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미장센이란

쇼트의 구성 framing과 관련됩니다.

연극 연출자가 *무대 위에 *무엇을 *배치할까를 고민한다면 영화감독은 프레임 frame에 무엇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를 기준으로 모든 생각을 풀어나갑니다.

따라서 영화에서 사용되는 미장센이란 용어는 *화면 속에 담길 모든 *조형적 요소들,

예를 들어 *카메라의 각도와 움직임, *조명, *세트, *배우의 연기, *의상, *분장 등 카메라에 찍힐 수 있도록 *영상을 *구성하고 *움직임을 만드는 감독의 연출 작업 전반을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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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일의 본질을 도망의 니힐리즘이라고 부른다면,
선장 에이해브의 본질은 공격의 니힐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P710

이 작품은 오히려 여러 가지 암시가 가득 채워져서 의미가 팽창하는 작품이라고 말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어쨌든 한 가닥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다층적이고 복층적인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 P711

미국에서 민족 말살을 그 가해자 쪽에 속하는 백인 작가가 명시적으로 고발하는 것은 멜빌 시대에는 물론 곤란한 일이었다.

자기 검열이라는 것도 있다. 그래서 고발은 암호화되고 암시가 된다. - P712

모비딕의 암시의 경계는 이렇게 공간에서도 시간에서도 한없이 팽창해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최종적으로 부정을 향해 팽창해간다.
작가 멜빌은 인간의 *모든 역사를 *비극으로 보고,
*대ㅎㅇ해시대 이후의 세계의 지리적 팽창을 *비참과 오염의 확대로 보고, 바다와 별을 포함한 우주의 생성을 무언가 위대한 존재가 저지른 과오로 인식한다.

멜빌의 비극 의식은 국내에서는 고립되었지만,
국외에서는 호응하는 의식과 병립해 있었다.

러시아에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출현한 것은 거의 동시대였다.

멜빌은 유럽이 낳은 정신적 습관인 *민주주의, 기독교, 개인주의, 자유주의 등을 음미하고 그 치명적인 함정을 가차 없이 척결한다. - P717

*『모비 딕』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된 *초기(1920~1940년대)에는 에이해브가 주인공이고 이슈메일은 그냥 화자였다.

그 무렵 미국문학은 *‘르네상스‘
를 맞이해서 *상징주의적, *신화적 비평이 주를 이루었는데, 여기에 맞춰 *모비 딕도 *신, 악, 우주 같은 개념으로 *상징화되었고, 에이해브도 거기에 맞서거나 도전하는 *인간 영웅으로 해석되었다. - P724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팍스아메리카‘가 확립된 뒤에는 이슈메일을 단순한 화자에서 독립된 존재로 파악하고, 그를 작가 허먼 멜빌의 대변자로 보게 된다.

이때 *주안점을 두고 본 것이 *’미국 제국주의‘ 개념인데,
*19세기 중엽에 수립된 **‘명백한 운명‘ (Manifest Destiny 미국은 북아메리카 전역을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지배하고 개발할 신의 명령을 받았다는 주장으로, 팽창주의와 영토 약탈을 합리화하기 위해 수립되었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 『모비딕의 *기저에 있다는 *해석이다.

자기 시대의 관점, 취향, 태도에서 반걸음 앞서면 동시대인들이 그럭저럭 따라가지만,

한 걸음 앞서버리면 따라가지 못하고, 그래서 아예 무시해 버린다. 그게 선각자의 운명이 아닐까. - P725

*비극도 너무 *장엄하면 슬픈 게 아니라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걸 미학에서는 *숭고미라고 하는데, 내가 뭔가 *고양되는 느낌, 그래서 내 삶이 구원받는 느낌이 드는 것, 그게 문학을, 예술을 접하고 경험하는 이유가 아닐까.

*번역을 *’장미 밭에서 춤추기’라고 비유한 것은,

그렇게 *가시밭 같은 조건이긴 하지만 그 안에서 나름대로 글쓰기를 수행할 수 있는 *’고통 속의 즐거움’을 그렇게 표현해본 것이다. - P728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에게 달려간다.

