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꽃 향기
김하인 지음 / 더스타일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지극한 모성애와 지고지순한 사랑얘기다. 김정현의 [아버지],조창인의 [가시고기]와 같은 감동소설이다. 사실, 이런류의 소설은 왠지 눈물을 강요하는 듯 해서 선뜻 내켜하지는 않지만 삶에 지칠 때는 가볍게 읽어볼 만 하다. 소위 '문학한다'는 사람들은 순수문학이 아닌 이런 (멜로)장르 소설을 B급이라 하여 다소 낮춰보는 경향이 있으나 우리 문단의 행태가 낙제점인 F급인 주제도 모르나 싶어 한심스럽기도 하다.

 

장진영, 박해일 주연의 동명영화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특성상 설정과 내용이 다소 변하긴 했지만 기본 줄거리는 비슷하다. 영화속 얘기처럼 장진영도 역시 위암4기 투병중이던 2009년 결혼하자 마자 삶을 마감했다. ‘데칼코마니(Decalcomanie)’는 원래 일정한 무늬를 종이에 찍어 다른 표면에 옮겨붙이는 장식기법을 말하는데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이름이기도 하다. 이 말이 요즘은 소설이나 영화에서의 죽음이 그대로 현실로 나타나는 현상을 이르는 말로 자주 사용되는 듯하다. 최근 작고한 정미경작가도 마찬가지인 경우이다.역량과 재능있는 이들의 갑작스런 죽음은 너무 안타깝다. 덧붙이자면 장진영이 출연한 영화를 모두 본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그녀의 최고 작품은 이 소설의 주인공 이름과 똑같은 김승우와의 애닯은 연애를 다룬 2006년의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도입부, 6.10항쟁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 198787일 시네마 드림솔저. 서울권 대학 영화동아리 CDS회원들이 단편영화를 찍을 수 있는 촬영장비를 갖추고 청량리역에서 강릉으로 가는 무궁화호 기차에 몸을 실었다. 승우와 미주와의 해변에서의 첫키스.

같은 써클의 선배이자 3살 많은 연상의 여자, 미주.

승우는  대학 신입생시절 전철에서 국화꽃 향기가 나는 그녀의 머리냄새에 뿅간 것이다.


군대갔다와서 한창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이승기가 2004년에 [내 여자라니까]로 빅히트를 쳤는데 누난 내 여자니까라고 부를 때 누나들의 가슴이 설레었을 테지만 ~라고 부를께.”연상녀,연하남의 사랑과 결혼. 과연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나이나 국경도 필요 없다지만, 나이와 서열에 민감한 유교질서속의 우리사회에서 쉬운 것은 아니지 않을까? 여자가 아니라서 모르겠다. 또 이런게 페미니즘과 관련있는지도... 그래서인지 승우는 첫키스의 추억과 사랑을 가슴속에 묻어둔 채 졸업후 라디오 FM음악방송 PD로 취업해 일하고, 미주는 시나리오 작가로서 전전긍긍하고 있던중, 어느날 호텔 커피숍에서 미주를 우연히 본 후 승우는 대뜸 반말로 대한다.

 

우리 같은 사회인끼리 서열 따지지 맙시다 이거.“

승우가 약간의 무례를 무릅쓴 것은 말이 가진 장벽부터 뛰어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언어속에는 사회 통념, 이를테면 관습이 내재되어 있어 사람들간의 간격과 상하를 일정하게 유지시킨다. 미주를 사회에서 다시 만났을 때 선배라는 호칭을 자기도 모르게 붙이거나, 그녀는 말을 낮추고 자신은 말을 높인다면 다시 상하관계가 팽팽한 대학 시절로 되돌아갈까 봐 염려했던 것이다. 미주를 사랑하는 여자로 만나기 위해서, 자신이 미주에게 남자로 느껴지게 하기 위해서.(98) 결국 결혼후 라고 부른다. 다른사람들과 같이 있을때는 미주씨, 승우씨라고 호칭하지만.

 

자고로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

학교 다닐때는 선머슴에다가 왈패 저리 가라, 페미니스트에 여권신장의 기수 아니었어?"

"선배님들 아녀자가 지아비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 이렇게 변하나이다 그리 타박 마소서!”(220)

하긴, 무슨 타박을 하겠는가? 사랑하는 사람끼리 합의하에 자기들 사이(또는 가정내에서) 너라고 하든, 자기야 하든, 아빠라고 하든 무슨 상관이랴.

 

강원도 고성에서 아트홀과 펜션을 운영하며 살고 있는 소설가 김하인은 시를 썼던 경력을 살려 감성적인 문체와 드라마적 구성을 통해 멜로의 극대화를 꾀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소설의 후반, 미주가 임신사실과 동시에 위암 3기임을 알고 출산을 위해 치료를 포기한후 강원도 바닷가 폐교에 내려온다. 그들의 생활과 심리에 대한 묘사에서 작가의 감각적 문체는 더욱 빛난다.

 

황금빛으로 불타는 은행나무는 셀수없이 많은 잎을 달고 우람하게 서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도 곱게 햇빛에서 노란 빛깔만을 뽑아 잎에 물들일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271)

고요와 적막감이 푸르게 푸르게 학교 담장을 경계로 거대해지는 느낌이었다. 운동장은 거인의 앞치마처럼 풍성하게 펼쳐져 바람을 담고 어둠을 꺼내 방목하고 있었다.(276)

잠이오면 자.”

그래. 여기에서의 잠은 아마도 바다 쪽에서 걸어올 것 같아.

자박자박, 찰랑찰랑 물 밟는 소리를 내면서.”(289)

승우의 혀가 미주의 가지런한 치아를 훑고 혀끝을 감았다. 승우는 자신의 몸 속에 담긴 풍부한 시간을 넣으려는 듯 뜨거움을 미주의 입속에 흘려 넣었다. 간절하게.

내 시간을 가져 가, 내 시간을 가져 가, 하고(326)

 

또, 죽음을 앞둔 자의 심경을 절묘하게 잘 표현한 문장. 

미주는 언제부터인가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싫어졌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연속극, 개그 같은 화면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하잘 것 없는, 문제가 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서로 헐뜯고 싸우고 웃고 떠드는 것이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싫었다. 살 시간을 넉넉하게 가진자들의 횡포 같았다.

상황이 변해서일 것이다. 미주도 건강을 잃기 전에는 텔레비전을 들여다보며 같이 킬킬대며 웃었으니까. 시시콜콜한 것을 가지고 떠들어대는. 인생이, 살아 있는 시간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인생을 가볍고 경박하게 만들기 위해 갖은 용을 써대는 것 같은.(282)

 

그래, 이게 인생이다. 인생등급이 B은 커녕 C급도 못되지만, 아직은 건강히 살아있는 나는 이쯤에서 독후감을 끝내고 텔레비전을 켜서 평창올림픽 중계를 볼 것이다. 아마도 손뼉을 치며 웃거나, 한숨을 쉬며 아쉬워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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