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분 후의 삶
권기태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제 목 : 일분 후의 삶
저 자 : 권기태
출판사 : 알에이치코리아

생의 극한에 직면했던 사람들이 들려주는 생존, 그리고 매순간 우리가 버릴 수 없는 삶의 희망을 전하고자, 죽음의 위기를 극복하고 생의 진정한 순간들을 겪은 12명의 실제 이야기를 기자 출신의 저자가 전국을 돌며 수 년 간의 취재 끝에 책으로 엮어냈다.

‘生은 매순간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는 작가의 말에서처럼 우리의 삶은 평소에는 나른하게 서행하던 일상이 치명적인 날카로운 위기에 봉착하면 매우 높은 밀도를 지니게 된다. 슬픔과 후회와 상실과 종말의 감정으로부터 용서와 사랑과 희망과 용기의 마음에 이르기까지 결정적인 순간이 낳은 정서와 깨달음을 이 책을 통해 따라가다 보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어가고 있는 그들의 세계에 나 자신 역시 몰입하게 된다.

1. 성에에 새긴 이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우는데 한평생이 필요하다. - 루시어스 세네카-

2001년 1월 15일 한국해양대 해사대학 동기인 김학실 씨와 김영은 씨가 필오션 사의 유조선 P-하모니 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선장을 꿈꾸며 실습항해사로 실습하던 중 악천후 속에서 발생한 폭발사고로 한 겨울의 차가운 바다에 빠져 중국 선적의 가스파라곤 호 구명정에 의해 가까스로 구조되었던 아찔한 체험담이다. 이 사고로 16명의 선원 중 9명이 숨지고 7명만이 살아남았다. 김학실 씨와 김영은 씨는 이창무 선장과 심경철 2항해사가 자신들도 똑같은 위험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명튜브를 던져주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도록 곁에서 격려하는 등 살신성인의 희생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우리는 언제 생명이 끝나더라도 의무를 다하려고 했던 것 같다. 서로의 불행을 위로해야 한다는.”(p.27)


2. 나를 방생해준 자연

자그마한 티끌 하나에 우주가 들어 있다. - 화엄경-

1990년 2월 20일 임강룡 씨가 아내의 도움으로 조양상선에 기관사를 돕는 조기수로 취업하여 메이스타 호를 타고 영국 리버풀에서 곡물을 싣고 방글라데시의 치타공으로 항해하던 중 커다란 너울파도에 휩쓸리는 바람에 갑판에서 미끄러져 인도양 바다에 빠져 조난당하고 사경을 헤매다가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커다란 거북이의 도움을 받고 실종된 지 7시간 만에 극적으로 구조된 경험담이다.

사실 희망은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거짓말일 때가 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차라리 부질없는 희망을 접어버리는 게 마음의 평정을 가져온다. 하지만 희망을 버리면 죽을 수밖에 없을 때 선택할 일은 오직 하나다. 그 거짓말이 현실이 되도록 사력을 다하는 것. 사람은 힘이 없을 때 죽는 게 아니다. 가망이 없어서 죽는다.

“칠전도에 밤이 찾아오면 하늘과 바다에 모두 별이 뜬다. 하늘의 별이 바다에 고스란히 비치듯이. 삼라만상은 모두 다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이들 속에 잠시 살다 가는 작은 미물. 그 동안 섬세한 이 자연의 거미줄을 흩트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선한 마음을 다하면 하늘과 바다는 온갖 힘을 다해 우리를 도와준다.”(pp. 56~57)


