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보는 황금 가지 까치글방 111
제임스 프레이저 지음, 이경덕 옮김 / 까치 / 2001년 12월
평점 :
품절


 

 

 

황금가지에 대해서 처음 들어본 것은 진중권의 책에서였다. 진중권 교수는 제임즈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의 내용을 인용한 글들이 여럿 있었다. ‘제임스 프레이저<황금가지>는 내게 그렇게 각인이 되었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때마침 까치글방에서 이벤트를 하기에 여러권을 샀고, 장바구니에는 황금가지를 담았다.

 

저자인 제임즈 조지 프레이저(1854-1941)1907년 세계 최초로 사회인류학 강좌를 개설하였고, 그의 학문적 성취를 취하하여 영국 왕실이 기사작위를 받았다. 후세의 인류학자들로부터 현장 연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안락의자의 인류학자(armchair anthropologist)라는 비판도 받았고, 그가 주장하였던 주술에서 종교로, 종교에서 과학으로 인류의 사상양태가 진화되었다는 진화주의적인 학설이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는 여전히 부러지지 않았고 인류학에 관한 고전으로 여전히 살아있다. 신앙이나 의례를 사회, 정치조직 및 그 밖의 여러 제도에 기능적으로 관련지어서 검토하는 최초로 시도된 그의 관점은 현재의 인류학적 연구로도 이어지고 있다.

 

그는 아버지를 통하여 헤브라이즘과 종교적 존경심을,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접하며 헬레니즘과 신화적 상상력을 갖추게 된다. 아울러 그의 친구이자 동양학자였던 로버트슨 스미스는 경건한 신앙과 동시에 진화론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을 잘 융합한 것이 프레이저의 학문적 태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참고적으로 로버트슨 스미스는 다윈의 <종의 기원>에 대한 기독교적 응답으로 유대 종교도 또한 진화했음을 주장한다. 유대 종교에서는 주술을 대신하여 유일신을 숭배하게 되었고, 피로 얼룩진 제물 대신에 비천한 마음을 참회하게 되었으며, 신을 나타내는 동물을 살해하는 것이 자기 몸을 바쳐서 숭배하는 신앙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프레이저는 종교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기독교인들에게 불쾌한 기분을 안겨주지 않으려 배려하면서도, 기독교 교리를 과학의 공격으로부터 옹호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이해는 참된 지식의 열쇠는 과학이지 종교나 주술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 태도는 흔히 한국 교회에서 자유주의로 분류될 수 있다. 나는 자유주의를 무조건적으로 비판할 마음도, 옹호할 마음도 없다. 한가지 mention하고 싶은 것(사실 fact)은 자유주의 학자들 중에는 지적 호기심과 학문적 성취가 탁월한 사람이 많다는 것과 영적 체험은 부재하거나 거의 없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지성이나 감성이 태어날 때부터 범인보다 탁월한 사람이 있듯이, 영적이 민감함이 특이하게 뛰어나든지 아니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나만의 가설)이 있다. 내가 만남 자유주의 신학자들 중에는 보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경건한 분들도 많이 계셨고, 반면에 학문적으로 그리 논리적이지도 않은 가설을 진리인양 믿는, 지적 수준 낮은 자유주의자들도 있다.)

 

<황금가지>는 마치 한편의 추리소설과 같은 플롯으로 전개된다. 책의 도입부는 네미Nemi의 사제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관습에서 출발한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다빈치 코드>의 전개방식은 분명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서 모티프를 도용한 것이 틀림없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파편적인 하나의 진실을 찾아가다 보니 마지막에는 거대한 세계적 진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도입부를 잠시 읽어보자(32)

로마가 쇠망할 때까지 네미에서 열렸던 관습은 우리를 미개사회로 유혹한다. 네미의 성스로운 숲에 가지가 무성한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그 주위를 무시무시한 사람 그림자가 낮에는 물론이고 밤 늦게까지도 배회하고 있다. 당장 적에게 습격당할지도 모른다는 듯이 칼을 빼어들고 주위를 살피고 있다. 그는 바로 사제였다. 또한 살인자이리도 했다. 지금 그가 경계하고 있는 상대는 조만간에 그를 죽이고 그의 뒤를 이어 사제가 될 사람이었다. 이것이 성소의 관례였다. 자신이 사제가 되고 싶으면 현재의 사제를 죽여야만 했다. 전임자를 죽이고 세자가 된 사람도 언젠가는 자기보다 강하거나 교활한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사제는 이 불안정한 지위에 있는 동안 왕의 칭호를 얻게 된다.”

