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 베른>
sf 장르를 다진 모험가


- 발전한 과학 기술에 힘입어 여러 가지 문명의 이기가 등장하는 완전한 새로운 형태의 모험담. 마법이나 마술, 신화에 기반한 환상이 아닌 현실의 과학 모험. 쥘 베른은 바로 이런 분야를 개척해 낸 인물이다.

이런 모험담 이면에는 **서양 제국주의의 팽창이라는 배경이었다. 당시 많은 통속 작가는 남자 영웅이 위기에 빠진 미녀를 구하고 사랑을 나눈다는 중세 무용담을, 서양인 주인공과 미개한 원주민의 대결로 구도만 바꾸어 내놓고는 했다.

그의 작품에는 통렬한 풍자와 반성이 배어 있다. 쥘 베른이 단지 낭만적 과학 모험담의 선구자에 그치지 않고 H G 웰스와 함께 SF소설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이유는, 과학 기술과 스토리텔링을 결합시켰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기술 문명에 대한 깊은 성찰을 작품에 담아서다.


22-24쪽

<H G 웰스>


원자 폭탄의 원리르 제공한 소설은 바로 H G 웰스가 1914년에 발표한 <해방된 세계>였다. 원자 폭탄이 쓰인 때로부터 31년이나 앞선 시기였다. 실라르드도 이 소설에 근거하여 중성자 연쇄 반응을 발견했다.

웰스는 노벨 문학상 후보에 네 번이나 오른 대문호였고 1920-30년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였다.

1901년 논편션에서 자동차, 철도가 지역 간 거리를 좁히지만 교통 체증이 일어날 것이며, 도시 확장으로 교외 지구가 발전할 것을 예언했고, <다가올 세계의 모습>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양상을 거의 정확히 예측했다.

<네 번째 해>에서는 전 세계 국가들의 대표자로 구성된 **세계 정부 설립을 진지하게 제안했는데, 지나친 이상주의로 여겨졌던 이 생각은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의 탄생으로 약소하게나마 실현되었다.

소설에서 제시한 타임머신, 우주 전쟁, 투명 인간, 유전자 조작 등의 개념은 지금도 SF의 단골 소재일 뿐만 아니라 실제 과학 연구에도 문자 그대로 적용된다.

<타임머신>에서는 "시간은 공간의 한 축이므로, 공간을 이동할 수 있듯이 시간을 이동할 수 있다. 광속보다 빠르게 회전하면 시간을 넘을 수 있고, 비행기를 통해 위아래로 이동할 수 있듯이 기계를 통해 시간을 이동할 수 있다"라는 이론을 폈는데, 이는 지금도 시간 여행 소설 대부분은 물론 현실의 과학자들도 경전처럼 인용하는 원칙이다.

웰스는 현실에서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뛰어다닌 사회 운동가이기도 했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비판한 사회주의자였고, 세계 인류가 하나의 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믿은 이상주의자였다.

세계 58개국이 참여해 채택한 유엔 세계 인권 선언의 많은 부분이 그의 문장을 따라 작성되었다.


34쪽

<카렐 차페크, 로봇의 창시자>


체코의 국민 작가 카렐 차페크가 1920년에 발표한 희곡 **<R. U. R>이다. 제목은 *‘로섬의 유니버설 로봇‘에서 앞글자를 따서 줄인 말이며, 세계 최초로 **로봇이란 말을 탄생시킨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인간의 노예로 태어난 로봇

물론 로봇이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도 로봇이라고 부를 수있는 것은 존재했다. 한국어로 옮기면 ‘자동인형‘쯤에 해당하는 *오토마톤 automaton 이라는 정교한 기계 장치가 이미 수백 년 전부터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호사스러운 고급 장난감일뿐이었다.

반면 차페크의 『R.U.R.』에 나오는 로봇들은 외모는 물론이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까지 인간과 똑같다. 오늘날 흔히 로봇 하면 떠올리는 금속성 기계가 아니라 **생물과 같은 유기체로 묘사되었으며 심지어 자기들끼리 짝을 지어 *번식까지 할 수 있다고 암시된다.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성실하고 유능한 노예 로봇들. 그들은 갈수록 개량되어 인간의 다양한 직업을 대체하는 반면, 인간은 점점 **게을러져 생물학적으로 퇴보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그러던 어느날, 로봇 제조 공장이 있는 섬에서로봇들이 반란을 일으켜 인간을 모두해치워 버린다. 그렇지만 인간이 없으면 그들 역시 태어날 수 없기에 로봇들은 마지막 남은 인간에게 로봇생명을 만들어 내는 연구를 하도록 압박한다. 우여곡절 끝에 인간처럼 사랑이라는 감정을 지닌 남녀 로봇 한쌍이 새로운 출발의 길을 간다.

인간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 한계가 있으며, 인간과 비슷하지만 이질적인 다른 존재에 의해서만 그 한계는 비로소 극복되리라는 통찰이었다.