3. 내 마음의 발가락

언제 우리는 정말 우리 자신인가 - 옥타비오 파스 -

1992년 수원산악연합 소속 산악인 박태원 씨가 히말라야 등정에 앞서 텐산산맥 최고봉인 7,439미터의 포베다 산을 등정하는 첫 해외등정 과정에서 수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는 극한의 모험으로 결국 발가락 열 개를 잘라내고 혼자 힘으로 걷게 되기까지의 모험담이다. 그는 자신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으며, 그 결과 1996년에 매킨리봉, 2000년에는 아이거 북벽을 정복했으며, 대한산악연맹 산악연수원 교수로 일하고 있다. 저자의 소개로는 그가 2007년 여름에 킬리만자로 등정을 준비하고 있다고만 되어 있어 글을 쓴 지 6년이 지난 지금 그 때등정 성공 여부가 자못 궁금하다.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다. 험한 일이 닥쳤다고 인생을 거꾸로 살 수 없는 것처럼. 무릎으로 기어가더라도 정상에 가야 한다. 칼날 능선을 올라가려면 방법은 하나다. 정신을 칼날처럼 세우는 것. 나는 신경을 세울 대로 세워 한 발 한 벌 옮겨갔다. 희미한 바람 한 줄기에도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몸이 흔들리는 것이다. 높이 7,000미터 실선 위에서.
(중략)
그렇다. 불가능은 없다. 하면 되고, 안 하면 안 된다. 그렇다. 위험하지 않다면 모험이 아니다. 모험이 없다면 내가 누군지 알 수가 없다. 내 한계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지금 이 창공 속에서 끝없이 밀고 나간다. 나의 한계를. 도무지 이 세상 같지 않은 이 위태로운 설산 위에서.
위기의 장점은 극한의 집중을 불러낸다는 것이다.”(p. 71)


4. “저기 캔버스가 있다”

주먹이 단련되는 곳은 체육관이 아니다. 복서의 주먹은 마음속에서 만들어진다. - 무하마드 알리 -

사춘기 시절 성수대교에서 친구들과 한강으로 뛰어내리며 방황하던 프로복서 김택민 선수가 신인왕전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시고 슬럼프에 빠진 이후 절치부심하여 자신을 단련하고 한국 랭킹 1위에 오르기까지의 이야기이다.

“인생의 벽에 부딪혔을 때 해답은 자기 자신이 쥐고 있다. 인생의 벽에는 흐릿하고 불분명한 것들이 벽돌로 꽂혀 있다. 워낙 사적이고 미묘한 것들이어서 남들은 결코 설명해줄 수가 없다. 자신이 그걸 남에게 가르쳐줄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해답이 나온다.”(p. 92)

“링 바닥은 캔버스라 불린다. 그래, 캔버스다. 화가가 붓질하는 캔버스. 복서가 승부를 겨루는 캔버스. 우리의 승부는 예술이 될 수 있다. 가자, 링으로, 내 인생을 향해. 저기 캔버스가 있다.
(중략)
나에겐 적이 없다. 방심만이 나의 적
나에겐 기적이 없다. 최선만이 나의 기적
나에겐 묘수가 없다. 정직만이 나의 묘수
나에겐 주먹이 없다. 집중만이 나의 주먹”(p.100)


5. 요나가 고래 뱃속에 들어간 까닭은

광부들은 땅속을 깊이 파고 들어가서 땅속이 아무리 캄캄하여도 그 캄캄한 구석구석에서 광석을 캐어낸다. - 욥기 (구약성경) -

회사에서 연말 송년모임 후 방심해서 길을 걷다가 뚜껑 열린 맨홀 지하 하수구 구멍에 빠져 무려 9일 동안이나 실종되었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조성철 씨의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 가운데 가장 어이없는 웃음이 나오는(?) 이야기다. 건설회사에서 대규모 토목건설로 잔뼈가 굵었고 지금은 에너지 컨설팅을 하는 자신이 그깟 하수구에 빠져 죽을 수는 없다며 마음의 시계를 읽으면서 치매에 걸린 칠순이 넘은 노모와 몇 년째 앓고 있는 아내를 생각하며 지하 수로를 걸으며 ‘사람 살려’를 계속 외치다가 마침 자동차 회사 간부인 김충배 씨가 3층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극적으로 발견되어 119의 도움을 받고 무사히 구조되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졌지만 곧장 죽지는 않았다. 고래한테 삼켜져서 사흘 밤낮을 캄캄한 뱃속에 갇혀 지냈다. 고래는 그런 후에 요나를 해변에 뱉어낸다. 하나님이 고래를 보냈지만, 요나가 고래 밥이 되라는 게 아니었다. 물에 빠져 죽지 말라는 것이었다.”(p. 114)


