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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황금 가지 ㅣ 까치글방 111
제임스 프레이저 지음, 이경덕 옮김 / 까치 / 2001년 12월
평점 :
품절
황금가지에 대해서 처음 들어본 것은 진중권의 책에서였다. 진중권 교수는 제임즈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의 내용을 인용한 글들이 여럿 있었다. ‘제임스 프레이저’와 <황금가지>는 내게 그렇게 각인이 되었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때마침 까치글방에서 이벤트를 하기에 여러권을 샀고, 장바구니에는 황금가지를 담았다.
저자인 제임즈 조지 프레이저(1854-1941)는 1907년 세계 최초로 사회인류학 강좌를 개설하였고, 그의 학문적 성취를 취하하여 영국 왕실이 기사작위를 받았다. 후세의 인류학자들로부터 현장 연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안락의자의 인류학자(armchair anthropologist)라는 비판도 받았고, 그가 주장하였던 주술에서 종교로, 종교에서 과학으로 인류의 사상양태가 진화되었다는 진화주의적인 학설이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는 여전히 부러지지 않았고 인류학에 관한 고전으로 여전히 살아있다. 신앙이나 의례를 사회, 정치조직 및 그 밖의 여러 제도에 기능적으로 관련지어서 검토하는 최초로 시도된 그의 관점은 현재의 인류학적 연구로도 이어지고 있다.
그는 아버지를 통하여 헤브라이즘과 종교적 존경심을,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접하며 헬레니즘과 신화적 상상력을 갖추게 된다. 아울러 그의 친구이자 동양학자였던 로버트슨 스미스는 경건한 신앙과 동시에 진화론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을 잘 융합한 것이 프레이저의 학문적 태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참고적으로 로버트슨 스미스는 다윈의 <종의 기원>에 대한 기독교적 응답으로 유대 종교도 또한 ‘진화’했음을 주장한다. 유대 종교에서는 주술을 대신하여 유일신을 숭배하게 되었고, 피로 얼룩진 제물 대신에 비천한 마음을 참회하게 되었으며, 신을 나타내는 동물을 살해하는 것이 자기 몸을 바쳐서 숭배하는 신앙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프레이저는 종교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기독교인들에게 불쾌한 기분을 안겨주지 않으려 배려하면서도, 기독교 교리를 과학의 공격으로부터 옹호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이해는 참된 지식의 열쇠는 과학이지 종교나 주술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 태도는 흔히 한국 교회에서 ‘자유주의’로 분류될 수 있다. 나는 자유주의를 무조건적으로 비판할 마음도, 옹호할 마음도 없다. 한가지 mention하고 싶은 것(사실 fact)은 자유주의 학자들 중에는 지적 호기심과 학문적 성취가 탁월한 사람이 많다는 것과 영적 체험은 부재하거나 거의 없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지성이나 감성이 태어날 때부터 범인보다 탁월한 사람이 있듯이, 영적이 민감함이 특이하게 뛰어나든지 아니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나만의 가설)이 있다. 내가 만남 자유주의 신학자들 중에는 보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경건한 분들도 많이 계셨고, 반면에 학문적으로 그리 논리적이지도 않은 가설을 진리인양 믿는, 지적 수준 낮은 자유주의자들도 있다.)
<황금가지>는 마치 한편의 추리소설과 같은 플롯으로 전개된다. 책의 도입부는 네미Nemi의 사제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관습에서 출발한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다빈치 코드>의 전개방식은 분명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서 모티프를 도용한 것이 틀림없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파편적인 하나의 진실을 찾아가다 보니 마지막에는 거대한 세계적 진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도입부를 잠시 읽어보자(32쪽)
“로마가 쇠망할 때까지 네미에서 열렸던 관습은 우리를 미개사회로 유혹한다. 네미의 성스로운 숲에 가지가 무성한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그 주위를 무시무시한 사람 그림자가 낮에는 물론이고 밤 늦게까지도 배회하고 있다. 당장 적에게 습격당할지도 모른다는 듯이 칼을 빼어들고 주위를 살피고 있다. 그는 바로 ‘사제’였다. 또한 ‘살인자’이리도 했다. 지금 그가 경계하고 있는 상대는 조만간에 그를 죽이고 그의 뒤를 이어 사제가 될 사람이었다. 이것이 성소의 관례였다. 자신이 사제가 되고 싶으면 현재의 사제를 죽여야만 했다. 전임자를 죽이고 세자가 된 사람도 언젠가는 자기보다 강하거나 교활한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사제는 이 불안정한 지위에 있는 동안 왕의 칭호를 얻게 된다.”