 

디아나 신전의 사제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황금가지라 부르는 나뭇가지를 꺽어야 사제와 대결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제를 죽이게 되면 자신이 신전의 사제직을 물려받게 되고, 이러한 일들이 시대에 걸쳐 무한반복 되는 것이다.

 

프레이저는 이 단순한 신화를 지구상에 무수히 많은 종족과 마을의 주술, 신화, 풍습, 종교에서 수집한 내용과 비교하면서 네미전설에 숨겨진 고대인들의 의도를 치밀하게 추론하여 재구성해낸다. 책의 대부분이 서양과 동양, 오지와 문명사회, 미개인과 문명인에 기록으로 남아있거나 관찰된 수많은 풍습을 설명하고 있다. 흔히 문화인류학에서 이야기하는 집단적 유사성을 발견하고 서술한 것이다.

 

고대사회는 왕 또는 사제를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이거나 신의 화신이라고 여겼다. 사람들은 왕이 자연의 운행을 어느 정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악천후나 흉작 등의 재해는 왕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뭄, 기근, 역병, 폭풍우 등이 닥치면 그 재난이 왕의 태만이나 죄악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왕을 채찍질하거나 심지어 왕위를 박탈하고 죽였다. 왕은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터부(taboo)를 만들었다.

 

터부는 감염을 막거나 또는 감염주술의 작용을 막는 것으로,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서 생겼다. 터부는 사회를 위해서 왕의 목숨을 지켜주기 위하 것이며 동시에 왕이 보여주는 주술적인 힘이 감염의 원리로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주술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터부의 위력은 양날을 가지 칼과 같다.

 

숲의 왕은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한 참나무의 신(풍요)이며, 이 숲의 왕이 늙거나 병약하게 된다는 것은 자연의 풍요가 위협당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결국 왕은 후계자에게 왕좌를 물려주어야 한다. 숲의 왕의 후계자는 전임자를 죽이기 전에 참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 나무의 가지인 황금가지를 반드시 꺽어야 한다. 황금가지는 바로 숲의 왕의 영혼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미전설의 사제는 도전자가 황금가지를 꺽지 못하게 막아야 하며, 도전자는 황금가지를 꺽어야만 비로소 사제와 대결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황금가지>는 나의 첫 번째 문화인류학 책이다. 문화인류학은 여전히 내게 낯설고 기묘하다. 이러한 신화와 종교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칼 바르트처럼 자연적 신인식과 일반계시를 부정해야 하는가? 아니면 틸리히나 칼 라너, 한스 큉처럼 종교들과 일반계시를 포함하여 포괄적인 계시체게로 인정해야 하는가?

 

바르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며, ‘유일한’ ‘계시이다.(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의 계시는 종교들과 접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종교의 지양이다. 종교란 원칙적으로 언제나 계시의 대체물, 허구, 우상숭배, 공로에 의한 인의, 불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한 인간학적인 현상이며, 하나님에게로가 아니라 하나의 반신(反神)에게로 이를 뿐이다. 본 회퍼도 모든 종교의 종교적 아프리오리를 배격했으며, 종교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칼 라너에게 기독교 이전의 비기독교적 종교들정당한 구원의 길이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인간의 초자연적 실존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알트하우스의 견해는 경청할 가치가 있다. 그에게 원계시란 구원을 위한 계시의 불가결한 전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추구하는 목적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죄책을 느끼도록 만들어서, 사죄의 복음이 인간에게 파고들 수 있는 기회가 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계시는 특별계시를 준비한다. 복음은 종교들의 진리와 접촉한다. 그러나 종교들은 스스로 구원하려는 것이 되려는 한에서, 진리일 뿐만이 아니라 기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유한자로서의 인간은 무한자를 담지할 수 없고, 영원한 진리의 파편만 알게 될 뿐, 전체로서의 진리는 파악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인간은 겸손해야 하며, 모든 학자들도 항상 진리의 도상 on the road에 있음을 나직이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 형이상학. 나는 4개의 학문을 좌표로 삼아 우주, 사회, 인간, 신에 관한 진리탐구의 여행을 몇 년째 계속하고 있고, 일평생 하고 싶다. 학부에서는 자연과학을, 대학원에서 형이상학(철학 신학)과 사회과학(경제학), 졸업한 이후 그 동안 인문학을 공부했으니 이제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자연과학 책들을 연구하고 싶다. 

