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평 집도 괜찮아! - ‘짐’이 아닌 ‘집’을 선택한 사람들
야도카리 지음, 박승희 옮김 / 즐거운상상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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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로베일하우스 카페에서 이 책을 알게 되어 읽었다.
마침 <조화로운 삶>이라는 책에 푹 빠져있을 때였는데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참 많았다. 스스로 집짓기, 자급자족, 공동체와의 나눔경제, 자본주의의 대항마적인 새로운 삶의 방식이 비슷하게 이어진다.
그들의 삶이 실감이 나지 않아 따라하기 두렵지만 저렇게 살면 어떤 기분을 가지고 살게 될 지 느껴보고 싶기도 하다. 자유로운 삶에 가까운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점점 더 편리함을 추구하는 사회에 길들여져 가고 있었다. 없으면 안될 것 같은 물건들을 사느라 돈은 점점 더 많이 필요하게 된다. 돈을 벌기 위해 살게 되는 삶으로 역전되었다. 분명히 옳지 않은 방식인데 바꾸기가 쉽지 않다. 모토야마 씨가 말하는 그야말로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그 용기가 없어 지금도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방법을 고민중이다. 이 책에 나온 사람들은 삶에 대해 더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들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 삶도, 이렇게 유지하고 있는 평범한 내 삶도 진지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자유로운 삶이라는 포부를 늘 가슴에 지니고 지금을 성실히 살아내어야 겠다. 내가 할일은 그거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대단한 용기를 낼 수 있는 날이 가까워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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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 철학과 과학을 넘나드는 사고력 강의
김재인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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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호모데우스>의 내용이 떠올랐다. 이 책이 철학적 관점에서 본 인공지능이라면, 호모데우스는 역사적 관점으로 본 인공지능이다.
호모데우스는 읽고 나서 불안하고 우울했는데 이 책은 나를 좀 더 안심시켜준다. 좀 더 인간적인 인공지능 얘기랄까?!
결론은 인간이 더 잘 할 수 있고, 앞으로 해야할 일은 창의성을 키우는 것과 예술이다. 저자는 우리 모두가 다 예술가가 되라는 얘기는 아니라고 하는데 나는 오리지널 예술이란 걸 더욱 더 해보고 싶어졌다. 예술이라고 하면 나는 미술이 가장 먼저 떠오르긴 하지만 기존에 없던 것을 창조한다면 다 예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수렴적 사고방식이 아닌 발산적 사고가 그 바탕이 되어줄 것이다. 지금 당장 뭘 어떻게 바꾸고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겠지만 이 책이 준 교훈을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겠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든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인 ‘우주 역사에 자유 의지는 없다‘에 대한 것이다. 호모데우스에도 나온 이야기인데 그때 이미 충격을 받았는데 조금 더 인간적인 이 책에서도 똑같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로 있게 된 이유는 나의 ‘자유 의지‘라고 생각해왔는데 그게 다 무너져버렸다. 사실 충격은 받았지만 바뀐 건 없다. 나는 여전히 내 자유의지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한다고 느끼고 있다. 근데 그게 아니라니 믿기지가 않을 뿐이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예술을 할 수 있을까? 과연 그게 예술이 맞는 걸까? 모르겠다. 그 부분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중요한 ‘마음‘에 대한 이야기. 마음이 어떻게 생기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저자도 그걸 모르기 때문에 인간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이 나타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읽은 게 맞다면.

쉽게 설명해주는 데도 이해안되는 문장이 여럿 있었다. 특히 몇 번을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원문들은 저자가 다시 설명해줘서야 알 듯 말듯했다. 그걸 읽고 해석을 하고 설명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저자가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밑줄 그은 것 중에 성격이 다른 여러 문장들이 많았지만 그 중 하나만 다시 첨부해보고 싶다.

실패란 처음에 의도한 목표와 내가 노력해 생겨난 결과가 어긋날 때, 목표에 이르지 못했을 때를 가리킵니다. 그 어긋남 때문에 사람들은 좌절하고 후회합니다. 후회는 결과에 비추어서 노력을 평가하려 할 때 생깁니다. 그때 그랬더라면,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거지요. 하지만 결과란 나의 노력과 우주의 조건이 어우러져서 생겨나는 법입니다. 내 노력이 바라던 결과를 낳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목표를 향한 노력이 원하는 결과를 낳지 않는 것이 세상에선 오히려 정상입니다. 차라리 실패가 정상 상태라고 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노력하는 순간에 집중해야 합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할 때, 그 결과와 상관없이 후회가 남지 않습니다. 후회란 노력에 대한 후회인데 노력의 순간에 더 할 수 없을 만큼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물론 노력과 결과를 분리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야 합니다.
노력은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무조건 수용하기, 그러고 나서 최선을 다한 또 다른 실험을 진행하기, 이런 것의 연속이어야 하고 이것이 삶이어야 한다는 게 니체가 명명한 운명애amor fati의 진짜 의미입니다. 삶의 경로와 결과가 모두 미리 정해져 있음을 받아들이는 숙명론‘과는 정반대입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할 바를 다하되 그 결과를 겸허하게 긍정하라 그렇게 살아갈 때만이, 그 삶의 끝에서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했노라" 하고 말을 맺으면서, "이것이 내 운명이고, 나는 내 운명을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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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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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동안 정유정의 <종의 기원>을 읽을 때가 생각났다. 악의 본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자가 과연 있을까? 그냥 소설일 뿐이다 라고 믿고 싶었던 때였다. 불과 1년전인데 이젠 그런 인간이 있을 수 있다고, 아니 분명히 있다고 믿게 되어버렸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내게 그걸 다시 확인시켜 주는 소설이 되었다.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인간은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이젠 그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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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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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이다. 전혀 모르던 작가였기에 그가 왜 노벨상을 받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클론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어느정도 예상을 하면서 읽어나갔다. 작가가 마치 진짜 클론, 캐시인 것마냥 캐시의 자서전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세한 묘사들이 압권이었다. 하지만 거의 모든 것을 자세히 묘사하느라 전개가 빠르지 않아 진력나기도 했다.

