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실체인가 허구인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민족 분단의 역사적 경험을 안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민족주의는 다른 어떠한 이념보다 확고한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지난 100년 동안 한국 사회를 강하게 움직인 이념적 원리는 민족주의였다. 하지만 최근 10년 동안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글에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논점은 민족이 원초적 실체가 아니라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점이다.
민족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원초론과 도구론이 있다. 원초론은 민족의 영속성을 강조하는 객관주의적 민족 이론이다.
언어, 종교, 지역, 혈연 등과 같은 객관적 요소를 민족의 기초로 강조한다. 즉 민족은 국가에 선행하며, 고대로부터 이미 존재해왔던 객관적 요소들을 기초로 한 원초적 실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도구론은 민족을 고대로부터 존재해온 것이 아니라 근대의 산물로 보는 주관주의적 민족 이론이다. 민족 공동체에 자신을 자발적으로 귀속시키려는 의지, 즉 주관적 요소가 민족 형성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88쪽
민족은 구성원들 사이의 동질감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법 앞에ㅅ 모든 시민은 평등하다는 근대 시민권이 확립된 다음에야 비로소 성립 가능한 개념이다.
우리의 경우, 민족에 대한 이해는 도구론보다 원초론에 가깝다.
물론 근대적 의미의 민족이 혈연과 문화를 기반으로 한 전근대의 공동체와는 다른 새로운 특성을 지닌 공동체라는 주장은 타장하다. 근대적 민족이 되려면 신분제를 타파되고 모든 구성원을 평등한 구성원으로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89쪽.
해방 후 지배층이 오랫동안 국민을 동원하거나 억압하는 기제로 민족주의를 사용했던 반면, 시민과 민중 진영에서는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기제로 민족주의를 사용했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에는 분단 해소를 위한 통일 논의가 제기되고 민족주의가 이를 뒷받침했으며, 1990년대에 들어서서는 세계화 추세에 대응하는 이념으로서 지속되고 있다.
요컨대 해방 이후 반체제 민족주의는 민주화와 사회적 연대의 이념을 담고 있으며, 앞으로도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91쪽.
<백범 김구, 나의 소원>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 세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는 없는 것이,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 어려움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마치 이미 진리권 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어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이 어느 민족 내에서나 혹은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인하여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어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의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견고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흥망성쇠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사는 것이다. 세계 인류가 너나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사해동포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 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99-100쪽.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
by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나남, 2002
우리가 민족주의를 ‘자유주의‘나 ‘전체주의‘보다는 ‘친족‘이나 ‘종교‘와 연관되는 것으로 취급했다면 문제는 더 쉬워졌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인류학적 정신에서 다음과 같은 민족의 정의를 제안한다.
즉 민족은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적 공동체이다.
민족은 구성원들 대부분이 다른 구성원들을 알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며 심지어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도 못하지만, 구성원 각자의 마음에 서로 친교의 이미지가 살아 있기 때문에 상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르낭Renan이 "민족의 핵심은 전 소속원들이 많은 것을 공유한다는 사실이며, 동시에 전 소속윈들이 많은 것을 망각해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라고 썼을때, 그는 유쾌한 화법으로 이 상상함을 언급한 것이다.
겔너Gellner는 "민족주의는 민족들이 자의식에 눈뜬 것이 아니다. 민족주의는 민족이 없는 곳에 민족을 발명해낸다"고 서슴없이 단언하고 있는데, 이는 위와 유사한 논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민족을 발명한다는 공식의 결점은 발명을 상상이나 ‘창조‘보다는 ‘허위날조‘나 ‘거짓‘과 같은 것으로 본다는 점에 있다. 사실 모든 이의 얼굴을 잘 아는 원초적 마을보다 큰 공통체는 상상의 산물이다. 공동체들은 그들의 거짓됨이나 참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상상되는 방식에 의해서 구별되어야 한다.
자바Java에 있는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전혀 본 적이 없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결은 무한히 늘릴 수 있는 친족의 그물처럼 특별한 형태로 상상되었다.
아주 최근까지 자바에는 ‘사회‘라는 추상체를 뜻하는 단어가 없었다. 우리는 오늘날 구체제의 프랑스 귀족을 하나의 계급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그것은 아주 뒤늦게, 오늘날에 이르러 상상된 것이다.
(...) 궁금적으로 지난 2세기 동안 수백만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제한된 상상체들을 위해 남을 죽이기보다 스스로 기꺼이 죽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이 형제애이다.
102-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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