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기호, 차이: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


보드리야르는 바타이유의 사유의 연장과 단절을 동시에 추구했다. 연장은 한 가지 주장으로 압축된다. 일반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생산이 아니라 **소비이다.

단절은 두 가지 주장에서 확인된다. 첫째, 현대 산업사회는 성장 지향의 사회가 아니라 **소비 지향의 사회이다.

둘째, 현대 소비사회는 고대 소비사회와 달리 매우 비관적인 전망을 불러일으킨다.


  보드리야르는 사회 활동을 영위하는 인간의 기본 심리를 ‘소비‘로 이해했다. 니체의 말대로 인간이 힘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힘을 쓰기 위해서, 즉 힘을 소비하기 위해서이다.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의 영웅들‘ 에 대한 찬가는 ‘소비의 영웅들‘에 대한 찬가로 대체되었다. **창업자, 개척자, 대재벌의 이야기가 **연예 스타, 스포츠 스타, 부유한 왕자의 이야기로 바뀐 것이다. 

엄청난 소비 능력으로 세인들의 시선, 즉 권력을 모으는 후자는 **현대의 ‘초인‘ 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드리야르는 현대 산업사회를 ‘소비의 사회‘ 라고 불렀다.


 보드리야르 이론의 핵심은 현대인이 상품의 구입을 통해 사물이 아니라 ***‘기호 를 소비한다는 데 있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인간의 욕망은 무엇보다 차이에 대한 욕망이 다. 예를 들어 대중소비사회에서 자동차는 유용한 ‘도구‘ 이상으로 위세를 나타내는 기호로 쓰인다. 

말하자면 사람이 상품, 즉 기호를 구입하는 근원적 목적은 **차별적 지위의 *과시에 있다. 이것이 바로 보드리야르의 **‘사회적 차이화‘Cherenciation sociale)‘ 의 논리인데, 이는 부르디외의 구별하기 distinction‘의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122-23쪽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 (2)>


소비자는 자신의 행위가 자율적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행위를 결정하는 것은 특히 **대중매체에 의해 조율되는 차이화 코드이다. 소비는 개인을 초월하는 곳에 있다.

이처럼 현대 산업사회에서 소비자는 **주체성을 상실한 채 자신의 진정한 욕망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더욱 비관적인 것은 현대 산업사회에서 소비자가 사회구조를 바꿀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소비자란 본질적으로 **고립된 개인이기 때문이다. 소비는 비혁명적이며 몰역사적인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소비 중심의 현대사회를 적실하게 통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결정적 한계는 현대사회의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보드리야르의 대중소비사회에서 인간의 **주체성은 환상이며, 오직 대중매체가 조작하는 기회의 발신과 수신이 있을 뿐이다.

1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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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게>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의 영위했던 열정적이고도 의미심장한 삶, 그리고 단테의 중세 기독교 세계를 구성했던 의미의 거대한 위계질서는 모두 우리의 세속 시대와는 뚜렷한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과거 세계는 다양한 형태로 **성스럽고도 빛나는 사물들의 세계를 이루곤 했습니다. 그러나 빛나는 것들은 이제 멀리 사라진 듯합니다.

고전적인 철학서와 문학작품들의 빛 속에서 삶을 경험함으로써 자기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기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빛나는 것들을 다시 불러들이고자 하는 사람, 우리가 한때 경험했던 경이를 다시 밝혀내고자 하는 사람, 또한 그런 정조를 일으키는 세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 망설임과 기다림, 무표정과 상실, 슬픔과 불안의 시간을 끝내고자 하는 사람, 다음에 올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준비하는 사람, 절망 대신 희망을 가지려는 사람, 또는 절망을 떨쳐내고 싶지만 아직 그 절망에 사로잡힌 사람.

이런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제 시작될 이야기에서 뭔가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1-2쪽

<1. 선택의 짐 (1)>


확실성의 느낌은 오늘날 상당히 드문 것이 되어 버렸다. 사실, 현대인의 삶은 그와는 정반대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삶의 거의 모든 순간마다 **선택의 무자비한 파도에 직면하며, 그때마다 *심하게 흔들리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우리가 접하는 선택 중에는 사소한 것이 아니라 심각하고 걱정스러운 것들도 많다. 그런 선택은 우리 존재의 **심장부까지 베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예컨대 이 관계를 끝낼 때가 되었나? 직장을 그만둘까? 이 후보자, 이 동료, 이 집단과 손을 잡아야 할까?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이런 종류의 선택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또 우리는 어떤 근거를 가지고 선택을 내려야 할지 궁금해 한다. 그러면서 이미 내린 선택을 후회하거나 다행으로 여긴다.

많은 사람들은 **선택의 자유가 현대의 삶이 이룩한 **위대한 진보의 표식 가운데 하나라고 지적할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이런 견해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담겨 있다.

비참한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음식을 먹을지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직업 선택의 자유란 것도 극심한 경제 불황으로 일자리가 없을 때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현대 세계의 특징은 우리들 대다수에게 그 이전보다 선택-어떤 사람이 될지, 어떻게 행동할지, 누구 줄에 설지-의 *폭이 더 넓어졌다는 바로 그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이런 종류의 **실존적 선택에 직면했을 때, 저것 아닌 ‘이것‘을 선택하게끔 해주는 ***참다운 동기가 없다는 점에 있다. 웨슬리 오트리가 위험에 처한 사람과 마주쳤을 때 느꼈던 확실성을 우리 자신의 삶과 행동에서 발견하기란 사실 무척 어려운 일이다.


