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가는 길 - 고3 아들과 쉰 살 아버지가 함께한 9일간의 도보여행
송언 지음, 김의규 그림 / 우리교육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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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언, <해남 가는 길>, 우리교육, 2009.




정겨운 책이다. 곧 고3이 되는 아들과 쉰 살이 넘은 아버지가 함께 한 이야기이다. 물론 단순히 같이 있는데서 그치지 않고 함께 여행을 갔다는데서 의미가 있고, 특히 ‘도보’를 이용하여 국토순례를 했다는데서 다른 부자간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과 차별화된다.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잘 발달해있는 시기에는 비행기나 배를 타고 외국에 가기도 하고, 국내 여행도 기차나 자동차, 조금 색다른 멋을 내려면 오토바이나 자전거 일주를 택하기도 하지만 이네들처럼 두 다리를 택하는 경우는 드물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우리나라의 도로나 길은 오직 자동차를 위한 것이지 전혀 사람을 배려한 상황은 아니다. 그렇기에 바람의 딸 한비야는 길을 걸을 때는 자동차가 오는 것을 바라보며 걷는 편이 더 안전하다고 이를 권했던 것이다. 물론 이 방법은 안전하겠지만, 작가는 자동차가 다가오고 지나가면서 발생시키는 먼지 바람이나 굉음을 참기보다는 두렵기는 해도 뒤에서 오는 차를 믿겠다며 차와 같은 방향으로 길을 걷는다. 이 책은 단순히 아들과의 도보 여행에만 초점을 맞추고 괜한 감동을 자아내는데서 그치는 책이 아니다. 무작정 걷기만 하는 것도 아니어서(생각해봐라, 아들이 계획아고 아버지를 도보여행으로 끌고 나왔지만 아들은 수험생활의 부담감 때문에 숙소에 들어가면 영어 단어를 외우다가 잠이 들기도 한다) 중간 중간에 지역버스 이용법이나 깔끔한 숙소 소개, 식사 해결 문제 등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덧붙인다. 이 책을 읽고 서울에서 땅끝마을까지 도보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독자이자 잠재적 도보여행자들에게 현실적인 문제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셈이다. 걸음을 옮기는 중간 중간에 아버지는 재미난 이야기를 꺼낸다. <땅끝을 거닐다>라는 시 소개,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에 나오는 대흥사 현판 이야기, 식당에서 있었던 다분히 개인적인 일화 소개,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 말아야한다는 니다이 이야기, 심청가를 잘 부르던 김창진 이야기 등등 지나가는 곳곳의 지역에 얽인 이야기를 재미나게 늘어놓고 있다. 교편을 잡고 있는 작가의 이력을 떠올릴 때 다소 늘어지는 감이 있긴 해도, 아주 유용하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글을 마지막까지 읽으면서도 ‘이거 소설아니야?’라는 생각이 조금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여행 중 때마침 그 지역이 고향인 친구에게 전화가 오는 장면이라든가, 수험생활의 부담이 엄청날 텐데도 아버지에게 국토 순례여행을 가자고 하는 오늘날의 예비 고3의 모습과는 어긋나는 그의 아들 등등 때문이다. 그러나 책의 말미에 실려 있는 ‘아버지와 함께 한 국토순례’란 글의 글쓴이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왠지 모를 짜릿함과 동시에 이 작품의 진정성을 새롭게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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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길, 우즈베키스탄을 걷다 - 실크로드 1200km 도보횡단기
김준희 글.사진 / 솔지미디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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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희, <오래된 길, 우즈베키스탄을 걷다>, 솔지미디어, 2009.