마지막에 캐시와 토미가 마담을 찾아가서 같이 있던 에밀리 선생님에게 모든 것을 말로 듣게 되었을 때는 허망하기도 했다. 에밀리 선생님이 말로서 책의 전체를 요약정리 해버린것 같아 앞의 내용이 있으나 없으나 크게 상관이 없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21세기인 현재 클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발달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이 소설의 배경이 1970~80년대라는 게 조금 의아하기도 하면서 어쩌면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 같다. 21세기 후반을 배경으로 했다면 그냥 있을 수도 있는 이야기라고 가볍게 여길 수도 있을텐데 과거라면 또 뭔가 다르게 다가온다. 작가의 의도가 무얼까 궁금해지는 것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그들이 클론이란 걸 모르고 읽었다면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거다. 실제로도 이 소설에서 클론의 영혼은 인간과 비슷하게 묘사된다. 알아채기 어려운 아주 미세한 차이만 있는 것 같다.

한번 읽어서는 작가의 의도를 잘 모르겠다. 나에게 크게 와닿는 것도 없는 것 같다. 사육이라는 단어가 조금 충격적이긴 했다. 캐시나 토미, 루스를 보며 나와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읽고 있는데 그들을 사육한다고 말할 때는 마치 나도 사육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소설에선 인간 대 클론으로 나누어지지만 현실에서는 인간 대 인간인데도 더한 취급을 받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작가는 그걸 의도한걸까? 모르겠다.
어려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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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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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리하고 왠지 세련된 문장이면서도 어렵지 않아서 술술 읽힌다.
동시대의 흔한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흥미롭다.
내가 겪고 있는 일상의 어떤 한가지 본질과 마주하는 듯한 느낌.
백지은 문학평론가의 해설을 읽고 알듯 말듯한 그 본질이 ‘관성‘이라는 두 글자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걸 깨닫고는 안그래도 공허한 삶이 더 공허하게 느껴졌고 내 삶에 ‘관성‘과 ‘공허‘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져버린 것 같았다.
앞으로도 그 글자를 지우고 살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이상하고 슬픈 현실을 직시하는 순간이었다.
직시하고 또 그렇게 살아갈 미래도 함께 어렴풋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렇게 살지는 않으리라는 다짐은 어째 일어나지 않는다.
발버둥쳐봤자 어차피 거길 거라는 체념이 더 크게 일어난다.

<우리안의 천사>를 다시 읽었다. 처음 읽을 땐 저들의 생각은 어리석다 생각했고 나라면 과연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해보며 읽었다. 남우가 그 6층에서 실은 아무 것도 안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해보았다. 추측이라기 보다는 바램이 더 맞을 지도 모르겠다. 다시 읽으니 확실해졌다. 남우는 그 일을 한거였다. 그리고 애완견 애니의 일과 관련된 앞부분의 문장들이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살리려는 의논은 크게 말할 수 있어도, 죽이려는 의논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애니는 나한테 유일한 가족이야. 지금 한 말, 안 들은 걸로 할게.‘
‘강아지의 목숨과 내 목숨을 동일한 저울에 달아놓고 측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안의 천사>와 <밤의 대관람차>에는 조금 다른 관성의 법칙이 존재한다. 전자가 두렵지만 바라기도 하는 극적인 파국이 당도하기 전의 수동적 관성이라면 후자는 변화를 바라지 않는 자발적 관성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관성과 변화. 반대되는 의미의 단어가 우리 삶 속에 공존하고 있다.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에는 관성의 법칙이 더 지배적이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다른 이유보다 그게 더 쉽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내가 잠시 한눈을 팔아도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죄가 또 유예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하고 절망했다. 극적인 파국이 닥치면, 속죄와 구원도 머지않을 텐데. 또다시 살아가기 위하여 나는 바다 쪽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결정의 순간에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방식으로 결정해버리고, 전 생애에 걸쳐 그 결정을 지키며 사는 일이 자신이 자초한 삶의 방식이라고 양은 탄식했다......
남편이 잠든 81제곱미터 아파트의 현관문을 열고 나서면서 양은 자신의 몸이 25년의 관성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느꼈다.

대화가 없어도, 음악이 없어도, 라디오 소리가 없어도, 사랑이 없어도, 세상 모든 소리와 빛이 사그라진 곳에서도 어색하지 않은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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