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BL] 화서의 나라 1 [BL] 화서의 나라 1
2RE / 시크노블 / 2022년 3월
평점 :
판매중지


동양풍의 신비로운 이야기라서 재미있어요! 사건물, 요괴물 좋아하는 분들께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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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대로 괜찮은 인생이었다고, 기화령은 애써 생각했다. 자신의 이름은 일생토록 의리를 다해 한 주군을 섬긴 충신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곳에서부터는 황제 폐하가 아닌 누구도 말에 오를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궐 안으로 병력을 들이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일입니다. 모두 물려 주십시오."

"손위 항렬이 제위를 이어받는 것은 상궤를 벗어나는 일입니다."

"주군께서 무사하심을 아는데 더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비슷한 차림새를 한 이가 무수히 많았으나 알아보지 못할 수는 없었다. 백은래는 언제나 그를 생각하며 살아왔으므로.

"기만은 숙부님의 특기 아닙니까. 항상 본을 보여 주신 덕분에 이렇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찢고, 가르고, 꿰뚫었다가, 다시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피를 흩뿌린다. 모든 동작은 인간의 것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민첩했고, 동시에 모자람 없이 파괴적이었다. 살육을 위해 휘둘러지는 칼날은 역설적이게도 흡사 생명력을 지닌 요괴 같았다

핏발 서린 두 눈이 이성을 잃은 맹수의 것처럼 섬뜩하게 빛났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상대에게 달려들어 목줄기를 물어뜯을 듯 흥분에 젖은 눈이었다.

"부모의 원수에게 해 주기에는 너무 좋은 일이잖습니까."

무언가, 이 상황을 뒤집는 데 유리하게 써먹을 수 있을 만한 아주 중요한 패를.

그들은 한 번도 제국의 군대였던 적이 없었다. 누명을 뒤집어쓴 사형수와 유배지로 보내진 죄인의 자녀들, 갈 곳 없는 고아들로 이루어진 오합지졸 부대를 이끌어 사지死地를 헤쳐 온 이는 바로 경왕 주자헌이었다.

백은래는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되었다.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또는 무엇을 하기를 바랐는지조차.

온갖 기억들이 한꺼번에 백은래의 머릿속에 차올랐다. 어린 손에 쥐여 주었던 보드라운 방한모. 손수 다관을 들어 잔에 부어 주던 향기로운 차. 하얗게 흐드러지던 살구 꽃잎. 온화한 눈웃음. 은애한다 말하며 떨구던 눈물.

당신은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주었건만, 내가 당신에게 준 것은 끝내 눈물뿐이었나.

"폐하, 아직은 안 됩니다. 소신은 아직 답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백은래가 사랑한 이들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났고, 그 중 두 사람이 서왕에 의해 피를 흘렸다. 은혜와 원한은 갚는 것이 순리이며, 수렵꾼의 자식인 백은래는 보복을 꺼리지 않았다

몸에 새겨진 사냥의 기억은 분노와 엮이며 이성의 개입을 용납하지 않았다.

오래도록 그저 숨죽여 지켜보아야만 했던, 유해의 산을 밟고 그 정상에 올라선 탐욕스러운 한 마리 짐승.

이리도 손쉬운 일이었다. 고작 화살 한 대면 끝나 버릴 것을, 이토록 허무하게 죽고 말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목숨이 지고 말았던가

‘그대 곁에 머무르도록 허락해 주지 않겠소?’

그러나 뭉그러진 단어들은 누구의 귀에도 제대로 닿지 못한 채 안개처럼 흩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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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대로 괜찮은 인생이었다고, 기화령은 애써 생각했다. 자신의 이름은 일생토록 의리를 다해 한 주군을 섬긴 충신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곳에서부터는 황제 폐하가 아닌 누구도 말에 오를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궐 안으로 병력을 들이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일입니다. 모두 물려 주십시오."

"손위 항렬이 제위를 이어받는 것은 상궤를 벗어나는 일입니다."

"주군께서 무사하심을 아는데 더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비슷한 차림새를 한 이가 무수히 많았으나 알아보지 못할 수는 없었다. 백은래는 언제나 그를 생각하며 살아왔으므로.

"기만은 숙부님의 특기 아닙니까. 항상 본을 보여 주신 덕분에 이렇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찢고, 가르고, 꿰뚫었다가, 다시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피를 흩뿌린다. 모든 동작은 인간의 것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민첩했고, 동시에 모자람 없이 파괴적이었다. 살육을 위해 휘둘러지는 칼날은 역설적이게도 흡사 생명력을 지닌 요괴 같았다

핏발 서린 두 눈이 이성을 잃은 맹수의 것처럼 섬뜩하게 빛났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상대에게 달려들어 목줄기를 물어뜯을 듯 흥분에 젖은 눈이었다.