나는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겠다.

지옥 한복판에서 너를 찔러 죽이고,

증오를 위해 내 마지막 입김을 너에게 뱉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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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주명리학, 근거는 있는가


몇 해 전 인문학의 부흥과 함께 사주명리학이 큰 인기를 누렸다.

《명리, 운명을 읽다》의 저자 강헌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여기에 *학문적인 합리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수십 개의 트렌드의 탄생과 소멸이 횡행하는, 급변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명리학이 살아남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사주명리학은 트렌드를 넘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의 저자 고미숙의 말처럼, 과연 사주명리학은 "*자신의 존재를 *우주적 인과 속에서 보는 *삶의 기술"일까?

대안연구공동체에서 사주명리학을 강의하고 있는 이재인 강사는 사주명리학에 합리적 근거가 존재하는지 물으며 사주명리학 형성의 역사를 추적한다.

/ 사주명리학, 근거는 있는가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이 사주명리학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강연과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운명이란 인생의 *우주적 변곡선"과 다르지 않다면서 사주 "팔자를 본다는 건 *내 안의 *우주적 흐름을 보는 것"2이라는 주장,

사주명리학이 "*인간과 우주의 *관계, *인간 그 자체의 *본질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 *많은 혜안을 던져주는 *합리적인 학문"3이라는 주장,

*사주는 "*내가 태어난 바로 그 *장소, *그 시각의 *우주의 에너지를 표현한 것"4이라는 주장 등을 서슴지 않는다.

이때 우주는 꼭 천문학적 의미가 아니라 하늘, 천지, 자연 등을 포괄하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주명리학은 *인간이 태어날 때 **우주의 기운을 *받는다는 것을 **전제로 *성립된다.

그러한 전제는 전한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의 천인감응론이나 후한의 사상가 왕충王充의 자연정명론 등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사주 풀이는 *출생 연월일시를 나타내는 *연주年柱, 월주月柱, 일주日柱, 시주時柱, 즉 사주四柱를 구성하는 *여덟 글자의 *간지干支를 해석함으로써 **타고난 **우주의 기운을 파악하여 **운명을 추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태어날 때 *우주의 기운을 받는다는 것을 일종의 **공리로 받아들이더라도, 사주명리학이 합리적인 학문이라고 주장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사주 여덟 글자의 간지가 *우주의 기운을 *나타낸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다음에는 *사주 풀이가 *실제 삶에 *적용되는 원리, 즉 *간지 상호 간의 논리와 *삶의 연관성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그 가장 기본적인 *증명을 *어느 누구도 *하지 않는다.

**입증은 커녕 **논증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인문학적 상상력과 *지식을 동원하여 **무리한 주장을 **진지하게 펼친다.

*사주명리학의 **정교한 논리 체계에 매료되어 *이성이 마비된 것일까?

*아니면 사주명리학에는 *증명이 필요 없을 만큼 *자명한 근거가 존재하는 것일까?

/ *사주명리학의 생명력은 *합리성이 아니라 *위로와 희망


*사주명리학의 핵심 이론은 *음양론, 오행론, 간지론, 십성론十星論, 용신론用神論 등이다.

음양론과 오행론 그리고 간지론은 춘추 전국 시대부터 진한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주명리학과 무관하게 형성된 고대 중국인의 자연철학이며 사유 방식이다. 사주명리학은 그런 요소들을 차용하고 변용하면서 운명을 추론하는 정교한 술수로 발전한 것이다.

사주명리학 고유의 이론은 음양오행과 생극生剋에 따른 간지의 관계를 논하는 십성론과 길흉을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용신론이다.

그런데 관계와 중화中和에 관한 철학적 의미의 깊이는 있지만, 십성론과 용신론 역시 글자들 사이의 이론이다. 그것이 실제 삶에서 작용한다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바둑이 아무리 인생의 축소판이어도 바둑판 위의 돌이 바둑 두는 사람의 인생에서 무슨 작용을 하겠는가.