 

나는 바닷가에서 노는 소년 같았다. 발견되지 않은 거대한 진리의 바다가 내 앞에 펼쳐져 있는 동안, 좀 더 매끈한 조약돌이나 좀 더 예쁜 조개를 줍고 즐거워하는 소년 말이다.”

- 아이작 뉴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마제국 쇠망사 - 그림과 함께 읽는
에드워드 기번 지음, 데로 손더스 엮음, 황건 옮김 / 까치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과 역사를 사랑하는 이 중에서, <로마제국 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라는 책과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94)'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전이 읽히지 않는 책이라고 하지 않던가. 책을 좋아하는 이 중에서 이 책을 전부 읽었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6권의 방대한 분량이 만만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역사학자가 아니라면 6권을 볼 만한 동기부여와 시간과 열정이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당위(ought)와 책을 읽는 것이 힘들다는 현실(reality)속에서 탄생한 것이 까치출판사의 <그림과 함께 읽는 로마제국 쇠망사>이다.

 

 

이 책은 기번의 6권짜리 책을 데로 A. 손더스가 전반부 3권을 중심으로 발췌 요약하였고, 출판사에서 그림을 삽입했다. 손더스는 로마의 최전성기였으나, 이미 그 쇠퇴의 기미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98-108)에서부터 서로마 제국의 멸망까지의 400년간을 다루었다. 나머지 후반부 3권의 내용은 50여 쪽에 걸쳐서 매우 압축적으로 요약되어 있다. 사실 사람들이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 서로마 제국이지, 동로마 제국은 아니다. 감사하게도, 접근성과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과 사진을 삽입한 것은 독자 입장에서 좋은 일이다.

 

 

많은 이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설파하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는 기실 인문 고전 text의 외면이고, 이 텍스트들의 시대적 해석(지평융합, Horizontverschmelzung)과 적용의 부재를 의미한다. 그런 관점에서, (애석하게도) 돈이 안되는 인문 고전들을 마구(?) 출판하는 출판사들을 사랑한다. 한길사, 도서출판 길, 서광사, 문예출판사. 물론 <로마제국 쇠망사>를 출판한 까치 출판사도 포함된다. 참고로 장하준 교수와도 인연이 있는 찰드 P. 킨들버거 교수의 <경제 강대국 흥망사 1500-1990>도 까치출판사에서 발행했다.(대학원 논문 쓸 때 참고문헌 중 하나였다. 로마제국 쇠망사와 함께 읽으면 좋을 듯... 훌륭한 책인데 그리 알려지지 않아서 아쉬움이 남는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꼭 읽어야 할 책이라 생각한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13820

 

 

알라딘에서 출판사 이벤트를 하기에, 주머니 사정으로 그 동안 못 사던 <호모 루덴스>, <로마제국 쇠망사>, <존재의 기술>, <황금가지>를 함께 구입했다. 인문학 공부한지 이제 1. 사고 싶고 읽고 싶고, 읽어야만 하는 책들은 쌓여만 가는데....

 

 

각설하고, 영국의 처칠과 인도의 네루가 <로마제국 쇠망사>를 탐독했다는 것은 여러 책에서 읽은 듯하다. 고전에 대해서 들어 아는 것이나 한 두장으로 요약한 글들을 읽은 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런 접근방법은 인문고전의 묘미를 알지 못하고, text에 대한 진정한 자신감이 생기지 않는다. 전체를 모르니 당연한 귀결이리라.

 

저자 에드워드 기번은 18세기 영국 인물이다. 어릴 시절부터 병약했지만 고전을 탐독하였고, 시대지성인 볼테르와도 친교를 맺었다. 특히 나에게 큰 감동과 도전으로 다가온 대목은, 그가 14개월 만에 거의 모든 라틴어 고전(역사, , 웅변, 철학)등을 독파한 점이다. 막대한 독서량과 자료수집이 이 책의 탄탄한 기초이자 뼈대이고 열매이다. 빠른 속도와 (깊이는 없는) 정보에 목을 매는 현대인들에게 기번의 행위는 반()현대적이다. 너무 빨리 가기 위해 기초(foundation)가 부실한. 기번의 책은 2000년 전의 역사 이야기 이지만, 적용은 현대적이다. 그래서 기번은 반현대적이지만, 그의 책은 현대적이다.