독특한 책이다. 여행을 다녀온 후 여정, 견문, 감상을 적은 기행문이지만 색다른 감이 있다. 그 이유는 제목에서 알 수 있다. 오래된 길, 우즈베키스탄을 ‘가다’가 아니라 우즈베키스탄을 ‘걷다’이기 때문이다. 물론 교통수단은 비행기를 타고 가든, 배를 타든,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이용하건 상관이 없다. 그렇지만 가장 원시적이고 가장 힘들고 비효율적인 두 다리를 이용한다는 것은 이 시대의 여행 수단으로 정하는 데는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인다. 인류에게 허락된 가장 오래된 길인 실크로든, 그곳에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아스팔트 도로가 잘 닦여 있은지 오래이다. 지금도 무역이나 경제 활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이 길을 걷겠다는 다소 무모한 결심을 했다. 옛날 사람들은 낙타라도 끌고 갔을텐데, 그는 조그마한 핸드카를 끌며 길을 나섰다. 걷는 것을 힘들어하고 싫어하는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결심이었다. 물론 나는 산을 좋아하지도 않고, 산을 타는 것을 좋아하는 그네들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편이다. 어쨌든, 뒷산을 오르는 것이나, 혹은 우리나라처럼 길이 잘 닦이고, 사람들 인심 좋고, 곳곳에 숙박시설이나 편의 시설이 즐비한 곳이라면 시도해보겠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 특히 작가가 걷는 ‘누쿠스-우르겐치-부하라-나보이-사마르칸드-타쉬켄트’의 루트는 우리와는 확연히 다르다. 말도 안통하고 편의시설도 부족하고 게다가 ‘사막’을 횡단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사막이라고 해서 한나절 걷고 저녁에는 호텔에서 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글을 통해 알게 된 사막은 그리 낭만적인 곳이 아니다. 며칠, 십여일 동안을 걸어야하며 30~40km마다 있는 숙소를(그 지방 노동자들의 임시 숙소인 집을 빙자한 컨테이너나 작은 식당) 찾기 위해 의무적으로, 즉 생존을 위한 걷기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목적 거리를 달성하지 못했을 경우, 사막에서 노숙을 해야 했다. 실제로 작가는 사막에서의 하루 노숙을 했는데 사막에서의 노숙은 어떤 동물이 어떤 해를 끼칠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일교차가 극심히 크기 때문에 상당히 위험하다고 한다. 어쨌든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시작한 사막에서의 노숙 또한 그에게는 좋은 추억으로 남았으리라. 작가는 사막이 끝난 후 아직 여정이 많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허무해하며 긴장의 끊을 놓아버린다. 독자인 나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라고 생가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몰입하던 나도 사막이 끝남과 함께 약간의 시들함과 집중력이 떨어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뒷부분으로 갈 수록 우즈베키스탄인의 인간성과 음식, 주거 문화 등에 대한 내용이 많이 수록되어 있으므로 여행서로서의 몰입도는 끝까지 유지한다고 본다. 사막에서는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여러 종교가 창시된 사막에서의 여정과 감상을 간접 체험하는 것 만으로도 나에게는 내 인생을 잠시나마 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신간을 갖게 되었기에 나름 의미있는 독서를 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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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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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하르트 슐링크, 김재혁 옮김, <다른 남자>, 이레, 2009

다른 남자, 참 자극적인 제목이다. 문득 영화 ‘아는 여자’의 타이틀이 생각났다. 존재감은 없었지만 그냥 아는 여자에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와 같이 이 책 또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통하여 사랑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렇지만 이 책은 사랑으로부터 떠나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 책은 2004년에 <사랑의 도피>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 사랑의 도피. 이 책 <다른 남자>는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통하여 거기에서 형성되는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 아니라, 하나같이 사랑으로부터 벗어나고 떠나는 이야기를 다루었기 때문에 사랑의 도피라는 제목이 이해가 된다.

  이 책은 6개의 중단편이 합쳐진 단편집인데, 단순히 남녀간의 사랑 문제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사랑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남녀간의 사랑만을 떠올릴 수 밖에 없지만, 이 작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한 부부와 그의 친구, 가족 등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관계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특이성을 보인다. 이들 관계들은 상황이나 시대적 배경 등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지만 사랑을 다룬다는 점과 이 사랑으로부터 떠나는 사랑의 도피 문제를 고민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사랑의 도피, 즉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라는 뜻이다. 본문에 실린 작품들은 나름 흡입력이 있었다.

