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아로진, 배후의 검은손을 낚을 미끼였다.

한 생각에 사로잡혀 마에 빠진 자에게 그 이후의 육체란 껍데기에 불과할 뿐 더 이상 원래의 그 사람이 아니라고. 아로진은 ‘집념’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걸어다니는 고깃덩어리일 뿐이었다.

이것이 수천 년 뒤의 세상이다. 요족도, 인족도 없다. 법술 대부분은 진위를 알 수 없는 종이 속 전설이 되었다

이건 그냥 그와 아로진의 속성이 상극이기 때문이었나?

3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온 오랜 상징이었다. 열화와 백골 사이에서 태어나, 비통하고도 엄숙한. 그가 말도 웃음도 없이 고요한 얼굴로 서 있는 지금, 요사스럽고 기이하며 모순적인 신성(神聖)이 다시 한 번 시대를 뛰어넘어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이 멈추었다. 그러나 쉬엔지는 피하지 않았다. 그는 이 귀하디 귀한 1초를 아로진의 발치에다 총을 한 번 더 발사하는 데 썼다

흉포한 바람의 칼날은 쉬엔지의 옷에 얕은 흔적만을 남기고 연기처럼 흩어졌다.

아로진이 부족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동천을 떠난 그 순간부터, 고향의 산천은 더 이상 그의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의 일생에는 언제나 아쉬움과 후회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만약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백일몽을 꾸지만, 꿈에서 깨어나 결국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면 그걸로 그만이다.

꽃밭이 비단처럼 펼쳐지는 땅에서 자란 그는 추위도 더위도, 아픔도 괴로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허황된 몽상 속을 노닐었다

이후 그 꿈들은 하나하나 깨져나갔건만, 마지막으로 남은 이 독약 같은 꿈에서는 깨어나지 못했다.

이는 마치… 이 세계의 규칙이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존재가 현재의 시공간에 침입한 것에 대해 온 천지가 놀라움과 분노에 가득 차 천벌을 내리는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없었어…. 마음껏 지내본 날조차… 단 하루라도 있었나…"

방금… 방금 불꽃의 실에 가슴이 뚫리고 벼락까지 맞았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세상의 좋은 것들은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니까. 제일 아름다운 꽃도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 번 피어난다고 했어. 일생에 한 번 잠깐 피었다가 곧 져버리지. 아주 오래 산 사람도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 즐거웠던 일 몇 가지만 떠오를 뿐이래. 모두 부싯불처럼 한 번 놓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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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모욕을 당한다면, 그것은 곧 나를 향한 모욕이오."

백은래의 옆모습에 무늬를 수놓던 햇살은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하늘이 삽시간에 흐려졌다. 이윽고 낱알을 흩뿌리는 듯한 소리가 요란스레 사위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슬픔이 격랑처럼 밀려들어 백은래를 집어삼켰다. 캄캄한 바다 속에 잠긴 듯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버거웠다. 더없이 괴로운 심정이었으나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신이 무탈히 살아가기를 바란 것이 그리 잘못이었나.

그 지나치게 평연한 문장이 송곳처럼 주자헌의 가슴을 찔렀다. 전신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에, 주자헌은 한 손으로 미간을 감싸 쥐었다.

"그대 같은 이를 마음에 품었는데, 달리 누가 눈에 들어오겠소?"

인간의 손을 타지 않고 자란 오래된 식물들이 내뿜는 숲 특유의 향취와, 몸을 씻어도 다 가시지 않는 화약과 철과 피의 냄새를

"재주 있는 자는 신분을 막론하고 뜻을 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태조께서 내세우신 제국의 기조입니다. 비록 제 손으로 뽑은 인물은 아니지만, 저는 제 승상보다 뛰어난 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 말씀을 삼가 주십시오."

하지만 그 다음에는? 저 뱀이 주자헌의 목을 과연 그대로 내버려 둘까?

"생각에 앞서 몸이 움직였소. 그뿐이오."
과거에 자신이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을 타인의 입에서 듣는 것은 기이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끔찍하게 외로운 감각이었다. 우주에 혼자 남겨진 듯 마음이 텅 빈 것 같았다.

