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자서 - 큰 인물을 키워낸 부모들의 자녀교육법
샤오춘셩 지음, 임대근 옮김 / 예담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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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동서양의 다양한 역사적인 인물들이 자녀의 재능을 키워주며 바른 인격의 소유자로 길러낸 그들의 자녀교육철학을 재미있는 일화를 통해 들려준다. 책에는 맹모삼천지교로 유명한 맹자의 어머니 장씨로부터 레닌의 어머니 마리아, 아인슈타인의 삼촌 야곱,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 등 다소 낯선 인물들의 교육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지은이는 각 일화를 소개하면서 오늘 현대의 부모들이 어떻게 그들의 교육철학을 자녀교육에 창조적으로 적용할 것인가를 설명해주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옛사람들이 교육의 목표를 단지 출세의 방편이나 기능의 계발에 두지 않고 우선 사람됨의 도리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정직과 진실, 성실과 인내 같은 인격의 연마를 공부의 목표로 제시하였다.

"네가 집안의 열여덟 항아리의 물을 다 쓰면 자연스럽게 글씨 쓰는 기교와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왕희지체로 유명한 진나라의 서예가 왕희지가 서예를 배우는 아들 헌지에게 가르친 말이다. 성실과 인내로써 기초실력을 연마하다보면 어느덧 능숙한 기교를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정직한 인간으로 교육하기 위해 돼지를 잡은 증자의 이야기는 가족끼리도 종종 식언을 일삼는 현대인들에게 깊은 감동과 깨우침을 준다. 하루는 증자의 아내가 시장을 가는데 어린 아들이 울면서 따라오자 증자의 처가 우는 아들을 달래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울지 말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돌아와서 돼지를 잡아서 볶아주마" 어린 아들은 이 말에 울음을 그쳤고 엄마를 쫓아가지 않고 집에서 기다렸다. 증자의 처가 시장에서 돌아와자 증자가 돼지를 잡기 위해 새끼로 돼지를 묶고 있었다. 이를 보고 놀란 증자의 처가 증자를 말리며 "아까 한 말은 단지 아이를 달래기 위해서 한 말이지 진짜 돼지를 잡겠다는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증자는 이렇게 말했다. " 아이를 속이면 안된다는 걸 알아야하오. 당신이 아이를 속이는 것은 아이더러 ㅁ남에게 거짓말을 하고 남을 속이며 살라고 가르치는 것과 다름 없소. 당신이 이렇게 아이를 속이면, 어머니의 말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앞으로 당신이 무슨 말을 하던 듣지 않을 것이요. 그러면 아이를 교육하는 것은 어려워지고 말것이오. 그러니 돼지를 잡겠소? 아니 잡겠소?" 증자의 처는 남편의 이 말을 옳게 여겨 함께 돼지를 잡아서 약속대로 고기를 볶아서 아들을 먹였다. "사람의 말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 단순한 진리 하나를 가르치기 위해 증자는 돼지 한 마리를 서슴없이 잡은 것이다.

