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ㅣ 위픽 클래식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지음, 박정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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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6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너무나도 새롭고, 너무도 달콤했다……. (중략) 그러다 떠오르는 기억에 문득문득 말없이 웃다가도, 내가 정말로 사랑에 빠졌다는 생각에, 그 상대가 그녀라는 사실에, 이게 바로 사랑이구 하는 깨달음에 가슴이 서늘해지기도 했다. 


으레 첫사랑이라고 하면 풋풋하고 서투른 사랑을 떠올릴 것이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에도 분명히 그런 애타는 첫사랑이 담겨 있지만 이 소설의 결말은 아마 대부분 독자가 예상하는 것과는 다소 다르게 흘러갈 것이다. 그들은 첫사랑을 성공해 결혼에 골인하지도 않고 보통의 첫사랑이 그렇듯 어설프게 흐지부지 잊어버린 채 어른이 되지도 않는다. 생애 처음으로 목숨까지 내어줄 수 있을 만큼 사랑한 여자가 사실은 아버지의 불륜 상대였다는 파격적인 결말은 마치 K-아침드라마를 떠올리게 만든다.

 

고전임에도 이야기의 인물 하나하나가 흥미롭게 다가온다. 주인공 블라디미르의 내면 묘사는 전형적인 사랑에 빠진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지나이다의 매력에 빠져 쉽게 질투하고 쩔쩔매는데다, 연상인 상대에게 어린 남자로 보이기 싫어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독자에게도 설렘과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반면 그의 첫사랑 상대 지나이다는 상당히 평이 갈릴 캐릭터다. 그녀는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들을 쥐락펴락하며 군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 소설이 1800년대에 쓰인 러시아 문학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당대에는 꽤나 특이한 여성상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블라디미르의 아버지 표트르의 앞에서 그녀는 오히려 순종적이다 못해 피학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 대목에서 독자는 지나이다가 ‘나는 내가 내려다봐야 하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어요, 나는 나를 꺾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리게 된다. 어쩌면 제목의 ‘첫사랑’은 블라디미르의 지고지순한 사랑인 동시에, 지나이다가 그의 아버지에게 느끼는 사랑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p.159 두 사람의 사랑은 마치 희미한 어둠 속에서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끝내 또렷이 드러나지 않는, 낯설고 아름답지만 위협적인 얼굴 같았다. (중략) 그런 사랑 앞에서는 온갖 설렘과 고통으로 가득했던 내 사랑도 너무나 작고 유치하며 보잘것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애끓는 첫사랑을 소재로 하는 이 소설은 주인공 블라디미르가 소년에서 한 명의 남성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사랑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또 좌절하게 하고, 또 성숙하게 만들어 준다는 시사점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시사점을 고려해도 굉장히 파격적인 서사라는 생각도 든다. 사실상 노문학이라고 하면 도스토예프스키부터 떠올리는 한국 독자들에게 노문학의 최대 입문 장벽은 끊임없이 등장하는 어렵고 긴 이름들이나 작중 인물들이 보여주는 시대와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은 철학적 고뇌와 성찰일 것인데, 비교적 『첫사랑』에서는 그런 점이 덜하기 때문에 노문학의 입문작으로 좋지 않을까 싶다.

 

