원은 특별 상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이 직원에게 라벤더 꽃 색깔의 연보라색 팔찌를 나눠주면 다른 직원들이 해당직원에 대해 평소보다 더 신중하게 대하는 등 환자와 직원 모두에게 세심한 인간적 배려를 해주는 것이다.

 

오래 전에 나도 몇 달 동안 국내 유명 대학병원에 입원해 본 경험이 있다. 병원도 물론 나름대로 고객만족 프로그램을 통해 의사, 간호사 등 직원들에게 친절교육을 가르치고 환자와의 공감을 강조하긴 하지만, 클리블랜드 클리닉의 환자 제일주의가 아직 시작단계일 뿐이라고 하니 우리나라 병원들의 환자 제일주의는 아직 아이디어 구상단계에 불과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혁명적으로 단순해지기 위한 두 번째 원칙은 핵심만 뽑아내어 정제하는 것이다. 이는 가장 중요한 핵심만 남기고 나머지는 버리는 것이다. 다 잡으려다 다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서비스와 제품의 핵심만 골라내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집중이란 거부하는 것이다. ‘아니오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 그렇게 한 곳에만 집중했을 때 정말로 멋진 제품이 나올 수 있다.” (Steve Jobs)

 

구글의 단순 명료한 홈페이지는 우연히 탄생한 게 아니다. 새로운 기능이나 화려한 디자인, 그밖에도 복잡함을 불러올만한 요소들을 추가하자는 제안과 유혹에 대처하기 위해 내부 오디션이라는 혹독한 자체 평가 시스템을 거치게 되어 있다. 제품과 서비스, 커뮤니케이션과 고객경험, 법률과 규정처럼 무엇이든 단순한 것을 창조하려는 사람이라면 쓸데없는 요소를 선별하고 편집할 때, 속된 말로 죽여야 할 때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 본질을 파악해 무엇을 죽이고 무엇을 살려야 할지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신생기업인 퓨어디지털과 디자인 회사 스마트디자인은 몇 년 전 공동으로 캠코더 플립 비디오를 출시했다. 플립은 녹화를 시작하고 중단하는 커다란 빨간 버튼 외에 아무런 버튼도 달려 있지 않다. 공동 개발한 스마트디자인의 나산 셰퍼드Nassghn Sheppard우리는 모든 과정을 통틀어 무엇을 집어넣을 수 있을까?’가 아니라 무엇을 뺄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물었습니다.”라고 말한다.

 

훌륭한 디자인은 모습을 감추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트위터 공동창립자 Jack Dorsey)

 

단순한 제품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제한된 범위 내에서 무엇을 살리고, 무엇을 죽일지 늘 고민해야 하고 품질, 기능성, 편리함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도 찾아야 한다. 외부 디자인도 빼놓을 수 없다. 애플의 제품은 품질, 기능성, 편리한 사용법, 단순하고 우아한 디자인이라는 네 박자가 한 번에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핵심만 남기고 나머지는 버리겠다고 결심했다면 시장점유율이나 엔지니어 또는 마케팅 담당자의 목표에 끌려다니면 안 된다. 고객경험의 수준을 끌어올린다는 목표에 모든 것을 맞춰야 한다.

 

선택권은 오히려 적을수록 소비자들이 의사결정을 하기에 좋을 수 있으며, 방대한 정보를 선별하고 정제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한데, 특히 금융 서비스 분야에서는 정보의 양을 고객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것도 단순함을 통해 고객을 만족시키는 유용한 방법이다.

 

많은 이들이 혁신과 단순함을 통시에 추구할 수는 없다고 잘못 알고 있다. 혁신이란 이미 존재하는 것에 어쨌든 뭔가를 더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좀 더 나은 무언가를 원하며, 좀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한다. 그게 욕망이고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더하기의 셈법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왠지 모를 무언가가 줄어드는 느낌을 받는 빼기의 셈법을 쓰는 걸 무의식적으로 주저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빼기가 더 어려운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가끔씩 무엇을 없애야 하는가도 똑같이 중요한 일이다.

 

단순함의 마지막 세 번째 원칙은 핵심적으로 중요한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 제품과 서비스를 이해하기 쉽고 편리하게 설계하는 명료함에 집중해야 한다. 너무 많은 정보는 변두리만 맴돌게 만들며 애매모호하고 장황한 설명은 오히려 무관심이라는 부작용을 낳는다. 정보의 계층구조를 활용하여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알맹이를 골라내고 명료하게 시각화하는 디자인이 필요하다.