  표제작인 ‘다른 남자’와 더불어 ‘소녀와 도마뱀’, ‘외도’, ‘주유소의 여인’ 등의 작품이 괜찮았다. 오랜 결혼생활을 아내와의 사별로 끝낸 남편에게 의문의 편지 한통이 오는 것으로, 아내에게 또 다른 남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다른 남자’. 동독과 서독이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이념이나 생활면에서 차이를 보이던 한 부부와 한 남자, 그리고 그들의 딸.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갈등의 골은 깊지는 않지만 스토리 전개는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그 중에서 ‘소녀와 도마뱀’이라는 작품이 제일 좋았다. 판사였던 아버지(베른하르트 슐링크도 법대 교수이자 판사이다)가 몰락한 와중에서도 한 그림을 끝까지 지켰고, 그것을 나에게 준 단순한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왜 그 그림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그 그림에는 어떠한 비밀이 있는지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찾아내고 알아내는 과정이 제법 흥미로웠다. 어쩌면 허무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결말로 글을 맺지만, 그것이 이 작품의 완성도를 떨어뜨린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소설의 여운을 조성함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독자로 하여금 문제의식을 갖게 하고,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하는 작품을 구구절절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친절한 작품에 비해 선호한다. 요즘 이슈인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의 작가의 작품이어서가 아니라, 이 자체만으로도 의미있고 괜찮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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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태스킹은 없다 -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멀티태스킹
데이비드 크렌쇼 지음, 이경아 옮김 / 아롬미디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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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e Crenshaw, 이경아 역, <멀티태스킹은 없다>, 아롬미디어, 2009.




사회에 나온 지 2년차가 되었다. 어리버리대던 1년차때와는 다르게 일을 제법 한다는 소리도 듣는다. 내가 몸담고 있는 직장은 소위 짬이 될 수록 대접을 받고 일이 적어지지만 보수는 높아지는 그런 공간이다. 겉으로는 동등한 지위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위계질서가 확실한 공간이다. 그래서 막내들이 일을 하는데, 그 양이 만만치가 않다.

오늘은 수요일. 수요일에는 아침에 전체 회의가 있고 오전 중으로 A에 전자문서로 보고를 해야 하고, 오전에 처리해야할 일이 2개, 오후에 3개. 아침에 오면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내나 고민하다가 일단 업무부터 하고 보자는 식으로 죄다 꺼내어놓는다. 그래서 지금도 왼쪽에 파란색 공문철이 2개, 컴퓨터 키보드 옆에 결재판 하나, 그 옆에 책 몇 권이 널부러져 있다. 모두 오늘 중으로 처리해야 할 것들이다. 그와중에 읽은 이 책. 넉놓고 읽은 이 책이 엄청난 효과를 불러왔다. 난 조용히, 그러면서도 신속하게 공문과 책들을 저쪽으로 밀어놓고야 말았다.

사실 나도 멀티태스킹에 능한 줄 알았다.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메신저로 쪽지도 보내고 핸드폰도 확인하고, 앞사람에게 복사를 부탁하면서 전화도 받아내고, 내전화건 옆전화를 끌어받건 내 일이 있더라도 전화가 오면 그것을 먼저 처리하고는 한다. 후다닥. 잔뜩 쌓여있던 일거리들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짜릿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남자들은? 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을까? 와이셔츠를 걷어붙힌채 여러 일거리를 왔다갔다하며 처리할 때 왠지 내가 유능하다고 느끼며, 그 일들을 처리하고 나서는 제법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내가 멀티태스킹이라고 착각했던 스위치태스킹을 재빠르게(결과적으로는 비효율적이었지만) 한 결과이지만 말이다.

  로마의 철학자인 푸블릴리우스 시루스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139쪽) 라고 말했다. 정말 맞는 말이다. 주로 행정업무를 처리할 때 옆에 누가 서있을 때가 많다. 나를 그냥 보러온 사람부터, 결재를 맡기 위해, 일의 진행 과정을 물어보기 위해서 등 각각의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온다. 물론 스위치태스킹을 재빠르게 하면서도 이네들의 말을 들어주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난 바뀌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실제로 조금전에도 나를 찾아온 한 사람을 위해 이어폰을 빼고, 내가 보고 있던 책을 과감히 덮었다. 그런 후에 그에게만 나의 시간과 관심을 온전히 주었다. 그것이 긴 시간은 아니다. 단 1~2분일지언정, 상대가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면 어설픈 스위치태스킹을 하면서 일도 제대로 못하고, 시간도 뺐기고 그러면서도 상대와의 인간적인 관계가 약간은 비틀려버리는(지금 생각해보면 상대나 나나 진심이 아니라고 느끼게되면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동료의 말을 소위 귓등으로 들어버리는 매너없는 행동이었다. 정말 반성하고 있는 중이다.) 전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걱정 따위는 안해도 될 것이다. 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고 협력함으로써 임무를 수행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일의 결과물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진행되는 과정이 얼마나 효율적인가도 중요하고 특히 그 과정에서 구성원들간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가의 결과 또한 중요하다. 이 책에는 문장과 숫자를 위,아래에 적는 실험이 있다. 한줄씩 쓰느냐, 한글자씩 위아래를 번갈아가며 쓰느냐. 전자는 일을 하나씩 처리하는 것이고, 후자는 멀티태스킹_엄밀히 말하면 스위치태스킹의 일 처리 방식이다. 과연 어떤것이 효율적일까? 답은 간단하다. 지금 즉시 펜을 들어보자. 지금까지의 자신의 일 처리 방식이 얼마나 비효율적이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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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위한 변명
신명호 지음 / 김영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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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 <왕을 위한 변명>, 김영사, 2009.