 

 

오늘날 책을 좀 읽는다는 독서가 중에서 다양한 고전들을 완독하고, 이해하고 곱씹어 자신과 사회의 풍성한 양식으로 삼는 이가 얼마나 될까? 기번은 고대 기록들간의 불일치하는 내용을 만나게 되면 며칠 밤이라도 뜬눈으로 새우는 열정적 연구가였다. 진정한 내공은 탄탄한 독서력, 지치지 않는 호기심 그리고 폭 넓은 텍스트 이해에 기초한 시대적(현대적, 삶의 자리) 해석에서 출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번은 이러한 삶의 귀한 모범이 된다.

 

아울러 그는 카톨릭 교도로서 신의 존재는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기독교가 전파됨에 따른 폐해에 대해 집중적으로 서술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신앙을 저버리는 행위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학자의 양심과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동시에 지키는 행위이다. 성경의 저자들이 언제 아브라함의 믿음만, 다윗왕의 공로만, 바울의 위대함만 서술하던가? 진실에 기초한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지 못하는 개인과 공동체(집단,사회)는 쇠망의 기름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로마제국 쇠망사>는 로마제국의 역사, 지도자의 장단점, 정치 역학, 정치 행정, 문화, 학문, 시민권, 노예제, 군사, 건축, 종교 등 로마제국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다룬다. 로마제국은 하루 아침에 완성된 것이 아니다. 작은 도시국가로 출발하여 역사에 길이 남을 대제국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드파워(군사, 경제, 정치)와 소프트파워(문화, 학문), 엄격함과 관용, 정신문명과 물질문명, 다양한 민족 등 다양한 가치와 문화들이 공존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고 하지 않았던가. (헤겔적 의미의) 모순적 가치와 자유/관용이 비빔밥처럼 섞이면서 로마제국이라는 창발(emergence)적 존재가 탄생한 것이다.

 

역사상 로마제국과 같은 거대한 제국은 여럿 존재했지만 그처럼 오랫동안 존속한 제국도 없다. 바빌론, 페르시아, 헬라 제국도 겨우 몇 세기 지탱했을 뿐이다. 소비에트 연방이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미국은 현재 자신들의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은 21세기를 미국에게서 빼앗아 오기 위해 로마제국을 연구하고 있다. 미국의 국기(독수리)부터가 로마제국의 모방 아니던가. 중국은 후진타오의 외교정책은 <화평굴기 和平崛起 , peaceful rising)>. 이는 세계 패권국가가 되기 위한 포석으로 볼 수 있다. 중국에서 다큐멘터리와 책으로도 발간된 <화평굴기>는 13억 중국인들의 가슴에 패권국가를 향한 열망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미국은 빼앗기지 않기 위해, 중국은 빼앗기 위해 엄청난 자금을 투입하여 로마제국을 연구하고 분석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책은 국가정치 지도자 뿐 아니라, 한 단체의 지도자라고 한다면 마땅히 읽어봄직하다. 인간이 구름 위의 이상과 윤리로 살기 원한다면 종교서적을 읽어야겠지만, 땅 위에 존재하고자 한다면마땅히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어야 한다. 군주론과 로마제국 쇠망사는 불편하지만 역사의 진실들이 가득하다.

 

 

로마제국의 실제 폭력성과 모순은 모두가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는 단지 로마의 성공과 실패의 거울삼아 현재의 나라와 집단에 적용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사회통합, 합리적 행정, 정치적 결속/안정성, 노블레스 오블리주, 시민적 자유, 열린 공동체, 학문과 문화 존중, security의 보장, 의무의 엄중함, 권리의 보장, 좋은 것에 대한 개방성 등등.)

 

 

 

몇 가지 내게 감동을 주었던 부분을 발췌해 본다.

