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렸을 때부터 집에 있었다. 비싼 돈을 주고 산 건지, 어디에서 받아 온 건지도 모를 이 작은 책상엔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불쌍한 애들끼리 끌리게 되나 봐. 빌어먹을 선민의식일 수도 있다. 적어도. 적어도 선호의 상황이 욱찬보다는 나았으니까.

어른인 척하고 싶어 하나 어른이 되고 싶진 않을 거다. 자신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어린아이로 남고 싶겠지. 이해한다. 어쩌면 동정이나 연민일 수도 있고.

고독한 척, 비관적인 척은 그동안 혼자 다 해 놓고, 도대체 눈물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모르겠다. 입꼬리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가 바들바들 떨렸다.

선호는 샤워했다. 제 몸에 덕지덕지 눌어붙어 있던 우울과 슬픔, 그리고 술과 담배 냄새까지도 모두 물로 쓸어 보냈다.

"배선호, 니 인생 망쳐 줄까?"

먼 미래의 사람들은 봄과 가을을 알까. 그때는 지금과는 모든 게 달라지겠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과 감정마저도 역사의 산물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자기 집은 돌아가고 훨씬 먼 주제에 꼬박꼬박 나를 집을 데려다주던 어린 이욱찬의 발걸음이, 우리 동네 곳곳에 남아 있었다.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이욱찬은 대답 대신 멀어지는 비행기를 보았다.
"인생 망쳐 주냐고."
이욱찬은 그제야 나와 눈을 마주했다.
"나 안 망할 거야."
"……."
"그러니까 너도 망하지 마."

나랑 이욱찬은 멀어지는 비행기의 잔흔을 쫓았다. 우리는 대화를 더 이어 나가지 않았다. 아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서로를 위해서 열심히 살자.

다만 우리의 삶이 지금보다는 조금 더 평온하고 평탄하기를, 허공을 떠다니던 이욱찬의 착륙을 받아 주는 활주로가 되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단지 그것뿐이다.

답답해. 가난이 싫다. 이럴 거면 대학도 오지 말 걸 그랬다. 평생을 우물 안 개구리로 살걸.

어차피 보낼 돈도 없었는데 화라도 내지 말걸. 죄책감이 짙게 내려앉는다.

돈도 없는데 생색은. 헛웃음을 뱉었다. 빌려줄 돈도 없었으면서 짜증은.

욱찬에겐 이상한 책임감이 있다. 제 인생뿐만 아니라 선호의 인생도 본인이 책임져야 된다는 듯 굴곤 했다.

일정한 심장 박동에 안정감을 느끼는 것, 지나간 과거보다 앞으로의 미래가 더 기대되는 게, 흔히들 생각하는 애정일까.

그동안 왜 피했나 싶었다. 여기도 우리 집인걸. 평생을 살아왔는데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을까.

빨리 돌아가고 싶다. 우리만의 공간으로. 언젠가는 말하더라도, 지금은 둘만의 시간, 둘만의 장소로 가고 싶었다. 눈치 보는 것 없이. 그곳이 비록 곰팡내가 나고, 햇빛도 어스름히 들어오는 반지하 원룸이라고 해도 말이다.

지랄해도 봐주자. 화내고, 짜증 내도 봐줘야지.

천안에 있었으면, 우리가 살아온 그곳에 여전히 있었으면 좀 더 나은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서울은 고달프고 벅찼다.

주어가 없어도 통하는 게 있다. 함께 걸어온 시간이 분명히 있었다. 몇 년이 흘렀던 서툴고 불안한 연애지만, 그 불안을 잠재워 줄 만한 시간이 두 사람에겐 분명히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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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관을, 열었지?"

그들은 피해자에게 직접 수를 쓰고는 또 직접 치료해 주는 방식으로, 피해자를 사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옭아맸다.

누가 알았을까. 지칭천이 적연 대협곡에서 영문도 모르고 처참한 죽음을 맞게 될 줄을.
지칭천은 어째서 적연 대협곡으로 간 것일까?

마치… 그의 순진무구함에 설득력을 실어주는 것 같았다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사방팔방에서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그 웃음소리는 바위에 못 박힌 아로진의 목소리였다!

