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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 새 시대를 열어간 사람들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에게 운명이란 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한다면 과연 운명이란 무엇일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져서 삶 전체의 테두리를 결정하는 것, 예를 들면 남자로 태어나느냐 여자로 태어나느냐 혹은 18세기 조선시대에 태어나느냐 21세기 대한민국사회에 태어나느냐 등과 같이 전혀 자기의지와 관계없이 주어진 삶의 결정요소들, 일방적으로 주어졌을 뿐 개인의 의지와 힘으로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 없는 삶의 테두리를 결정하는 요소들,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마치 권투선수가 링에 오르면 사각의 링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무구한 세월 속에서 어느 시기 잠시 무대에 올랐다가 내려가야 하는 개개의 인간이 운신할 수 있는 삶의 폭과 너비는 본인의 뜻과는 무관하게 이미 테두리 지어져 있다. 그것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정약용은 "인생의 화와 복이란 정말로 운명에 정해져 있지 않다고 누가 말하겠는가?"라고 다소 체념 어린 어조로 자신의 비운의 삶을 자조했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죽음과 유배로 몰아넣은 그들의 운명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그런 생각을 하였다. 역사에 만약이란 상상은 부질없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만약의 경우를 상상해보는 것은 불행한 역사의 아픔이 그만큼 절절하기 때문이다. 만약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 18세기 조선사회가 아니라 21세기 대한민국에 태어났더라면 그들의 창의성과 합리적 실용주의는 어떻게 꽃피웠을까? 만약 그들이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계열이 아니라 집권노론계열의 학자였다면 그들의 정치적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만약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 천주교와 무관했다면? 만약 정약용을 그토록 신뢰하고 요직에 등용코자했던 정조가 의문의 죽임을 당하지 않고 오래도록 권좌에 머물렀더라면? 만약 그랬다면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정약용의 부계 쪽은 선조 8명이 대대로 홍문관관리를 지낼 만큼 뛰어난 학자집안이었지만 노론천하의 세상에서 권력의 중심과는 거리가 멀었던 남인계열의 집안이었고 모계 윤씨 부인 쪽은 노론의 영수 송시열과 맞섰던 남인 영수 윤선도의 피가 흐르는 집안이었다. 양쪽 다 집권 노론의 칼끝이 겨누고 있는 남인집안이었다는 것이 정약용의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였다. 정조는 정약용 같은 능력 있는 남인을 등용함으로써 노론 일당독재의 조정을 개혁하고 정치를 일신하고자 했다. 때문에 정조는 끊임없이 정약용을 권력의 핵심에 등용코자 하였고 바로 그 때문에 정약용은 노론의 집중적인 견제와 박해의 표적이 되었다. 노론도 정약용의 뛰어난 학식과 정무적인 능력은 높이 샀다. 그러나 노론에게 그는 정적일 뿐이었다. 이점이 정약용의 비극이요 당심에 사로 잡혀 인재를 활용할 기회를 스스로 잃어버린 조선후기사회의 비극이었다.
정약용의 두 번째 운명의 굴레는 바로 천주교다. 맏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은 조선천주교회 창설의 산파요, 막내형 정약종은 조선 최초의 교리서 주교요지를 쓸 만큼 천주교에 정통한 학자요, 천주교 교리에 따라 제사를 폐한다며 부모의 신주를 불태워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진산사건의 당사자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가쪽 육촌형제였다. 천주교박해상황을 청나라에 알려 외세의 힘을 빌어 박해아래 있던 조선 천주교를 구원코자 했던 이른바 백서사건의 당사자 황사영은 정약용의 조카사위였다. 큰형 약현의 딸 명련의 남편이 황사영이다. 유학을 국가의 근본으로 하는 조선사회에서 천주교는 곧 국가와 사회의 정체성을 뿌리부터 흔드는 사교요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곧 척결해야 할 패역무도한 무리일 뿐이다. 정약용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드리워진 천주교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썼다. 그는 정조가 동부승지를 제수하였을 때 자신이 천주교와 무관한 사람임을 천명하기 위해 일명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상소문>을 지어 올렸는데 거기서 그는 천주교에 잠시나마 관심을 가졌던 것은 마치 어리석은 아이의 장난과 같은 것이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신의 경우는 당초에 서학에 물든 자취는 아이의 장난과 같았는데 지식이 자라자 문득 적수수로 여기고, 분명히 알게 되어서는 더욱 엄하게 배척하였고, 이미 늦게나마 깨우치고서는 더욱 더 심하게 미워했었으니, 얼굴과 심장을 헤치고 보아도 진실로 가린 것이 없고, 구곡간장을 더듬어 보아도 진실로 남은 찌꺼기가 없는데, 위로는 군부(군부)에게 의심받고 아래로는 당세에 견책을 당하였으니, 입신(立身)을 한번 잘못함으로써 만사가 와해되었습니다. 산들 무엇하며 죽은들 장차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러나 정약용의 이런 양심고백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정조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열한 살의 순조를 대신해 섭정하게 된 정순왕후와 노론은 천주교를 빌미로 정적인 남인세력을 대거 죽이거나 유배 보냄으로써 조정에서 씨를 말리려 들었다. 정약종이 서수문밖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황사영은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리고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각각 길고 긴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이후 18년의 유배생활을 하면서 정약용은 1표2서를 비롯 수백 권의 책을 저술하였고 현실정치에서 미처 피우지 못한 정치가로서의 꿈과 비전을 고스란히 책으로 남겼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이런 것일까? 정치가로서의 정약용의 좌절과 비운이 사상가로서의 정약용을 역사 위에 살려놓았다. 정약용은 말했다. "인생의 화와 복이란 정말로 운명에 정해져 있지 않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유배지의 초당이 위대한 사상의 요람이 된 것을 정약용은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였을까? 운명이란 것이 이런 것이라면 과연 인생의 화복은 어디까지가 화이고 어디부터가 복인가? 만약이라는 가정이 부질없는 줄은 알지만 정약용이 현실정치가로서도 성공했었다면 조선후기사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조선사회의 개혁을 꿈꾸었던 정조와 실용과 합리의 정신으로 정조의 꿈을 현실에 옮기려했던 정약용의 몰락이 곧 조선사회의 몰락을 재촉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좌절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역사는 때때로 정말 좋은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아까운 인재를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 댓가는 너무도 무거운 짐으로 되돌아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