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컥 솟아난 설움이 백은래의 가슴 안쪽을 태웠다. 열기로 심장이 타올라 재가 되어 버릴 듯했다.

이리 후회할 줄 알았더라면, 그때 자신은 다르게 행동했을까.

그러지 않으면 이 마음이 갈 곳을 모르고 흉곽 안쪽에 쌓인 채, 종내는 새카맣게 부패할 것만 같았다.

나는 다정한 당신이 다시 별처럼 빛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곁에 내 자리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일생 행복했을 터인데.

그런 것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건만.

그러한 것은 필요치 않았다. 길가의 하찮은 돌처럼 여기더라도, 천한 북방의 야만족으로 생각하더라도 좋았다.

그때는 왜 그리도 그에게 냉정하게 굴었을까. 남은 시간이 고작 1년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한껏 다감하게 대해 주었을 것을

그랬던 것을,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조그마한 불꽃 같은 감정을 경계하여 멀리하다, 종내는 잿더미 같은 회한만이 남고 말았다.

황제의 침전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이의 담청빛 눈동자에는 더 이상 어둠이 고여 있지 않았다.

설령 목이 날아가더라도 그른 것을 그르다 말하는 것이 그의 책무였고, 모친의 가르침이었으며, 삶의 신조였다.

방 안을 가득 메운 여름 꽃의 내음 사이에서 청량한 겨울의 향취가 느껴졌다.

황제는 흡사 인세가 아닌 어딘가 닿을 수 없는 곳에 발을 걸친 존재처럼 보였다.

자신을 감싼 것은 산 사람의 체온이었고, 피부를 스치는 것은 산 사람의 숨결이었다. 역할 만치 짙게 고여 있던 꽃향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미안하오. 그대가 없으니 혼자서 돌아올 길을 찾지 못해 한참 헤매고 말았다오."

다시는 길을 잃지 않으시도록, 소신이 언제나 등롱을 들고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타오르던 마지막 초가 가는 연기로 화해 스러졌다. 별빛조차 들지 않는 침소 안에서, 두 사람은 포근한 어둠에 감싸여 한참 동안 서로를 놓지 않았다.

벼슬운을 상징하는 한 마리 사슴이 아닌, 한 쌍의 사슴이 상징하는 어떠한 관계.

기다렸다.
15년의 세월 동안, 그저 당신의 무사를 바라며

오후는 평온하고 느리게 지나갔다. 서안 위에 쌓여 있던 종이가 조금씩 줄어가는 동안, 두 사람은 다관에 여러 번 새 물을 채웠고 비슷한 횟수만큼 먹을 새로 갈았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자주, 일에 몰두한 상대를 바라보며 짧은 미소를 머금었고, 그러다 다시금 들여다보던 답지로 시선을 내렸다.

이루고자 한 것을 모두 이루었고, 더불어 평생을 약조한 정인까지 얻었으니 무엇을 더 바랄까.

머지않아 찰나의 색채가 사라진 자리에 밤이 내려앉을 터였다. 그러나 가장 깊고 어두운 시간이 지나면 새벽이 돌아오고, 세상이 온전히 밝아지기 직전의 하늘은 또다시 창백한 푸른빛으로 잠겨 들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에게 마음을 줄 방도는 없지 않으냐.’

이렇게까지 무거운 마음을 참 오래도 충심으로 오해하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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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이 있기 때문이었다. 고작해야 10분. 뇌에 신호를 보내는 스킬을 교란시켜 막는 약물로, 세현이 자신의 영웅들을 위해 만든,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감응교란 물약이었다.

대가 없이 주는 게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법이다. 누구는 목숨 걸고 갔다 왔는데, 꿀꺽하면 그거야말로 도둑놈이고.

한편으로는 그곳에 두고 올 수밖에 없던 제논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데려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제안했어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감각이 눈을 감고도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질 정도였다. 긴 시간조차 아니었지만, 세현에겐 길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 모든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이 스킬이 생겨난 것이다.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세현은 잠시만 이 평온에 기대 모두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백도현이 가기 전에, 제가 떠나기 전에, 그리고 곽정한의 선택을 듣기 전에, 잠시만 이 시간에 멈춰 있기로 했다.

무수한 포탈이 있는 끝없는 곳. 바람조차 없고, 어떤 온도조차 느낄 수 없는 평온 그 자체의 세계였다.

주인을 잃은 시계는 결국 국고의 가장 깊은 곳에 묻혀 버렸다. 잊고 있었는데, 한 번 상기하자 다시 씁쓸한 감정이 밀려왔다.

시험해볼 생각이었다. 스킬이 특정 부위나 특정 사람에게 전이가 가능한지.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백도현은 이런 대공을 사랑으로 품어주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어쩌지 못해 방황하며 누군가 잡아주길, 이게 잘못된 길이라는 걸 알려주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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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자신이 가장 두려웠던 순간에 한 남자가 체온을 머금은 나침반을 손에 쥐여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 세상의 밀입국자로 운명이 정해져 있다. 어쩌다 보니 시스템이 착오를 일으켜 이곳에 잘못 태어난 것이다.

"저는 죽지 못하고 고독하게 떠도는 넋일 뿐입니다. 이 너절한 목숨 하나, 그에게 준다 해도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올바른 도리가 무너져야 어짊과 의로움이 나타나고, 큰 거짓이 있기에 지혜가 드러난다. 육친이 화목하지 않아야 효와 인자함이 싹트며, 국가가 혼란에 빠져야 충신이 나오는 법이다

돈은 아껴도 ‘정성’은 절대 아낄 수 없는 법.

이 손가락 한 마디 길이의 작은 파편이… 그가 남긴 유일한 것이다.