19-20쪽

 어쨌든 이 시대에 선택의 짐을 회피하는, 그것도 나쁜 방식으로 회피하는 사람들로는 두 부류가 있다.

 첫 번째는 **자기 확신 self-confidence에 넘치는 사람이다(보통은 남자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모든 행동에 확실하게 뛰어든다. 그는 그 세계를 **명약관화한 것으로 여긴다. "지금 이처럼 올바른 결정을 하는 데 대해 어느 누가 의심하랴?"라고 묻는 것만 같다. 이런 확신으로 인해 그는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까지도 자기와 함께하도록 끌어들인다.

 이런 자기 확신형 인간은 종종 **강요적 인간형이기도 하다. 그는 *충동적이면서 *자기중심적인 나머지 세상이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자기이상에 맞춰 세상을 정렬하는 데 골몰한다. 

진정 그는 세상에 대한 자신의 이상이 훌륭한 것이고, 세상을 자기 의지대로 주조할 수 있다면 더 좋은 세계가 될 것이며, 때때로 더 좋은 세계를 위해 자신이 중대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런 태도에는 위험도 따른다. 그런 헛된 자신감으로 가득 찬 사람은 대개 자신감의 **어두운 기원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갓 *야심과 결탁한 *거만함이거나 더 나쁘게는 일종의 *자기기만이다. 계획들이 결국 실패로 돌아간 경우에도 자신감 넘치는 사람은 종종 실패한 것을 깨닫지도 못한다. 그는 사안들이 자기 이상대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생각에 완고하게 빠진 나머지 현실에 대응조차 하지 못한다. 자신감 넘치는 사람은 확신이 자신의 장점이라 믿는다. 이런 종류의 자신감이 극한에 이르면 *광신주의로 귀결된다.

21-23쪽



<1. 선택의 짐 (3)>


/ 선택을 회피하는 두 번재 방식


현대에는 선택의 짐을 회피하는 두 번째 길도 있는데, 이 길도 그다지 미덥지 못하다는 점에서는 제조된 확신의 길과 마찬가지다. 여기서 우리가 거론하려는 사람들은 *강박이나 심취 또는 *중독의 노예가 된 탓에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 **아무런 선택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정말이지 자신을 넘어선 무언가에 이끌린 나머지, 자신이 하려는 일을 아예 잊어버린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과 영웅적인 옽리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어떤 중독 현상은 현대적 외피를 입고 더 부각되고 있는데, 테크놀로지 시대 이전에는 없었던 블로그나 소셜 네트워크 따위가 그것이다.

선택의 짐은 **특히나 현대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더 이상 **신 혹은 신들을 믿지 않는 세상,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그 어떤 **신성 불가침한 존재도 없는 세상에서 증식한다. 그러나 선택의 문제를 해소하는 방식들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고집스러운 자기 확신이나 중독으로 인한 통제력 상실은 둘 다 선택의 짐을 회파하는 방식-전자는 대안의 인정을 거부하기 때문이고, 후자는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이지만, 이것들 중 어느 것도 아무런 계산 없이 영웅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의 경험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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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중한 적>


니체는 용서의 윤리학을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적과 제대로 싸울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애초 존경할 만한 적만을 상대하라는 것.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 즉 내가 **고귀해지기 위해서다.


적에 대한 증오로 세월을 허비하느라 공허해지는 길도 있다. 이에 대한 니체의 설명은 심오한데, 잘 알려진 대로, 이 대목이 니체 사상의 핵심 중 하나다.

"반대로 원한 ressentiment의 인간이 적을 상정하는 방식을 상상해보자. 바로 여기서 원한의 인간이 행위하고 창조하는 방식이 드러난다. 그는 ‘악한 적‘, 그러니까 ‘나쁜 놈‘을 상정한다. 그런 인간을 기본 개념으로 삼고, 그로부터 어떤 잔상 after-image이자 상대 counterpart인 다른 존재를 도출해내는데, 그것이 바로 ‘착한 놈‘이다. 바로 자기 자신 말이다!"


적을 ‘악‘으로 규정해야만 자신을 ‘선‘이라 믿고 자족할 수 있는 이들의 근본 감정은 "원한"이고, 그것은 언제나 반작용과 불과한, 반종적인 행위만을 낳기 때문에 열등하고 위험하다는 것.

굳이 니체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타인을 부정해야만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삶은 비극적이다.

어떤 이를 비판할 때 해서는 안되는 일 중 하나는 상대방을 ‘*비판하기 쉬운 존재로 만드는‘ 일이다. 그에 대한 나의 비판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그의 다른 이미 존재할 때, 그것을 못 본 척해서는 안된다.

**그런 비판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비판당하는 적은 *황당한 불쾌감을, 비판하는 나는 *얄팍한 우월감을 느끼게 될 뿐, 그 이후 둘은 ‘이전보다 더 자기 자신인‘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요컨대 진정한 비판은 적의 가장 복잡하고 심오한 부분과 맞서는 일이다. 니체의 말대로 **적을 대하는 태도는 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연결돼 있다. 적을 사랑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적을 사랑하면서 고귀해질 것인가, 적을 조롱하면서 공허해질 것인가. 수많은 매체가 생겨나고, 수많은 비판들이 쏟아진다. 좋은 비판과 나쁜 비판이 있다. 전자는 어려워서 드물고 후자는 쉬워서 흔하다.


349-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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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은 네가 있는 곳에서 시작하는 거야


3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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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란
권태와 진부함,
규칙과 절차로 점철되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적나라하고 떨리는 열의가 있었고,
그곳으로 떠밀린 사람들을 깊숙이 연루시켰다.


341-3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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