"부모의 원수에게 해 주기에는 너무 좋은 일이잖습니까."

무언가, 이 상황을 뒤집는 데 유리하게 써먹을 수 있을 만한 아주 중요한 패를.

그들은 한 번도 제국의 군대였던 적이 없었다. 누명을 뒤집어쓴 사형수와 유배지로 보내진 죄인의 자녀들, 갈 곳 없는 고아들로 이루어진 오합지졸 부대를 이끌어 사지死地를 헤쳐 온 이는 바로 경왕 주자헌이었다.

백은래는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되었다.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또는 무엇을 하기를 바랐는지조차.

온갖 기억들이 한꺼번에 백은래의 머릿속에 차올랐다. 어린 손에 쥐여 주었던 보드라운 방한모. 손수 다관을 들어 잔에 부어 주던 향기로운 차. 하얗게 흐드러지던 살구 꽃잎. 온화한 눈웃음. 은애한다 말하며 떨구던 눈물.

당신은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주었건만, 내가 당신에게 준 것은 끝내 눈물뿐이었나.

"폐하, 아직은 안 됩니다. 소신은 아직 답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백은래가 사랑한 이들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났고, 그 중 두 사람이 서왕에 의해 피를 흘렸다. 은혜와 원한은 갚는 것이 순리이며, 수렵꾼의 자식인 백은래는 보복을 꺼리지 않았다

몸에 새겨진 사냥의 기억은 분노와 엮이며 이성의 개입을 용납하지 않았다.

오래도록 그저 숨죽여 지켜보아야만 했던, 유해의 산을 밟고 그 정상에 올라선 탐욕스러운 한 마리 짐승.

이리도 손쉬운 일이었다. 고작 화살 한 대면 끝나 버릴 것을, 이토록 허무하게 죽고 말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목숨이 지고 말았던가

‘그대 곁에 머무르도록 허락해 주지 않겠소?’

그러나 뭉그러진 단어들은 누구의 귀에도 제대로 닿지 못한 채 안개처럼 흩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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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부터는 황제 폐하가 아닌 누구도 말에 오를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궐 안으로 병력을 들이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일입니다. 모두 물려 주십시오."

"손위 항렬이 제위를 이어받는 것은 상궤를 벗어나는 일입니다."

"주군께서 무사하심을 아는데 더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비슷한 차림새를 한 이가 무수히 많았으나 알아보지 못할 수는 없었다. 백은래는 언제나 그를 생각하며 살아왔으므로.

"기만은 숙부님의 특기 아닙니까. 항상 본을 보여 주신 덕분에 이렇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찢고, 가르고, 꿰뚫었다가, 다시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피를 흩뿌린다. 모든 동작은 인간의 것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민첩했고, 동시에 모자람 없이 파괴적이었다. 살육을 위해 휘둘러지는 칼날은 역설적이게도 흡사 생명력을 지닌 요괴 같았다

핏발 서린 두 눈이 이성을 잃은 맹수의 것처럼 섬뜩하게 빛났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상대에게 달려들어 목줄기를 물어뜯을 듯 흥분에 젖은 눈이었다.

"부모의 원수에게 해 주기에는 너무 좋은 일이잖습니까."

무언가, 이 상황을 뒤집는 데 유리하게 써먹을 수 있을 만한 아주 중요한 패를.

그들은 한 번도 제국의 군대였던 적이 없었다. 누명을 뒤집어쓴 사형수와 유배지로 보내진 죄인의 자녀들, 갈 곳 없는 고아들로 이루어진 오합지졸 부대를 이끌어 사지死地를 헤쳐 온 이는 바로 경왕 주자헌이었다.

백은래는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되었다.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또는 무엇을 하기를 바랐는지조차.

온갖 기억들이 한꺼번에 백은래의 머릿속에 차올랐다. 어린 손에 쥐여 주었던 보드라운 방한모. 손수 다관을 들어 잔에 부어 주던 향기로운 차. 하얗게 흐드러지던 살구 꽃잎. 온화한 눈웃음. 은애한다 말하며 떨구던 눈물.

당신은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주었건만, 내가 당신에게 준 것은 끝내 눈물뿐이었나.

"폐하, 아직은 안 됩니다. 소신은 아직 답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백은래가 사랑한 이들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났고, 그 중 두 사람이 서왕에 의해 피를 흘렸다. 은혜와 원한은 갚는 것이 순리이며, 수렵꾼의 자식인 백은래는 보복을 꺼리지 않았다

몸에 새겨진 사냥의 기억은 분노와 엮이며 이성의 개입을 용납하지 않았다.