 

- 그리스인들은 로마에 패배한 이후, 그 원인을 운명의 여신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이 운명은 로마인들이 스스로 만든 것이었다. 로마의 교육제도, 국가에 대한 성실한 자세, 명예와 미덕 존중, 승리에 대한 열망, 민회의 자유, 합리적 통치력, 우세한 군사제도와 전략. 운명주의(fatalism)는 인생에 치명적fatal이다. 삶과 집단은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다. 미래의 영광은 현재가 만드는 것이다. 아울러 과거와 현재의 영광의 미래의 영광을 담보하지 못한다.

 

(아놀드 토인비의 도전-응전-모방 모델에 따르면 문명의 기원이나 발생을 가져오는 사람도, 문명을 성장시키거나 붕괴를 막아내는 사람도 창조적 소수이다. 붕괴 단계에서 문명은 더 이상 제도적으로 창조적이지 않으며, 도전-응전-모방 사이클도 작동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문명은 살해당하기보다는 자살(창조성 상실)로 죽는다. 표류하는 기운과 더불어 총체적 분열 현상이 잃어나고, 죄는 증가하며, 난잡함과 혼합주의가 지배하게 된다)

 

- 오랫동안의 평화와 로마의 획일적 통치는 제국의 중추부문에 서서히 그리고 은밀하게 독을 퍼뜨렸다. 사람들의 정신은 점차 평준화되고 번뜩이는 천재성은 소멸되고 심지어 상무정신도 사라져갔다. (중략) 시민들은 군주의 의지에 따라서 범과 총독을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의 보호를 용병에게 맡겼다. 용감했던 지도자의 후손들도 이제는 평범한 시민과 백성의 지위에 만족했다. 대망을 품은 자들도 황실과 황제의 군기에 의지하게 되었고, 속주들은 정치력과 단결력을 상실한 채 점차 개인생활의 무관심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86-7)

 

- 학계는 여전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제논과 에피쿠로스의 권위가 지배했고, 이들의 학문체계는 제자들간에 맹목적인 존경심으로 대를 이어 전해져 내려오면서 인간정심의 힘을 발휘하고 그 한계를 넓히려고 하는 온갖 폭넓은 노력을 막았다. (중략) 이 모델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은 분별력과 예절을 벗어난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87)

 

- 집정관 또는 독재관은 로마의 젊은이들에게 군복무를 명하고, 반항자와 비겁자는 범법자로 취급하여 시민권을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그 신병을 노예로 판매하는 등 극히 가혹하고 수치스러운 처벌을 내릴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91)

 

- 극단적인 역경은 자유민의 미덕을 결집시키는 법이지만, 쇠망해가는 나라에서는 당파 싸움을 부추길 뿐이다.

 

- 콘스탄티노플의 창건은 서로마의 멸망에 기여했다기 보다는 기본적으로 동로마의 유지에 기여했던 것이다. (541)

 

- 로마가 쇠망한 것도 이 무절제한 팽창이 가져온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였다. ‘번영은 쇠망의 원리를 성숙시켰고, 정복의 확대에 의해서 파괴의 원인이 증가했으며 그리고 시간이 지나 또는 우연히 인위적 기둥들이 허물어지게 되자 그 방대한 구조물은 자체의 무게에 짓눌려 무너졌다. 그 붕괴의 이야기는 간단명료하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제국이 왜 멸망했는지를 묻기보다는 오히려 그처럼 오랫동안 존속했다는 데놀라게 되는 것이다.

 

- 로마제국의 쇠퇴가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에 의해서 촉진되었다고 한다면, 이 승리의 종교는 제국의 급격한 명망을 늦추었고 정복자들(북방의 야만족)의 흉포한 기질을 누그러뜨렸다고 할 수 있다. (542)

 

 

<로마제국 쇠망사>는 계몽주의 역사학의 대표작이자, 계몽주의 한계도 부분적으로 보여준다. 문명과 야만, 문명인과 야만인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유럽중심주의, 제국주의적 시선을 여실히 보여준다. 어쩌면 미셀 푸코의 주장처럼, 모든 지식인은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개인 평점은 9점.