자녀교육과 학교교육이 아이들에게 참사람됨의 도리를 가르치기 보다는 진학과 취업, 출세의 방편으로 여겨지는 오늘의 세태에 이 책은 참교육이 무엇인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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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 새 시대를 열어간 사람들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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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간에게 운명이란 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한다면 과연 운명이란 무엇일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져서 삶 전체의 테두리를 결정하는 것, 예를 들면 남자로 태어나느냐 여자로 태어나느냐 혹은 18세기 조선시대에 태어나느냐 21세기 대한민국사회에 태어나느냐 등과 같이 전혀 자기의지와 관계없이 주어진 삶의 결정요소들, 일방적으로 주어졌을 뿐 개인의 의지와 힘으로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 없는 삶의 테두리를 결정하는 요소들,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마치 권투선수가 링에 오르면 사각의 링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무구한 세월 속에서 어느 시기 잠시 무대에 올랐다가 내려가야 하는 개개의 인간이 운신할 수 있는 삶의 폭과 너비는 본인의 뜻과는 무관하게 이미 테두리 지어져 있다. 그것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정약용은 "인생의 화와 복이란 정말로 운명에 정해져 있지 않다고 누가 말하겠는가?"라고 다소 체념 어린 어조로 자신의 비운의 삶을 자조했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죽음과 유배로 몰아넣은 그들의 운명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그런 생각을 하였다. 역사에 만약이란 상상은 부질없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만약의 경우를 상상해보는 것은 불행한 역사의 아픔이 그만큼 절절하기 때문이다. 만약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 18세기 조선사회가 아니라 21세기 대한민국에 태어났더라면 그들의 창의성과 합리적 실용주의는 어떻게 꽃피웠을까? 만약 그들이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계열이 아니라 집권노론계열의 학자였다면 그들의 정치적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만약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 천주교와 무관했다면? 만약 정약용을 그토록 신뢰하고 요직에 등용코자했던 정조가 의문의 죽임을 당하지 않고 오래도록 권좌에 머물렀더라면? 만약 그랬다면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정약용의 부계 쪽은 선조 8명이 대대로 홍문관관리를 지낼 만큼 뛰어난 학자집안이었지만 노론천하의 세상에서 권력의 중심과는 거리가 멀었던 남인계열의 집안이었고 모계 윤씨 부인 쪽은 노론의 영수 송시열과 맞섰던 남인 영수 윤선도의 피가 흐르는 집안이었다. 양쪽 다 집권 노론의 칼끝이 겨누고 있는 남인집안이었다는 것이 정약용의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였다. 정조는 정약용 같은 능력 있는 남인을 등용함으로써 노론 일당독재의 조정을 개혁하고 정치를 일신하고자 했다. 때문에 정조는 끊임없이 정약용을 권력의 핵심에 등용코자 하였고 바로 그 때문에 정약용은 노론의 집중적인 견제와 박해의 표적이 되었다. 노론도 정약용의 뛰어난 학식과 정무적인 능력은 높이 샀다. 그러나 노론에게 그는 정적일 뿐이었다. 이점이 정약용의 비극이요 당심에 사로 잡혀 인재를 활용할 기회를 스스로 잃어버린 조선후기사회의 비극이었다.

정약용의 두 번째 운명의 굴레는 바로 천주교다. 맏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은 조선천주교회 창설의 산파요, 막내형 정약종은 조선 최초의 교리서 주교요지를 쓸 만큼 천주교에 정통한 학자요, 천주교 교리에 따라 제사를 폐한다며 부모의 신주를 불태워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진산사건의 당사자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가쪽 육촌형제였다. 천주교박해상황을 청나라에 알려 외세의 힘을 빌어 박해아래 있던 조선 천주교를 구원코자 했던 이른바 백서사건의 당사자 황사영은 정약용의 조카사위였다. 큰형 약현의 딸 명련의 남편이 황사영이다. 유학을 국가의 근본으로 하는 조선사회에서 천주교는 곧 국가와 사회의 정체성을 뿌리부터 흔드는 사교요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곧 척결해야 할 패역무도한 무리일 뿐이다. 정약용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드리워진 천주교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썼다. 그는 정조가 동부승지를 제수하였을 때 자신이 천주교와 무관한 사람임을 천명하기 위해 일명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상소문>을 지어 올렸는데 거기서 그는 천주교에 잠시나마 관심을 가졌던 것은 마치 어리석은 아이의 장난과 같은 것이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신의 경우는 당초에 서학에 물든 자취는 아이의 장난과 같았는데 지식이 자라자 문득 적수수로 여기고, 분명히 알게 되어서는 더욱 엄하게 배척하였고, 이미 늦게나마 깨우치고서는 더욱 더 심하게 미워했었으니, 얼굴과 심장을 헤치고 보아도 진실로 가린 것이 없고, 구곡간장을 더듬어 보아도 진실로 남은 찌꺼기가 없는데, 위로는 군부(군부)에게 의심받고 아래로는 당세에 견책을 당하였으니, 입신(立身)을 한번 잘못함으로써 만사가 와해되었습니다. 산들 무엇하며 죽은들 장차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러나 정약용의 이런 양심고백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정조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열한 살의 순조를 대신해 섭정하게 된 정순왕후와 노론은 천주교를 빌미로 정적인 남인세력을 대거 죽이거나 유배 보냄으로써 조정에서 씨를 말리려 들었다. 정약종이 서수문밖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황사영은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리고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각각 길고 긴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이후 18년의 유배생활을 하면서 정약용은 1표2서를 비롯 수백 권의 책을 저술하였고 현실정치에서 미처 피우지 못한 정치가로서의 꿈과 비전을 고스란히 책으로 남겼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이런 것일까? 정치가로서의 정약용의 좌절과 비운이 사상가로서의 정약용을 역사 위에 살려놓았다. 정약용은 말했다. "인생의 화와 복이란 정말로 운명에 정해져 있지 않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유배지의 초당이 위대한 사상의 요람이 된 것을 정약용은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였을까? 운명이란 것이 이런 것이라면 과연 인생의 화복은 어디까지가 화이고 어디부터가 복인가? 만약이라는 가정이 부질없는 줄은 알지만 정약용이 현실정치가로서도 성공했었다면 조선후기사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조선사회의 개혁을 꿈꾸었던 정조와 실용과 합리의 정신으로 정조의 꿈을 현실에 옮기려했던 정약용의 몰락이 곧 조선사회의 몰락을 재촉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좌절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역사는 때때로 정말 좋은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아까운 인재를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 댓가는 너무도 무거운 짐으로 되돌아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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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뒤흔든 발굴
이종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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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헤리슨 포드의 직업은 무엇일까? 고고학자다. 하지만 영화속 헤리슨 포드의 모습은 학자라기 보다는 용감하고 싸움 잘하는 탐험가의 모습으로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다. 고고학자는 우리에게 학자의 이미지 보다는 신비에 싸인 미지의 고대세계를 탐험하는 모험심 강한 탐험가의 이미지로 더 친숙하다. 그러나 고고학자의 그런 와일드한 모습 뒤에는 고대언어와 역사에 대한 학자로서의 치열한 연구가 감추어져 있다. <세계사를 뒤흔든 발굴>은 학문적 지식과 낭만적 열정을 함께 갖춘 고고학자들이 한 때 신화나 전설로만 여겨지던 이야기들의 실재를 밝히기 위해 고대 미지의 세계에 던진 과감한 도전과 그 성과, 그 과정에서 그들이 맛본 희열에 관한 책이다.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고대 유물과 유적의 발굴에 깊이 매료된 저자는 나름의 판단으로 세계의 주목을 고고학적 발굴로 다음 10가지를 들고 있다.