  변명이란 흔히들 ‘어떤 잘못이나 실수에 대하여 구실을 대며 그 까닭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인 ‘왕을 위한 변명’을 보고 이 책이 왠지 과오를 저지른 후 구차하게 구실을 대는 것으로 섣불리 판단해 버릴 지도 모른다. 물론 나 또한 그랬다. 그렇지만 변명에는 또 다른 뜻이 있었다. 즉, ‘옳고 그름을 가려 사리를 밝히는 것’이 그것이다. 나의 경우 제목을 보고 ‘왕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합리화시키기 위해 스스로 변명하는구나’라고 오해했는데, 제대로 보니 ‘왕을 위한 변명’이었다. 왕은 절대군주이고 권위와 위엄을 갖춘 존재였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하소연할 수 없었나보다. 당사자가 조용히 하고 있으니 단순한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도 온갖 추측이 난무할 수 밖에 없었던 셈이고. 나와 같은 역사적 지식이나 당시 정치 맥락 등에 대한 전반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소문에 의존할 수 밖에 없지만, 이 책의 작가와 같은 지식인들은 달랐을 것이다. 이렇게 온갖 억측과 근거 없는 추측이 나타나는 혼란한 상황에서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이 사건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판단해버리는 우민들을 위하여 지식인이 나섰다. 그것도 사건의 이면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방법 또한 제시해 줌으로써 우리들도 미약하나마 성찰의 계기를 얻게 된 것이다.

  등장 인물은 말할 것 없이 왕이다. 조선왕조를 창업했지만, 상왕으로 밀려나게 된 태종으로부터, 조선왕조를 외롭고 고단하게 마무리한 고종까지 다루었다. 우리들이 술자리에서 가끔 논쟁하는 것이 있다. 넌 단종이냐 세조냐. 그 사람의 가치관을 판단할 때 이런 질문을 던지는데 결국 니가 옳다 내가 옳다 하며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그 민감한 화두인 세조를 불교의 수용과 거부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접근한 글도 있다. 게다가 왠지 핑계가 많을 것 같은 한스럽지만, 자신의 마음대로 원을 풀다간 연산군의 이야기도 담겨있다. 폭정을 일삼던 연산군이었지만, 이 책에서는 제법 왕을 위해 변명을 대준다. 그가 행했던 흥청망청한 생활과 환락, 살육 등은 무절제한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모성을 위해서라면 희학과 희욕이라도 상관없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야할 것이라는 변을 해주고 있다. 말나온김에, ‘흥청망청 쓴다’의 어원을 소개하고자 한다. 흥청은 기생으로 연산군은 지금식으로 말하면 이동식 러브호텔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면서 욕정이 솟구칠 때 마다 주변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흥청과 즐겼다고 한다. 이렇게 연산군이 흥청과 함께 마구 놀며 쓰던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124쪽 참고)

  이 책은 읽기에 따라서 어렵게 느낄 수도 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견들이 많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기때문에 더욱 흥미를 느낄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원래 정사보다 야사가 재미난 법이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적재적소에 배치된 생전 처음 보는 몇몇의 삽화 또한 이 책을 쉽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데 큰 도움을 준다. <왕을 위한 변명>은 우리 역사의 해설서로 중요한 역할을 할 뿐더러 대중에게 역사이해에 대한 또다른 시각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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