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대로 괜찮은 인생이었다고, 기화령은 애써 생각했다. 자신의 이름은 일생토록 의리를 다해 한 주군을 섬긴 충신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곳에서부터는 황제 폐하가 아닌 누구도 말에 오를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궐 안으로 병력을 들이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일입니다. 모두 물려 주십시오."

"손위 항렬이 제위를 이어받는 것은 상궤를 벗어나는 일입니다."

"주군께서 무사하심을 아는데 더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비슷한 차림새를 한 이가 무수히 많았으나 알아보지 못할 수는 없었다. 백은래는 언제나 그를 생각하며 살아왔으므로.

"기만은 숙부님의 특기 아닙니까. 항상 본을 보여 주신 덕분에 이렇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찢고, 가르고, 꿰뚫었다가, 다시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피를 흩뿌린다. 모든 동작은 인간의 것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민첩했고, 동시에 모자람 없이 파괴적이었다. 살육을 위해 휘둘러지는 칼날은 역설적이게도 흡사 생명력을 지닌 요괴 같았다

핏발 서린 두 눈이 이성을 잃은 맹수의 것처럼 섬뜩하게 빛났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상대에게 달려들어 목줄기를 물어뜯을 듯 흥분에 젖은 눈이었다.

"부모의 원수에게 해 주기에는 너무 좋은 일이잖습니까."

무언가, 이 상황을 뒤집는 데 유리하게 써먹을 수 있을 만한 아주 중요한 패를.

그들은 한 번도 제국의 군대였던 적이 없었다. 누명을 뒤집어쓴 사형수와 유배지로 보내진 죄인의 자녀들, 갈 곳 없는 고아들로 이루어진 오합지졸 부대를 이끌어 사지死地를 헤쳐 온 이는 바로 경왕 주자헌이었다.

백은래는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되었다.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또는 무엇을 하기를 바랐는지조차.

온갖 기억들이 한꺼번에 백은래의 머릿속에 차올랐다. 어린 손에 쥐여 주었던 보드라운 방한모. 손수 다관을 들어 잔에 부어 주던 향기로운 차. 하얗게 흐드러지던 살구 꽃잎. 온화한 눈웃음. 은애한다 말하며 떨구던 눈물.

당신은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주었건만, 내가 당신에게 준 것은 끝내 눈물뿐이었나.

"폐하, 아직은 안 됩니다. 소신은 아직 답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백은래가 사랑한 이들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났고, 그 중 두 사람이 서왕에 의해 피를 흘렸다. 은혜와 원한은 갚는 것이 순리이며, 수렵꾼의 자식인 백은래는 보복을 꺼리지 않았다

몸에 새겨진 사냥의 기억은 분노와 엮이며 이성의 개입을 용납하지 않았다.

오래도록 그저 숨죽여 지켜보아야만 했던, 유해의 산을 밟고 그 정상에 올라선 탐욕스러운 한 마리 짐승.

이리도 손쉬운 일이었다. 고작 화살 한 대면 끝나 버릴 것을, 이토록 허무하게 죽고 말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목숨이 지고 말았던가

‘그대 곁에 머무르도록 허락해 주지 않겠소?’

그러나 뭉그러진 단어들은 누구의 귀에도 제대로 닿지 못한 채 안개처럼 흩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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