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와인 이야기 세계사를 바꾼 시리즈
나이토 히로후미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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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와인잔에 담긴 인류, 그 매혹의 역사를 맛보다 - 『세계사를 바꾼 와인 이야기』

서점에서 이 책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때, 솔직히 가벼운 호기심이 전부였습니다. 와인을 좋아하긴 하지만, '세계사를 바꾼'이라는 거창한 제목은 조금 과장이 섞인 마케팅 문구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책 표지에 적힌 "와인이 없었다면 고대 그리스 민주정도, '유럽의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도, 프랑스혁명도 없었다?!"라는 도발적인 문구에 저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첫 장을 넘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은 지금, 저는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 특히 와인 한 잔을 마주하는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 힘을 가졌습니다.

책은 우리가 익히 아는 역사의 거대한 사건들 뒤에 숨어, 묵묵히 그러나 결정적인 역할을 해온 '와인'이라는 주인공을 무대 중앙으로 끌어냅니다. 제가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바로 고대 그리스의 '심포지온(Symposion)'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전까지 저는 심포지온을 그저 남자들이 모여 술 마시고 노는 향락적인 파티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심포지온이 어떻게 민주주의의 산실이 되었는지를 설득력 있게 풀어냅니다. 와인은 단순한 알코올이 아니었습니다. 적절히 물과 희석된 와인은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키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계급과 체면의 벽을 허물어 자유로운 대화와 토론을 이끌어내는 '마법의 음료'였던 것입니다. 철학, 정치, 예술에 대한 격의 없는 대화가 오가며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꽃피울 수 있었던 배경에 와인의 역할이 있었다는 통찰은, 제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중세 시대로 넘어오면 와인은 더욱 노골적으로 권력의 도구가 됩니다. '유럽의 아버지'라 불리는 카롤루스 대제가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내세운 핵심 정책 중 하나가 바로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법을 체계화하는 것이었다는 대목에서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는 수도원을 중심으로 고품질의 와인을 생산하게 함으로써, 미개한 게르만족과는 다른, 고도로 문명화된 로마 제국의 계승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했습니다. 동시에 와인은 왕에게 바치는 중요한 세금이자, 충성스러운 신하에게 내리는 최고의 하사품이었습니다. 즉, 와인의 생산과 유통을 장악하는 것이 곧 경제와 정치를 장악하는 길이었던 셈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저는 당시의 포도밭이 오늘날의 반도체 공장만큼이나 중요한 전략적 자산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가 '와인의 심장'이라 불리는 보르도 지역을 두고 벌인 100년이 넘는 싸움은 이 책의 백미 중 하나입니다. 단순히 영토 분쟁으로만 알았던 역사가, 사실은 최고급 와인의 주도권을 둘러싼 치열한 경제 전쟁이었음을 알게 되면서 역사를 보는 시야가 한층 넓어졌습니다. 영국 왕실과 귀족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보르도 와인이 어떻게 영국의 경제를 좌우하고, 또 프랑스의 자존심이 되었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와인 한 잔에 담긴 국제 관계의 역학에 감탄하게 됩니다.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역사책 특유의 딱딱함을 완전히 벗어던졌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어려운 연대기 나열이나 복잡한 설명 대신, 와인을 둘러싼 구체적인 에피소드와 인물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역사를 풀어냅니다. 덕분에 독자는 마치 흥미진진한 소설을 읽듯 페이지를 넘기게 되죠. 19세기 유럽 포도밭을 초토화시킨 '필록세라'라는 작은 벌레의 이야기는 한 편의 재난 영화처럼 극적이기까지 합니다. 이 작은 재앙이 와인의 세계 지도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그리고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처절한 노력이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와인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를 읽으며, 저는 와인이 단순한 농작물이 아니라 수천 년 인류의 지혜와 투쟁이 응축된 결정체임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세계사를 바꾼 와인 이야기』는 와인 애호가는 물론, 평소 역사에 큰 관심이 없던 사람에게도 즐거운 지적 탐험을 선사하는 책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저는 더 이상 와인을 그냥 '마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와인잔을 들면 그 루비 빛깔 속에서 민주주의를 논하던 그리스 철학자의 얼굴이, 포도밭을 돌보던 수도사의 경건한 손길이, 보르도를 차지하기 위해 칼을 맞대던 왕들의 야망이 어른거립니다. 와인은 이제 제게 단순한 술이 아닌, 살아있는 '역사책'이 되었습니다. 오늘 저녁, 와인 한 잔을 계획하고 있다면 이 책을 먼저 펼쳐보시길 강력히 권합니다. 아마 당신의 와인잔은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향기로운 이야기로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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