누가 번역했는지는 확인해 볼 길이 없지만, 출토된 고대 중국어 고서들 중에는 ‘주(呪)’라는 개념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 이 ‘주’의 강점은 적당한 도구만 있다면 일반인도 쓸 수 있다는 점이다. 개중 일부는 살상력이 무척 강했지만, 신기하게도 모두 그에 대응하는 해법이 있어서 해주를 쓰기만 하면 후유증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기억이 돌아왔다. 그야말로 불청객처럼.
되살아난 생전의 일들은 거추장스럽기 그지없었다. 기억은 천근만근의 시름이 되어, 주변을 살필 기력조차 낼 수 없을 만큼 그를 짓눌렀다.

참, 당시의 그는 대체 어쩌다 눈을 떠서 다시 인간 세상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일까?

사람이 죽으면 혼백은 흩어진다. 귀신과 요괴란 무릇 불운에 빠진 사람이 만들어낸 자기 기만적인 환상이다

그럼에도 쉬엔지는 심장을 잡아 뜯기는 것처럼 괴로워졌다. 잠시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마치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정이 허무하게 버려진 것만 같았다.

이 사람은 마음에 동요가 일어날수록 거리를 두는 것이다. 이때 그가 소년 시절의 아름다운 꿈에 갇힌 채 깨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쉬엔지는 이분께 약점 같은 건 없다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도 나약하게 애써 자신을 속인단 말이야? 어떤 기억 한 자락에 갇혀 헤매일 수도 있고?

"당신을 가둘 수 있는 기억이 어떻게 시시하고 보잘것없는 일이겠습니까?"

자신이 요족이 아니면 무엇일까. 어차피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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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짧은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헤어졌다. 아쉬움 따윈 하나도 담아 두지 않고 그렇게.

고요한 밤. 정적 속에서 시끄러운 엔진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 거친 엔진 소리를 듣자마자 이욱찬의 ‘오도바이’를 떠올렸다.

나는 그 익숙한 향을 맡으며 눈을 감았다. 그래도 혼자 있을 때보다는 덜 춥다. 말해 주고 싶은데, 그러기엔 너무나도 졸렸다.

우리는 각자의 손에 창을 들고, 어깨엔 무거운 방패를 빙자한 가방을 메고 전쟁터로 출근하고 있었다.

엄마는 어쩌면 나와의 식사를 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표면상의 가족. 깊은 대화 따윈 없다. 역할 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자동차가 사라진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자동차가 떠난 자리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른다. 엄마는 왜 거짓말을 했을까.

나는 겨울밤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 단단히 몸을 감쌌다

겨울밤은 마치 모든 걸 잡아먹을 것 같다. 사납고 음습했다. 연말의 따스한 온기도, 결국은 빛으로 추위를 가려낸 것뿐이었다.

퉁명스러운 말과 함께 괜히 눈 앞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냥 실망은 괜찮지만, 기대에서 변질된 실망은 나를 조금 더 비참하게 만들고 눈물까지 찔끔 나왔다. 엄지로 눈 앞머리를 꾹꾹 누른 후, 패딩 모자를 뒤집어썼다.

나는 그곳에서 무서울 만큼 쓸쓸하고 고독한 뒷모습과 목소리를 보고 들었다. 어둠을 가로지르는 희뿌연 연기는 곡선을 그리다 흐려졌다.

그래서 묻는 척 따지고 싶었다. 왜 나에게 아침에 기다리라고 말한 건지. 잊고 있던 건지. 왜 이제 나타나 나를 괴롭히는 건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던 건지.

그렇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태생이 그런 속 좋은 녀석은 되지 못했다.
아, 찌질해…. 나는 너무나도 찌질한 인간이다.

지가 늦어 놓고 왜 나한테 난리야. 나는 아예 뒷전으로 밀어 놓고 할 일 다 하고, 놀 거 다 처놀다가 늦어 놓고선 왜 나한테 화풀이냐고.

겨울, 나뭇가지에 간신히 매달린 죽은 나뭇잎 같았다. 바삭하고 손으로 한 번 문지르면 다 부서지고 말 나뭇잎. 그게 바로 나였다.

"나 신경 쓰고 싶어. 때리고 맞는 게 정상적인 친구는 아니잖아. 아무리 네 친구가 폭력적이라고 해도."