1. 터키 할리카르나소스에 있는 마우솔로스왕의 무덤. 마우솔레움
  카리아 왕국의 왕 마우솔로스가 자신의 무덤으로 만든 것으로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제외하면 고대 무덤건축물로서는 최대규모의 것으로 마우솔레움이라는 말이 무덤건축물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쓰일 만큼 웅장한 건축물이었으나 중세 십자군전쟁과 오스만터키제국에 의해 비잔틴제국이 함락되면서 철저하게 파괴되고 해체되어 버렸다. 1857년 영국공사 찰스 뉴턴 공에 의해 발굴되어 그 흔적이나마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2. 터키 에페수스에 있는 아르테미스신전
 아르테미스는 그리스신화에서 달의 여신이다. 에페수스에 있는 아르테미스여신의 전은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신전의 네 배가 넘는 규모의 어마 어마한 규모였다. 성서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에베소(에페수스)에서 복음을 전할 때 아데미(아르테미스)신상을 깎아 팔아 큰돈을 벌던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바울이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하니 바울을 그냥 두어서는 자신들의 영업에 지장에 있고 여신의 신전도 업신여김을 당할 우려가 있다고 선동하니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분노하여 아르테미스여신을 연호 하는 장면이 나온다.(사도행전 19:23-41) 에페수스인들의 자존심이었던 이 신전은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한 로마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에 의해 서기 401년 파괴되었다. 1863년 영국의 건축가 존 터틀 우드가 신전의 터를 발굴하여 그 웅장한 규모를 알 수 있게 되었다. 

3. 터키 히사를리크에 있는 트로이 유적
브레드 피트가 멋진 갈색머리를 휘날리며 나왔던 영화 트로이의 무대는 어디였을까? 트로이목마로 유명한 그리스와 트로이와의 전쟁 무대를 찾아내어 트로이의 목마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은 모든 고고학자들의 꿈이었다. 이 꿈을 이룬 사람은 독일의 하인리히 슐리만이라는 거상(巨商)이다. 일곱 살 때 크리스마스선물로 받은 책에서 트로이목마 이야기를 읽고 훗날 그 역사적 실재여부를 확인해보겠노라는 꿈을 가졌던 소년은 훗날 거상이 되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다음 어린 시절의 꿈을 현실로 옮기게 되었다. 1873년 터키의 히사클리크언덕에서 그는 마침내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궁전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발굴하는데 성공하였고 8750개에 달하는 유물을 발굴하였다. 하지만 그가 발굴한 유적과 유물은 시기적으로 트로이전쟁보다 천년이나 앞선 시대의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긴 하지만 트로이의 무대를 정확히 짚어냄으로써 트로이전쟁이 역사상 실재하였던 사실(史實)이라는 것을 입증한 것은 슐리만의 공로임에 분명하다.  