<R.U.R>에서 로봇은 과학 기술적 피조물이라는 성격을 뚜렷하게 지니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인간의 유산을 계승하고 보전하여 인간의 멸종 이후에 새로운 시대의 주인이 되는 존재, 바로 이것이 차페크가 말하고자 했던 궁극적인 전망이다.

사실 **로봇은 *노동 계급을 은유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학 기술 그 자체를 의미하는 중층적 메타포어이기 때문이다.

로봇 robot이라는 말은 강제 노동을 뜻하는 체코어 ‘로보타 robota에서 온 것인데, 차페크가 밝힌 바에 따르면 형 요제프가 만들었다고 한다.

37쪽

<올더스 헉슬리>
멋지고 어두운 신세계


1945년 원자 폭탄이 떨어지면서 인류는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과학 기술이 우리의 미래를 유토피아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은 설득력을 잃었다. 산업 혁명 이후 망설임 없이 질주해 온 과학 기술에 대중은 처음으로 의심과 불안을 품게 되었다.

모든 이들이 처음부터 *과학만능주의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예술가들은 언제나 시대의 이면에 드리워진 그늘의 징조에 예민하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혼자 나서서 아니요라고 용감하게 발언하는 존재다.

세상 사람들이 과학 기술의 장밋빛 전망에 심취해 있던 1932년,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를 내놓았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보다 13년 앞서 발표된 이 소설을 읽고 독자들은 충격에 빠졌다. 미래 과학 기술 사회에는 **가치관과 철학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멋진 신세계>는 겉보기에 유토피아처럼 보이는 디스토피아 이야기다. 의속주가 높은 수준으로 보장되지만 자유분방한 창의성이나 슬픔, 비탄 등의 감정 과잉은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정교한 사회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갈들을 야기할 수 있는 책들은 모두 금지되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다. 소마라는 마약만 있으면 늘 행복에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헉슬리가 이 작품을 발표할 당시 인류가 낙관적 미래상을 견지할 수 있었던 큰 근거는 ***통제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새로운 과학 기술이 계속 나오더라도 항상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헉슬리는 **과학 기술이 사회에 침투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영혼도 조금씩 변화시킨다는 점을 예리하게 간파했다.

**사회의 비능률은 크게 감소하고 복지나 생활 수준이 향상될 것은 분명했지만, 새로운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질 것이다.

4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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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이 영화의 1부는 우울의 서사라고 봐야 한다.

 그 첫 번째 열쇠는 당연하게도 프로이트의 논문 「애도와 우울」(1917, 국역본 제목은 ‘슬픔과 우울증‘)에서 찾을 수 있다. 

**애도 mourning와 우울 melancholy은 사랑해오던 대상을 상실했을 때 주체가 보이는 반응이라는 점에서는 일단 같다. 

그러나 *애도가 대상의 상실을 받아들이고 그 대상에 쏟았던 에너지(리비도)를 철회하여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라면(그래서 ‘애도 작업‘이나 애도 기간‘ 같은 말이 성립될 수 있
‘ 다), *우울은 대상의 상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그 대상과 **동일시하면서 **자기 파괴적인 무력감에 사로잡히는 경우다(그래서 애도와 달리 우울은 병리적인 현상이며 치료의 대상이 된다). 

세부 논증은 생략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우울의 경우 *‘상실‘과 *자학이 맺고 있는 이 기묘한 관계는 섬세한 해석의 대상이 돼야 마땅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자들은 오늘날 제도적인 정신의학이 우울melancholy을 *우울증depression이라는 명칭으로 진단하고 *약물 치료에 의존하는 것에 *회의적이다. 

라캉학파 분석가인 대리언 리더는 말한다.
""인간 내면을 탐구하는 일이 정신위생이라는 고정관념으로 대체되고 있다.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제거하는 것이다. 우울증을 바라보는 이러한 시선이 문제 자체의 일부분은 아닐까?" (<우리는 왜 우울할까>, 우달임 옮김, 동녘사이언스, 2011, 8쪽

103쪽

<시, 이창동>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둘러싼 일련의 논의들을 넓으 의미에서의 *‘윤리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그 논의의 장에 개입하는 모든 종류의 글쓰기는 *‘윤리학적 텍스트‘를 생산할 것이고, 그 하위 범주 중 하나로 ‘*윤리학적 문학 텍스트를 또한 생산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문학작품을 쓰는 데 필요한 특별한 자질이 있을까? *윤리학적인 의제를 활성화시키는 효과적인 서사 구조를 창조해내는 능력을 나는 **‘윤리학적 상상력‘이라고 부른다. 

내가 보기에 ‘윤리학적 상상력‘은 다음 세 가지 요소를 서사 내부에 *절합節合해내는 능력이다. **사건, 진실, 그리고 응답. 

첫째, 그 일이 있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어떤 **존재론적 단절의 계기로서의 *사건이 발생한다. 
둘째, 주체가 미처 그 의미를 확정할 수 없었던 사건의 진실이 뒤늦게 밝혀져 주체에게 *압력을 행사한다. 
셋째, 진실의 압력 속에서 그 진실에 충실하기 위해 주체는 모종의 **응답을 시도한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심급이다.  이 단계에서 작가는 세계를 향해 그가 아껴둔 마지막 말을 건넨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근래 우리가 만난 가장 진지한 ‘윤리학적 상상력‘의 결과물이다.