이제 속상하다고 울고, 화난다고 버럭버럭 화내도 되는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열여덟 살이니까. 열일곱 살 때처럼 마냥 감정을 표출할 순 없었다.

사실은 나도 직설적인 타입은 아니지만 적어도 대화를 나누는 인간 두 명이 모두 돌려 말하는 편이면 괜히 이상해진다.

쿵. 심장이 떨어졌다. 나는 떨어진 심장을 주워 담는 대신 이불을 움켜잡았다. 부릅뜬 눈이 천장을 겨냥했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데 순식간에 공기가 뒤바뀌었다. 뒤바뀌다 못해 바람 빠진 풍선이 되어 쪼그라들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말을, 어마어마한 준비 끝에야 간신히 했다. 정작 말하고 나니 마음이 괜찮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다. 사실은 맥이 풀렸다.

모르는 척으로 일관한 나로 인해 우리는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바짝 선 긴장감에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 위에서 뒤척일 뿐이다.

내가 나를 인정한 것과 타인에게 인정한 나를 드러내는 건 달랐다.

나는 정현우를 재단기 위에 올려놓고 신랄하게 칼을 휘둘렀다. 정현우가 나에게 무슨 이유로 이런 질문을 한 건지 모르겠다. 그의 세계에선 모든 사람이 그래도 돼, 살고 싶은 대로 살아, 다른 사람들 눈치 보지 말고, 원하는 대로. 따위의 긍정적인 응원이라도 해 줬던 걸까. 그래서 나에게 응원이라도 해 주려는 걸까.

나는 옅은 곰팡내가 나는 내 방, 침대 위에서 결국 연민에 빠져 버렸다. 그래도 되는 세계가 있다. 안 되는 세계가 있고.

다시 돌아온 현실, 악을 앞에 두고 똘똘 뭉쳤던 영웅 무리는 이미 다 흩어진 후였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가졌던 유대감은 평화로운 현실 앞에서 모두 흐지부지되었다.

새 학기에 같은 반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다들 그러하듯이 한 해만 유독 잘 지냈던 친구 사이, 반이 갈라지면서 사이도 소원해진 그저 그랬던 관계로 남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마주 설 수 있었던 거고. 그런데 나는 내가 두렵고, 무섭다는 이유로 나뿐만 아니라 그에게까지 상처를 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울고 싶었다. 분명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울했다. 얼핏 들은 정현우의 가정사 때문이 아니었다. 이모가 그에게 건넨 내 험담 때문도 아니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쉽게 꺼내지 못할 비밀을 똑똑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절대로, 절대로 당사자에게는 말하지 못할 거다.

나에게 사춘기란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회오리에 빠진 것과 같았다.

이욱찬은 좋게 말하자면 배포가 컸고, 나쁘게 말하자면 건달이나 양아치의 낌새를 그때부터 보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에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우리 둘 다 외로워.

그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앞뒤로 걸었다가 한 바퀴 돌았다. 파트너 없이 추는 왈츠 같았다. 그만큼 고결하거나 우아하진 않았지만.

남들이 보기엔 나이 미상에, 누가 봐도 양아치 무리인 그들과 같이 다니는 게 버겁기도 했다.

나는 술을 마실수록 우울해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향해 추락했다. 최악의 상황을 떠올렸다. 나 혼자 그 촌스러운, 붉은 꽃들이 수를 놓은 모텔에서 잠들어야 한다는 것.

나는 횟집 옆 편의점 앞에 놓여 있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세상이 지나치게 험난했다. 술로 슬픔과 우울함을 잊는 사람들은 무슨 수로 잊는 걸까.

모든 걸 잊자는 그의 말처럼 우리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나는 어젯밤 그 일이 혹시 내 꿈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나는 전날 밤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술이 깨고, 이성이 또렷해질수록 더더욱.

소금기 어린 바닷바람에 후회를 실어 보내기로 했다. 밀려들었다 꺼지는 파도에 함께 내 마음을 보내기로 했다. 그게 맞다.

여행의 끝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정말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끝나는 거구나. 여행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허무한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서로의 기억이 공유되는 아래에서 그런다고?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고작 입맞춤, 이게 뭐라고 모든 풍파를 다 겪는 것 같은 감정의 회오리에 휘말려야 한단 말인가.