4. 지중해에 있는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궁전
<9천년전 고도의 발달한 문명을 자랑하던 도시국가가 있었는데 어느 날, 엄청난 지진과 해일로 인해 하루아침에 바다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국가를 아틀란티스라고 부른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그의 책 <대화록>에서 동시대 정치인 솔론이 이집트사제에게서 전해들은 말이다.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고문명의 도시국가! 아틀란티스!! 수많은 탐험가와 고고학자들이 아틀란티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애를 썼다. 영국인 에번스는 <일리아드>에 나오는 크레타 섬에 대한 묘사가 고도로 발달한 문명에 대한 묘사임을 주목하고 지중해의 섬 크레타 섬의 발굴에 나섰다. 그의 예상은 적중하여 크레타 섬에서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고대 미노스문명의 중심인 크레타왕국의 크노소스궁전을 발굴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 왕궁이 거대한 화산폭발과 그로 인한 지진과 해일로 일순간에 멸망해버린 사실도 밝혀 내었다. 논란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크레타 섬과 혹은 그 옆의 화산섬 산토리니섬 어딘가에 아틀란티스가 묻혀있다고 믿고 있다. 

5. 이라크 니네베에서 발굴한 수메르점토판
1852년 영국인 오스틴 헨리 레어드는 고대 아시리아제국의 강력한 왕이었던 센나케리브왕의 왕궁이 있던 니네베에서 도서관을 발굴하였고 그 속에서 쐐기문자가 새겨진 수천 점의 점토판이 발견되었다. 이 점토판을 통해서 성서의 노아 홍수 이야기의 원형에 해당하는 길가메쉬서사시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메소포타미아문명의 시원(始原)이 수메르문명이었다는 것도 밝혀지게 되었다. 대홍수로 인한 전지구적 멸망이라는 성서의 기록이 단순한 신화나 허구로 가득찬 전설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엄청난 사건이었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놀라운 발굴이었다.

6. 터키의 보가즈쾨이에서 발굴한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평화조약기록점토판
기원전 1259년 이집트 람세스2세와 히타이트제국의 하투실리3세가 맺은 평화조약이 점토판에 기록되어 1906년 독일인 휴고 벤클러에 의해 터키의 보가즈쾨이에서 발굴되었다. 그리고 동일한 내용이 이집트의 카르나크신전 벽에서도 발견되었다. 한 때 이집트와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겨룰 정도로 막강한 제국을 이루어 700년 동안 영화를 누렸지만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던 히타이트제국이 이집트와의 평화협정조약문이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된 것이다.

7. 이스라엘의 쿰란에서 발굴한 사해문서
1947년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의 사해근처 쿰란의 동굴에서 어느 양치기 소년에 의해 우연히 두루마리 뭉치가 항아리에 담긴 채 대량 발견되었다. 훗날 사해문서라고 불리게 된 이 두루마리는 학자들의 연구 결과 최소 기원전 100년 이전의 것으로 유대교의 한 종파였던 에쎄네파가 성서를 필사한 것임을 밝혀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성서가 발견된 것이다. 종래 전해져 오는 구약성서의 어떤 필사본보다 최소 천년을 앞서는 것으로 구약성서의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받으면서 이 두루마리는 학계의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이들 문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구세주는 성서의 예수처럼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고 다시 부활하여 세계를 구원하는 인물로 나오는데 문제는 이들 두루마리 성서의 작성시기가 시기적으로 성서의 예수보다 최소 150년은 앞선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세상에 나기도 훨씬 전에 십자가죽음을 당하고 부활한 그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사해문서가 기록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구세주는 과연 누구였는가? 사해문서의 발굴로 이 골치 아픈 문제를 성서학계는 떠 안게 되었다.

8. 우크라이나에 있는 스키타이유적
흑해 위쪽 지금의 우크라이나 초원지대를 지배했던 스키타이민족은 유목기마민족이다. 빠른 기동력을 무기로 삼은 그들은 기원전 513년 당시 최고의 강국이었던 페르시아와 전쟁을 할 만큼 무시 못할 존재였다. 스키타이의 유적과 유물은 주로 쿠르간(봉분)의 발굴을 통해 빛을 보게 되었다. 왕의 무덤은 순장(殉葬)의 풍습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고 장신구를 비롯 온갖 무기와 제기(祭器), 심지어 일상용품과 마구(馬具)까지도 황금으로 장식한 것으로 보아 황금이 풍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9. 중국 시안의 진시황 병마총
1974년 중국의 산시성 시안에서 발굴된 진시황제의 능은 고대 권력의 힘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황제의 능에서 1km 떨어진 곳에서 병마용릉이 발굴되었는데 6천명이 넘는 군사들과 말 500필, 전차 130대가 실물크기의 인형으로 제작되어 지하의 시황제를 보위하고 있는 것이다. 바깥 성곽의 길이만 12km에 달하고 묘역 자체넓이만 60만평이나 되는 진시황릉은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무덤건축물이다.