디아나 신전의 사제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황금가지’라 부르는 나뭇가지를 꺽어야 사제와 대결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제를 죽이게 되면 자신이 신전의 사제직을 물려받게 되고, 이러한 일들이 시대에 걸쳐 무한반복 되는 것이다.
프레이저는 이 단순한 신화를 지구상에 무수히 많은 종족과 마을의 주술, 신화, 풍습, 종교에서 수집한 내용과 비교하면서 네미전설에 숨겨진 고대인들의 의도를 치밀하게 추론하여 재구성해낸다. 책의 대부분이 서양과 동양, 오지와 문명사회, 미개인과 문명인에 기록으로 남아있거나 관찰된 수많은 풍습을 설명하고 있다. 흔히 문화인류학에서 이야기하는 집단적 유사성을 발견하고 서술한 것이다.
고대사회는 왕 또는 사제를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이거나 신의 화신이라고 여겼다. 사람들은 왕이 자연의 운행을 어느 정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악천후나 흉작 등의 재해는 왕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뭄, 기근, 역병, 폭풍우 등이 닥치면 그 재난이 왕의 태만이나 죄악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왕을 채찍질하거나 심지어 왕위를 박탈하고 죽였다. 왕은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터부(taboo)를 만들었다.
터부는 감염을 막거나 또는 감염주술의 작용을 막는 것으로,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서 생겼다. 터부는 사회를 위해서 왕의 목숨을 지켜주기 위하 ㄴ것이며 동시에 왕이 보여주는 주술적인 힘이 감염의 원리로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주술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터부의 위력은 양날을 가지 칼과 같다.
‘숲의 왕’은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한 참나무의 신(풍요)이며, 이 숲의 왕이 늙거나 병약하게 된다는 것은 자연의 풍요가 위협당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결국 왕은 후계자에게 왕좌를 물려주어야 한다. 숲의 왕의 후계자는 전임자를 죽이기 전에 참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 나무의 가지인 ‘황금가지’를 반드시 꺽어야 한다. 황금가지는 바로 숲의 왕의 영혼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미전설의 사제는 도전자가 황금가지를 꺽지 못하게 막아야 하며, 도전자는 황금가지를 꺽어야만 비로소 사제와 대결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황금가지>는 나의 첫 번째 문화인류학 책이다. 문화인류학은 여전히 내게 낯설고 기묘하다. 이러한 신화와 종교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칼 바르트처럼 자연적 신인식과 일반계시를 부정해야 하는가? 아니면 틸리히나 칼 라너, 한스 큉처럼 종교들과 일반계시를 포함하여 포괄적인 계시체게로 인정해야 하는가?
바르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며, ‘유일한’ ‘계시’이다.(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의 계시는 종교들과 접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종교의 지양이다. 종교란 원칙적으로 언제나 계시의 대체물, 허구, 우상숭배, 공로에 의한 인의, 불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한 인간학적인 현상이며, 하나님에게로가 아니라 하나의 반신(反神)에게로 이를 뿐이다. 본 회퍼도 모든 종교의 ‘종교적 아프리오리’를 배격했으며, 종교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칼 라너에게 기독교 이전의 ‘비기독교적 종교들’도 ‘정당한 구원의 길’이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인간의 ‘초자연적 실존’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알트하우스의 견해는 경청할 가치가 있다. 그에게 원계시란 ‘구원을 위한 계시’의 불가결한 전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추구하는 목적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죄책을 느끼도록 만들어서, 사죄의 복음이 인간에게 파고들 수 있는 기회가 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계시는 특별계시를 준비한다. 복음은 종교들의 진리와 접촉한다. 그러나 종교들은 ‘스스로 구원하려는 것’이 되려는 한에서, 진리일 뿐만이 아니라 ‘기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유한자로서의 인간은 무한자를 담지할 수 없고, 영원한 진리의 파편만 알게 될 뿐, 전체로서의 진리는 파악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인간은 겸손해야 하며, 모든 학자들도 항상 진리의 도상 on the road에 있음을 나직이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 형이상학. 나는 4개의 학문을 좌표로 삼아 우주, 사회, 인간, 신에 관한 진리탐구의 여행을 몇 년째 계속하고 있고, 일평생 하고 싶다. 학부에서는 자연과학을, 대학원에서 형이상학(철학 신학)과 사회과학(경제학)을, 졸업한 이후 그 동안 인문학을 공부했으니 이제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자연과학 책들을 연구하고 싶다.
“나는 바닷가에서 노는 소년 같았다. 발견되지 않은 거대한 진리의 바다가 내 앞에 펼쳐져 있는 동안, 좀 더 매끈한 조약돌이나 좀 더 예쁜 조개를 줍고 즐거워하는 소년 말이다.”
- 아이작 뉴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