끝없이 드넓은 천지에 홀로 주저앉은 나그네처럼, 세상을 잠시 비추었다 스러진 혜성처럼[26]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 아득하기만 한.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자는 엉뚱하고 정이 많은 면모는 있으되 선한 마음은 이미 무너졌으니 이번 생에는 희망이 없다.

사람과 칼은 서로 의지하고 함께했다. 천진난만했던 시절부터 각자에게 잔잔한 파문이 일어날 때까지, 가까운 듯 먼 듯 거리를 지키다가 다시금 감정을 누르기 어려워질 때까지….

때문에 인간들의 슬픔과 기쁨, 헤어짐과 만남 같은 삶의 애환은 억지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보다가 깜박 조는 일이 없을 터였다. 어찌 시시한 꿈 따위가 이런 그에게 파문을 일으킬 수 있단 말인가?

그 사람은 분명 어떤 방향에 있고, 자신이 그 방향을 향하면 온몸에 주체할 수 없는 전율이 일며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기억력이 몇 초밖에 안 되는 하등척추동물 주제에 대체 뭘 잘못 먹은 거지?

만일 전해지지 않은 고산인의 비밀이 고분 안에 있다면? 설령 없다고 하더라도, 이 복잡한 법진만이라도 조금 배울 수 있다면 수확이 적지 않을 터였다.

물속에 가라앉은 고요한 묘혈(墓穴, 무덤의 구덩이)은 새카맣고 가는 초승달 모양을 띠고 있어 마치 교활한 비웃음을 짓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지도를 따라 묘혈을 여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칼과 검의 환영이 그들을 덮치는 것이다.

그의 옆얼굴 윤곽이 선명해지는 찰나, 왕저는 불현듯 그가 화살처럼 스치는 세월 가운데의 석상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 일은 중간에 그만둘 수도 없어서 오로지 한 우물만 파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과거에 했던 여러 가지 일들은 공적으로 취급되지도 않을 뿐더러, 도리어 낱낱이 청산해야 할 허물로 돌아오게 된다.

요족 꼬마는 어떻게 진안의 위치를 알아낸 거지?

사흘만 떨어져 있어도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하는 인재라는 게 정말로 존재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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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컥 솟아난 설움이 백은래의 가슴 안쪽을 태웠다. 열기로 심장이 타올라 재가 되어 버릴 듯했다.

이리 후회할 줄 알았더라면, 그때 자신은 다르게 행동했을까.

그러지 않으면 이 마음이 갈 곳을 모르고 흉곽 안쪽에 쌓인 채, 종내는 새카맣게 부패할 것만 같았다.

나는 다정한 당신이 다시 별처럼 빛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곁에 내 자리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일생 행복했을 터인데.

그런 것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건만.

그러한 것은 필요치 않았다. 길가의 하찮은 돌처럼 여기더라도, 천한 북방의 야만족으로 생각하더라도 좋았다.

그때는 왜 그리도 그에게 냉정하게 굴었을까. 남은 시간이 고작 1년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한껏 다감하게 대해 주었을 것을

그랬던 것을,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조그마한 불꽃 같은 감정을 경계하여 멀리하다, 종내는 잿더미 같은 회한만이 남고 말았다.

황제의 침전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이의 담청빛 눈동자에는 더 이상 어둠이 고여 있지 않았다.

설령 목이 날아가더라도 그른 것을 그르다 말하는 것이 그의 책무였고, 모친의 가르침이었으며, 삶의 신조였다.

방 안을 가득 메운 여름 꽃의 내음 사이에서 청량한 겨울의 향취가 느껴졌다.

황제는 흡사 인세가 아닌 어딘가 닿을 수 없는 곳에 발을 걸친 존재처럼 보였다.

자신을 감싼 것은 산 사람의 체온이었고, 피부를 스치는 것은 산 사람의 숨결이었다. 역할 만치 짙게 고여 있던 꽃향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미안하오. 그대가 없으니 혼자서 돌아올 길을 찾지 못해 한참 헤매고 말았다오."

다시는 길을 잃지 않으시도록, 소신이 언제나 등롱을 들고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타오르던 마지막 초가 가는 연기로 화해 스러졌다. 별빛조차 들지 않는 침소 안에서, 두 사람은 포근한 어둠에 감싸여 한참 동안 서로를 놓지 않았다.

벼슬운을 상징하는 한 마리 사슴이 아닌, 한 쌍의 사슴이 상징하는 어떠한 관계.

기다렸다.
15년의 세월 동안, 그저 당신의 무사를 바라며

오후는 평온하고 느리게 지나갔다. 서안 위에 쌓여 있던 종이가 조금씩 줄어가는 동안, 두 사람은 다관에 여러 번 새 물을 채웠고 비슷한 횟수만큼 먹을 새로 갈았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자주, 일에 몰두한 상대를 바라보며 짧은 미소를 머금었고, 그러다 다시금 들여다보던 답지로 시선을 내렸다.

이루고자 한 것을 모두 이루었고, 더불어 평생을 약조한 정인까지 얻었으니 무엇을 더 바랄까.

머지않아 찰나의 색채가 사라진 자리에 밤이 내려앉을 터였다. 그러나 가장 깊고 어두운 시간이 지나면 새벽이 돌아오고, 세상이 온전히 밝아지기 직전의 하늘은 또다시 창백한 푸른빛으로 잠겨 들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에게 마음을 줄 방도는 없지 않으냐.’

이렇게까지 무거운 마음을 참 오래도 충심으로 오해하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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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BL] 화서의 나라 2 [BL] 화서의 나라 2
2RE / 시크노블 / 2022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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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들이 흥미롭게 진행되고 주인공 주인수의 감정선도 마음에 들어요. 점점 재미있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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