134쪽

<영화 시 2>

시는 마음의 투명한 재현을 추구하는 1인칭의 독백이다.
시에 어떤 화자가 등장하건 그는 곧 시인 자신이다.
그러므로 거짓된 삶에서 진실한 시가 나올 수는 없다.
삶과 시는 일치되어야 한다, 라는 명제들이 그 관념을 구성한다.

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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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에 대하여>


**소시오패스는 ‘절대적인 진단명이지만 **괴물은 ‘상대적인‘ 규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로 소시오패스가 아니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누군가에게나 언제든지 괴물이 될 수는 있다.

이런 의미에서 괴물이라는 규정이 상대저인 것이라면 우리는 케빈과 에바에게도 (다시 말하지만, 도덕적 단죄 없이)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케빈은 괴물로 태어난 것인가 아니면 괴물로 길러진 것인가. 그가 괴물로 길러진 것이라면 괴물을 기른 존재는 괴물인가 아닌가.

 나는 지금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을 염두에 두고 있다. 광기 어린 열정으로 생명을 창조한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뒤늦게 후회하며 피조물을 혐오했고, 피조물은 자신이 태어났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 고통받다가 정말로 괴물이 돼버렸다. 

"**나는 불행하기 때문에 사악하다. (…) **인간이 나를 동정하지 않는데 내가 왜 인간을 동정해
야 하는지 말해달라." 

누가 괴물인가. 누가 진짜 괴물인지를 가려내자는 뜻이 아니다. **어느 두 존재가 만나 거기서 하나의 괴물이 탄생했다면 그것은 어느 한 사람만의 책임은 아닐 것이라는 말이다. 

에바가 케빈을 출산하는 장면에서 린 램지 감독은 영상을 일그러뜨려서 피사체가 흡사 괴물처럼 보이도록 했다. 그 화면에 찍인 것이 침대에 누운 에바인지 자궁 밖으로 나오고 있는 케빈인지 나는 모른다. 두 사람 중 하나가 괴물인 것이 아니라, 둘 중 누구도 원하지 않은 그 관계 자체에 ‘괴물성‘이 있지는 않은가. 본래 괴물이 아니었으나 둘이 만나서 함께 괴물을 탄생시킨 두 사람의 역사를 살피자..


48-49쪽

<설국열차: 마르크스 프로이트 그리고 봉준호>


그런데 왜 기차이고, 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인가.

 "**오늘날 문명국 이 철도 건설에 쏟는 열의와 성의는 몇 세기 전의 교회 건축에 비견될 수 있다." 이것은 생시몽주의자 미셸 슈발리에가 1853년에 한 말이다.

  그리고 이 시기를 조망하면서 수잔 벽 모스는 이렇게 적었다. "**철도는 지시물이었고, **진보는 기호였다. **공간적 운동은 역사적 운동 개념과 너무나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철도와 진보는 더 이상 구분될 수 없었다."(『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김성아 옮김, 문학동네, 2004, 126쪽) 

보다시피 19세기 이래로 *기차는 *진보의 은유였고 **진보는 곧 근대성의 핵심 이념 중 하나였다. 그러니 ‘**기차 = 진보 = 근대성‘이라는 도식이 사람들을 지배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164쪽

<설국열차 2>

- 마르크스의 기차

**마르크스가 전복하려 한 것은 자본주의라는 체제일 뿐 진보라는 이념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역시 **진보의 상징인 기차의 은유를 받아들였다.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다." 


위 문장이 특별히 유명해실 수 있었던 것은 발터 벤야민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그는 비판하기 위해 인용한 것이시만 말이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역사철학테제)라는 글을 쓰기 위해 적어
‘둔 메모를 모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관련 노트들에 이런 말이나온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세계사의 기관차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쩌면 사정은 그와는 아주 다를지 모른다. 아마 **혁명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잡아당기는 비상 브레이크일 것이다."(『벤야민
‘선집 5., 최성만 옮김, 길, 2008. 356쪽)

 당시의 벤야민에게는 **‘진보에 대한 신화적 믿음이 가장 큰 위험으로 보였다. "진보의 의미론은 테크놀로지의 변화와 사회 개선을 무매개적으로 동일시하며, 진보의 이미지는 지상-천국을 불가피한 어떤 것처럼 제시한다."
(수잔 벅 모스, 같은이, 128쪽) 

이런 미혹에 빠져 있는 동안 역사는 오히려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벤야민은 마르크스조차도 계몽주의 이래로 사람들을 지배해온 이 진보에 대한 맹신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기차 은유를 위와 같이 뒤집어야만 했다. 기차를 멈추는 것이야말로 혁명이라고.

16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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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번 돈은 오래가지 않는 법이다.
자기가 힘들여서 번 돈이라는 실감도 나지 않는 법이다.
노동 없이는 열매가 없다는 옛말이 하나 그른 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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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언제나,
무엇보다도,
다가갈 수 없는 것을 강렬하게 욕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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