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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처럼 - 도청의 마지막 날, 그 새벽의 이야기
정도상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5월
평점 :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 쿠데타 세력이 이에 항의한 무고한 광주 시민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으로, 40년이 지난 지금도 발포명령자와 발포에 대한 최종책임에 대한 진상규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고, 헬기사격이나 집단학살의 증거들 그리고 찾지 못한 시신들 등에 대한 풀어야할 과제는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된 이들의 숭고한 정신과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앞당기는 데 일조를 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공감하며 이견이 없을 것이다. 매년 이맘 때 즈음이면 그들의 희생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의 정신을 잊지 않으려 5.18 관련도서를 찾아 읽곤 하는데, 올해 내가 선택한 책은 정도상 작가님의 <꽃잎처럼>이다.
이 책의 원래이름은 <도청>이었다고 한다. 1980년 5월 18일 집회를 시작으로 한 총 열흘간의 민주화운동에서 그 최후 격전지인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이 책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1980년 5월 26일 저녁부터 5월 27일 아침까지 계엄군이 시민군을 진압해가는 과정을 시간 순서에 따라 구성하였고, 그 바탕에 역사실화를 재구성한 소설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몸부림쳤던 사람들의 실존에 관한 소설임을 작가는 강조하고 있다. '나'로 등장하는 노명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실재했었거나 실재하고 있는 인물들이라고 하니, 해마다 이 맘때면 각종 미디어와 책에서 전해듣는 상황이지만, 들을 때마다 읽을 때마다 더 가슴아프고 슬프게 느껴지는 이유가 그들이 특별나게 뛰어나고 존재감을 드러내는 위인이라서 아니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와 다르지 않는 그저 일반시민들이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나'로 등장하는 노명수는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은 자동차하청업체에서 용접공으로, 검정고시를 준비하다 나보다 두살 많은 방직공장에 다니는 김희순이라는 여자를 알게되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가 대학에 다니다 자퇴를 하고 야학을 열어 스스로 공순이가 된 걸 알게되고 자신과 그녀가 이뤄질 수 없음을 직감한다. 그가 너무도 사랑하는 희순이는 모두가 믿고 따르는 투쟁위원회 대변인인 윤상우를 그에게 경호하고 지켜달라는 말에, 그는 전남대를 졸업하고 서울서 은행에 다니다 내려와 플라스틱 공장에 취직한 윤상우를 '피리부는 소년'으로 부르며 그를 묵묵히 지키며 전남도청에서 마지막까지도 함께 하게 된다.
키가 150도 채 되지 않지만 생각도 동작도 빠르며 <투사회보>에 글도 잘 쓰는 고아청년 박영준, 수습위원회 활동을 하는 이종석 변호사와 그의 아들 이효균, 동국대 한의대를 다니는 효균의 친구 김병규, 그리고 고교를 중퇴하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다 츄레라 운전수로 지내는 김수찬 등 이 책의 등장인물은 지극히 평범하고 일반적인 소시민들이다. 2만의 계엄군 앞에선 오백명의 시민군이 예비군용으로 사용되어 실전에 거의 사용되지 않는 실탄이 3발 정도 남아있는 오래된 카빈 총으로 대항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을 뿐아니라, 평범한 시민이 자신들을 향해 총을 겨누는 계엄군을 향해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어도 머뭇거리기만 하고 당기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수 밖에 없을듯 했다. 결국 전남도청은 이들 시민군들의 시체더미로 쌓여갔고, 도청옥상에 피에 젖은 깃발만 휘날렸지만 그들은 어제와 다른 새로운 내일이 시작됨을 암묵적으로 암시하며 책은 마무리 되었다.
너무도 가슴 아픈 역사인지라 읽으면서도 몇 번이나 울컥하게 했다. 과거의 아픔과 상처는 어떠한 형태로든 치유되기 힘들다는 것을 알지만 제대로 된 진상규명은 물론 그들의 희생에 대한 폄훼나 왜곡은 절대 어떠한 형태로든 용납해서는 안될 것으로 여겨지며, 이들의 숭고한 희생과 정신은 우리가 기억하고 지향하며 계승해야할 하나의 이념으로 받아들여져야 함을 인식하게 되는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알게 해준 책이었다.
기억해두고 픈 문장을 남겨둔다.
- 식구를 지키고 사랑하는 것. 상우 형은 내게 있어 식구나 다름없었다. 희순을 사랑한다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것이 사랑을 대하는 나의 자세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끼고, 그렇게 하는 것, 사랑이란 상대방을 위하여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희순은 말했다. (p.19)
- 나도 덩달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느리게 뱉어냈다.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나에게는 희순이 있어. 오늘 밤이라고 했어. 오늘 밤을 지내고, 내일이면 희순을 만날 수 있어.' 나는 그 약속을 믿고 있다. (p.24 사랑하던 희순은 연탄가스로 사망했던 상황)
- 전투에서 우리는 질 것입니다. 한 발만 더 가면 낭떠러지가 분명한데 한 발을 더 내디뎌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백척간두 진일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밤 공수부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할 것입니다........하지만 영원히 패배하진 않을 것입니다. (p.32 상우형의 외신기자 인터뷰)
- 놈들이 오고 있다. 이 한마디가 귀에 콱 박혔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놈들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놈들은 탱크와 장갑차, 헬리콥터와 화염방사기까지 앞세우고 올 것이다. 놈들은 그냥 오는 게 아니다. 놈들이 지난간 자취마다 붉은 피가 흥건할 것이다. 우리는 놈들이 우리의 도시를 유린하지 못하게 하려고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계엄군이 아니다, 침략군이다. (p.46-47)
- 나는 민주화도 투쟁도 잘 모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으니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곁을 떠나서는 안된다는 것 뿐이다. 그것이 사랑에 대한 예의다. 내게 그것을 가르친 사람은 희순이다. (p. 67)
- 놈들이 온다. '오지 말아라. 하지만 온다면 피하진 않겠소,' 이것이 솔직한 마음이었다. (p.193)
- 하지만 인생은 비관하는 것만이, 포기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것 같다. 어둠 속의 한 가닥 희망의 빛줄기를 잡고 맹목적일망정 전진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나는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p.198)
- 나는 군인 하나를 겨냥하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손가락에 힘을 줘서 살짝만 당겨도 총알이 발사되고, 총알에 맞으면 사람이 죽는다. 사람이 죽는다는 무게감에 내 손가락은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p.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