언제 보아도 위픽 시리즈는 참 예쁜 책이다. 잘 만들어진 각양장 하드커버에 위픽 클래식 특유의 제목 박 부분이 시선을 끈다. 내지도 평량이 두꺼워 뒷장의 글씨가 비치거나 페이지를 넘기다 쉽게 손상되는 일이 없다. 헤드밴드의 컬러까지 표지 컬러와 맞춰져 있는 부분이 책장을 넘기기 전부터 출판사에서 이토록 사랑받은 책이라면 분명히 재미있을 것이라는 묘한 확신마저도 들게 한다. 풋풋한 사랑이 그리워지지만 흔한 러브스토리는 지겨워진 한여름, 매운맛 사랑이 궁금해진 사람들에게 『첫사랑』을 추천한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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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썸머 에디션)
이디스 워튼 지음, 민지현 옮김 / 머묾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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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1 눈부신 햇살과 아침의 일부가 된 듯한 환희가 가슴 가득 차오르자, 지난밤의 비참했던 심정은 깨끗이 씻겨 내려갔다. 혈관 속에서 사랑이 춤추고, 길 아래쪽에서는 루시어스 하니가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데,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누구의 딸인지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로맨스를 기대한다면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리얼리즘을 기대한다면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이디스 워튼의 『여름』은 철없고 감정적인 소녀 채리티의 사랑을 통해 당대 여성의 삶과 소녀의 내밀한 속사정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마치 여름 초록의 생기처럼 피어나는 정열적인 사랑이 워튼 특유의 시적이고 낭만적인 문장을 만나 더욱 불타오르며 그들의 젊음을 돋보이게 만든다. 불꽃처럼 끓어올랐다가 증오와 절망으로 참담해지기를 반복하는 내면에 대한 고찰, 그가 품은 사랑에 대한 솔직하곧 대담한 묘사는 독자에게 탄식과 설렘을 동시에 선사한다.

 

사실 21세기의 시선으로 읽으면 다소 당황스러운 구석이 있는 책이다. 대부분의 젊은 여성 독자가 로열의 청혼에 여러 번 질색하며 채리티가 하니와의 사랑의 도피에 성공하기를, 또는 채리티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글이 100여년 전 전쟁 중에 쓰여졌다는 걸 떠올려보면 『여름』이야말로 그간 누구도 조명하지 않았던 어린 여성의 성과 사랑, 개인의 삶, 자유의지에 대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글이다. 누구도 채리티의 선택을 비난할 수 없다. 그는 그 시대의 여성으로서 원하는 만큼 하니를 사랑했고, 종래에는 자신과 아이를 지켜줄 로열이라는 현실적 결단을 내렸다.

 

p.125 익숙한 솜씨로 정확하게 움직이는 두 손을 보는 순간 채리티는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자신이 느꼈던 불안한 감정과 그 근원이 되었던 사람 사이에 놓인 불균형이 비로소 보이는 것 같았다.

 

이디스 워튼이 상당히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가 채리티 로열이라는, 이토록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냈다는 점이 새삼 놀랍게 느껴진다. 채리티는 당시 사회가 요구했던 여성성과는 사뭇 거리가 있어 보인다. 당돌하고, 자유롭고, 가감없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때로 어쩔 수 없이 여성이라는 틀 안에서 수치스러워하곤 하면서도 그 굳센 심지가 꺾이지는 않는다. 시골, 산 위의 야만적인 빈민 집단 출신,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여성의 삶이 워튼의 펜촉을 만나 강렬한 여름 햇살같은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 뉴욕의 상류층을 사정없이 파헤쳐 오던 날카로움이 주제부가 다소 다른 『여름』에서도 가감없이 드러난다. 여름의 정열적 사랑을 묘사하는 순간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낭만적이어서 독자마저도 함께 설레고, 여름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에는 복잡한 감정이 몰아치게 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채리티 로열이다. 하니도, 로열도, 리프도 남자 주인공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직 채리티만이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현대의 시각으로 채리티의 삶을 평가하기보다 190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워튼이 말하고자 했던 여성의 자유로운 사랑, 미혼모, 계층적 한계에 대한 고발에 주목해 읽으면 글 속으로 더 깊게 다다르지 않을까 싶어진다. 여름 햇빛의 조각같은 표지 홀로그램의 무지개를 자꾸 매만지게 되는 책이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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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어떻게 느끼고 행동하고 기억하는가 - 지구 끝에서도 살아남는 작고 여린 잎에 숨은 강인함에 대하여
곽준명 지음 / 현대지성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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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82 생존을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과 성장을 위해 잊어야 할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식물과 인간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다. 결국 기억만큼 망각도 지혜로운 선택인 셈이다.