10.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대짐바브웨
아프리카 동남부의 로디지아라는 곳에 아프리카인이 만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거대한 석탑과 신전, 그리고 거주지의 흔적이 있다는 소문은 그곳이 어쩌면 성경에 나오는 황금의 나라,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금을 가져왔다는 오빌 일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호기심으로 고고학자와 고고학자를 가장한 도적 떼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독일의 지질학자 칼 마우크가 결국 아프리카 남부 잠베지강과 오렌지강 사이에서 그 유적을 발굴하였는데 학자들의 연구 결과 이 유적은 15세기 아프리카의 모노모타파제국이 건설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백인이 흑인을 지배하는 짐바브웨(짐바브웨유적을 발견해서 나라이름이 짐바브웨)의 현실정치는 대짐바브웨유적의 아프리카 기원설을 정치적으로 부정하고 유럽인에 의한 건설임을 내세워 흑인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려고 했지만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책은 고고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하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깊은 학문적 천착을 해 들어가는 책은 아니지만 각 유적의 발굴에 대한 간략한 약사(略史)와 함께 유적의 배경이 되는 역사를 소개해 줌으로써 유적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저자가 서양에서 유학하다가 서양의 박물관을 통해서 고대유물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까닭에 10가지 유적지 선정이 서양에 치우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겠다. 게다가 아직까지는 고대사에 대한 고고학적 관심과 연구가 서양이 앞서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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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창세기 - 1.2권 합본
데이비드 롤 지음, 김석희 옮김 / 해냄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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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국의 고고학자 데이비드 롤의 <문명의 창세기>는 그의 전작 <시간의 풍상>에 이어 구약성서 창세기의 역사적 사실성을 방대한 고고학적 발굴과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문명의 문헌기록에 대한 치밀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입증해 보이는 야심에 찬 책이다. 내가 이 책을 야심 차다고 하는 것은 성서학 내부에서도 이미 오래 전부터 창세기 1-11장까지는 이른바 역사이전의 시대, 원역사, 혹은 선사시대라고 분류해놓았기 때문이다. 역사이전의 시대라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인가? 그것은 역사적 실재(實在) 여부를 따질 수 있는 학문적 대상의 범위를 벗어난 시대라는 뜻인데 사실 그 말은 역사적 실재를 확실하게 입증할만한 역사적 유물의 부재, 혹은 그것에 대한 무지를 감추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도대체 역사 이전의 역사라는 게 말이 되는가? 어디까지가 역사 이전이고 어디서부터가 역사인가? 저자는 그동안 성서학과 역사학이 창세기의 1-11장에 대해선 원역사시대라는 딱지를 붙여놓고 그 역사적 실재성을 탐구하려는 학문적 접근 대신에 오직 믿음이라는 관문을 통해서만 접근할 것을 암묵적으로 동의해왔다고 비판하고 이는 학문적인 무사안일주의라고 일침을 놓았다. 그리고 그는 시간의 안개 속에 가려진 창세기의 역사적 실체의 복원에 야심에 찬 삽을 뜨고 있다. 저자는 이렇게 시간의 안개를 헤치고 1권에서는 창세기의 낙원 에덴동산의 위치를 찾아, 노아의 홍수와 바벨탑의 역사적 실체를 찾아 문명이 동터오던 창세(創世)의 시간으로 떠난다. 그리고 2권에서는 고대 이집트문명의 기원이 메소포타미아의 땅에 일찍이 선진문명을 일구었던 수메르 문명이었음을 밝혀내고 수메르문명의 뿌리에 노아 홍수 이후 시날(쉬나르-수메르)땅에 정착해서 도시문명을 일군 노아의 후손 셈의 자손들이 있음을 밝혀내고 있다. 수메르문명에서 발견되는 지구라트(계단식 신전)는 산악지대였던 에덴을 떠나 평야지대로 내려온 아담의 후예들의 신전이요 창세기 11장의 바벨탑은 이 지구라트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1. 에덴동산은 어디에 있었나?
저자는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에덴동산에 대한 지리적 정보를 바탕으로 에덴의 실제 위치를 추적한다. 네 개의 강(피숀, 기혼, 히데겔, 페라트)의 기원이 되는 강이 흐르며 온갖 나무와 식물이 풍성한 그 곳은 어디인가? 고대지명과 지리적 특성에 대한 연구 결과 성서의 에덴은 오늘날 이란의 북서부에 있는 아드지 차이(옛 이름 메이단) 골짜기라는 것을 밝혀내었다.