 

이 책에는 일상에서 흔히 접하면서도 정작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각종 보고서, 신용카드 약관, 주택 임대차계약서, 스마트폰 등 제품 사용설명서, 보험 약관, 포장과 광고, 전화요금 청구서, 대출 약정서 등에 대해 명료한 시각화 디자인을 도입하여 단순화한 혁신적인 사례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또한 난해한 행정, 경영, 법률 분야의 전문용어를 누구나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순화하자는 언어 운동을 통해 법률과 정부 정책을 이끌어낸 사례도 제시하고 있다. 특히 기업은 쉬운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 인지적 유창성cognitive fluency'을 높임으로써 고객과 단순하고 정직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기업은 특별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으며, 고객도 더 큰 만족을 느끼고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기업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고 브랜드 충성심도 올라가므로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게 되는 선순환이 가능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에서 설명한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세 가지 설득의 원칙은 1. 로고스(언어 자체에 들어 있는 논리와 근거), 2. 파토스(청중에 대한 감정적 호소), 3. 에토스(화자의 성격과 신뢰성)이다. 워런 버핏은 매년 2월에 버크셔 해서웨이의 주주들에게 보내는 연례보고서를 작성할 때 바로 이 세 가지 원칙을 충실히 반영하여 복잡한 언어와 개념을 쉽게 풀어 설명하고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효과적으로 자신의 개성을 드러냄으로써 단순명료한 기업 커뮤니케이션의 모범을 제시했다.

 

복잡함이 초래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개인과 조직의 수많은 노력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단순함이 마치 본능처럼 조직 전체에 문화로 스며들어야 한다.

 

위대한 지도자들은 항상 단순한 것을 추구하다. 그들은 논쟁, 토론, 의심을 뛰어넘어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전 미국 합참의장 Collin Powell)

 

필립스는 단순함을 기업문화로 전파하기 위해 (1) 고객 중심의 디자인, (2) 사용하기 편할 것, (3) 발전된 제품과 서비스라는 세 가지 원칙을 목표로 삼고, 맨 꼭대기 경영진부터 시작하는 하향식top-down 접근법을 채택하였다. IBM, 애플, 제트블루 항공, 옥소, 구글 등 세계적인 기업들의 사례처럼 단순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조직이라면 조직 목표를 단순하게 디자인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모든 커뮤니케이션과 프로세스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명료함을 추구해야 하며, 경영진의 메시지는 난해하거나 모호함이 없이 늘 변함없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클리블랜드 클리닉은 늘 환자를 대할 때마다 '마음HEART'을 담으라고 강조한다. 즉 환자의 말을 경청하고Hear, 공감을 표시하고Empathize, 기꺼이 사과하고Apologize,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대답하고Respond, 마지막으로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기회를 준 환자들에게 감사하라Thank는 것이다. 이 병원의 변화 사례는 불필요한 과정을 줄이고 조직 간 장벽을 허물어 통합할 때 단순함이 기업문화로 자리잡고 유연한 조직으로 바뀌게 되며 만족스러운 고객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뉴욕시의 마이클 블룸버그 시장의 311 전화안내 통합시스템 구축 프로젝트는 거대한 행정기관의 복잡함과 비효율적인 관료주의 혁신의 대표적 사례이다. 대도시의 복잡한 문제와 혼란을 해결하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도록 시민들에게 진짜 사람의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대도시라는 환경에서 작은 시골 마을의 인간적인 분위기를 창조하여 뉴욕시가 늘 시민들의 민원과 애로사항을 들어주고 답해줄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콜센터가 딱딱한 전자 기계음으로 먼저 차갑게 응답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다. 비용 절감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우리나라의 많은 콜센터는 순수하게 고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기업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상담원과 한 번 연결되려면 불필요하게 길고 긴 안내 멘트를 따라 무수한 번호를 눌러가며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하여 기꺼이 기다릴 준비가 되지 않은 이상 콜센터에 전화를 걸 생각을 못하게 만든다. 정작 급하고 중요한 자신들의 고객을 화나게 만들어 스스로 고객을 쫒아내는 곳으로 기능하는 역설적인 조직운영 시스템이라고 하겠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우리나라 정부나 기업들의 현실과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 정말 많은 생각들이 들었다. 선진국이란 어떤 나라인가, 정부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무엇인지, 기업들은 어떻게 해야 고객과 함께 지속적인 성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속한 조직은 어떻고, 그 조직 속에 몸담고 있는 나 자신은 그런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개인적인 일상의 복잡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얻고자 하였는데, 오히려 정부나 기업과 같은 조직의 혁신과 변화에 대한 단순하면서도 깊은 통찰과 풍부한 사례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어 특히 조직문화를 변화시키고자 고민하는 경영자와 실무자라면 반드시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특히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각 챕터별 각주는 좀 더 깊이 내용을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는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오늘날 모든 기업이나 행정 당국에서는 언제나 변화와 혁신, 소통을 외친다. 혁신만이 살 길이고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그런 구호들은 대부분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시작할 때 결심과 의욕은 충만하나 구체적인 실천 과정을 지속하는 것은 말과는 달리 무척 어렵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아무리 창조경제를 부르짖은들 당정간, 부처간 높은 장벽으로 내부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국민이나 기업과 같은 외부적인 소통이 안 되어 변화되지 않고 관료주의의 타성에 젖어 정책의 실효성이 없다면 역시 화려한 말장난에 불과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나라야 말로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정신을 받들어 쉬운 언어를 쓰기 위한 전국민적인 운동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정부에서, 기업에서, 학교에서, 사회 곳곳에서 난해하고 복잡하고 전문적이어서 일반인들은 뜻도 모를 언어를 쉬운 언어로 바꾸어 제대로 된 소통이 이루어질 때 이 사회가 좀 더 투명해지고 단순해져 사람들이 정말 살맛나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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