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삶에게 - 끝을 기억하는 삶, 진정한 오늘을 살다
토드 빌링스 지음, 홍종락 옮김 / 두란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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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인간은 모두 죽는다. 그런데 이 죽음은 인간이 살아서는 경험할 수 없고, 경험한 사람에게 어떠한 증언도 들을 수 없다는 점에서 미지의 세계다. 그리고 현대 사회는 의도적으로 이 죽음의 영역을 우리 삶에서 격리시키고 있다. 그 결과 죽음은 이전보다 더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불청객이 되어 버렸다. 인류의 그 무엇보다 불편한 진실인 죽음,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신학자이자 선교사이면서, 다발성골수종이라는 불치성 암 말기 환자인 저자는 그에게 서서히 다가오는―그러나 실상은 인류 모두에게 똑같이 다가오고 있는―죽음에 대해 논하고 있다.

책의 내용 요약

죽음에 대한 첫 번째 고찰은 ‘스올’이라 불리는 히브리 전통에서 시작한다. 이는 생물학적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살아 있는 자들에게도 스올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나는 ‘성전’의 정 반대 개념 즉, 하나님이 부재하시다 인식되는 장소나 상황이다. 유대교 학자 존 레븐슨은 이 대비를 이렇게 설명한다.

“스올에서 성전으로 이동하는 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성전 바라보기를 갈망하는 것은 생명 자체를 갈망하는 일이다.” (45쪽)

그렇다면 죽음 그 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신학적으로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죽음이란 하나님의 자비를 알아가게 하는 교훈적 성격이 있다는 이레나이우스의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은 죄의 결과로서 불합리한 참사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 두 가지 요소가 모두 인간의 삶에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며, 오히려 이러한 죽음에 대해 어떠한 관점으로 정의를 내리려는 발언권을 포기할 때, 우리 대신에 죽음을 맛보신 구원자가 필요함을 바라보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이토록 우리 곁을 떠날래야 떠날 수 없는 죽음을 인간 문화에서 의도적으로 격리시켜 버렸다. 이런 죽음을 부정하는 문화가 그리스도인 공동체인 교회에도 아주 많이 퍼져 있다. 이것은 아주 큰 문제다. 죽음의 문 앞에서 의사가 목사를 대체했고, 인공호흡기가 기도서를 대신했다.

“죽음을 부정하는 예전에 맞추어 살다 보면 우리가 구원의 하나님, 매번 새롭게 호흡하는 일에서도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시고 죽음 앞에서도 유일한 소망이신 생명의 주님을 철저히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진실을 회피하게 된다.” (178쪽)

저자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아르스 모리엔디(Ars Moriendi)’, 즉 죽음의 기술로 알려진 기독교적 전통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아르스 모리엔디 전통을 회복하려면 제자도에서 일생의 특징인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 지닌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 죽어 가는 이들과 접촉하고 그들과 함께 기도할 기회를 찾아 나서야 한다. 우리 자녀들이 죽어가는 이들을 알게 되는 것을 환영하고 그렇게 되도록 이끌어야 한다. 자녀들을 장례식에 데려가는 일을 피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죽어 가는 이들뿐만 아니라 자녀들과 우리를 위한 길이기도 하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성경은 밝히 말하고 있지 않다. 신약의 여러 부분에 언급된 내용에 의하면 우리의 육신은 부패해도 개인의 정체성은 그리스도를 통해 계속 이어질 거라고 암시하거나 분명히 가르치는 정도다.

그런데 이에 대한 흥미로운 증언들이 현대 사회에 차고 넘친다. 1975년 레이먼드 무디가 그의 책 『다시 산다는 것』에서 ‘임사체험(near-death experience)’라는 용어를 처음 고안하여 사용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 신약학자 스캇 맥나이트는 그의 책 『천국의 약속』에서 임사체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표현했다.

“솔직히 나는 사람들이 (임사체험에 근거하여) 천국에 대해 말하는 많은 내용에 회의적이다. (중략) 임사체험은 무덤 너머의 삶에 대한 안내문으로서 신뢰하기 힘들다. 무엇보다 그것은 죽음 ‘이후’의 체험이 아니라 죽음 ‘이전’ 또는 죽음에 ‘임박한’ 체험이기 때문이다.” (277쪽)

결국 내세에 대한 소망 중 가장 신뢰할 만한 원천은 천국에서의 가족 상봉이나 임사체험이 아닌 성경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하심과 십자가에서의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심이다.

죽음에 대한 고찰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이어진다. 천국은 어떤 곳일까? 천국은 영원히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다. 이것을 희미하게 구약 시대에는 성막과 성전으로 경험했다. 예수님은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의 상인들을 쫓아내신 후, 자신이 죽음과 부활 가운데 친히 성전이 되실 것을 선언하셨다. 그렇다면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일까? 시편 주석가 피터 크레이기는 이렇게 말한다.

“인생은 극도로 짧다. 그 의미를 찾으려 한다면 모든 생명의 수여자이신 하나님의 목적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354쪽)

감상평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음에 대해 논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그 죽음을 대처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100세 시대를 외치며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외침은 많지만, 죽음을 어떻게 준비하는지에 대해서는 듣지 못한 채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다.

그래서 저자가 강조하는 죽음의 기술, ‘아르스 모리엔디’를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소유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물론 이것이 죽음에 대한 우리의 슬픔을 상쇄시켜 줄 수는 없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삶과 죽음, 그 이후의 이야기를 우리 삶에서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 깊은 슬픔과 좌절을 느낌과 동시에 소망을 품고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얼마 전 교회 공동체의 사랑하는 집사님을 갑작스럽게 떠나보낸 뒤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삶과 죽음에 대해 내가 어떤 의견을 피력한다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장례식의 과정을 통해 느낀 분명한 사실은 이 죽음의 문제를 그리스도인 공동체인 교회가 어떻게 경험해내느냐는 정말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속한 교회 공동체가 이 문제를 누구보다도 슬픔 가운데, 그러나 소망을 잃지 않고 함께 위로하고 위로받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 본인도 죽음의 경계에서 치열하게 싸우면서 책을 집필하였다는 점에서 한 구절 한 구절이 와닿았다. 절대 쉽게 쓰여진 책이 아님을, 단순히 자신의 신학적, 지식적인 견해만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정제된 지식이나 교리로 죽음의 문제로 슬픔을 당한 이들의 감정을 재단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대적인 진리 앞에서 좌절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줄 뿐이다. 질병과 죽음의 문제로 고통받는 그리스도인이 이 책을 읽는다면 더욱 공감과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을 주요 주제로 삼고 있지만, 기독교의 본질은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있다. 그리고 그 삶을 함께 누릴 우리의 자세가 최종적인 결론이다. 그래서 ‘스올’에서 시작한 책의 주제는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성전’을 사모하는 예배자의 고백으로 마무리된다.

공동체성경읽기를 하며 시편의 진면목을 더욱 알아가고 있다. 수많은 믿음의 조상이 이 스올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그들의 고백은 반드시 감사로 마무리되었다. 빠져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로 여겨지는 그 스올에서조차 하나님의 역사는 그치지 않았음을 그들이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두가 죽는다. 그러나 믿는 자는 다시 살아난다. 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10:17).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이 ‘아르스 모리엔디’를 습득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그분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함께 즐거워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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