2. 노아의 홍수는 역사적 사실인가?
수메르문명의 고대도시 우루크의 왕이었던 길가메쉬의 영웅담을 그린 길가메쉬서사시에는 성서의 홍수 이야기를 떠올리는 홍수이야기가 나온다. 이야기 속에서 길가메쉬는 영생의 길을 찾기 위해 대홍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신들에 의해 영생을 얻고 신처럼 영생을 얻은 우트나피쉬팀(수메르어는 지우수드라)이라는 영생자를 찾아 나선다. 에아는 홍수로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신들의 모의를 우트나피쉬팀에게 누설하고 우트나피쉬팀은 에아신의 권유대로  방주를 지어 대홍수에서 살아남았다. 결국 이 사건은 수메르문명에 대한 발굴 결과 기원전 3000년경 고대 중동지역에 토기와 문자가 출현하기 직전에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시의 고대문헌들이 한결같이 대홍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인류에게 엄청난 재앙과 충격을 안겨 주었을 이 대홍수 사건은 수메르인의 서사시 길가메쉬서사시에 기록되었고 이것은 다시 고대 바빌로니아의 아트라하시스 서사시로, 히브리문명의 노아 홍수 이야기로 전해지게 되었다. 

3.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문명을 일으킨 자들은 누구인가?
저자는 나일강의 압바드 와디와 함마마트 와디에 대한 발굴을 토대로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문명을 일으킨 장본인은 당시 이미 선진적인 도시문명을 이루고 페르시아만을 사이에 두고 이집트 동북부지역과 활발한 해상무역을 펼쳤던 수메르인들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와디의 암각화는 수메르인들이 역청을 칠한 갈대배를 타고 페르시아만을 건너와 나일강을 거슬러 이집트의 북부지역으로 올라갔음을 보여 주고 있다. 암각화에 새겨진 배의 모양은 전체적으로 네모나고 이물과 고물이 높으며 뱃머리에 동물의 뿔의 형상을 올린 것으로 당시 수메르인들이 제조한 배의 양식과 동일하다. 이런 모양의 배를 사람들이 끌고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모양이 나일강의 와디 암각화에 새겨져 있는 것은 수메르인들이 페르시아만을 타고 건너온 배를 나일강까지 운반하기 위해 배를 끌고 사막을 횡단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바로 이들이 고대 이집트 선왕조 시대 위대한 파라오문명을 일으킨 지배엘리트 집단이라고 본다. 이집트는 바로 이 시기 갑작스런 문명의 도약을 이루게 되는데 이전에 볼 수 없던 원통형 인장이라든가, 상형문자의 출현, 그리고 흙벽돌건축물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들 모두는 수메르문명에서 시기적으로 앞서 출현한 것들이다. 에덴에서 놋땅으로, 다시 시날 땅으로, 산악지대에서 메소포타미아의 기름진 평야지대로 내려온 아담의 후손들이 우루크와 같은 도시국가건설을 통해 위대한 수메르문명을 만들고 그들이 바다를 건너 이집트로 건너가 토착종족과의 전쟁을 통해 지배권을 확립하고 위대한 피라오문명을 이룩한 셈이다.

저자는 창세기가 신화의 옷을 입고 있는 듯 하나 그 옷 속에는 우리가 이제껏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진정한 역사가 숨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문명에 대한 발굴을 통해서 성서 창세기의 이른바 원역사시대의 이야기가 단순히 설화나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대인의 진실한 기록이었음을 알 게 해준다.
나는 이 책이 성서를 맹목적 신앙의 눈으로만 보는 이에게는 성서의 역사적 진실에 눈뜨는 감격적인 경험을 안겨주고, 성서를 소설책 정도로만 여기는 이에게는 성서의 한 줄 한 줄에 담겨 있는 수천년 역사의 무게와 숨결을 느끼게 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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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풍상 - 성서의 새 연대기를 찾아 떠난 고대 이집트 탐험
데이비드 롤 외 지음 / 해냄 / 2003년 4월
평점 :
절판