6. 나의 오른손

말로도 코끼리로도 갈 수 없는 곳에 자기 위에 앉은 사람은 갈 수 있다. - 법구경 -

울주군 삼남면에 산남 장애인 근로작업시설을 세운 태권도 유망주였던 간은태 씨가 대학생 사범 시절 알지도 못하는 어느 초등학교 아이가 전봇대에 걸린 연을 내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물기 묻은 고압 전신주에 올라갔다가 감전되어 전신을 관통하는 사고를 당한 후에 좌절과 방황을 극복하고 목축업, 화훼업을 시작한 후 장애인 시설장을 세우는 등 전혀 다른 희망의 삶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담은 이야기이다.

“다시 그런 부탁을 받더라도 나는 도와줄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때보다는 더 조심스럽게. 우리는 누군가의 손이 되고 싶다. 우리는 누군가의 소매단추를 채워주고 싶다. 우리는 누군가의 잃어버린 연을 찾아주고 싶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작은 천수관음이 되고 싶다.……세상을 위해 천 개의 팔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pp. 139~140)


7. 안식

위기의 시간에 자신에게 허용해도 될 생각은 오직 하나. 다음 할 일은 무엇인가뿐이다. 안식은 그 생각이 다 끝난 다음이다. - 생 텍쥐페리 -

1993년 10월 10일 정광우 씨가 섬 낚시를 갔다가 정원을 초과한 서해 훼리 호 침몰사건을 겪었던 이야기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선실 유리창을 머리로 들이받아 깨고 침몰하는 선실에서 탈출하여 구조선인 고깃배 종국호에 간신히 구조되어 목숨을 건졌다.

"생사의 위기를 넘은 생존자들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난 게 아니라고 말한다. 집에 있는 누군가를 위해 그렇게 버텼다고 말한다.... 위험하고 고단한 여로에 나선 사람들은 자기가 걸어온 길들을 한나절이나 하루 단위로 토막내기도 한다. 그 한 토막, 한 토막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바친다. 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 한 토막은 나를 위해 걸은 게 아니라고. 그대를 위해 참아낸 거라고. 당신을 위해 인내한 거라고. 그렇게 험한 길을 나선 사람들이 옷의 내피나, 모자의 챙에 가족의 이름을 새겨넣는 것은 자기 마음에 가족을 담아가는 풍습이다." (p. 150)

“나는 하나님 아래 그 섬세한 고리들로 이어진 다른 존재들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했었나. 그들을 위해 내가 살아나야 할 때도 있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살아나리라고 다짐한 사람도 있는 것을. 그 같은 사람들을 지루하게 여기고, 내 일상을 지겨워한 것은 그들과 내 생이 앞으로 항상 내게 머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인가. 그러나 내게 남은 생이 이번처럼 이제 하루나 한 시간뿐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것은 내 눈앞에서 얼마나 소중하고 선명하게 타들어갈 것인가. 
(중략)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근심 풀었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pp. 163~164)


8. 태어나 가장 기쁜 악수

나는 완전 몰입할 때 생의 기쁨을 느낀다. 그 순간을 위해 산에 올라간다. - 이현조 -

산악인 이현조 씨가 2005년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 남쪽 루팔 벽 등정 때 겪은 극한의 체험담이다. 그는 이 기억의 복원작업을 끝으로 2007년 5월 16일 새벽 에베레스트에서 가장 힘든 구간인 남서벽을 등정하다가 정상 1천미터를 남기고 산사태를 만사 숨졌다. 이 책에 등장한 주인공 중에서 유일한 사망자이다. 그가 낭가파르트 등정에서 구해낸 후배 김미곤 씨는 그가 사망한 날 아침 남동쪽 루트를 통해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했지만, 남서벽에서 이현조 씨가 숨을 거뒀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10미터, 20미터, 30미터, 나는 올라가는 게 아니라 들어가고 있다. 나를 잊어버리는 몰아의 세계로.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을 절대 집중의 세계로. 내면으로 난 이 통로 끝의 세계로. 나는 이런 시간이 좋았다. 그래서 등산을 선택했다." (p. 178)