*결국 인간이 태어날 때 *우주의 기운을 받는다는 사주명리학의 *전제를 인정하더라도, *간지가 *우주의 기운을 나타낸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고, 또 그것을 *증명하더라도 *사주를 풀이하는 *글자들 사이의 *이론과 *실제 삶의 **연관성을 *증명하지 못하는 한 사주명리학의 *모든 논리는 *아무리 정교해도 **공중누각일 수밖에 없다.

*사주명리학 신봉자들이 *선현들의 지혜, 직관, 도, 동양의 신비, "동양의 성격학"18 운운하는 것은 *자신의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것일 뿐 그것이 *공중에 떠 있는 *누각의 토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주 풀이가 *실제 삶에 *부합된다면 *그 이론은 *실증되는 셈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많은 이들이 *확증 편향에 사로잡혀 *아전인수 격인 *간명 사례들을 제시하지만, 그것은 *더 많은 **반례 앞에서 *효력을 잃어 어떤 이론도 입증하지 못한다.

*개인의 경험이나 *관점에 좌우되지 않는 *사주 풀이의 *논리적 정합성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사주에 *각인각색의 풀이가 있을 뿐이다. 용신의 경우 *역술가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으며 아예 용신 무용론을 주장하는 이도 있다. 심지어 세수歲首 및 야자시夜子時 입장에 따라 사주 명식 자체가 바뀔 수도 있다.

*사주명리학은 *합리성을 토대로 성립된 학문이 *아니다.

*고미숙이 말하는 "*자신의 존재를 *우주적 인과 속에서 보는 *삶의 기술"19은 **인문학 과잉이 빚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강헌은 "만약 여기에 *학문적인 합리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수십 개의 *트렌드의 *탄생과 소멸이 횡행하는, *급변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명리학이 살아남지는 못했을 것"20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주명리학이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남아 있는 것은 *합리성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운명을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속성 때문이다.

*합리성 여부를 떠나서 사주명리학이 다양한 *통변으로 *운명에 대한 *궁금증과 *답답함을 *잠시나마 해소시켜 주기 때문이다.

사주명리학의 *생명력은 *우주적 인과나 *합리성 따위의 *분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습卑濕한 기토己土가 되어 *고단한 삶에 조금이라도 *위로와 *희망을 주는 데 있다.

간신히 *미신의 오명을 벗고 *양지로 나온 사주명리학에 **분칠한 *가면을 *씌울 필요는 없다. *있는 그대로 배우고 *즐기는 *문화 자산으로 *전승되면 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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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시간 historical time으로 20세기를 보는 두 개의 시각이 경쟁하였다.

이탈리아의 역사정치학자인 *조반니 아리기는 20세기를 *’긴 20세기’의 끝자락이라고 규정하였는데 반해

*홉스봄은 *20세기는 *1914년에 시작하여 1991년에 이미 끝난 *짧은 20세기라는 상반된 역사적 성격 규정을 하였다. - P21

아리기는 브로델의 장기지속 longue duree 시간 개념을 차용하여, 플로렌스, 베니스 제노아, 네덜란드, 대영제국의 헤게모니와 아메리칸 임페리움으로 이어지는 700년에 걸친

*긴, 긴 20세기라는 너무 긴 20세기를 그림으로써 2세기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기 어렵게 하였다.

*홉스봄은 *20세기 전반(1914-45)은 *전쟁, 야만, 학살로 얼룩진 *‘파멸의 시기’였고

20세기 *후반은 *냉전, 케인지안 황금기, 민주주의 사회문화혁명 그리고 *현존 사회주의가 몰락한 1991년에 종말을 고한 *’황금기 golden age였다고 하면서

*전쟁과 평화, 야만과 문명, 현존 사회주의(스탈린주의)의 등장과 몰락이라는 두 극단이 한 세기 내에 연쇄적으로 실험된 *짧은 세기로 규정하면서 희망, 평화, 번영, 공존의 21세기로 빨리 가기를 원하는 소망적 사고를 담고 있다. - P22

*한국의 20세기는 사실상 *1876년 개항으로부터 시작되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긴 20세기‘이다.

