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짧은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헤어졌다. 아쉬움 따윈 하나도 담아 두지 않고 그렇게.

고요한 밤. 정적 속에서 시끄러운 엔진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 거친 엔진 소리를 듣자마자 이욱찬의 ‘오도바이’를 떠올렸다.

나는 그 익숙한 향을 맡으며 눈을 감았다. 그래도 혼자 있을 때보다는 덜 춥다. 말해 주고 싶은데, 그러기엔 너무나도 졸렸다.

우리는 각자의 손에 창을 들고, 어깨엔 무거운 방패를 빙자한 가방을 메고 전쟁터로 출근하고 있었다.

엄마는 어쩌면 나와의 식사를 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표면상의 가족. 깊은 대화 따윈 없다. 역할 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자동차가 사라진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자동차가 떠난 자리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른다. 엄마는 왜 거짓말을 했을까.

나는 겨울밤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 단단히 몸을 감쌌다

겨울밤은 마치 모든 걸 잡아먹을 것 같다. 사납고 음습했다. 연말의 따스한 온기도, 결국은 빛으로 추위를 가려낸 것뿐이었다.

퉁명스러운 말과 함께 괜히 눈 앞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냥 실망은 괜찮지만, 기대에서 변질된 실망은 나를 조금 더 비참하게 만들고 눈물까지 찔끔 나왔다. 엄지로 눈 앞머리를 꾹꾹 누른 후, 패딩 모자를 뒤집어썼다.

나는 그곳에서 무서울 만큼 쓸쓸하고 고독한 뒷모습과 목소리를 보고 들었다. 어둠을 가로지르는 희뿌연 연기는 곡선을 그리다 흐려졌다.

그래서 묻는 척 따지고 싶었다. 왜 나에게 아침에 기다리라고 말한 건지. 잊고 있던 건지. 왜 이제 나타나 나를 괴롭히는 건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던 건지.

그렇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태생이 그런 속 좋은 녀석은 되지 못했다.
아, 찌질해…. 나는 너무나도 찌질한 인간이다.

지가 늦어 놓고 왜 나한테 난리야. 나는 아예 뒷전으로 밀어 놓고 할 일 다 하고, 놀 거 다 처놀다가 늦어 놓고선 왜 나한테 화풀이냐고.

겨울, 나뭇가지에 간신히 매달린 죽은 나뭇잎 같았다. 바삭하고 손으로 한 번 문지르면 다 부서지고 말 나뭇잎. 그게 바로 나였다.

"나 신경 쓰고 싶어. 때리고 맞는 게 정상적인 친구는 아니잖아. 아무리 네 친구가 폭력적이라고 해도."

이제 속상하다고 울고, 화난다고 버럭버럭 화내도 되는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열여덟 살이니까. 열일곱 살 때처럼 마냥 감정을 표출할 순 없었다.

사실은 나도 직설적인 타입은 아니지만 적어도 대화를 나누는 인간 두 명이 모두 돌려 말하는 편이면 괜히 이상해진다.

쿵. 심장이 떨어졌다. 나는 떨어진 심장을 주워 담는 대신 이불을 움켜잡았다. 부릅뜬 눈이 천장을 겨냥했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데 순식간에 공기가 뒤바뀌었다. 뒤바뀌다 못해 바람 빠진 풍선이 되어 쪼그라들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말을, 어마어마한 준비 끝에야 간신히 했다. 정작 말하고 나니 마음이 괜찮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다. 사실은 맥이 풀렸다.

모르는 척으로 일관한 나로 인해 우리는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바짝 선 긴장감에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 위에서 뒤척일 뿐이다.

내가 나를 인정한 것과 타인에게 인정한 나를 드러내는 건 달랐다.

나는 정현우를 재단기 위에 올려놓고 신랄하게 칼을 휘둘렀다. 정현우가 나에게 무슨 이유로 이런 질문을 한 건지 모르겠다. 그의 세계에선 모든 사람이 그래도 돼, 살고 싶은 대로 살아, 다른 사람들 눈치 보지 말고, 원하는 대로. 따위의 긍정적인 응원이라도 해 줬던 걸까. 그래서 나에게 응원이라도 해 주려는 걸까.