오래도록 그저 숨죽여 지켜보아야만 했던, 유해의 산을 밟고 그 정상에 올라선 탐욕스러운 한 마리 짐승.

이리도 손쉬운 일이었다. 고작 화살 한 대면 끝나 버릴 것을, 이토록 허무하게 죽고 말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목숨이 지고 말았던가

‘그대 곁에 머무르도록 허락해 주지 않겠소?’

그러나 뭉그러진 단어들은 누구의 귀에도 제대로 닿지 못한 채 안개처럼 흩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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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위에 떠 오른 익숙한 글자가 조금이지만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초보 때 질리도록 봤던 문구였다. 가신을 키우기 위해 수도 없이 이곳을 들락날락 거렸던 그때의 추억이 새겨지듯 떠올랐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따라 해볼 생각이었다. 요령 탓을 하기엔 이미 해먹은 게 많긴 했지만.

희생이 따르면 사람들은 처음이야 의기소침해하지만, 그게 두 번, 세 번이 되면 살기 위해 윗사람을 갈아치우고 자신들만의 방식을 구축한다. 많은 제국이 겪는 첫 번째 패망 원인이었다. 세현 역시도 그랬다.

처음이라 아무것도 몰랐던 시작 때는, 가신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었다. 서로의 유대나 신뢰조차 쌓이지 않았던 시절이라, 죽으면 별수 없다는 마음이 강했었다.

의연함이 가득한 그들의 모습은 모두에게 희망을 주었다. 일어설 수 있는 의지를 심어주었고, 나아갈 수 있는 지표를 만들어 주었다.

다들 오늘의 여운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 그런다는 것을 모두는 알고 있었다

각성을 하지 않은 건, 무서워서였다. 책임질 자신이 없어서였고, 시작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사실 기쁘다기보다 의아함이 먼저 들었다. 왜 이런 게 생겼을까, 하는 의문.

차갑게 폐부를 찌르고 들어오는 새벽공기가 좋다며 속삭이는 말이 왜인지 뻐근하게 와닿았다. 불안감을 애써 지우며 세현은 이재영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시험의 탑. 세계수를 근간으로 이루어진, 이 행성의 살아있는 생명이자 무한하고 영원한 소재.

등골이 오싹한, 살고자 하는 본능만 필사적으로 떠오를 뿐이었다. 공포 감염. 손끝조차 움직이지 못할 만큼 모두는 두려움에 판단력을 잃어갔다

문득 과거에 무작위로 던전에 던져 넣었던 제 가신들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이제야 겨우 알게 되었다. 이 정도면, 그래. 초반에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숙청할 만도 했다.

그래도… 만나보고 싶었는데.
조금쯤은 그런 생각을 했었다. 잠자리에 누워 어둑한 천장을 볼 때마다, 혹여 기다리진 않았을까, 만약 갔다면 따뜻하게 맞아주진 않았을까, 조금은 이해해주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도 가지 못했고, 갈 수가 없었다. 모진 짓을 많이 해서, 그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눈을 감자 후회는 깊어졌다. 그 사이로 기억 하나가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아무도 없는 정원 한 편에 앉아 그와 신뢰를 쌓던 찰나 같던 그때가.

이를 악물어 봤지만, 흐느낌까진 차마 막을 수 없었다. 처음으로 겪어 보는 좌절과 절망이었다. 그리고 아픔이었다.

지울 수 없는 죄책감에 목이 멨다. 이렇게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부터가 그랬다.

울던 아이에게 손을 내민 것부터가 문제였는지, 저를 향하던 신뢰를 알면서도 떼어놓지 않은 게 잘못이었는지, 그냥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제 잘못 같았다.

가장 먼저 세현에게 마음을 열고 대화에 응해줬던 가신이었고, 충의가 깊고 바보같이 우직해서 묵묵함이 바위 같던 가신이었다. 그렇기에 세현은 지금 이 상황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세현의 안위 따위가 아닌, 제국의 정세와 유지, 부흥이었다. 그리고 그 야망의 가장 앞에 선 자가 바로 대공이었다.

"가십시오. 그게 무엇이든 그 뜻을 믿겠습니다. 그 어떤 명분이든 거기에 따르겠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절대 후회되지 않을 선택을 해주십시오. 저는 그거면 됩니다."

너는, 왜 이렇게 나를 걱정하는 걸까. 저런 모습이 되어서도, 뭐가 그리 좋다고 이렇게나 마음을 쓰는 건지, 세현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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