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모욕을 당한다면, 그것은 곧 나를 향한 모욕이오."

백은래의 옆모습에 무늬를 수놓던 햇살은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하늘이 삽시간에 흐려졌다. 이윽고 낱알을 흩뿌리는 듯한 소리가 요란스레 사위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슬픔이 격랑처럼 밀려들어 백은래를 집어삼켰다. 캄캄한 바다 속에 잠긴 듯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버거웠다. 더없이 괴로운 심정이었으나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신이 무탈히 살아가기를 바란 것이 그리 잘못이었나.

그 지나치게 평연한 문장이 송곳처럼 주자헌의 가슴을 찔렀다. 전신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에, 주자헌은 한 손으로 미간을 감싸 쥐었다.

"그대 같은 이를 마음에 품었는데, 달리 누가 눈에 들어오겠소?"

인간의 손을 타지 않고 자란 오래된 식물들이 내뿜는 숲 특유의 향취와, 몸을 씻어도 다 가시지 않는 화약과 철과 피의 냄새를

"재주 있는 자는 신분을 막론하고 뜻을 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태조께서 내세우신 제국의 기조입니다. 비록 제 손으로 뽑은 인물은 아니지만, 저는 제 승상보다 뛰어난 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 말씀을 삼가 주십시오."

하지만 그 다음에는? 저 뱀이 주자헌의 목을 과연 그대로 내버려 둘까?

"생각에 앞서 몸이 움직였소. 그뿐이오."
과거에 자신이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을 타인의 입에서 듣는 것은 기이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끔찍하게 외로운 감각이었다. 우주에 혼자 남겨진 듯 마음이 텅 빈 것 같았다.

"만약 가난과 굶주림에 못 이겨 향주를 공격한 것이었다면 나는 너에게 최소한의 연민을 품었을 것이다. 하지만 너는 모자람 없이 가지고도 탐욕을 부리는 것이, 꼭 내가 아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군."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자신은 그저, 주자헌의 곁에서 향주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했을 뿐이건만.

그 새벽에 보았던 눈에 푸른 기운이 없어 영락없이 금족이라 생각했으나, 돌이켜 보면 세상에는 금족과 북명족의 경계에 걸친 인간도 존재했다.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는 푸른 첨정석처럼 선명한 빛을 내다가도, 실내에 들어서면 흐린 날의 바다처럼 부드러운 빛깔로 바뀌곤 하던 그 눈을. 화로의 약한 불빛에 의지해 그를 품던 순간에는 또 어떠했던가. 거의 안개 같은 회색에 가깝지 않았던가?

먹먹한 감정이 차올라 가슴속을 채웠다. 못다 한 말들이 명치끝에 걸린 듯 속이 거북했다. 그 새벽 이후로 같은 꿈을 수없이 되풀이해 꾸었다. 언젠가 너를 찾아낼 날을 기다리며, 아득한 그리움 속에서 긴 세월을 견뎌 냈다.

이미 곁에 와 있는 줄도 모르고서.

어찌 그에게 매혹되지 않을 수 있을까. 다채로운 빛깔의 광채를 지닌 자개와도 같은 영롱함이 그에게 깃들어 있었다. 그 반짝임은 어느 세계에서든 변치 않을 터였다.

‘여러 종류의 독에 면역이라 하여 모든 종류의 독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독에는 한계가 있고, 그 성질이 서로 겹치는 것들도 많습니다. 본래라면 큰 해를 입을 만한 독에 당하더라도 적은 피해만으로 지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어떤 이들은 몸이 독을 이겨 내더라도 정신이 취해 버린 채 영영 꿈속을 헤매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소관이 드리는 말씀을 기억하소서. 전하께는 반드시 생으로 돌아와야 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이 꿈에서 깨어나야 했다. 마침내 오랜 숙원을 이룰 날이 왔다는 깨달음이 주자헌의 정신을 이끌었다. 백은래에게 반드시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15년을 헤맨 끝에 그를 찾았다. 살아 있기만 한다면 당장 대답해 주지 않는다 해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건만.

어떤 수모나 모멸도 겪지 않도록 해 주고 싶었다.

그러자 오랜 세월 동안 차곡차곡 쌓여 온 마음의 파편들이 점성을 얻어 뭉치기 시작했다. 절실한 기원, 간곡한 바람, 애틋한 소망, 무엇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 형질은 모두 같았고, 동일한 무게와 부피로 주자헌의 내면을 채우며 특정한 깨달음을 이끌어 냈다.

"내 사람을 해하고서 감히 너만은 살기를 바라느냐?"

이제야 그대가 내게 어떤 존재인지 알았건만.

귀하지 않은 목숨은 하늘 아래 없었다.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백은래와 같은 존재조차도 그러할 터였다.

다정한 목소리는 여름이면 산기슭에서 피어나는 분홍빛 석죽화를 떠올리게 했다. 잎새 끄트머리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고, 입 안에 넣어 굴리면 은근한 단맛이 나는 고운 꽃. 그런데 귀하신 분을 고작 들꽃 따위에 비유하는 것은 죄일까?

"언젠가 그대를 찾아 은혜를 갚고 싶었소. 반드시 찾아내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주겠다고, 끊임없이 다짐하며 이날 이때까지 살아왔소. 그 다짐이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 어딘가의 묘비 아래에 묻혀 있었을 거요."

"나는 더 이상 숨지 않을 것이오. 언제나 서왕을 두려워하며 그의 그늘 아래서 살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겠소. 그대를 노리는 자가 있다면 내가 먼저 나서서 제거할 것이고, 그대를 욕보이는 자가 있다면 내 손으로 목을 베겠소."

자신에게는 그를 미워할 자격 같은 것이 없었다.

"아무 관계도 없는 이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소. 인간이란 늘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법이니."

다만, 주자헌은 생각했다.
이 나라를 그대에게 주겠다 말한다면, 그대는 황제가 눈이 멀었다며 정변을 일으키려 들까.

주렴을 걷어 내고 둥근 창을 열자 보이는 것은 어둠이 완전히 물러나고 환한 태양 빛이 세상을 물들이기 직전의 박명이었다. 담청빛 새벽이 번져 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젊은 황제는 그 하늘과 꼭 닮은 눈빛을 한 누군가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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