"만약 가난과 굶주림에 못 이겨 향주를 공격한 것이었다면 나는 너에게 최소한의 연민을 품었을 것이다. 하지만 너는 모자람 없이 가지고도 탐욕을 부리는 것이, 꼭 내가 아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군."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자신은 그저, 주자헌의 곁에서 향주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했을 뿐이건만.

그 새벽에 보았던 눈에 푸른 기운이 없어 영락없이 금족이라 생각했으나, 돌이켜 보면 세상에는 금족과 북명족의 경계에 걸친 인간도 존재했다.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는 푸른 첨정석처럼 선명한 빛을 내다가도, 실내에 들어서면 흐린 날의 바다처럼 부드러운 빛깔로 바뀌곤 하던 그 눈을. 화로의 약한 불빛에 의지해 그를 품던 순간에는 또 어떠했던가. 거의 안개 같은 회색에 가깝지 않았던가?

먹먹한 감정이 차올라 가슴속을 채웠다. 못다 한 말들이 명치끝에 걸린 듯 속이 거북했다. 그 새벽 이후로 같은 꿈을 수없이 되풀이해 꾸었다. 언젠가 너를 찾아낼 날을 기다리며, 아득한 그리움 속에서 긴 세월을 견뎌 냈다.

이미 곁에 와 있는 줄도 모르고서.

어찌 그에게 매혹되지 않을 수 있을까. 다채로운 빛깔의 광채를 지닌 자개와도 같은 영롱함이 그에게 깃들어 있었다. 그 반짝임은 어느 세계에서든 변치 않을 터였다.

‘여러 종류의 독에 면역이라 하여 모든 종류의 독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독에는 한계가 있고, 그 성질이 서로 겹치는 것들도 많습니다. 본래라면 큰 해를 입을 만한 독에 당하더라도 적은 피해만으로 지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어떤 이들은 몸이 독을 이겨 내더라도 정신이 취해 버린 채 영영 꿈속을 헤매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소관이 드리는 말씀을 기억하소서. 전하께는 반드시 생으로 돌아와야 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이 꿈에서 깨어나야 했다. 마침내 오랜 숙원을 이룰 날이 왔다는 깨달음이 주자헌의 정신을 이끌었다. 백은래에게 반드시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15년을 헤맨 끝에 그를 찾았다. 살아 있기만 한다면 당장 대답해 주지 않는다 해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건만.

어떤 수모나 모멸도 겪지 않도록 해 주고 싶었다.

그러자 오랜 세월 동안 차곡차곡 쌓여 온 마음의 파편들이 점성을 얻어 뭉치기 시작했다. 절실한 기원, 간곡한 바람, 애틋한 소망, 무엇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 형질은 모두 같았고, 동일한 무게와 부피로 주자헌의 내면을 채우며 특정한 깨달음을 이끌어 냈다.

"내 사람을 해하고서 감히 너만은 살기를 바라느냐?"

이제야 그대가 내게 어떤 존재인지 알았건만.

귀하지 않은 목숨은 하늘 아래 없었다.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백은래와 같은 존재조차도 그러할 터였다.

다정한 목소리는 여름이면 산기슭에서 피어나는 분홍빛 석죽화를 떠올리게 했다. 잎새 끄트머리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고, 입 안에 넣어 굴리면 은근한 단맛이 나는 고운 꽃. 그런데 귀하신 분을 고작 들꽃 따위에 비유하는 것은 죄일까?

"언젠가 그대를 찾아 은혜를 갚고 싶었소. 반드시 찾아내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주겠다고, 끊임없이 다짐하며 이날 이때까지 살아왔소. 그 다짐이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 어딘가의 묘비 아래에 묻혀 있었을 거요."

"나는 더 이상 숨지 않을 것이오. 언제나 서왕을 두려워하며 그의 그늘 아래서 살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겠소. 그대를 노리는 자가 있다면 내가 먼저 나서서 제거할 것이고, 그대를 욕보이는 자가 있다면 내 손으로 목을 베겠소."

자신에게는 그를 미워할 자격 같은 것이 없었다.

"아무 관계도 없는 이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소. 인간이란 늘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법이니."