성급하고, 조급하고, 다급한 녀석들이 우리를 바쁘게 스쳐 지나갔다. 영화 같았다. 나랑 정현우는 그냥 걷는 건데 주변만 빠르게 흘러갔다.

날 대할 때처럼 어색해하지도, 불편해하지도 않았다. 아마 그날 새벽을 끝으로 우리의 관계는 끝났나 보다.

겉만 얼고 속은 액체 상태인 얼음. 그것이 우리 가족을 비유할 수 있는 것이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진 못하고 엉뚱한 질문과 답만 늘어놓았다. 늦은 밤 켜 놓은 가로등 주변에 꼬인 날벌레처럼 주변만 빙빙 돌았다.

자존심을 세우지 말 걸 그랬나. 이게 아닌가…. 말을 하면 할수록 실수하는 느낌이 든다.

나는 내가 평생을 괴로워할 줄 알았다. 고작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워하고, 죽기 직전에 피 토하듯 말을 쏟아 낼 줄 알았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게 있다. 그는 내가 오자마자 왜 장난을 쳤으며, 모르는 척하려고 했을까. 어쩌면 나에게도 내심 티 내고 있던 걸까. 다 알고 있으니까 굳이 말하지 말라고.

어두운 방, 그의 주변엔 어둠뿐이다. 내 주변도 마찬가지겠지. 그의 덩치로 인해 더 짙고 깊은 그림자가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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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렸을 때부터 집에 있었다. 비싼 돈을 주고 산 건지, 어디에서 받아 온 건지도 모를 이 작은 책상엔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불쌍한 애들끼리 끌리게 되나 봐. 빌어먹을 선민의식일 수도 있다. 적어도. 적어도 선호의 상황이 욱찬보다는 나았으니까.

어른인 척하고 싶어 하나 어른이 되고 싶진 않을 거다. 자신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어린아이로 남고 싶겠지. 이해한다. 어쩌면 동정이나 연민일 수도 있고.

고독한 척, 비관적인 척은 그동안 혼자 다 해 놓고, 도대체 눈물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모르겠다. 입꼬리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가 바들바들 떨렸다.

선호는 샤워했다. 제 몸에 덕지덕지 눌어붙어 있던 우울과 슬픔, 그리고 술과 담배 냄새까지도 모두 물로 쓸어 보냈다.

"배선호, 니 인생 망쳐 줄까?"

먼 미래의 사람들은 봄과 가을을 알까. 그때는 지금과는 모든 게 달라지겠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과 감정마저도 역사의 산물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자기 집은 돌아가고 훨씬 먼 주제에 꼬박꼬박 나를 집을 데려다주던 어린 이욱찬의 발걸음이, 우리 동네 곳곳에 남아 있었다.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이욱찬은 대답 대신 멀어지는 비행기를 보았다.
"인생 망쳐 주냐고."
이욱찬은 그제야 나와 눈을 마주했다.
"나 안 망할 거야."
"……."
"그러니까 너도 망하지 마."

나랑 이욱찬은 멀어지는 비행기의 잔흔을 쫓았다. 우리는 대화를 더 이어 나가지 않았다. 아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서로를 위해서 열심히 살자.

다만 우리의 삶이 지금보다는 조금 더 평온하고 평탄하기를, 허공을 떠다니던 이욱찬의 착륙을 받아 주는 활주로가 되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단지 그것뿐이다.

답답해. 가난이 싫다. 이럴 거면 대학도 오지 말 걸 그랬다. 평생을 우물 안 개구리로 살걸.

어차피 보낼 돈도 없었는데 화라도 내지 말걸. 죄책감이 짙게 내려앉는다.

돈도 없는데 생색은. 헛웃음을 뱉었다. 빌려줄 돈도 없었으면서 짜증은.

욱찬에겐 이상한 책임감이 있다. 제 인생뿐만 아니라 선호의 인생도 본인이 책임져야 된다는 듯 굴곤 했다.

일정한 심장 박동에 안정감을 느끼는 것, 지나간 과거보다 앞으로의 미래가 더 기대되는 게, 흔히들 생각하는 애정일까.

그동안 왜 피했나 싶었다. 여기도 우리 집인걸. 평생을 살아왔는데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을까.

