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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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리하고 왠지 세련된 문장이면서도 어렵지 않아서 술술 읽힌다.
동시대의 흔한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흥미롭다.
내가 겪고 있는 일상의 어떤 한가지 본질과 마주하는 듯한 느낌.
백지은 문학평론가의 해설을 읽고 알듯 말듯한 그 본질이 ‘관성‘이라는 두 글자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걸 깨닫고는 안그래도 공허한 삶이 더 공허하게 느껴졌고 내 삶에 ‘관성‘과 ‘공허‘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져버린 것 같았다.
앞으로도 그 글자를 지우고 살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이상하고 슬픈 현실을 직시하는 순간이었다.
직시하고 또 그렇게 살아갈 미래도 함께 어렴풋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렇게 살지는 않으리라는 다짐은 어째 일어나지 않는다.
발버둥쳐봤자 어차피 거길 거라는 체념이 더 크게 일어난다.

<우리안의 천사>를 다시 읽었다. 처음 읽을 땐 저들의 생각은 어리석다 생각했고 나라면 과연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해보며 읽었다. 남우가 그 6층에서 실은 아무 것도 안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해보았다. 추측이라기 보다는 바램이 더 맞을 지도 모르겠다. 다시 읽으니 확실해졌다. 남우는 그 일을 한거였다. 그리고 애완견 애니의 일과 관련된 앞부분의 문장들이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살리려는 의논은 크게 말할 수 있어도, 죽이려는 의논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애니는 나한테 유일한 가족이야. 지금 한 말, 안 들은 걸로 할게.‘
‘강아지의 목숨과 내 목숨을 동일한 저울에 달아놓고 측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안의 천사>와 <밤의 대관람차>에는 조금 다른 관성의 법칙이 존재한다. 전자가 두렵지만 바라기도 하는 극적인 파국이 당도하기 전의 수동적 관성이라면 후자는 변화를 바라지 않는 자발적 관성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관성과 변화. 반대되는 의미의 단어가 우리 삶 속에 공존하고 있다.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에는 관성의 법칙이 더 지배적이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다른 이유보다 그게 더 쉽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내가 잠시 한눈을 팔아도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죄가 또 유예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하고 절망했다. 극적인 파국이 닥치면, 속죄와 구원도 머지않을 텐데. 또다시 살아가기 위하여 나는 바다 쪽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결정의 순간에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방식으로 결정해버리고, 전 생애에 걸쳐 그 결정을 지키며 사는 일이 자신이 자초한 삶의 방식이라고 양은 탄식했다......
남편이 잠든 81제곱미터 아파트의 현관문을 열고 나서면서 양은 자신의 몸이 25년의 관성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느꼈다.

대화가 없어도, 음악이 없어도, 라디오 소리가 없어도, 사랑이 없어도, 세상 모든 소리와 빛이 사그라진 곳에서도 어색하지 않은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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