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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1. 나의 리뷰
리뷰를 쓰려고 하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써야할지 막막하다.
처음 읽었을 땐 희미하게 느낌만 있었던 것 같은데
다시 읽으니 모든 부분에서 확실히 선명하게 다가온다.
꼼꼼히 읽은 덕분이기도 할거다.
역사와 정치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그런 시대적 배경에 큰 의미가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숱한 검색들로 체코와 그 시대를 조금 알게 되어 글을 읽었을땐 그런 시대적 배경은 말그대로 배경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배경이 있기에 이 소설이 존재하지만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의 수단으로 쓰였을 뿐이었단 생각이 든다.
밀란 쿤데라가 살아본 20세기 체코였기에 그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조선시대를 살았다면 그 배경으로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끌어 냈을 수도 있을 거라는 뜻이다.
많은 이야기들 중에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루드비크와 루치에의 첫만남에서부터 헤어질 때까지의 이야기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그들의 눈빛 하나, 동작하나, 감정하나하나까지 느낄 수 있었다.
직접 겪어보지 않고 이런 통찰과 표현이 가능하다는 걸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소설가는 애초에 타고나는 것이며 소설은 그런 소설가가 의해 쓰여지기에 책 하나에 우주를 담을 수도 있을 정도의 방대한 영역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문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소설가가 아니기에 이 책을 읽고 내가 직접 느낀 것조차도 제대로 표현해낼 수 없음이 답답하다.
사건마다 그것들에 대한 깨우침이 중간 중간 나온다. 작가의 통찰력에 한번씩 놀라고 나만의 해석도 해보게 되었지만 세세한 부분까지 얘기하려면 끝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이 소설 전체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만 책내용을 빌려 얘기해보고자 한다.
p.492 오늘날에도 벌써 역사는 잊힌 것들의 망망대해 위에 떠 있는 가느다란 기억의 밧줄일 따름이지만, 시간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이제 한정된 개개인의 기억 속에 모두 들어올 수조차 없는 또다른 수천 년의 세월이 이미 지나가 버리고 난 후인 시대가 다시 또 올 것이다.
......
이 사회의 모든 잘못과 오류들,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나를 소진시킨, 내가 그토록 고치고 시정하고 다시 바로잡아 보려 애썼으나 소용없었던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 이제 어떻게 돌이킬 도리가 없는 것이므로) 그 모든 잘못과 오류들과 더불어 그렇게 잊힐 것이었다.
그렇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사람들 대부분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 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
주인공 루드비크는 이것을 뒤늦게 깨우쳤기에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항하고 원망하고 복수를 결심했던 것일 것이다. 비단 소설 속 루드비크 뿐이겠는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모두 그것을 깨우치지 못하고 살고 있을 것이다. 만약 깨우쳐서 안다고 할지라도 막상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그 당시에 초연하게 받아들 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한참이 지나서 깨우친 루드비크처럼 우리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2. 저자 후기
다른 출판사의 저자 후기에 있는 글 참고하시라고 올려봅니다.
˝역사적 상황이 이 소설 본래의 테마는 아니다. 내게 있어 역사적 상황은 복수, 망각,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역사와 인간의 관계, 본래 행위의 소외, 섹스와 사랑의 분열 등 나를 매혹하는 실존의 주제를, 새롭게 극도로 날카로운 빛으로 내리쬘 때만이 의의가 있다. 60년대 후반의 문학 비평에 있어(당시 체코의 문학 비평은, 나중에 내가 국외에서 인정한 것처럼, 세계의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자세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그동안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중요한 문예잡지와 문학에 대한 진지한 에세이를 싣던 잡지가 모두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문화의 권위는 저널리즘이나 대중 매체의 권위에 길을 양보하고, 시사 문제의 위협적 요소는 문예 비평에까지 침투하고 말았다. 《농담》은 어디서나 평가의 대상은 되었으나(다름아닌 러시아의 전차에 짓밟힌 나라의 작가를 어찌 칭찬하지 않으리오!), 유일하게 뛰어난 클로드 루아의 비평을 제외하고는, 당시 《농담》에 대한 모든 비평은 천박한 정치적 코멘트나 서정적 절규에 불과했다.
......
오늘날 시사 문제를 반추하는 사람들은 이미 프라하의 봄과 러시아의 침공을 잊고 있다. 이 망각에 의해, 《농담》은 역설적으로 본연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장편소설이고, 장편소설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3. 다른 사람의 리뷰
공감가는 리뷰가 있어서 퍼왔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어찌 알고 다 써놨더라구요 ㅎㅎ
http://m.book.naver.com/todaybook/view.nhn?todayBookCond.seq=2478
(사진) 2년전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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