 

우리는 대개 동물은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잡아먹고 가족이나 무리, 사회를 형성하는 존재로, 식물을 수동적이고 잡아먹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존재로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제목부터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식물은 어떻게 ‘느끼고’ ‘행동하고’ ‘기억하는가.’ 가만히 그 자리에서 광합성이라는 화학적 반응을 반복하는 것으로만 보였던 식물이 사실 무언가를 느끼고 행동하고 있었다니, 식물에는 눈이나 귀 같은 감각기관도 뇌처럼 생각하고 명령하는 기관도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것일까. 게다가 기억력이 나쁜 사람을 놀릴 때 일부 동물에 빗댈 정도로 ‘기억’이란 사람과 같은 고등 동물만의 특별한 능력으로 여겨져 왔다. 도대체 식물이 어떻게 이 많은 능력을 가진다는 것일까? 하는 의문 속, 식물에 대한 이야기란 곧 그들이 포함된 자연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까지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라는 추천사로 책의 포문이 열린다.



 

살면서 상상하지도 못했던 부분에 대해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될 때 뇌가 트이는 경험을 한다. 단언컨대, 이 책은 모든 페이지가 그런 경험으로 독자를 이끈다. 사람이 조치를 취해주지 않으면 병충해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줄만 알았던 식물이 사실 화합물을 스스로 만들어내 세균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지킨다니. 심지어 가뭄이 들면 스스로 기공을 닫고 저장해둔 물을 지켜낸다니. 지금껏 식물에 대해 알고 있던 모든 상식이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의문과 놀라움에 빠져 종래에는 혼자 중얼거리며 책을 읽었다. 식물이 위험에 처하면 주변의 다른 식물들에게 그걸 알려준다고요? 중금속 환경에서도 생존하는 해바라기를 심어 방사능에 오염된 토양을 복구할 수 있다고요...? 실로 식물이 가진 강인한 생존력, 그들이 서로 공생하며 자연을 지켜내고 다음 세대로 그 경험을 전달하는 과정에 쉴 새 없이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p.262 하지만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려는 식물의 지혜와 전략을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욱 심각한 기후위기의 순간에도 인류와 지구를 지킬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총 4장에 거쳐 책은 식물이 살아가는 기본적 원리와 식물의 능력, 식물의 공생 생태계, 자연 회복력, 그리고 식물의 이러한 지혜가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이야기한다. 인간 중심적 시선에서 관상용으로, 식용으로만 생각되던 식물이 기후위기나 환경오염이라는 현대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희망이 된다는 점에서 식물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과학책을 리뷰할 때마다 쓰는 말이지만 나는 문과-보건계 루트를 탄 사람인지라, 생명과학이라면 모를까 자연과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식물은 어떻게 느끼고 행동하고 기억하는가』는 우선 설명이 상냥하고, 그림이나 챕터 요약을 통해 관련 지식이 없는 독자더라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심지어는 종이책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싣기 힘든 영상 자료는 각주에 QR코드로 첨부한 센스가 굉장히 좋아서, 페이지를 넘기다 QR코드를 만날 때마다 내용을 이해하려 골몰하던 기분이 조금 환기되기도 하고 여러모로 반가워졌다. 상냥하고, 재밌고, 유익한 과학책이다. 이 책을 읽은 모두가 식물과 함께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기를 꿈꾸게 될 것이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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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만큼 성실하게 - 교유서가 소설
이소호 지음 / 교유서가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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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1 나의 중독은 누군가에겐 배부른 투정이자, 재수없는 돈 자랑이었고, 의지가 부족한 여자의 철없는 소동일 뿐이었다. 쇼핑 중독은 동정조차 ‘가성비’가 안 나오는 병이었다. 