다만, 주자헌은 생각했다.
이 나라를 그대에게 주겠다 말한다면, 그대는 황제가 눈이 멀었다며 정변을 일으키려 들까.

주렴을 걷어 내고 둥근 창을 열자 보이는 것은 어둠이 완전히 물러나고 환한 태양 빛이 세상을 물들이기 직전의 박명이었다. 담청빛 새벽이 번져 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젊은 황제는 그 하늘과 꼭 닮은 눈빛을 한 누군가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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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래는 향주에 폭설이 내리는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대혼란의 시대가 열릴 것이 불 보듯 뻔했기에 슬쩍 웃고 말았다

이곳에서만큼은 청회색 눈의 남자란 그다지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정작 고향이라 부를 만한 곳에서는 언제나 겉도는 존재였는데, 처음 지내는 지방에서 도리어 마음이 편하니 씁쓸한 일이었다.

관모를 쓰고 나니 그나마 좀 나은 대접을 받게 되었지만, 좌우지간 눈동자 색이 달라 어디서든 쉽게 눈에 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더 이상 한 사람의 부질없는 욕심으로 인해 혈육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뿐입니다."

소녀의 말 때문인지, 왜 이제 와서 아쉬운 마음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럴 줄 미리 알았더라면 한 번 손에 껴 보기라도 할 것을.

매일같이 두루마리의 산에 파묻혀 지새워야 했던 나날을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참으로 못 할 짓이건만, 이루지 못한 일에는 늘 미련이 남는 법이다

이르게 등청하는 자신과 마주치고서 쾌청하게 웃는 얼굴이나, 칭찬을 들으면 소년처럼 쑥스러워하는 표정, 자신을 은애한다 말하던, 일말의 기대와 서러움으로 떨리던 목소리 같은 것들을.

겨울이 끝나도 푸른 땅의 눈은 녹지 않음을 기억해 주시오.

백은래는 누구의 이해도 바라지 않는 생을 살았으며 다른 방식의 삶은 알지 못했다.

가정이란 언제나 부질없는 일이었다. 수없이 상상해 보아도 백은래의 청회색 두 눈이 검은 빛깔로 바뀌거나, 북명족 명리홀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수도에서 평화롭게 생을 보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듯이.

별의 움직임을 통해 세상의 변화를 읽어내는 그들이라면, 백은래와 주자헌 사이에서 흐르던 그 가느다란 물줄기가 제국 전체를 휩쓸어 끝내 왕조의 흐름을 바꿀 만큼 거대한 지류로 바뀌리라는 사실을 예견했을까.

신하로서 황제의 앞에서 취하기에 한 치의 모자람도 없는 태도였다. 그럼에도 어쩐지 가슴이 울렁여,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왼쪽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그리하면 이 울렁임이 진정되리라 믿는 듯이. 손끝이 간질거리는 것은 사방을 떠다니는 살구꽃 향기가 부드러운 탓일까.

등롱의 불빛이 일렁이며 주자헌의 미소에 따스한 색채를 더했다. 어둠은 비단처럼 흐르고 있었고, 보석처럼 흩뿌려진 별들이 반짝였다. 봄밤의 정취가 그윽하여 숨이 막힐 듯했다. 주자헌의 목소리가 유독 달게 들린 것도 필시 그 때문이리라.

머나먼 북강에서 지내는 동안, 그도 가끔은 자신을 그리워하지는 않았을지.

"도리와 인의를 모르고 살려거든 계속 그리할 것이지, 이제 와서 왜 돌아온답니까."

불현듯 살구꽃이 만개한 중정에 서 있던 주자헌의 모습이 눈앞을 스치는 듯해, 아련한 미소가 짧은 순간 백은래의 입가에 걸렸다.

"……마음에 두지 않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대인을 본받아 관료로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싶습니다.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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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아로진, 배후의 검은손을 낚을 미끼였다.

한 생각에 사로잡혀 마에 빠진 자에게 그 이후의 육체란 껍데기에 불과할 뿐 더 이상 원래의 그 사람이 아니라고. 아로진은 ‘집념’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걸어다니는 고깃덩어리일 뿐이었다.