 

왜 Essays 'in' Love 일까? on love도 about love도 아닌 essays in love. 아마도 소설 속 화자(혹은 숨은 저자)가 사랑에 빠진 상태(in love, 주관성)에서 최대한 객관성(essays)을 유지하면서 쓴 글이기 때문이리라. 영국에서는 Essays in Love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는 On Love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개인적으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한글 제목이 가장 마음에 든다. 창의력이 떨어지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저자의 의도나 내용에 가장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사랑이라는 평이한 사건이 실상은 굉장히 복잡다단한 심리적, 사회적 결과물들의 복합체이기 때문이기에, 평이함 속에서 낯선 것을 본다는 것이 저자의 의도라고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 책이 한 권 또 있다. 처음에 출판된 남색 표지의 다소 평이한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양장본에 새로운 표지로 출판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다시 구입하였다. 처음 구입한 책은 거의 새책 수준이었고, 책을 아끼는 후배에게 선물했다.

 

우선, 알랭이 20대 초반에 이 책을 쓴 것에 놀랐다. 심리적 통찰력과 흥미로운 스토리, 가끔씩 '빵' 터지게 만드는 위트까지. 그의 천재성에 인문학적 환경에서 자란 것이 essays in love라는 꽃을 피우게 된 원인일 것이다.

 

책의 내용은 사실 단순하다. 남자 주인공이 클로이라는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사귀다가 헤어지는 이야기. 나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이야기들이다. 어쩌면 허무 개그로 끝날 수 있는 이야기에 생명력을 더하는 것은 바로 알랭의 번뜩이는 통찰력과 위트이다. 대부분은 별 생각없이 지나치는 것을 알랭은 결코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끊임없이, 집요하게 '왜 why?'를 파고 들어간다.

 

처음 이 글을 볼 때는 일반 소설 보듯이 읽었다. 2년 전에 처음 읽었을 때는 아마 4-5시간 걸린 듯 싶다. 그러나 얼마전 독서토론에서 이 책이 선정되었고, 다시 이 책을 읽었을 때. 두번 놀랐다. 이 책 속에 이렇게 다양한 주제들이 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쑥쓰럽지만... 나의 독서력이 2년 사이 많이 늘었구나 하는 것이다. 나는 공대 출신이고, 대학원에서는 사회과학을 공부했다. 인문학을 공부한지 1년도 되지 않는다.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확실히 나의 삶의 깊이와 넓이가 확장된 것은 사실인 듯 싶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이 속에는 사랑과 삶, 세상과 인간에 대한 백과사전적 주제들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의 욕망, 타자 이상화(理想化), (라깡이 주장하는) 주체, 대상a, 주관적 인식, 간주관성, fantasy, 일치의 경험, 유한자와 무한자, 일상성과 탈일상성, 인간 실존, 문화, 자본주의, 불안, 사회적 소외, 우연과 운명, 판단중지(epoche), 이미지, 소유와 존재, 한정된 재화로서의 인정과 사랑, 진화, 희망과 절망, 믿음과 신뢰, 의식의 흐름,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자존감, 자기 소외, 자아 통합(integrity), 다양한 감정들 등등.

 

이 책은 가면(persona)를 벗기고, 주변환경(context)를 지운 후, 인간의 맨 얼굴과 맨 몸을 드러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정신(마음)을, 알랭은 문자라는 현미경을 사용하여 자세하게 관찰한 후, 때로는 격정적으로,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우울하게 묘사한다.

 

이 책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자, 인간의 이야기이며, 우리 마음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때로는 신선하고, 때로는 찔리고, 때로는 웃음이, 때로는 슬프고 아프다. 모르지만 다 알고, 낯설면서도 낯익은 아이러니.

 

인간은 불완전한 유한자이기에 완전한 무한자를 찾는다. 그 무한자는 인간 역사와 실존 속에서  신, 이데올로기, 부모, 위인, 성공, 돈이라는 이름의 기표를 가진다. 그러나 기의는 동일하다. 인간의 원죄는 유한자로 탄생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끝없이 무엇인가를 갈망하지만 충족이 되지 않는(대상a).

그래서 우리는 사랑에 빠지고, 실망하고, 상처받고, 헤어지는 수학 공식을 무한반복 하는지 모른다.

 

사랑은 내게 여전히 끝없는 의문문이지 마침표는 아니다. 가끔 나의 삶 속에 의문문과 의문문 사이에 느낌표가 끼어들기는 한다. 나의 의문문은 언제 마침표를 만나게 될까?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