*한국의 ‘긴 20세기‘는 *개항, 식민지배, 해방 후 내전상태,
분단국가 건설, 전면적인 한국전쟁이라는 *내파(內破)와 외파(外破)의 전반기와민주주의의 도입과 좌절, 군사 쿠데타, 압축적 산업화, 민주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이어지는 자유, 평화, 번영의 후반기로 나눌 수 있다. - P22

*긴 20세기의 *전반기가 *제국주의, 식민주의, *냉전, 사회혁명, *전쟁으로 얼룩진 20세기라면,

*후반부는 *군부독재라는 긴 막간기(interlude)를 *제외하면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로 이어지는 모범적인 부르주아 근대화의 시간이었다.

한국의 20세기가 시간의 길이로 보면 아리기의 600년이 넘는 긴 20세기 보다는 짧으나 홉스봄의 짧은 20세기(1914-1991) 보다는 길다.

왜냐하면 한국의 20세기는 21세기에 들어선 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긴 20세기는 *한국 민족시간(national time)이 *세계시간(world time)‘에 편입된 1876년 개항부터 세계시간과의 *지체현상은 있었지만 *대체로 세계시간의 흐름과 *공명(共鳴)하면서 흘러갔다.

따라서 현재 진행형인 한국의 ‘긴 20세기‘는 지난 세기 말부터 헤게모니적인 정치경제 레짐으로 군림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대항적 정치경제 헤게모니에 의해 대체되기까지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2. 비동시성의 동시성 개념의 모방과 혁신


적극적 혁신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한국의 역사적 시간의 특수성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후발 산업국가인 한국은 *전근대, *근대, *탈근대를 *단계적으로 이행해 온 *선진국과는 *달리

*전근대, 근대, 탈근대가 **동시에 나타나는 *‘역사적 시간의 동시성을 보여 주고 있다.

선진국이수백 년에 걸쳐 달성했던 근대화를 수십 년 만에 압축적으로 달성하려 한 데서 나온 부작용인 것이다.

우리는 정치, 기업경영, 노사관계, 가족관계에서 여전히 전근대적인 관습, 가치, 행태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으며, 근대화를 완성하지 못한 채 21세기에 들어서고 있다. - P23

*아나톨리 칼레츠키가

애덤 스미스의 신고전주의 자본주의 1.0 세대,
케인즈의 국가 개입주의적 자본주의 2.0 세대 이후에

프리드만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3.0 세대하에 있었으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생명을 다하고 *공감, 공유, 공존의 *자본주의 4.0이 도래할 것이라고 했으나 아직 자본주의 4.0이 헤게모니를 획득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Kaletsky, 2011) - P23

오히려 표피적으로는 신자유주의가 다시 원기를 회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불확실성의 근원은 미국의 헤게모니가 쇠퇴하고 있으나 중국을 비롯해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대체할 경제나 국가가 없다는 것이다.

*그람시의 표현을 빌리면, *"옛것은 죽어가고 있으나 새것이 태어나지 않고 있는 과도기적 상황이다.(Gramsci, 1971)

최장집 교수는 *후발산업화 국가에서 *근대화의 3대 프로젝트인 *산업화, *국민국가 형성, *민주화가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근대화 변화의 동시성(simultaneity of changes at different levels)‘으로불렀다.(최장집, 1996b: 18) - P23

*분단 국가가 지속됨으로써 우리는 **여전히 *근대화의 *기본적 단위인 **민족국가(국민국가)를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화가 본 궤도에 올라섰으나 여전히 **시민권과 **법치주의가 확립되지 못하고 있다.

또한 20세기 *근대의 성과라 할 수 있는 **복지국가의 건설은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고 있다.