이것이 수천 년 뒤의 세상이다. 요족도, 인족도 없다. 법술 대부분은 진위를 알 수 없는 종이 속 전설이 되었다

이건 그냥 그와 아로진의 속성이 상극이기 때문이었나?

3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온 오랜 상징이었다. 열화와 백골 사이에서 태어나, 비통하고도 엄숙한. 그가 말도 웃음도 없이 고요한 얼굴로 서 있는 지금, 요사스럽고 기이하며 모순적인 신성(神聖)이 다시 한 번 시대를 뛰어넘어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이 멈추었다. 그러나 쉬엔지는 피하지 않았다. 그는 이 귀하디 귀한 1초를 아로진의 발치에다 총을 한 번 더 발사하는 데 썼다

흉포한 바람의 칼날은 쉬엔지의 옷에 얕은 흔적만을 남기고 연기처럼 흩어졌다.

아로진이 부족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동천을 떠난 그 순간부터, 고향의 산천은 더 이상 그의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의 일생에는 언제나 아쉬움과 후회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만약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백일몽을 꾸지만, 꿈에서 깨어나 결국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면 그걸로 그만이다.

꽃밭이 비단처럼 펼쳐지는 땅에서 자란 그는 추위도 더위도, 아픔도 괴로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허황된 몽상 속을 노닐었다

이후 그 꿈들은 하나하나 깨져나갔건만, 마지막으로 남은 이 독약 같은 꿈에서는 깨어나지 못했다.

이는 마치… 이 세계의 규칙이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존재가 현재의 시공간에 침입한 것에 대해 온 천지가 놀라움과 분노에 가득 차 천벌을 내리는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없었어…. 마음껏 지내본 날조차… 단 하루라도 있었나…"

방금… 방금 불꽃의 실에 가슴이 뚫리고 벼락까지 맞았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세상의 좋은 것들은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니까. 제일 아름다운 꽃도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 번 피어난다고 했어. 일생에 한 번 잠깐 피었다가 곧 져버리지. 아주 오래 산 사람도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 즐거웠던 일 몇 가지만 떠오를 뿐이래. 모두 부싯불처럼 한 번 놓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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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모욕을 당한다면, 그것은 곧 나를 향한 모욕이오."

백은래의 옆모습에 무늬를 수놓던 햇살은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하늘이 삽시간에 흐려졌다. 이윽고 낱알을 흩뿌리는 듯한 소리가 요란스레 사위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슬픔이 격랑처럼 밀려들어 백은래를 집어삼켰다. 캄캄한 바다 속에 잠긴 듯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버거웠다. 더없이 괴로운 심정이었으나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신이 무탈히 살아가기를 바란 것이 그리 잘못이었나.

그 지나치게 평연한 문장이 송곳처럼 주자헌의 가슴을 찔렀다. 전신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에, 주자헌은 한 손으로 미간을 감싸 쥐었다.

"그대 같은 이를 마음에 품었는데, 달리 누가 눈에 들어오겠소?"

인간의 손을 타지 않고 자란 오래된 식물들이 내뿜는 숲 특유의 향취와, 몸을 씻어도 다 가시지 않는 화약과 철과 피의 냄새를

"재주 있는 자는 신분을 막론하고 뜻을 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태조께서 내세우신 제국의 기조입니다. 비록 제 손으로 뽑은 인물은 아니지만, 저는 제 승상보다 뛰어난 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 말씀을 삼가 주십시오."

하지만 그 다음에는? 저 뱀이 주자헌의 목을 과연 그대로 내버려 둘까?

"생각에 앞서 몸이 움직였소. 그뿐이오."
과거에 자신이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을 타인의 입에서 듣는 것은 기이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끔찍하게 외로운 감각이었다. 우주에 혼자 남겨진 듯 마음이 텅 빈 것 같았다.

"만약 가난과 굶주림에 못 이겨 향주를 공격한 것이었다면 나는 너에게 최소한의 연민을 품었을 것이다. 하지만 너는 모자람 없이 가지고도 탐욕을 부리는 것이, 꼭 내가 아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군."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자신은 그저, 주자헌의 곁에서 향주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했을 뿐이건만.