구약성서의 사건들은 역사적 사실일까? 아니면 이스라엘민족의 신앙이 만들어낸 허구의 드라마일까? 나폴레옹의 이집트원정으로 촉발된 고대 이집트의 역사와 유물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는 구약성서의 사건들을 고대 이집트의 역사적 문헌과 유물 속에서 그 흔적을 찾음으로써 성서의 역사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이웃한 나라일 뿐 아니라 구약성서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많은 관계를 맺어왔으므로 고대 이집트의 역사적 유물 속에는 반드시 동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흔적이 남아 있으리라는 생각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당초 고고학자들의 기대와 달리 구약성서가 전하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건들은 역사적 사실로 입증할만한 유물이나 문헌이 동시대 이집트의 역사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이것은 성서의 역사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고고학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었고 애초 그들의 의도와는 반대로 도리어 성서의 역사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저자 데이비드 롤은 여기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 문제는 곧 시간표의 문제였다. 구약성서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난 시대와 동일한 시대는 이집트 역사에서 언제에 해당하는가? 이스라엘의 역사적 시간표와 고대 이집트의 역사적 시간표(이집트연표)가 만약 서로 동시대끼리 맞물리지 않고 어긋나 있다면? 그러면 결과는 뻔하다. A시점에서 일어난 구약성서의 사건을 엉뚱하게도 B시점의 이집트 역사에서 찾는 셈이 된다. 이렇게 되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시대착오적인 결과들이 나오게 된다.
예를 들면 여리고성의 발굴이 대표적이다. 그동안의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땅을 정복해 들어가기 시작한 때는 이집트 19왕조 말엽 즉 후기 청동기시대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여리고 유적을 발굴해 보니 과연 무너진 성벽은 나왔으나 그 축성 시기가 여호수아 시대보다 1천년이나 앞선 초기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후기 청동기 시대의 지층에선 성벽의 존재 자체가 아예 발견되지 않았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정복하였다는 이집트 19왕조 말엽 즉 후기 청동기시대에는 여리고성은 이미 폐허가 된 채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 폐허가 된 성을 여호수아는 무슨 재주로 무너뜨리고 정복하였다는 것일까?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저자는 이런 시대착오적인 결과가 나오는 것은 근본적으로 고대 이집트의 연표와 성서의 역사적 시간표를 잘못 짝맞추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여리고성 유적을 자세히 발굴해 본 결과 중기 청동기시대의 지층에서 성벽이 무너져 비탈을 메운 흔적을 발견하였고 성안 주택과 건물들이 모두 화재에 불탄 듯 검게 그을러져 있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점령한 뒤 성안 모든 것을 불로 태워 소각해 버렸다는 성서의 증언과 일치한다. 즉 성서의 여리고성 점령사건을 후기 청동기시대에 일어난 일로 보면 시간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되지만 중기청동기시대에 일어난 일로 보면 성서의 증언과 일치하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여리고 유적이 보여준다는 것이다.