빨리 돌아가고 싶다. 우리만의 공간으로. 언젠가는 말하더라도, 지금은 둘만의 시간, 둘만의 장소로 가고 싶었다. 눈치 보는 것 없이. 그곳이 비록 곰팡내가 나고, 햇빛도 어스름히 들어오는 반지하 원룸이라고 해도 말이다.

지랄해도 봐주자. 화내고, 짜증 내도 봐줘야지.

천안에 있었으면, 우리가 살아온 그곳에 여전히 있었으면 좀 더 나은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서울은 고달프고 벅찼다.

주어가 없어도 통하는 게 있다. 함께 걸어온 시간이 분명히 있었다. 몇 년이 흘렀던 서툴고 불안한 연애지만, 그 불안을 잠재워 줄 만한 시간이 두 사람에겐 분명히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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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렸을 때부터 집에 있었다. 비싼 돈을 주고 산 건지, 어디에서 받아 온 건지도 모를 이 작은 책상엔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불쌍한 애들끼리 끌리게 되나 봐. 빌어먹을 선민의식일 수도 있다. 적어도. 적어도 선호의 상황이 욱찬보다는 나았으니까.

어른인 척하고 싶어 하나 어른이 되고 싶진 않을 거다. 자신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어린아이로 남고 싶겠지. 이해한다. 어쩌면 동정이나 연민일 수도 있고.

고독한 척, 비관적인 척은 그동안 혼자 다 해 놓고, 도대체 눈물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모르겠다. 입꼬리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가 바들바들 떨렸다.

선호는 샤워했다. 제 몸에 덕지덕지 눌어붙어 있던 우울과 슬픔, 그리고 술과 담배 냄새까지도 모두 물로 쓸어 보냈다.

"배선호, 니 인생 망쳐 줄까?"

먼 미래의 사람들은 봄과 가을을 알까. 그때는 지금과는 모든 게 달라지겠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과 감정마저도 역사의 산물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자기 집은 돌아가고 훨씬 먼 주제에 꼬박꼬박 나를 집을 데려다주던 어린 이욱찬의 발걸음이, 우리 동네 곳곳에 남아 있었다.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이욱찬은 대답 대신 멀어지는 비행기를 보았다.
"인생 망쳐 주냐고."
이욱찬은 그제야 나와 눈을 마주했다.
"나 안 망할 거야."
"……."
"그러니까 너도 망하지 마."

나랑 이욱찬은 멀어지는 비행기의 잔흔을 쫓았다. 우리는 대화를 더 이어 나가지 않았다. 아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서로를 위해서 열심히 살자.

다만 우리의 삶이 지금보다는 조금 더 평온하고 평탄하기를, 허공을 떠다니던 이욱찬의 착륙을 받아 주는 활주로가 되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단지 그것뿐이다.

답답해. 가난이 싫다. 이럴 거면 대학도 오지 말 걸 그랬다. 평생을 우물 안 개구리로 살걸.

어차피 보낼 돈도 없었는데 화라도 내지 말걸. 죄책감이 짙게 내려앉는다.

돈도 없는데 생색은. 헛웃음을 뱉었다. 빌려줄 돈도 없었으면서 짜증은.

욱찬에겐 이상한 책임감이 있다. 제 인생뿐만 아니라 선호의 인생도 본인이 책임져야 된다는 듯 굴곤 했다.

일정한 심장 박동에 안정감을 느끼는 것, 지나간 과거보다 앞으로의 미래가 더 기대되는 게, 흔히들 생각하는 애정일까.

그동안 왜 피했나 싶었다. 여기도 우리 집인걸. 평생을 살아왔는데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을까.

빨리 돌아가고 싶다. 우리만의 공간으로. 언젠가는 말하더라도, 지금은 둘만의 시간, 둘만의 장소로 가고 싶었다. 눈치 보는 것 없이. 그곳이 비록 곰팡내가 나고, 햇빛도 어스름히 들어오는 반지하 원룸이라고 해도 말이다.

지랄해도 봐주자. 화내고, 짜증 내도 봐줘야지.

천안에 있었으면, 우리가 살아온 그곳에 여전히 있었으면 좀 더 나은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서울은 고달프고 벅찼다.

주어가 없어도 통하는 게 있다. 함께 걸어온 시간이 분명히 있었다. 몇 년이 흘렀던 서툴고 불안한 연애지만, 그 불안을 잠재워 줄 만한 시간이 두 사람에겐 분명히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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