허구와 현실 사이 돈 없는 예술가를 상냥하게 위로하는 대신 발가벗겨 세상에 내던져 놓는다. 『캣콜링』 『홈 스위트 홈』의 이소호가 다시 한 번 독자를 미치게 만들고 있다. 『이자만큼 성실하게』를 다 읽고 가장 먼저 든 감상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런 글을 이소호 말고 누가 쓸 수 있을까. 수진의 목소리를 따라가고 있으면 정제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쾌감이 자꾸만 치밀어오른다. 비난이 목끝까지 차오른다. 수진아, 글을 때려쳐. 그리고 나가서 쿠팡 뛰어. 그러나 그렇게 비난할 수 없는 것은,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부터가 그 가난한 작가들이 가난과 체면과 삶을 박박 갈아넣어 쓴 빚조각 글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그러나 사랑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 여기까지 쓰면 다시금 수진의 논문이 떠오른다. 예술은 공공의 것이 되는데 예술가는 알아서 밥을 먹어야 한다(이 논리가 너무나 대단해서 예술가도 공무원처럼 나랏밥 먹여 주라는 주장마저 하고 싶어진다).

 

너무 현실적이어서 너무 무섭다. 여름에 읽어본 그 어떤 공포소설보다도 두려운 글이다. 귀신은 허상이고 빚은 현실이니까. 결국 수진의 사치는 병이었고 성실하게 모은 돈은 믿었던 친구에게 등쳐먹혔고 예술을 알아줄 것만 같던 남자친구는 막상 그 예술이 자신의 삶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와 현실이 되자 계산기를 두드린다. 분명 수진의 상황은 안타까운데, 때로는 수진보다도 가기 싫다고 울면서까지 호주로 떠나가 수진에게 20만원을 따박따박 빌려주는 은진이 더 안타깝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시인이 수치심을 팔 때 가족은 건물을 판다. 독자가 그의 존엄과 가족의 현물 간 무게를 달아 보는 중에도 수진이 미안함이나 비참함보다 ‘아직 비빌 언덕이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작태에는 잠시 책을 덮고 쉬고 싶어질 만큼 마음이 힘들어진다.



 

p.192 시는 나였다. 내 숨이고 내 침묵이고 내 행간이었다. 끝이 보였다. 내가 멈추면 시도 멈췄다. 근데 소설은 달랐다. 소설은 남이었다. 내가 아닌 사람을 만들어서 걷게 하고 말하게 하고 몇백 페이지를 살게 해야 했다. 그게 무서웠다.


이소호의 시들이 대체로 자전과 허구가 어울려 있다는 점과 서울예대 문창과, 광고회사 경력, 호주에서 일하는 동생, 등단 12년차 등 이소호와 주인공 수진의 공통되는 키워드를 생각해 보면 『이자만큼 성실하게』에도 어느정도 자전적 요소가 스며있다고 느껴지는데, 그런 부분에서 수진을 이토록 날것으로 묘사하는 기세가 대단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변호의 욕망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수진은 지독하게 현실적으로 빚어진 듯한 캐릭터다. 동생이나 가족에게 쉽게 손을 벌리고, 그러면서도 수치심 대신 합리화만 반복한다. 실존이니 쇼펜하우어니 거창하게 떠들지만 현실에서 손에 떨어지는 건 캐시워크 100원. 돈이 없어 사치를 그만두었을 뿐이지 시인의 껍데기를 쓰기 위해 울 코트를 사던 순간에서 별로 변하지 않았다고 느껴지는 지경이다. 몇 번이고 책을 다시 읽어도 계속해서 감탄하게 된다. 이걸 이소호 말고 누가 쓰겠나.

 

이 글은 빚에 허덕여 본 적도 빚을 진 가족을 건사해본 적도 없는 이들에게는 마음껏 수진을 헐뜯을 수 있는 블랙코미디고, 단 한 번이라도 그렇게 살아본 적 있는 이들에게는 다큐멘터리다. 거지방이나 탄원서, 논문의 디자인을 살려 넣은 부분이 소설의 글맛을 더욱 살려준다. 에세이인지 소설인지, 고발인지 유머인지 끝까지 읽고도 알 수 없는 괴롭고 맵고 쓰고 짠 책이다. 감사하게도 작가님이 남겨주신 사인 속 ‘흑야의 빛’이라는 표현을 되새겨본다. 그런데 제가 빛이 되는 거 맞나요, 이 책을 출판사에서 무료로 받았는데. 어쩐지 서점에 가서 한 권을 더 카드로 긁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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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절대로 멋진 첫 문장으로 시작해서는 안 된다. 때문에 나는 현학적인 형용사를 포기했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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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강은 그녀를 끌어내린다
윤지현 지음, 박지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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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84 사람들은 귀신이 되는 걸 너무 거창하게 생각해. (중략) 그 마음 때문에 죽고 만 거야. 마크, 그게 전부란다. 귀신이 되는 건 단 하나, 놓지 못하는 마음 때문이야. 우리를 괴롭히는 건 우리가 놓아 줘야 떠나는 거야.