문제는 잘못된 시간표다. 저자는 구약성서의 사건을 증명할 유적을 찾는 고고학자들의 노력이 장소는 제대로 찾았지만 시대를 잘못 헛집었다고 말한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여기엔 고대 이집트역사연구와 유물발굴의 선구자들이 이집트연표를 작성할 때 중대한 착오가 있었음을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역사의 접점을 찾던 그들은 성서에서 두 군데 구절을 주목하였다. 하나는 이집트의 파라오의 학대 아래서 이스라엘이 라암셋을 건설하였다는 것이고(출1:7-11) 다른 하나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이집트의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쳐들어와 솔로몬 궁정의 온갖 보화를 다 쓸어갔다는 대목이다(역대하 12:9) 고고학자들은 여기에서 이스라엘이 노예로 라암셋(람세스의 영지)를 건설할 때의 이집트 왕을 람세스2세로 보고 그 시기를 기원전 13세기로 보았다. 또한 르호보암시대 예루살렘을 점령한 시삭은 가나안북부지방을 점령한 것으로 알려진 쇼셍크1세로 보았다. 쇼셍크1세의 점령지를 기록한 부조에 새겨진 유다왕국이라는 기록이 이를 강력히 뒷받침하였다. 그 결과 시삭왕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시기는 기원전 10세기(BC925) 쇼셍크1세 치세기간으로 확정되었다. 이 두 가지 접점을 축으로 이스라엘과 고대 이집트의 역사적 시간표가 짜 맞추어졌다.
  저자는 여기에서 문제가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저자의 연구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노예로서 라암셋을 건설 할 때의 이집트 파라오는 람세스2세가 아니라 아멘호테프1세이고 예루살렘을 약탈한 시삭은 다름 아닌 람세스2세이다. 줄잡아 300년 정도의 시차가 생긴다. 저자는 이렇듯 솔로몬 시대의 유적도 BC 1000년 이후 철기시대에서 찾으면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지만 그 보다 앞선 BC 1300년 경 후기 청동기시대의 지층을 발굴하면 당대의 화려하고 국제적인 성격의 유물을 발견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집트주변의 도시국가들의 통치자들과 이집트의 파라오간에 오간 공식 서간을 기록한 아마르나의 점토판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실존인물이었으며 그의 생전 이름은 위대한 사자(Great Lion)라는 뜻의 라바유였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공개된다. <다윗은 시편 57:4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의 부하들을 가리켜 ‘사람을 잡아먹는 사자들’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사울이 파라오에게 보낸 서신에서 우리는 떠돌이 하비루(히브리)의 우두머리 다윗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고 아들이 하비루와 어울리는 것을 심히 걱정하는 사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성서에서 사울은 아들 요나단이 다윗과 우정을 나누는 것에 대해 격분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준다.(삼상20:30-31)
모세시대는 그동안 알려져왔듯 이집트19왕조의 세티1세-람세스2세-메렌프타 시기(BC 1294 ~ 1203)가 아니라 이보다 훨씬 앞선 13왕조의 소베크호테프4세~투티모세3세에 이르는 시기(BC 1529 ~ 1425)이며 출애굽시 이스라엘이 집단거주하였던 성서의 고센지역을 발굴한 결과 발견유골의 65%가 생후 18개월 미만의 어린애유골이었으며 성인남성의 유골이 성인여성보다 압도적으로 매장된 사실이 밝혀졌다. 이것은 모세 당시 히브리인의 증가를 막기 위해 파라오가 남아살해를 지시했다는 성서의 증언이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구약 창세기의 드라마틱한 인물 요셉을 이집트의 역사 속에서 찾아 보았다. 요셉이 꿈을 해몽해 준 파라오는 아마넴하트3세(BC 1682 ~ 1635)이었고 파라오가 꾼 7년 흉년의 불길한 꿈은 당시 나일강의 수위를 기록한 셈나의 명판에 의하면 나일강의 대홍수로 인한 기근이 당시에 실제상황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요셉의 무덤을 소개하고 있다. 1987년 고센지역에서 요셉의 무덤이 발굴되었다. 그 속에선 유골은 찾아볼 수 없었고 파괴된 요셉의 석상 중 두상부분이 남아있었다. 두상은 누군가가 돌로 쪼개어 부수려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성서에 보면 요셉은 죽기 전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날 자신의 유골을 가져갈 것을 유언했다.(창50:24-25) 요셉의 무덤에 유골이 없는 것은 모세의 영도 아래 이스라엘민족이 출애굽할 때 그들의 위대한 족장의 유해를 유언대로 무덤에서 가져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출애굽의 과정에서 이집트가 당한 재앙과 노예를 잃은 허탈함으로 인한 분노에 휩싸인 이집트인들이 주인 없는 요셉의 무덤을 마구잡이로 파헤치고 요셉의 석상을 파괴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요셉의 빈 무덤과 파괴된 석상은 요셉이 실존인물이었음을 웅변해 주고 있다.

이 책은 우리에게 고대 이집트 역사의 연표 수정이라는 다소 생소하고 어려워보이는 주제를 제시한다. 주제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고대 이집트인들의 이름과 지명등이 낯설어 처음엔 읽기가 다소 지루하고 힘든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559페이지 짜리 책이다. 판형도 일반책보다 크다! 그러나 수천년 시간의 베일 속에 숨겨진 역사적 진실의 꼬투리를 하나씩 발견해 나갈 때 이 책이 주는 감동과 기쁨, 유익은 말할 수 없이 크다. 특히 성서속 인물이 실존의 인물로, 성서의 역사가 실재하였던 역사로 새롭고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성서의 내용이면 뭐든 무조건 성서의 기록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는 맹목적 신앙인 에게나 혹은 성서의 내용이면 뭐든 무조건 허무맹랑한 허구요 신화요 각색이라고 외면해 버리고 마는 사람에게나 이 책은 모두에게 귀중한 깨달음을 안겨주리라 생각한다.
진리는 맹목으로도 무지로도 알 수 없다는 것을.

관심 있는 분들의 필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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