나는 옅은 곰팡내가 나는 내 방, 침대 위에서 결국 연민에 빠져 버렸다. 그래도 되는 세계가 있다. 안 되는 세계가 있고.

다시 돌아온 현실, 악을 앞에 두고 똘똘 뭉쳤던 영웅 무리는 이미 다 흩어진 후였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가졌던 유대감은 평화로운 현실 앞에서 모두 흐지부지되었다.

새 학기에 같은 반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다들 그러하듯이 한 해만 유독 잘 지냈던 친구 사이, 반이 갈라지면서 사이도 소원해진 그저 그랬던 관계로 남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마주 설 수 있었던 거고. 그런데 나는 내가 두렵고, 무섭다는 이유로 나뿐만 아니라 그에게까지 상처를 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울고 싶었다. 분명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울했다. 얼핏 들은 정현우의 가정사 때문이 아니었다. 이모가 그에게 건넨 내 험담 때문도 아니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쉽게 꺼내지 못할 비밀을 똑똑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절대로, 절대로 당사자에게는 말하지 못할 거다.

나에게 사춘기란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회오리에 빠진 것과 같았다.

이욱찬은 좋게 말하자면 배포가 컸고, 나쁘게 말하자면 건달이나 양아치의 낌새를 그때부터 보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에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우리 둘 다 외로워.

그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앞뒤로 걸었다가 한 바퀴 돌았다. 파트너 없이 추는 왈츠 같았다. 그만큼 고결하거나 우아하진 않았지만.

남들이 보기엔 나이 미상에, 누가 봐도 양아치 무리인 그들과 같이 다니는 게 버겁기도 했다.

나는 술을 마실수록 우울해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향해 추락했다. 최악의 상황을 떠올렸다. 나 혼자 그 촌스러운, 붉은 꽃들이 수를 놓은 모텔에서 잠들어야 한다는 것.

나는 횟집 옆 편의점 앞에 놓여 있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세상이 지나치게 험난했다. 술로 슬픔과 우울함을 잊는 사람들은 무슨 수로 잊는 걸까.

모든 걸 잊자는 그의 말처럼 우리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나는 어젯밤 그 일이 혹시 내 꿈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나는 전날 밤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술이 깨고, 이성이 또렷해질수록 더더욱.

소금기 어린 바닷바람에 후회를 실어 보내기로 했다. 밀려들었다 꺼지는 파도에 함께 내 마음을 보내기로 했다. 그게 맞다.

여행의 끝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정말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끝나는 거구나. 여행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허무한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서로의 기억이 공유되는 아래에서 그런다고?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고작 입맞춤, 이게 뭐라고 모든 풍파를 다 겪는 것 같은 감정의 회오리에 휘말려야 한단 말인가.

성급하고, 조급하고, 다급한 녀석들이 우리를 바쁘게 스쳐 지나갔다. 영화 같았다. 나랑 정현우는 그냥 걷는 건데 주변만 빠르게 흘러갔다.

날 대할 때처럼 어색해하지도, 불편해하지도 않았다. 아마 그날 새벽을 끝으로 우리의 관계는 끝났나 보다.

겉만 얼고 속은 액체 상태인 얼음. 그것이 우리 가족을 비유할 수 있는 것이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진 못하고 엉뚱한 질문과 답만 늘어놓았다. 늦은 밤 켜 놓은 가로등 주변에 꼬인 날벌레처럼 주변만 빙빙 돌았다.

자존심을 세우지 말 걸 그랬나. 이게 아닌가…. 말을 하면 할수록 실수하는 느낌이 든다.

나는 내가 평생을 괴로워할 줄 알았다. 고작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워하고, 죽기 직전에 피 토하듯 말을 쏟아 낼 줄 알았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게 있다. 그는 내가 오자마자 왜 장난을 쳤으며, 모르는 척하려고 했을까. 어쩌면 나에게도 내심 티 내고 있던 걸까. 다 알고 있으니까 굳이 말하지 말라고.

어두운 방, 그의 주변엔 어둠뿐이다. 내 주변도 마찬가지겠지. 그의 덩치로 인해 더 짙고 깊은 그림자가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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