 

굉장히 그리워했던 죽은 사람이 돌아온다면, 그것이 과연 살아 있는 자들에게 행운일까? 『그리고 강은 그녀를 끌어내린다』는 수진이 기르던 쥐 ‘밀키스’를 되살리는 것을 통해 수진의 집안 여자들이 공유하는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수진이 능력을 마크에게 들킨 후 마크가 그녀의 죽은 언니 ‘미래’도 그 능력으로 되살릴 것이냐고 물었을 때 수진은 강하게 부정하지만, 이 작품이 자매 관계를 중심으로 흘러간다는 소개를 생각하면 이미 독자는 그녀가 언니를 되살리리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예상대로 수진에 의해 살아난 미래는 차츰차츰 복수를 해나가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수진의 가족이 한국계라는 설정에 걸맞게 이야기 곳곳에 한국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들이 보이고, 수진이 그곳의 경찰서장에 의해 인종차별을 겪는 모습도 드러난다. 작가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본인이 겪어 온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미래가 어머니의 죽음에 얽힌 자들을 차례차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마치 한국의 주된 귀신 소재인 ‘처녀귀신’과 ‘한’을 떠올리게 한다. 수진이 죽음을 거슬러 미래를 되살린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되면서도 너무나 애틋한 이 자매를 바라보고 있으면, 미래가 건강히 잘 살아가기만 한다면 이대로도 괜찮지 않나 하는 착각에 독자도 수진과 함께 사로잡히고 만다. 그러나 마크도, 수진도, 그리고 이야기 밖의 독자도 알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된 미래는 완전히 살아난 것이 아니며 앞으로 완전하게 살아갈 수도 없다는 것을. 그래서 독자는 불안한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긴다. 과연 미래는 어떻게 될지, 그리고 미래를 다시 잃을지도 모르는 수진은 어떻게 될지, 마크는 끝까지 그녀의 편이 되어 줄지.

 

p.420 복수의 끝에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미래가 증오하는 이들이 모두 익사하고 나면, 이미 제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망령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미래가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존재로 변하고 나면 앞으로 나아가는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수진은 미래를 절대 죽음으로 되돌려보내지 못할 것처럼 굴지만 작가는 주변인의 입을 빌려 수없이 메시지를 던진다. 마크의 어머니가 ‘우리를 괴롭히는 건 우리가 놓아 줘야 떠난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야기는 수진이 어머니를, 미래를, 밀키스를 놓아줘야만 한다고 소리친다. 그래서 종래에는 수진도 미래가 원하는 복수를 모두 실행해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그래서는 미래도 자신도 과거를 두고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으스스한 스릴러 속에서 독자는 수진의 모습을 통해 은연중에 미래의 애도를 함께하면서 이야기가 완성된다.

 

흡입력이 굉장한 소설이다. 400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두꺼운 책인데도 지루하거나 답답한 부분이 전혀 없다. 독자를 글 속으로 순식간에 빨아들여서는 수진의 성장을, 미래의 애도를, 마크의 풋풋한 사랑을 함께하게 만든다. 단지 스릴러에 그치지 않고 미래가 K-장녀로서 짊어져야 했던 짐을 보여준다는 것이, 그리고 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과 끝내는 것이 모두 수진이라는 점이 굉장히 좋았다. 가장 가까운 연대자이자 가장 아픈 덧니같은 이 자매가 끝난 페이지 속 각자의 자리에서 영원히 행복하기를 바라게 된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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