우리는 *’근대’를 완성하지 *못했으나 **’세계시간의 동시화’라는 압력에 의해 *탈근대에 들어가고 있다. - P24

*21세기 *탈근대화시대의 과제인 *지식정보사회, *안전사회, *문화적 풍요, *환경공동체, *질 높은 생활정치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제도 *관습 *의식에 남아 있는 *전근대성을 *탈피하고, *국민국가 건설, *민주화와 *산업화를 *세 축으로 하는 근대화를 완성하며, *미래 지식정보사회에 대해 대비하는 탈근대화의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임혁백 안석교, 2000: 26-27) - P24

필자는 ‘긴 20세기에 전근대, 근대, 탈근대의 시간이 동시적으로 나타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의 *원인은 **압축적 후발 산업화였다고 보았다.

*후발 산업화를 *압축적으로 달성하려는 조*바심, 속도전, 역사단계의 단축(telescoping stages)이 *전근대를 *온존시킨 채, *근대에 들어가고, *근대를 완성하지 못한 채, *탈근대에 들어가는 *비동시성 현상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새천년과제는 한편으로 *전근대성을 탈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근대성을 완결하고 또한 *탈근대에 *진입해야 하는 *3중적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한국은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경제발전과 고도성장을 위한 *경제지상주의 환경을 조성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는 동안

*정신적, 문화적 자산의 관리를 소홀히 했고,
*사람과 사람 간의 질서 있는 관계를 마련하는 데 필수적인 *사회적 소통과
*공동체를 우선하는 *공화주의적 가치관의 *빈곤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성장주의적 사회 지배층은 *이러한 가치관을 *성장 저해 요소로 간주하여 *배척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지목하였고,

밀레니엄이 다가오고 있는 *캘린더적 20세기 말 시간에서 한국의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역사적 정체성의 *혼란 초래와 *집단적 정신 분열증을 초래, 그리고 *집단 간 사회적 신뢰의 붕괴 가능성을 경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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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트릭스와 사르트르의 <구토>가 보여주는 실존적 본래성


빨간 약인가, 파란 약인가?

그것은 *참된 본질을 알고 사는 것과 *무지 속에 사는 것 사이의 *실존적인 선택이다.

실존주의자들의 용어로 그것은 *본래성과 *비본래성이다. - P12

실존주의자들은 비본래성을 *거짓 믿음, *지적인 자살이라는 말로 비하하는 한편,

본래성을 *용기 있고 위엄 있는 삶의 양식으로 옹호한다.

그들은 "**본래성을 유지하는 데는 많은 *시련이 따르지만, 본래성의 장점은 그것의 *부담을 *능가하며, *특별한 종류의 *평온을 느끼게 해준다"고 말한다.

*본래성을 회복할 때 우리는 *존재의 본질을 왜곡하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그때 존재는 *완전한 공짜 선물이 된다.
비로소 우리는 매일매일 존재한다는, 어렵고도 매력 없는 임무에 헌신할 수 있게 된다. - P13

*칸트는 *예수를, *무기력한 인류를 구원하는 *예외적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우리 *내부의 *신인적 잠재력의 모범이라고 설명한다.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는 자유와 신성과 불멸성을 믿어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도덕적 이상으로 나아갈 숭 ㅣㅆ다.

네오는 최초일 뿐이다. 마지막이 아니다.

/ 매트릭스, 마르크스 그리고 건전지의 생애


자본주의 체제 하의 노동자들은 그들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다. 매트릭스는 인간 발전소 장면에서 이 현실을 명백하게 극화한다.

매트릭스의 인류는 노동자 계급이 될 것이고 요원들은 *자본의 수호자가 될 것이다. - P18

나아가 *형이상학적으로도, *시뮬레이션은 *현실보다 더 실제적일지 모른다.

시험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 - P33

/ 인공 낙원 대신 진실의 사막을 걷겠다
: 네오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 생활자


*자유주의로부터 *허무주의가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허무주의란 어떤 *궁극적인 *목적이나 *근본적인 *의미를 *결여한 *인간 존재를 의미하는데,

그런 속성 때문에 허무주의는 *이전 시대에 인류에게 *영감을 주었던 *위대한 질문들과 활발한 탐색들이 *더 이상 인간의 *영혼에 자리잡지 못하게 만든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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