"피켈은 등반가의 혼. 힘들더라도 피켈을 더 깊이 박아야 한다. 피켈을 휘두르는 스윙이 한 번, 두 번 모이고 쌓여 고도를 높이고, 정상으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밤 11시. 김창호 형과 나는 뜨겁게 끌어안고 무전을 날렸다. "대장님, 더 높으 곳이 없습니다. 여기가 정상입니다."  한국에서 출발한 지 94일 만이었다." (p. 181)

9. 라라야, 안녕

어떤 개들은 입을 길게 뒤로 당겨 사람의 웃음을 흉내낸다. 개들은 우리를 신이라 생각하진 않겠지만 갖은 추리를 다해 우리의 뜻을 섭리처럼 따라가려고 한다. - 엘리자베스 마셜 토머스 - 

고속버스 운전기사로 일했던 김진문 씨가 2002년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송정리 계곡에 전원주택을 짓고 애완견 시베리안 허스키 '라라'와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중 2006년 강원지역의 집중호우로 인한 산사태로 무너져내린 흙더미에 집과 함께 깔렸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오자마자 불어난 계곡 물에 곧바로 휩쓸려 떠내려가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무려 9일 동안이나 흙더미 속에 갇혀 있던 라라를 자신의 부상 때문에 제대로 보살펴줄 수 없어 끝내 다른 사람한테 맡기게 된 안타까운 사연이다.

"생사는 운명에 달린다. 그 운명이 주는 생존의 기회는 집중한 사람한테만 보이고 준비된 자에게만 주어진다." (p. 203)

"사람들은 헤어진 이들과는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고 말한다. 저편의 세상에선 사랑하던 이들과 마침내 재회하게 된다고. 그의 눈앞에는 선연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나중에 거기서 누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 (p. 213)


10. 오전 11시 23분

인간의 유일한 의무는 행복해지는 것이다.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났다. - 헤르만 헤세 -

경북 안동의 김보현 씨가 가난을 극복해보고자 어렸을 때부터 온갖 험한 일들을 겪고 우여곡절 끝에 친구의 제안으로 자동차 보험회사에 취직하여 열심히 뛴 결과 우수사원에 대한 포상으로 해외여행 대상자로 선정되어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임신한 아내와 함께 중국을 관광하고 귀국하는 비행기가 기상악화 및 조종사의 실수로 김해공항 인근 야산에 추락한 후 가까스로 탈출하고 구조되었던 아찔했던 체험담이다.

"그런 일은 내 적성에 맞았다. 누구나 행복을 줄 수는 없을지 몰라도, 불행을 덜어줄 수는 있다. 갑작스레 사고를 당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을 도와줄 때 정말 기뻤다. 어려서 마이너스 체험을 해본 사람은 다행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어려운 읽을겪는 애타는심정이 어떤 건지 알지 못한다." (p. 223)

"순전히 행복한 사람과 순전히 불행한 사람은 없다. 행복한 때와 불행한 때가 있을 뿐. 일생에는 행복과 불행이 뒤섞여 있다. 시절에 따라 그 비율이 조금씩 달라질 뿐. 가장 큰 행복은 괴로움이 가장 적을 때, 가장 큰 불행은 기쁨이 가장 적을 때이다.
(중략)
누군가 오전 11시 23분이 어떤 시간이냐고 물으면 나는 "우리가 추락했던 시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내 딸이 태어난 시간"이라고 말한다." (p. 237)


11. 생애 가장 긴 순간

저녁 놀이 아름답듯이 노인의 시선으로 본 세상은 아름답다. -이토 세이 -

건국 후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대한민국 항공회 총재로 일하고 있는 유명 토종 영어강사 이보영 씨의 모친인 김경오 씨가 1957년 대위로 예편한 지 10년 후인 1967년 7월 산후 우울증을 겪으면서도 한일 민간 여성 비행사 친선 교환비행차 위해 파이퍼 체로키라는 경비행기를 몰고 오사카로 향하던 중 정비불량인 경비행기의 고장으로 현해탄에 추락할 뻔한 위급한 상황에서 아슬아슬하게 다시 솟구쳐올라 정상 착륙했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야기이다.