그 새벽에 보았던 눈에 푸른 기운이 없어 영락없이 금족이라 생각했으나, 돌이켜 보면 세상에는 금족과 북명족의 경계에 걸친 인간도 존재했다.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는 푸른 첨정석처럼 선명한 빛을 내다가도, 실내에 들어서면 흐린 날의 바다처럼 부드러운 빛깔로 바뀌곤 하던 그 눈을. 화로의 약한 불빛에 의지해 그를 품던 순간에는 또 어떠했던가. 거의 안개 같은 회색에 가깝지 않았던가?

먹먹한 감정이 차올라 가슴속을 채웠다. 못다 한 말들이 명치끝에 걸린 듯 속이 거북했다. 그 새벽 이후로 같은 꿈을 수없이 되풀이해 꾸었다. 언젠가 너를 찾아낼 날을 기다리며, 아득한 그리움 속에서 긴 세월을 견뎌 냈다.

이미 곁에 와 있는 줄도 모르고서.

어찌 그에게 매혹되지 않을 수 있을까. 다채로운 빛깔의 광채를 지닌 자개와도 같은 영롱함이 그에게 깃들어 있었다. 그 반짝임은 어느 세계에서든 변치 않을 터였다.

‘여러 종류의 독에 면역이라 하여 모든 종류의 독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독에는 한계가 있고, 그 성질이 서로 겹치는 것들도 많습니다. 본래라면 큰 해를 입을 만한 독에 당하더라도 적은 피해만으로 지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어떤 이들은 몸이 독을 이겨 내더라도 정신이 취해 버린 채 영영 꿈속을 헤매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소관이 드리는 말씀을 기억하소서. 전하께는 반드시 생으로 돌아와야 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이 꿈에서 깨어나야 했다. 마침내 오랜 숙원을 이룰 날이 왔다는 깨달음이 주자헌의 정신을 이끌었다. 백은래에게 반드시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15년을 헤맨 끝에 그를 찾았다. 살아 있기만 한다면 당장 대답해 주지 않는다 해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건만.

어떤 수모나 모멸도 겪지 않도록 해 주고 싶었다.

그러자 오랜 세월 동안 차곡차곡 쌓여 온 마음의 파편들이 점성을 얻어 뭉치기 시작했다. 절실한 기원, 간곡한 바람, 애틋한 소망, 무엇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 형질은 모두 같았고, 동일한 무게와 부피로 주자헌의 내면을 채우며 특정한 깨달음을 이끌어 냈다.

"내 사람을 해하고서 감히 너만은 살기를 바라느냐?"

이제야 그대가 내게 어떤 존재인지 알았건만.

귀하지 않은 목숨은 하늘 아래 없었다.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백은래와 같은 존재조차도 그러할 터였다.

다정한 목소리는 여름이면 산기슭에서 피어나는 분홍빛 석죽화를 떠올리게 했다. 잎새 끄트머리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고, 입 안에 넣어 굴리면 은근한 단맛이 나는 고운 꽃. 그런데 귀하신 분을 고작 들꽃 따위에 비유하는 것은 죄일까?

"언젠가 그대를 찾아 은혜를 갚고 싶었소. 반드시 찾아내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주겠다고, 끊임없이 다짐하며 이날 이때까지 살아왔소. 그 다짐이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 어딘가의 묘비 아래에 묻혀 있었을 거요."

"나는 더 이상 숨지 않을 것이오. 언제나 서왕을 두려워하며 그의 그늘 아래서 살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겠소. 그대를 노리는 자가 있다면 내가 먼저 나서서 제거할 것이고, 그대를 욕보이는 자가 있다면 내 손으로 목을 베겠소."

자신에게는 그를 미워할 자격 같은 것이 없었다.

"아무 관계도 없는 이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소. 인간이란 늘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법이니."

다만, 주자헌은 생각했다.
이 나라를 그대에게 주겠다 말한다면, 그대는 황제가 눈이 멀었다며 정변을 일으키려 들까.

주렴을 걷어 내고 둥근 창을 열자 보이는 것은 어둠이 완전히 물러나고 환한 태양 빛이 세상을 물들이기 직전의 박명이었다. 담청빛 새벽이 번져 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젊은 황제는 그 하늘과 꼭 닮은 눈빛을 한 누군가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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