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 위에 떠 오른 익숙한 글자가 조금이지만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초보 때 질리도록 봤던 문구였다. 가신을 키우기 위해 수도 없이 이곳을 들락날락 거렸던 그때의 추억이 새겨지듯 떠올랐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따라 해볼 생각이었다. 요령 탓을 하기엔 이미 해먹은 게 많긴 했지만.

희생이 따르면 사람들은 처음이야 의기소침해하지만, 그게 두 번, 세 번이 되면 살기 위해 윗사람을 갈아치우고 자신들만의 방식을 구축한다. 많은 제국이 겪는 첫 번째 패망 원인이었다. 세현 역시도 그랬다.

처음이라 아무것도 몰랐던 시작 때는, 가신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었다. 서로의 유대나 신뢰조차 쌓이지 않았던 시절이라, 죽으면 별수 없다는 마음이 강했었다.

의연함이 가득한 그들의 모습은 모두에게 희망을 주었다. 일어설 수 있는 의지를 심어주었고, 나아갈 수 있는 지표를 만들어 주었다.

다들 오늘의 여운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 그런다는 것을 모두는 알고 있었다

각성을 하지 않은 건, 무서워서였다. 책임질 자신이 없어서였고, 시작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사실 기쁘다기보다 의아함이 먼저 들었다. 왜 이런 게 생겼을까, 하는 의문.

차갑게 폐부를 찌르고 들어오는 새벽공기가 좋다며 속삭이는 말이 왜인지 뻐근하게 와닿았다. 불안감을 애써 지우며 세현은 이재영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시험의 탑. 세계수를 근간으로 이루어진, 이 행성의 살아있는 생명이자 무한하고 영원한 소재.

등골이 오싹한, 살고자 하는 본능만 필사적으로 떠오를 뿐이었다. 공포 감염. 손끝조차 움직이지 못할 만큼 모두는 두려움에 판단력을 잃어갔다

문득 과거에 무작위로 던전에 던져 넣었던 제 가신들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이제야 겨우 알게 되었다. 이 정도면, 그래. 초반에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숙청할 만도 했다.

그래도… 만나보고 싶었는데.
조금쯤은 그런 생각을 했었다. 잠자리에 누워 어둑한 천장을 볼 때마다, 혹여 기다리진 않았을까, 만약 갔다면 따뜻하게 맞아주진 않았을까, 조금은 이해해주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도 가지 못했고, 갈 수가 없었다. 모진 짓을 많이 해서, 그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눈을 감자 후회는 깊어졌다. 그 사이로 기억 하나가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아무도 없는 정원 한 편에 앉아 그와 신뢰를 쌓던 찰나 같던 그때가.

이를 악물어 봤지만, 흐느낌까진 차마 막을 수 없었다. 처음으로 겪어 보는 좌절과 절망이었다. 그리고 아픔이었다.

지울 수 없는 죄책감에 목이 멨다. 이렇게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부터가 그랬다.

울던 아이에게 손을 내민 것부터가 문제였는지, 저를 향하던 신뢰를 알면서도 떼어놓지 않은 게 잘못이었는지, 그냥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제 잘못 같았다.

가장 먼저 세현에게 마음을 열고 대화에 응해줬던 가신이었고, 충의가 깊고 바보같이 우직해서 묵묵함이 바위 같던 가신이었다. 그렇기에 세현은 지금 이 상황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세현의 안위 따위가 아닌, 제국의 정세와 유지, 부흥이었다. 그리고 그 야망의 가장 앞에 선 자가 바로 대공이었다.

"가십시오. 그게 무엇이든 그 뜻을 믿겠습니다. 그 어떤 명분이든 거기에 따르겠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절대 후회되지 않을 선택을 해주십시오. 저는 그거면 됩니다."

너는, 왜 이렇게 나를 걱정하는 걸까. 저런 모습이 되어서도, 뭐가 그리 좋다고 이렇게나 마음을 쓰는 건지, 세현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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