그녀는 동덕여고 시절 교장 선생님의 추천으로 정부의 여성 비행사 선발시험에 추천되었으나 집안의 반대로 무산될 뻔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식구들 몰래 집을 빠져나와 한 겨울 눈발 속에서 국회의장 공관으로 달려가 직접 추천서를 받아와 훈련소에 입소할 정도로 열정이 넘쳤다.

"그녀는 조종사가 되면서 그렇게 교육받았다. 죽는 장소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고.
죽음은 삶이 남긴 동상이다. 죽는 한순간으로 인생 전체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 죽을 수밖에 없다면 최후의 위격을 갖춰야 한다." (p. 255)

"집착하면 일이 어려워지고, 마음을 비우면 시야가 넓어진다. 
(중략)
그의 회상 속에 비행기 기수를 왼편으로 돌리다가, 저 위로 지나가는 하늘을 본 것은 확실히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죽음마저 허락할 만큼 마음을 비워버린 뒤에 심리적인 시야가 넓어졌기 때문이었다. 착륙하기 위해 아래로만 향하던 시선이 집착없이 온전한 하늘을 대했기 때문이다. 내려가야 한다는 강박을 딛고 도리어 솟구쳐서 조망을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pp. 256~257)


12. 잃어버린 시계

사는 동안 내가 바라보는 모든 풍경의 군주는 바로 나다. - 윌리엄 쿠퍼 -

충북 청원의 이경섭 씨가 1997년 2월 11일 친구와 함께 저수지에서 얼음 위에서 놀다가 물 속에 빠져 죽었다가 공사 위병이 건져내 항공우주의료원 응급실에서 심폐소생술을 받고 살아난 기적같은 이야기이다. 그를 소생시킨 당시 항공우주의료원 진료부장은 정기영 대령으로 2007년 한국 최초의 우주인 주치의가 되었다고 한다.

"일체의 경험이 쌓이지 않고, 오로지 현재만 존재하는 삶. 감각은 고조될 대로 고조되고, 피로가 빨리 찾아오지만, 일상의 식상함이나 상투성은 사라져버린다. 만일 신처럼 불멸하는 삶이 있다면, 현재만이 그런 삶이 되리라. 영생의 대가로 일체의 기억이 시시각각 증발하는 삶. 그렇지 않다면 반복되는 일상과 세상의 정적인 측면에 지겨워서 불멸의 특권 자체를 반납할 수밖에 없으리라. 권태는 기억이 가져다준 형벌인 것이다." (pp. 267~268)

"그것은 아마 기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나서 듣게 되면, 생의 이 순간이 그 죽음 때문에 훨씬 더 선명해질 거라고. 지금 현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분명히 알게 될 거라고. 시시각각 기억의 바깥으로, 과거의 것으로 변색되는 이 한 번뿐인 현재가."  (p. 271)

이들 생존자들의 체험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의 신비한 우연이 거의 공통적으로 담겨져 있다. 그것은 대부분 자신이 아닌 타자, 즉 부모, 아내, 자녀 등 가족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것이기도 하고, 종교적 체험을 동반하는 경우도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열 두명의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갑작스럽게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몰려 죽음이라는 생의 극한에까지 닿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그들은 진정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고 자신의 진짜 삶과 직면하게 된다. 소설가 이윤기 씨는 추천평에서 "죽음을 유예시키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깨어있는 의식이라는 것을, 비슷한 과거가 있는 나는 이 책에서 다시 확인했다."고 했다.

죽음의 순간에 발동한 강렬한 생의 의지가 죽음도 물리친 감동적인 이야기는, 애써 기억하고 싶지 않은 비슷한 과거를 갖고 있는 나에게 처음에는 약간의 두려움 혹은 거부감을 줬던 것도 사실이지만, 반복되는 일상에 권태로움을 느끼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나를 다시금  추스려 일으키고 현재의 삶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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